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양장)
앤드루 갬블 지음, 박형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앤드루 갬블은 영국의 정치학자로 케임브리지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영국의 공립 연구 대학인 더럼 대학에서 정치 이론과 관련해 석사를, 이후 모교인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갬블은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이자 퀸즈 칼리지에서 연구 교수로 일했는데요. 그는 2003년에 자신의 논저인 "유럽과 미국 사이"가 그해 정치학 분야 최고의 책으로, W. J. M 매킨지 상을 수상하고, 2년 뒤인, 2005년에는 PSA로부터 평생 정치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이사야 벌린 상을 받습니다. 이런 갬블의 최근 주요 연구 주제는 자산 기반의 복지 제도와 국제 관계로서의 영미 관계입니다. 특히 그는 근래 경기 침체와 그에 따른 자본주의적 정치의 위기에도 큰 관심을 두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Can the Welfare State Survive?"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2월 번역되었습니다.

미국과 더불어 철저한 신자유주의 국가로 읽히는 영국에서 저자와 같은 강단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꽤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물론 저자인 갬블이 본래 정치학자이기 때문에 오늘날 전혀 퇴로가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의 일상적 폐해'에 양심 상 입을 닫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자본주의에 있어 오래된 해결책으로 이해되는 복지 혹은 복지 시스템은 20세기 유럽으로부터 시작된 그야말로 사회적 유산에 가깝습니다. 바로 이 책의 서론은 복지의 그와 같은 연원을 다루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조금 이른 결론이지만 갬블의 이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기도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왜 시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 그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명확히 고찰해 봐야 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1929년에 전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 준 뉴욕 증시 발 대폭락은 바로 대공황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 소위 '뉴딜 엘리트'들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해법을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동시에, 다수 시민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중첩된 복지 프로그램'을 자본가들의 동의와 폭넓은 공감대를 우선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그 시대의 자본가들이 매번 이러한 요구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손익에 있어 무엇보다 체제 안정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식했던 점인데요. 특히나 서구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심각하게 분열된 계급 사회를 이미 경험한 일반 시민들 그리고 자본가들이자 보수주의자들은 "모든 시민을 위한 관대한 복지 국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당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을 전통적인 사회적 합의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 듭니다만 설사 그것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치밀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이들도 보편적 공익에 동의했던 것이 아닐까 순진한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물론 보편적인 사회주의자들 역시 이 '양보'에 마땅히 동의했습니다만 1930년대 이후, 조직된 노동 계급의 스스로 삶을 통제하기 위한 자기 방어 기제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된 힘'이 서서히 무력화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제가 갬블의 이 글을 통해 그저 과거를 엿본 것이지만 동시에 자본가들과 이에 결탁한 보수주의자들이 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겠다는 '최종 결론'에 이르렀던 점도 거의 진실로도 읽혔습니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광범위한 복지 제도와 관련해, 특유의 정치학자 답게 민주주의 하에서 시장의 매커니즘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주의는 원칙적으로 시민을 위한 사회 부조를 거부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민권과 관련된 리처드 벨러미의 논증과도 매우 유사한 점인데요. 즉, 복지 국가에서 시민은 자신이 이룩해 온 성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시민권에 근거해 부여되는 불가침의 사회적 권리를 갖는다는 당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적지 않은 수의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시장의 지속적인 이익을 위해 무엇보다 사회 체제가 안정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일전에 데이빗 코츠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의 순진한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이 신자유주의자들을 무턱대고 저열한 음모론자들로 취급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다소 일관되지 않은 화법으로 시민들에게 혼란을 끼친 부분은 사실로 밝혀졌는데요. 