계급이란 무엇인가? - 갖가지 불평등의 원인을 이해하는 열쇠
린지 저먼 지음, 최병현 옮김 / 책갈피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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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지 저먼은 영국의 좌파 정치 운동가입니다. 그녀는 영국 반전 조직인 전쟁저지연합 Stop the War Coalition 의 창립 멤버였고,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월간지인 소셜리스트 리뷰의 편집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저먼은 영국 유수의 사회과학 전문 대학인 런던 정경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스스로 여성 운동에 대한 의지를 갖고 1975년 4월 영국 최초의 전국 낙태 캠페인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정치 이력 대부분은 영국 노동당과 밀접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로 SWC에 참여한 것만 봐도 그녀의 정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2007년 4월에는 런던 시장 선거에 참여하기도 하고 스스로 노동당을 개혁하기 위해 움직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A Question of Class"로 지난 199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서평을 쓰기에 앞서 우선 개념적인 접근에서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저자가 분석하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사회 전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특히나 여러분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사회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노동 조합에 의한 사회적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가 이를 구조적으로 강화하여 왔다는 점을 인식하시는 것이 좋읗 듯 합니다. 즉, 사회 전반에 노동 조합에 대한 터무니 없는 부정적 영향은 바로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면서 강고화 된 것인데요. 이것의 전반적인 체제적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자본가들의 요구와 그에 대한 정부의 응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작은 정부에 대한 사실상의 강력한 동의는 체제 안에서 소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정부'가 우선적으로 포함된, 작은 정부임을 우라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마르크스가 해석한 자본주의에 대한 함의는 일부 오류를 제외한다면 기본적으로 현세에 까지 일관된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부 분들은 '노동자들의 착취'라는 개념에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는데요.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논증되고 있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분석과 사회적 기원에 대한 저자의 전반적인 진술은 대체로 정확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글에서 영국 사회의 여러 사례들이 근거로 제시되고 있고, 흔히 자본주의가 계급주의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여러 일설에 대해 1장의 논의들은 충분한 반론으로 읽히는데요. 더욱이 저자가 강조하는 "계급은 객관적 관계다"라는 주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계급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보다도 자신이 생존하려면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두고 고심해야 된다는 부분에서 실로 이론과 사례 양쪽 모두, 적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여전히 많은 자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체제가 결국은 인간의 계급적 해방을 추동했고, 현재의 건전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맹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을 논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에서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듯 한데요. 하지만 노동자 계급이라는 어감의 마르크스주의적 반감을 조금 차치하고 이 글을 본다면, 현재의 노동자 계급이 처한 실체 자체가 우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황임을 자각할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끊임없이 혁신하는 특성이 있다"는 2장의 서두는, 그만큼 자본주의를 잘 설명하는 문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의 인식하에 과거와는 달리 비숙련 노동자들의 채용이 오늘날 자본가들에게 선호되는 것은 현장에서 비숙련 노동자들을 고용해 그만큼 생산 단가를 줄이려는 일련의 노력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950년대 이후 변화된 영국 사회에서의 노동자 계층의 전반적인 상황이 저자의 분석대로 "결코 균일하지 않다"는 주장은 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세계 2차 대전 이후. 전통적인 제조업과 서비스직으로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사무직 노동자들이 일선에 등장하고, 자본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동시에 규모가 커진 서비스업은 자본가들의 새로운 요구였던, "읽고 쓸 줄 얼고 잘 교육받고 건강하고 상대적으로 장수하는 노동력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처럼 노동 형태가 변화되고, 노동 계급 자체를 포드주의 시대보다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던 사회적 체제는 제조업과 서비스직의 분화라는 중요한 포인트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2장 중후반에 논증되는 노동 계급의 본질적인 사회적 삶의 변화는 정부가 이들의 삶에서 양육을 책임지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 전반적인 사회적 부조를 신자유주의가 성공적으로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화이트 컬러 노동자들이 일반 제조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자신들은 엄연히 다르다는 입장으로 급격한 분화가 이뤄졌습니다. 또한 사회가 보다 평등한 삶을 위해, 서로 간의 처한 입장과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여러 모순들에 있어 근본적인 방해가 되는 노동 계급의 분열이 초래된 것인데요. 다소 불편한 이해일 수 있겠지만, 이들 화이트 컬러들이 자본주의에 사실상 매수 되었고, 비숙련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주의 자체의 선호로 말미암아 대다수의 제조업 노동자들이 저자의 분석대로, '언더클래스'로 취급되기에 이릅니다. 사실상 이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사회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신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철회된 시점에서, 많은 시민들이 이런 분열된 의식 가운데,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멍청하거나 어딘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편견이 뿌리 내리게 됩니다. 더욱이 극우에 있는 자들은 "물질적 빈곤 자체는 개인이 자초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요. 2장 말미에서 언더클래스 이론은 결국, "취업자와 실업자, 훌륭한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검소한 사람과 무절제한 사람으로 노동자들을 분열시켰다고 판단됩니다.

이어지는 3장은 소위 '선택 받은 자들'이라는 자본가들을 설명합니다. 다수의 자본가들은 다른 시민들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 더 자유로운 선택'으로 표현되는 사실상 사회 지배 계급입니다. 이들에 대한 저자의 분석 들은 대부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식들입니다. 이번 장의 가장 중요한 분석은, "정부 자체, 경찰 군대 같은 국가 기구, 사법부, 공무원 조직은 모두 자본가 계급을 대신해,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조직이다"는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가 구축되어 왔고, 이들의 이익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전무하다는 것이 이 장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만약 자본주의가 계급의 자유로운 이동성을 보장하는 건전한 체제 그 자체라면 자본가들의 특권 만을 위한 사회의 재편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일부의 경제적 활황에서 일부의 '떡고물'을 노동자 계급과 공유하겠다는 일종의 경제적 배려 같은 것도 어쩌면 계급적 인식의 한 증거일 수도 있겠습니다.

생산 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조치에서 비롯된 사회의 계급적 분열은 이처럼 결과적으로는 자본주의적 모순 이전에 우리의 정치를 포함한, 고질적인 문제로 귀결되었습니다. 시민 사회가 분열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을 포함한 중위 계층과 그 이하 계층의 분열, 그리고 이것을 거의 조장하는 듯한 자본가들을 위한 이익 증대의 토대는 우리가 어떠한 현실에 놓여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인 린지 저먼의 새로울 것 없는 체제 전반의 비판은 역시나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만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지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소리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먼의 이 글을 찬찬히 읽다 보니, 지금은 없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모두가 아주 쉽게 '시민의 각성'을 밥 먹듯 언급하지만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본질적인 체제 구속은 쉽게 개선될 수 없는 지극한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저와 오래된 북플 이웃님이 이 책에 대한 짧은 평가를 남기셨는데,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


노동자는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의 소외‘때문에 ‘노동과정‘뿐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개인의 실제 계급 위치는 자신이 어느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생존하려면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지 여부에 달린 것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끊임없이 혁신하는 특성이 있다. 자본주의 초기부터 구조조정은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성이었다.

자본주의는 읽고 쓸 줄 알고 잘 교육받고 건강하고 상대적으로 장수하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노동생산성을 높여 잉여가치를 최대한 쥐어짜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가 양육의 짐을 부담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시간제 일자리가 적합했던 것이다. 이런 일자리는 여성이 기초적 양육을 책임지면서 병행할 수 있어 국가 지출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객관적 지위가 무엇이든 간에 소득과 라이프스타일을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멍청하거나 어딘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 생각했다.

정부 자체, 경찰 군대 같은 국가 기구, 사법부, 공무원 조직은 모두 자본가 계급을 대신해,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조직이다.

경제 성장기와 호황기에 자본가는 상당히 만족해하고 약간의 떡고물을 자신이 착취하는 노동자들에게 주기도 한다.

특권층을 위한 이런 제도와 단체 등은 자본가 계급의 구성원을 교육하고, 계급의식과 응집력을 높이고, 지배계급 출신이 아니지만 부나 지위를 통해 지배계급이 된 이들을 포섭하는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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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에 대하여 - 애덤 스미스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서 한 강의 부글 클래식 boogle Classics
애덤 스미스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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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합리적 이기심','보이지 않는 손','고전적 자유 시장'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애덤 스미스는 후세에 의해 경제학의 선구자로 거의 존숭받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는 여러 서평들을 통해 그가 경제학의 아버지이기 전에 '도덕감정론'의 저자이고, 오늘날에는 여러 지식인들의 의도로 부분적으로 읽히고 있는 것이 애덤 스미스라고 강조했던 바가 있습니다. 또한 시장 자유주의자들에게도 애덤 스미스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그를 몇 번이나 팔면서 애꿎은 논리에 등장시키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본디 스미스는 유년 시절부터 이성과 시민의 자유 및 언론의 자유라는 철학적 가치에 몰입했고, 이러한 공부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데이비드 흄과의 만남은 계몽주의적 측면에서 역사, 정치, 철학, 경제 등을 포함한 자신의 지적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이런 스미스의 학문적 관심과 지향을 고려해 봤을 때, 오직 하나의 저작 만을 놓고 그를 해석하는 것은 어쩌면 그에 대한 반쪽 짜리 이해라고 판단되는데요. 과거 애덤 스미스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대학에 강의를 나가면서, 그가 행한 도덕 철학 강의가 총 네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가운데, 여기서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이 추후에 출판되기에 이릅니다. 지금 서평을 쓰게 될 이 '정의에 대하여'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스미스의 강의록에서 당시 학생이 기록한 노트를 바탕으로 출판된 것인데요. 더욱이 번역된 이 책은 그중에서도 편역이 된 상황으로 어떻게 보면 '발췌본'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 글은 원제, "The Lecture on Justice"로 지난 201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3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인류에게 소유권의 개념이 생겨나면서 비로소 정부의 행태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단초를 기반으로, 그동안 역사적으로 사회를 구성해 온 정부 형태들을 살펴보고, 더불어 사법의 기원과 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의 사법제도가 어떠한 사회적 맥락으로 기인했는지도 밝히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전에 읽었던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어떤 글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스미스가 살았던 근대를 구분하여 그 시대마다 있었던 국가의 형태를 분석해 보는 작업은 분명 의미가 있긴 합니다. 스미스는 이에 대해 무엇보다 소유권의 개념과 개개인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국가를 해석하고 있는데요. 사적 소유권의 인식은 스미스에게 기본적인 합리성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 전반에 중요한 가치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소유권 자체가 어떻게 보면 인간 자유의 기초적인 기반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경제 발전을 통해 사회가 발전, 변화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 인간의 권리가 더 충족될 수 있다고 사실상 확신하는 이론적 체계는 스미스 사상의 주요한 근간이기도 합니다.

정부의 권력이라는 구분으로 정부 형태를 살펴본다면, 일반 군주제와 공화주의는 개념적으로 매우 다른 체제입니다. 특히 고대 로마 제국을 근간으로 했던 공화주의를 고려한다면 그 시기에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어느 정도는 노예 제도에 기반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최근의 공화주의 기반의 정치가 사익 보다는 공익에 근거한 권력 체제임을 인정한다면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공화주의에서는 필수적인 요소인데요. 그럼에도 14세기 전후로 이탈리아 내의 도시 국가였던 베네치아 공화정이 정치 참여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가 부정적이었다는 스미스의 진술은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꽤 오랫동안 민주정과 공화주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중세의 그늘을 떠올려 본다면, 역사적으로 인간 자체가 권위주의적 권력에 쉽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E. H. 카의 진술을 거부하기 힘듭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헌팅턴 류의 선민주의와도 얼마간 맞닿아 있기도 한 데요. 그렇지만 여기에서 스미스는 인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마땅한 정부의 행태를 분석하고 그것을 제도 자체보다 일종의 '계약' 관계로 추론해 보는 점은 어쩌면 대안의 제시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일독을 하고 보니, 스미스의 '계약'은 일반적인 사회학적인 계약과는 조금 맥락이 다르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다음 2부의 가정법을 위시한 여러 사회법에 대한 부분에서 스미스는 특히 결혼제도를 중심으로 사회에 뿌리 내린 오래된 관습법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스미스가 그 시대 다른 남성 사상가들과는 달리 여성의 권리나 여성이 처한 현실 내지는 전통적인 결혼제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점은 이 부분의 진술로 파악해 볼 수 있는데요. 1부 마지막 부분에서 스미스가 정부는 "효용과 권위의 원칙을 바탕으로 세워졌다"는 인식 하에, 교회의 지배 하에 있던 전통적인 결혼제도가 여성의 권리라는 일종의 파격적인 효용이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위배되어 왔는지 (약간의 저의 해석을 곁들이면) 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일부다처제에 대한 스미스의 비판은 글 전반에서 일관된 편이기도 합니다. 이혼에 있어서 만큼 과거 남성들이 무분별하게 누려왔다는 점에서,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초래하는 '사생아' 문제도 이런 인식하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래된 관습법적인 결혼 제도 자체가 여성이 남편의 아이가 아닌 다른 정부(精夫)의 아이를 임신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고도로 마련된 제도임을 감안해 본다면 과거 사회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나 전통적인 유럽의 귀족 사회에서 남성들이 처(妻) 외에 무분별하게 정부를 두고 자신의 성욕을 채우고 있었다는 점과 육체적 폭력이 너무나 가중되고 두려운 현실에서조차 완벽한 이혼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시대적 배경은 대체로 여성에게 있어 매우 불합리한 부분이었습니다. 더욱이 여성에게 성불감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교회의 지배하에서도 이혼이 가능했다는 점은 물론 반대로 남성에게도 해당되는 사례이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제도 하에서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지 사뭇 짐작케 합니다.

이렇게 가정에 대한 인식 저변이 어떻게 사법 제도에서 변화되어 왔고, 이를 통해 기본적인 가족 제도에 대한 체계를 마련했는지 뒤이어 나오는 부모와 자식, 후견인과 피후견인 간의 제도적 인식을 통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존의 가정을 통해, 재산을 어떻게 분배하고, 상속 문제라든지, 후견인과 피후견인간의 개념들은 결국은 소유권 개념으로 사실상 연결됩니다. 만약 스미스가 살았던 시대에 본격적으로 소유권 권리에 대한 인식이 사회에 요청된 것이라면 그가 이런 변화된 사회상에 얼마나 고심했을지 짐작이 되는데요. 앞서 언급한 대로 기존의 소유에 대한 관념이 정부와 그것을 이루는 권력 관계에 의해 제한적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이를테면 국왕이 봉토제를 통해 자신의 귀족들에게 일종의 소유권을 허가한 것과 다름 아닌 것인데요. 이것이 스미스의 시대에 계몽주의와 사회적 진보로 말미암아 소유권이 개인의 중요한 권리로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결국 소유권과 이를 바탕으로 확장된 계약의 가치가 법으로 어떻게 보장해야 하며, 이것을 불법적으로 거스르는 행태들인 '사기나 위조'와 같은 문제들을 어떻게 하면 예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법에 대한 요구와 일종의 사회 규약의 요청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역시나 편역이라 그저 개론서의 측면에서 '이런 게 있다'는 식으로 글 전체를 요약해 볼 수 있을 텐데요. 역자의 말마따나 나머지 번역에 대한 추후 계획이 있었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부장적 체제 하에 여성이 얼마나 모순된 상황에 있었는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남성의 성적 권리라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이 엄청난 재산을 지출할 수 있지만, 그 지출로 인해 그 사람에게 종속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지출로 인해 기술과 제품은 증대될 것이지만, 그런 지출에 종속되어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유언이나 합의, 계약 같은 것이 일어나고 복잡한 거래가 행해지기 시작함에 따라, 갈등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 차이의 원인은 바로 노예제도에 있다. 자유민들이 자신의 일을 모두 노예들에게 맡기게 되었을 때, 그들은 공적 토론에 참석할 권리를 누렸다.

그러나 풍요와 사치가 늘어나게 되었을 때, 부유한 사람은 대단히 급박한 상황이 아니고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려 들었을 것이다.

판사들은 도덕성이 높은 사람이고, 또 상당한 독립을 누리고 있으며, 그 자리를 종신으로 지키면서 법에만 얽매일 뿐이다.

그러나 통치자가 잘못한 때를 결정하는 판사는 전혀 없다. 주권자가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곧 또 다른 주권자를 전제하는 것이다.

일부다처제가 이뤄지는 곳이라면, 아내는 완전히 노예의 신분이기 때문에 남편의 재산에 아무런 이해관계를 갖지 못하며 남편의 사후에 식량을 받을 자격만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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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은 쉽고 민주주의는 어렵다 - 민주주의를 오염시키는 선동의 수사학
패트리샤 로버츠-밀러 지음, 김선 옮김 / 힐데와소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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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패트리샤 로버츠-밀러는 버클리 대학에서 수사학을 전공하여 이후, 모교에서 석사와 박사까지 마치게 됩니다. 그녀는 한나 아렌트, 아리스토텔레스, 케네스 버크 등을 연구하고, 수사학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에 있어서 공동체에 함께 결정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이를 어떻게 민주주의에 응용할 수 있을지 평생에 걸쳐 노력을 해왔는데요. 더불어 수사학의 기본 목표가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들의 교양 교육 전반에도 관여할 수 있기에 그녀와 같은 연구자들의 활동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정치가 극단주의적 위협에 노출되어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 책을 통해, 수사학의 가치가 극우 포퓰리즘과 선동 정치의 병리를 치료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다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Demagoguery and Democracy"로 지난 21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3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로버츠-밀러의 이 글은 오늘날 나날이 세를 확대하고 있는 극단주의와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선동을 이용하여 어떻게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합니다. 또한 선동은 우리에게 중요한 민주적 숙의의 원칙을 무력화 시키고, 시민 대다수를 그릇된 근거에 따른 일방적인 주장들로 세뇌시킨다는 점에서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저자의 논증이 진행되는 가운데, 다소 놀랍게 느꼈던 부분은 선동에 휩쓸리는 시민들 대다수가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고, 똑똑하지 않다는 점 이외에도 똑똑한 사람들조차 마찬가지로 선동의 영향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분석이었습니다. 결국 선동이 나와 적을 가르는 일종의 슈미트식의 폭력적 분리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앞으로의 우리 정치는 대다수 시민들이 이 선동을 어떻게 하면 확실히 구별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버츠-밀러가 이러한 글을 내놓은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잖아도 이 책에 대해 구글링을 해보니, 현지의 의미 있는 여러 서평들이 적잖게 검색되고 있었습니다.

과거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내에서 벌어진 '조선인 사냥'은 저자가 말하는 내집단과 외집단의 폭력적 구별 뿐만 아니라, 정치 집단이 자신들을 향한 내부의 불만을 전혀 상관 없는 집단에게 돌려 사실상 비참한 결말을 초래한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시의 일본인들 전부를 어리석은 군중으로 몰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같은 선동은 예상했던 것보다 그 파급이 치명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선동 자체는 대체로 민주주의적 숙의와 확연히 구별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동가의 무분별한 선동과는 달리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스스로가 언급한 발언에 책임을 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더욱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만능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포용의 원칙에서 다른 사람의 발언을 존중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선동은 이와는 반대로, 우리와 적이라는 구분으로 정치 전반을 양극화 하고, 더 나아가 세계는 우리 편과 상대 편으로 마땅히 환원될 수 있으며, 현재의 내집단 상황이 대체로 좋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벌이는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이들은 사실과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그릇된 주장을 일삼으며, 여기에는 각종 논리적 오류는 물론이고 객관적 진실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것의 해악은 자체로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테면 "우리편 정치인이 진실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면 실수지만, 상대편 정치인이 그런다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는 주장들이 이러한 범주에 속할 겁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저자의 논증에 있어 한 가지 부족한 진술은 이들 선동이 궁극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사실상의 격멸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선동의 끝에 파시즘이 있다"는 종래의 경고를 어정쩡하게 넘어간 점이라 볼 수 있는데요. 저는 이 뿐만 아니라, 선동에 빠져 그릇된 사고와 행동을 벌이고 있는 집단의 행태를 과연 어떤 식으로 정상화 시킬 수 있는지 논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해결책이 좀 더 제시되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현재 프랑스와 독일은 물론 이탈리아까지 과거 파시즘에 대한 찬양과 인종적 혐오를 조장하는 행위를 사실상 처벌하는 법령을 갖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카를 슈미트를 언급했지만 선동의 근원에 대한 역사적 맥락이 대부분 파시즘과 연결되어 있고, 이에 슈미트적 피아 논리는 이처럼 극단적인 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극우 포퓰리즘의 속성일지도 모르겠지만 선동 자체를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법들 혹은 주장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대한 회의를 끌어냅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자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현실에서 포퓰리즘이 터무니 없게 매번 민주주의 타령을 해대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마치 저 아프리카의 독재자가 자신은 밤낮으로 오로지 민주주의 생각만 한다는 소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요. 사실상 우리 정치에서도 '민주적 숙의'를 통한 서로 간의 정치적 토론이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은 언제나 옳고, 설사 그릇된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고, 오히려 편을 들게 되는 행태가 만연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자의 결론대로 오늘날 선동이 왜곡한 정치는 그만큼 건정성을 답보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저자가 매번 강조하는 민주적 숙의는 어떻게 보면 서로에 대한 정치적 양보라고 여겨집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따라서 주장 전반이 부족하면 때에 따라 그것을 보완하여 알리고, 쟁점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는 것은 행위자들에게 적잖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선동이 주가 된 정치 자체는 건설적인 토론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것이 끝내 인신 공격에 이른다는 점에서 매우 유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선동가들을 정치 무대에서 축출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선동을 구별하고, 그 가운데에서 민주주의에 유독한 측면을 효과적으로 찾아내는데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논리적으로 무장하여 이들 선동 정치의 포로가 되지 않는 점일 텐데요. 개인적으로는 시민들 모두가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유혹하는 '내집단'이라는 의미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인 외집단을 배격하면서 느끼는 왜곡된 카타르시스는 그만큼 중독적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터넷 상에서의 너무나 무분별한 혐오 발언과 그것을 추종하는 집단들의 무분별한 언행들이 선동에 대한 근절을 더욱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정치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만은 않은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여타 다른 인용보다 히틀러 이전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자행된 언론들의 혐오주의적 발언에 대한 인용이 결국 파시즘을 일으킨 토양이 되었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한데요. 현재 미국 언론 지형이 극단화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이 가까운 미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부분도 꽤 중요한 통찰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경계할 부분이라 생각되는데요. 전반적인 선동 정치에 대한 비판 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 우리 언론에게 있어 거의 전무하다는 점도 현재 미국의 사례와 비슷하게 견주어 볼 수 있는 내용이라 여겨집니다. 주류 정치를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선동 정치와 이것을 거의 비판하지 않는 언론의 조합이 과연 민주주의에 어떠한 악영향으로 나타날지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드는군요.



-이 글, 4장에서 인용된 "시장이 비합리적으로 굴러가는 사례들은 해맑게 무시하면서 시장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유 시장으로 전환하려는 결정은 잘 작동할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과 돈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나을 수 있다는 주장 등이 비논리적으로 꾸며진, 합리적 인간의 근거로 쓰인다는 부분은 여전히 강고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향후 드러난 바와 같이 대량살상무기 관련 주장, 9.11과 이라크 사이의 연관성, 계획의 실행 가능성에 관해서는 당시에 침공을 반대하고 의심했던 사람들이 옳았다.

선동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선동은 복잡한 정책 이슈가 우리(좋음) 대 그들(나쁨)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도 틀릴 수 있고 지식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며, 주장의 증거와 출처, 전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가지고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성체를 훼손하고, 우물에 독약을 풀고, 세계적인 음모에 가담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유대인을 학살하던 과거를 돌아보며 끔찍해 한다.

우리는 똑똑하고 좋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좋아했다거나, 히틀러가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 보면 점차 성숙해지고 사실 정말 그런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거나, 자유 민주주의는 끝났으니 파시즘이 최선의 선택이고,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모든 특징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질문을 우리 대 상대편의 구도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 오류가 우리 같은 사람들(내집단 구성원)은 본질적으로 믿을 만하고, 그들 같은 사람들(외집단 구성원)은 그렇지 않다는, 자주 틀리곤 하는 직감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우리편 정치인이 진실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면 실수지만, 상대편 정치인이 그런다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세계를 정확히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며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완벽하게 진심일 수 있고, 진정성 있게 부정확한 것을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와 비슷한 논쟁을 시장이 비합리적으로 굴러가는 사례들은 해맑게 무시하면서 시장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유 시장으로 전환하려는 결정은 잘 작동할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사람과도 했던 적이 있다.

히틀러의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나너였던 게르디 트루스트는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친절하고, 강아지를 아끼고,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예술품 앞에 서서 감동에 가득 차 생각에 잠기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살인자일 수 있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생산적인 민주적 숙의가 되려면 전제를 포함한 자신의 주장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공적 담론의 요점은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누르고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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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밍 사회 - 캔슬 컬처에서 해시태그 운동까지 그들은 왜 불타오르는가
이토 마사아키 지음, 유태선 옮김 / 북바이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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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이토 마사아키(伊藤昌亮) 교수는 일본의 사회학자로 도쿄 외국어 대학의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일반 IT 기업에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2001년 2008년까지 도쿄대 학제정보학부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후 현재는 도쿄도 무사시노시에 소재한 세이케이 대학의 현대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사아키 교수는 일본 내의 넷우익에 대한 연구를 비롯 최근에 일본 사회에서 불고 있는 반자유주의적 현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중도 성향에 가까운 마이니치 신문에 인터뷰와 기사로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치적으로는 리버럴적인 성향을 갖고 지식인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炎上社会を考える"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이 글의 원제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염상炎上 이라는 단어는 넷상에서 익명으로 벌어지는 일부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비방이 빠르게 올라오며 이슈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요. 마찬가지로 원제에 염상사회 炎上社会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현재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극단적인 혐오 정서에 대해 저자는 사회학적인 분석을 시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이와 같은 일본 사회 내에서의 '사회적 병리 현상'은 2000년대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와 현재 일본 정치에서 거의 주류가 된 신보수주의 즉, 극우 정치가 만나 초래한 극단적인 사회 문화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와 관련된 문제를 일본 내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 '혐한'을 지목하고 이러한 배경에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적 원리인 사회 내에서의 지위를 향한 경쟁과 사회 구성원들끼리 경제적 이득을 놓고 벌이는 각축이 비정상적인 '인정 욕구'와 맞물려,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해 보입니다.

어쩌면 일본 사회의 역사적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저자는 의미심장하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당국이 자신들의 국민들에게 벌인 통제와 감시 활동에서 이런 끔찍한 현상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이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일본 뿐만 아니라 전셰계적으로 기성 정치 무대에 등장한 '우파 포퓰리즘'과 관련해, 이들이 채용한 카를 슈미트의 '적과 아'의 정치론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이러한 맥락이 슈미트 특유의 '나약한 자유주의 정치'에 대한 반감으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기본적으로 자신들을 비판하는 상대방에 대해 광범위한 거짓 뉴스와 선동을 사용하여, 거의 가차 없는 공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심각히 훼손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본도 현 상황에서 정치적 주류가 오랫동안 극우에 기울어지면서 비교적 짧게 막을 내린 트럼프의 미국 정치보다도 병폐적 사회 문제는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저자의 분석대로 자유 시장의 경쟁 체제의 관념이 극단적인 여타 신자유주의적 국가들과 유사하면서도 여기에 더해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일본 사회를 이끌게 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문제점이 책의 제목과 다름없는 일본 사회의 무분별한 혐오 문화를 초래했다는 저자의 분석이 옳다면, 사실상 신자유주의가 공동체 이익과 공동선에 대한 가치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진술은 큰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 마가렛 대처가 이 시점부터 '사회는 없다'는 주장이 과연 무엇을 의미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사회 부조가 철폐되면서, 한정된 사회적 자원(지위를 포함해)을 놓고 사회 구성원들이 벌이는 경쟁이 결국은 아름답지 않은 결말로 귀결된 점도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설사 이 부분이 일본 사회에 한정된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 기업들의 노골적인 기업 이익 추구와 넷 상에서 벌어지는 시민들 간의 익명 대결은 제대로 넷 규범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우파 포퓰리즘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특히 앞선 카를 슈미트의 주장을 떠올려 본다면 인터넷에서의 무분별한 증오 양태와 혐오 발언 자체가 어떻게 사회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지 깨닫게 되는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를테면 넷 상에서 평범한 한 사람의 인격 살인을 초래하는 소위 '좌표 찍기'와 부풀려지는 낙인 찍기는 유독 일본만의 상황은 아니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미국 역시 혐오 발언과 다름 없는 트롤링으로 정치적 중도를 모조리 넷 상에서 쫓아내 버린 점도 위와 비슷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일관된 논증 가운데, 3장에서 해시태그와 관련된 '집단 극화' 현상과 같은 넷 상에서의 분위기가 '시회 운동인지 아니면 군중 운동'인지에 관한 의문을 더욱 강화 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민주적 발언을 위한 어느 정도의 익명성은 필요할 수 있지만, 앞선 집단 극화 현상과 같이 평범한 주제의 의견도 쉽게 과격해지고 폭력적이 되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시장 가치'를 높이고자 특히 그 '의식의 높이'를 두고 서로 경쟁한다"는 진술은 이처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해 '깨어있다는 의식 자체'를 SNS 상에서 이용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이는 일본 뿐만 아니라 선진 민주 국가로 불리는 많은 사회에서 좌파와 우파라는 이념적 대치 뿐만 아니라, 각각의 발언들이 상대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향해 인신적 공격까지 서슴치 않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묵시적으로 익명성을 강조하는 넷 상에서 이들 '유저'들에게 일일이 도덕적 관용을 강조하기란 철지난 계몽주의적 논법으로 취급 되었고, "좌파는 이렇다. 우파는 답답하다"라는 식의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만을 모두가 소모적으로 소비하게 이르렀는데요. 물론 여기에만 그쳤다면 별 반 문제가 없겠으나, 1장과 2장에서 보여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사회적 약자'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과해졌고, 이것이 흔한 군중에서 볼 수 있는 언어적 폭력성과 더불어, 사회적 인격 살인까지 빈번히 발생하기에 이릅니다. 그런 연유로 넷 상에서 중도의 퇴출은 물론 반대로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극단에 있는 자들의 콜로세움이 열린 현실이 결국에는 저자의 말하고자 하는 일관된 논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뒤이어 5장에서는 인터넷 악성 발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공감 지상주의'에 대해서도 논증하고 있습니다만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려하는 것으로 시작된 공감에 대한 인식이 누군가에 대한 비상식적인 공격과 함께, 한 개인의 사회적 매장에 대한 소위 공감 강요로 이어지고 있는 점이 과연 자유주의적 토대의 관용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저자는 되묻기에 이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정치를 따로 거론하지 않더라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시민이 어떻게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는데요. 이성이 결여된 시민이 초래하는 전반적인 우려에 대해 버틀란드 러셀은 이미 통렬하게 분석한 바가 있습니다. 정치적 건전성을 위해, 또한 시민들 간의 자유롭고 모두의 이익이 되는 제언들은 시민 각자의 명료한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한 것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일 텐데요. 이것은 우파 포퓰리즘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증명되지도 않은 가짜 뉴스를 남발하면서 이성을 잃은 다수의 시민들을 입맛에 맞게 포획한 최근의 상황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이는 이성의 실종과 더불어 우리가 그토록 수호하고자 했던 자유주의적 관용이 과연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대해 시민 모두가 성찰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마사아키 교수가 거의 일관되게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수에 대한 혐오 발언과 더불어 집단 린치에 이르는 사회적 병리 현상 전반을 꽤 설득적으로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일본 사회가 오래전부터 강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흡사 고착된 관습으로 여겼던 점을 감안해 본다면, 2차 대전 패전 이후 미군에 의해 반강제로 이식된 자유 민주주의가 대다수의 일본인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특정 국가의 지독한 혐오를 책으로 찍어내어, 버젓이 대도시의 대형 서점에 '혐한 섹션'이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는 현상 자체에 일본 사회에 과연 자유주의적 관용과 이웃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기반이 되어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할 따름인데요. 저자 특유의 교묘한 논법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자신이 해석하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여러모로 쉽게 불타오르게 되는 요인들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과거사 문제가 언급되지 않은 점은 꽤 아쉬운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더욱이 재특회와 5CH와 같은 우익들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도 미흡해 보였고, 전반적인 현상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적 자유 경쟁과 시장 경제에 대한 원리 원칙이 사회적 문제의 큰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과연 설명으로 충분한지에 대해서도 큰 의문이 듭니다. 예를 들어, 일전에 읽은 케이트 만의 글처럼 '여성 혐오'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식의 좀 더 설득적인 맥락과 이에 기반한 상세한 분석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터무니 없는 여성 혐오에 대한 사회적 맥락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사회적 병폐는 정말 사례와 그 분석이 충분히 상당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외적으로 건전gk고 견고한 민주주의 국가이면서 경제적으로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일본이 사실상 극우 정치와 이들을 견제할 만한 효과적인 수단이 전무하고, 이러한 가운데 사회가 점차 관용을 잃고 극단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무엇보다 글에서 역자의 '일왕'이라는 표기는 꽤 의외이기도 했습니다. 여지없이 일본 국왕에 대한 저의 이해는 '일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37년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시작되었고, 1938년 4월에는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었다. 게다가 1940년 10월에는 대정익찬회가 결성되어 중앙에서 말단 조직인 도나리구미(2차 세계 대전 당시에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에 이르는 광대한 국민 통제 체제가 갖추어져간다.

그들은 신자유주의하에서 각자가 자유 경쟁을 벌이면서 자기 책임으로 위험에 대처해나갈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일찍이 정치적 행위의 본질이란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데 있다면서 특히 ‘예외 상황‘을 만났을 때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 모습에서 정치가의 책무를 보려고 했다. 게다가 그것은 대중의 갈채에 힘입어 이루어진다면서 그런 태도를 ‘결단주의‘가고 불렀다.

강자가 되려고 모두가 각축을 벌이는 신자유주의 풍조속에서 자신이 약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진 상황은 기묘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사회의 재분배 기능이 무너지고 분배의 기초 자금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제한된 이익을 둘러싸고 ‘약자‘포지션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격화되어왔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 인식에 하나의 틀(프레임)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상황의 정의를 공유하고, 게다가 특정 가치관, 문제 의식, 변혁 지향 등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사회 운동론에서는 ‘프레이밍‘이라고 부른다.

‘공감‘은 본래 과거 애덤 스미스가 논했듯이 ‘타인의 입장에서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 상상하는 것‘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상상력에 근거해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이해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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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주의의 폭력 - 부채위기를 넘어 공통으로 아우또노미아총서 41
크리스티안 마라찌 지음, 심성보 옮김 / 갈무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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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마라찌는 스위스 루가노 출신으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학계에선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열정적인 사회 활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을 졸업하고 런던 정경대를 거쳐, 런던시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특히 마라찌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그에 따른 여러 운동에도 직접 참여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가 나가야 할 길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요. 그래서 그가 상아탑에 국한된 경제 이론가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경제 환경과 시스템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해오고 있는 점은 학자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 여기는 듯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마라찌에 대해 크게 긍정한 부분은 작금의 전세계적 금융 자본주의가 현실에서 많은 시민들에게 거의 이익이 되지 않았다는 점과 1985년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복지 축소와 사회 보장에 대한 쥐어짜기식 정책이 마찬가지로 유럽을 결국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인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 Violence of Financial Capitalism"으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3년 4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마라찌의 이 글은 지난 수십 년 간의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 이행에 따른 파급이 어떻게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로 이어졌는지를 고찰해보고, 앞으로 자본주의의 건전성과 금융 자본주의의 병리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명확히 드러나지만 채권을 손쉽게 팔아 치울 수 있었던 증권화 securitization는 대표적인 금융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위 '유독성 자산'을 만들어 낸 원인이기도 한데요. 물론 2008년의 대위기를 분석한 글들은 충분히 소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008년의 위기 때 경제 엘리트들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는 물론 시스템의 붕괴까지 여러모로 자유 시장이라는 대마불사에 큰 타격이 되었죠. 여기에 저자가 거듭 인용하고 있는 마틴 울프를 포함, 파리드 자카리아, 맷 타이비, 심지어 히로세 다카시마저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를 직접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 금융 엘리트들이 주도한 근본 금융 자본주의 자체를 흡사 '카지노'로 비유했던 한스 베르너 진의 분석 또한 매우 유명한데요. 사실상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고전 경제학자들을 제외한다면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 학자들이 제법 많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연유로 경제학이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이 지점에서 깊은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더할 나위 없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미국의 경제 동향이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의 시장이 세계 경제의 소위 '베드' 역할을 하고 있는 소위 선진 적자국이라고 불리는 영국과 미국의 대규모 적자는 이처럼 세계 경제 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맥락이기도 합니다. 다시 돌아와, 2008년의 위기는 소위 채무를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고안된 증권화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저자의 분석대로 증권화를 통한 자본의 축적은 그 파급이 충격적이었다는 점에서 금융 시스템 전반이 과연 건전성을 답보할 수 있는가가 이 글의 주요한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저자의 현재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과 이런 체제가 다시금 초래할 수 있는 위기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고 있는 부분만으로도 우리가 이 글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1980년 이전의 시장에 대한 케인스주의적 접근의 불만족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장 전반을 새롭게 재해석한 신자유주의의 실패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고전 경제학자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미 누리엘 루비니가 2004년부터 이 금융 시장의 위기를 경고했지만 금융 엘리트들을 비롯해, 심지어 당국마저도 이러한 의견을 사실상 무시해 왔습니다. 그 이전에 하이먼 민스키를 알고 있다면 이러한 우려는 상당히 있어 왔습니다. 어떻게 시장 전체가 거대한 증권화에 담보물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 시장의 자정 능력은 그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 시점에 신자유주의자들의 뼈아픈 반성이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2008년의 청산 작업에서 보여준 금융 엘리트들의 추태는 이런 저의 당위에 상반되는 모습을 만천하에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저들이 오로지 자신의 사익에만 몰두하는 인간들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더욱이 조지 W. 부시에 이어 등장한 오바마 행정부가 이들에 대한 기소를 포기하고 면죄부를 이들 손에 안겨준 것은 이 사태의 결론이 익히 짐작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저자인 마라찌가 오바마 정부의 '신 뉴딜'이 가급정 성공해야만 한다고 기대하는 장면에서는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미국의 소비시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브레이크 없이 신용 생활을 지속합니다. 이 점은 달리 말하면 시스템적 도더적 해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의 원인들 가운제 한가지는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흑자를 거두고 있던 중국의 국내 저축 자금이 이런 여파를 불러온 것인데요. 이에 새뮤얼 헌팅턴과 같은 이들은 미국의 위기를 전부 중국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근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자의 평가대로 중국 당국이 미국의 국채 매입이나 미국 시장의 재투자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점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현실적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미국이 반쯤 자임해 온 세계 자본주의에서의 소비 시장 역할을 중국에 맡기기에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이를 지금까지 지탱해 온 체제의 근본과 관련해서도 역시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극히 난감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럽이 설정해 온 '유로화'에 대한 시장에서의 안정화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시장 전반이 개발도상국에게 좀 더 수출 시장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필요한데, 현재 독일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흑자국임을 고려해 봤을 때, 이 같은 기대 역시도 상당히 어려운 실정입니다. 일전의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언급대로 오로지 미국만의 적자를 기반으로 해, 전세계 국가들을 향한 소비 시장 제공이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 지는 분명히 우려스러운 부분인데요. 더욱이 이 시점에서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갖게 된 중국이 세계 결제 통화를 교체하고 싶어하는 내심과 그러한 세계 경제 체제의 주도권을 쥐고 싶어하는 이들의 근본적인 목표도 마찬가지로 세계 경제에 있어서 어두운 그림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IMF 체제가 과거처럼 얼마나 영향력을 견지할 수 있을지도 신자유주의와 세계 경제의 헤게모니에 대한 분명한 과제로 여겨집니다. 

결국 세계가 직면한 이 문제 대한 마라찌의 해법은 사실상 진보적인 것으로, 기존의 대니 로드릭이 회의적으로 파악했던, 정치적 결단 혹은 정치적 해법에 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세계 경제 블럭이 선진 그룹과 개발도상국 간의 이원화로 고착화 되어 가는 점을 인식하고, 중국이 자신들의 요구대로 세계 경제 체제의 재구축에 유럽을 비롯한 미국의 경제 당국이 이를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느냐가 현재의 큰 과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저 역시도 이 과제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이 자신들이 쥐고 있는 경제적 헤게모니를 떠오르는 경쟁국에게 양보하리란 어려운 부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의 양상이 그러했으니까요. 저는 이런 체제의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권력 문제에서 조금 벗어나서, 금융 자본주의에 있어 저자가 제안한,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이 1997년의 외환위기를 교훈 삼아 외화 보유고를 늘리고자 하는 딜레마를 워싱턴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앞선 국가들의 위기시 외환 보유고의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우리가 당신들을 고립시키거나 그것을 기화로 당신들의 시장을 붕괴시키지 않겠다는 제스처를 일관되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합니다. 이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IMF 체제를 고려해 본다면 상당히 충격적인 제안이기도 한 데요. 즉, 개발도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과도한 외환 축적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급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제안은 충분히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런 제안과 더불어, 4장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구조적인 선진 적자국들과 반대의 흑자국들 간의 차이 또한 어떻게 좁혀 나갈 수 있느냐도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시장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작금의 고정된 경제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여기에는 서로 간의 대화와 협의라는 (민주주의 방식의) 정치적 해법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3장의 결말에서 저자는 우리가 몸소 목도하고 있는 금융화는 고도로 고안된 기법으로 채워,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시점에서 '도착적인 축적 양식'자체라고 진단합니다. 이는 실물 경제가 금융 기법의 하위 요소로 추락하고, 이를 통해 돈이 더욱 배타적으로 축적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요. 결국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한 자들을 위한 신자유주의적 기법과 그런 이행 전반이 자본주의를 더욱 비인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에티엔 발리바르를 포함한 많은 사회학자들이 경제와 시장이 민주주의를 비롯한 시민이 기본이 되는 정치를 떠받쳐야 했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무력화 된 바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비합리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경제 상황에서 자본의 축적을 좀 더 효율적이고 손쉽게 만든다면 그만큼 사회가 진보하고, 이러한 이행에 따른 이익이 모든 시민들에게 고르게 주어질 수 있다고 항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극명한 모순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금융 시장에 대한 불안전성 자체를 그저 자연스런 문제라고 치부하고, 이익은 마땅히 자신들의 손에, 손해는 오로지 정부의 몫으로 남긴 2008년의 파국적인 결과는 시장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야 하는지에 대한 시민들의 거듭된 의문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마라찌의 이 글은 2008년의 위기로부터 우리가 과연 배운 것이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체제의 모순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술에서 의문이 드는 점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기법에 의해 시장에 대한 제한적인 접근만이 가능한 분위기에서 과연 체계적으로 이에 대응할 수 있겠느냐 입니다. 따라서 금융 시장에 대한 각 국의 정치적인 접근이 이렇게 큰 모순을 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폴 크루거먼에 따르면, (2010년 1월 11일 상하 양원에서 7천 895억 달러로 감축되긴 했지만) 오바마 정부가 제안한 8천 25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 부양책은, 위기시기에 나타난 잠재 성장(률)의 "산출 격차"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애널리스트들에 따르면, 시장은 가격 왜곡을 암시하는 경제적 버블의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 정부가 차입을 시도함에 따라 실질 금리가 상승하는 교란이 일어나고 있다."

먼저 자극 단계에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주식시장에 도취되어 과잉거래를 일삼는다. 다음으로 공포와 혼란의 단계가 나타나고, 곧이어 합병의 단계로 진입한 다음 마지막에 재조직의 단계로 끝맺는다.

1960~70년대에 발생한 (대략 50퍼센트에 이르는) 이윤 감소가 꼽히고 있다. 이윤 감소는 포드주의의 기술적, 경제적 토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배의 측면에서 볼 때,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금리생활자의 소비 증가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부채를 통한 임금 생활자의 소비 때문이다.

전지구적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의심할 바 없이 서브 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기초로 창출된 파생증권은 희생양이 되었고 "유독성" 자산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오늘날 금융 산업의 입맛에 맞추어 학문적 역량과 품위를 냉팽개쳤던 아카데미 경제학자들이 양심상 평안하길 바랄 뿐이다(이처럼 현재의 금융위기는 아카데미 경제학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무역 흑자국, 가령 독일과 일본 뿐만 아니라 발전도상국들이 수출을 늘릴 수 있는 근본적 원인은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무역 적자]국들이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높은 수요 증가율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신경제에서 자본주의적 가치창출 과정을 혁신하는 최전선은 ‘임금노동을 주변화하고 자유노동을 통해 가치를 증식하는 것‘이다.

금융화는 금융 지대와 소비자 부채를 창출하였고 이 덕분에 전지구적 자본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1985년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시장의 탈규제화를 통해 경제를 신자유주의로 전환한 이후, 평균 2년 반마다 금융 위기와/나 통화위기가 반복해서 일어났다.

알폰소 뚜어가 언급했듯이, "중국의 선의는 공짜가 아닐뿐더러, 특히 미국에게, 값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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