결과론적이지만 이러한 문제는 저자의 분석대로 신자유주의가 단일한 교의가 아니었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복지와 대립되는 신자유주의적 기법을 분석하는 논증 가운데, 이를 명확하게 "시장 자유지상주의"로 다루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하이에크와 더불어 강고한 신자유주의자로 알려진 그들 세계의 석학, 밀턴 프리드먼을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로 사회학에서 자유지상주의는 어느 정도 철지난 멸칭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앞선 프리드먼에 대한 저자의 이 같은 의도는 과연 무엇일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대다수 신자유주의들이 주장하는 시장 자유주의적 발상과 노골적인 사적 이익 추구, 이를 통한 강고한 개인주의화는 단순히 복지 담론을 넘어, 사회에 당면한 문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저 도식적으로 공리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러한 사적 이익화를 필두로 시민을 파편에 이르게 했던 개인주의에 대한 맹신은 특히 신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한 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의 흔들리지 않는 교리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저자의 논증을 통해 다시금 밝혀지고 있지만 이 양자가 공통되게 수용하는 부분은 바로 시장 자유 하에 '사회 정의'는 필요 없다는 인식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가 안전하고 무엇보다 누구에게나 정의롭기를 바랍니다. 사유 재산에 관련된 부분, 사적 이익화에 대한 부분을 여기에서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이미 인간성이 결여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그동안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는 거의 명백합니다. 그래서 복지는 바로 그런 정의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미국과 같은 완벽한 신자유주의 국가가 자신들의 국민을 위한 사회 부조를 완벽히 철회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의 수사가 어떤 식으로든 본질적 의미를 왜곡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된 자본주의적 폐해를 단순히 일원적으로 분석할 수 없듯이, 오늘날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맥락은 저자의 말마따나 정치경제학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시장의 이익을 위해 국가와 시장을 비롯, 전지구적 생물권이 이에 동원되고 있고, 이러한 일관된 전개 과정은 보편 타당한 복지 시스템 없이 평범한 시민이 과연 자신의 삶을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을 들게 하는데요.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복지 전반은 큰 틀에서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 요청되는 것이고 작게는 시민 각자의 삶이 폭력적인 자본주의적 불평등에서 일상을 보전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장책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리버럴의 항복과 더불어,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들이 신자유주의적 교의에 표면적으로는 함께하게 되면서 반대의 큰 국가론에 맞섰고 이와 동시에 복지 비용까지 큰 폭으로 삭감하며 이런 사활적 문제를 그저 개인의 책임으로만 국한시키는 사회적 작업에 온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는 지난날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후, 노동 조합이 신자본가들이 추동한 사회경제적 압박에 의해 급격히 힘을 잃어 갔고,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시민의 도태와 분리 그리고 계급화가 더 맹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금융 규제를 철폐하고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제한하여, 기업과 경제 주체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그런 단편적인 작업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위한 소위 사회 개조가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데요. 앞선 리버럴 정치인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극적 편입과 더불어 유럽을 비롯한 진보 좌파의 몰락은 바로 이러한 일방적 이행을 부추겨 왔습니다. 

단순히 자본가 계급에 의한 비용 문제로 백안시 되는 복지 문제가 '어른이 된 시민'에게는 그저 불필요하다는 주장과 신자유주의가 맹신하는 능력주의 체제에서 밀려난 자들은 당연히 도태되어야 한다는 소위 과거 허버트 스펜서류의 사회 진화론자들과 같은 주장들에 대다수 시민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침체 시기에 시민들을 위한 복지 비용을 충원하기 위해, 다방면의 정치적 토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하에서는 분명 필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19세기 자유주의 시대를 거쳐 끈질기게 우리가 옹호해 온 이 복지 제도와 그것을 보장한 복지 국가 자체는 어떻게 보면 홉스가 부정해 온 현실에 맞서, 우리 인류가 지켜온 유산이기도 한 데요. 더욱이 일전에 피터 플레밍과 같은 학자들이 분석했던 바대로, 부유층들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일관되게 무리 없이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대다수 시민 계급의 경제적 안정이 무엇보다 - 그것의 맥락이 일견 모욕적이긴 하지만 - 시급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금융 자본주의적 헤게모니에서 자본주의와 더욱더 멀어진 인간성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겠는가를 정치철학적으로 고민하는 것보다 시민 사회가 기존의 기회의 균등, 평등, 시민의 자유, 사상의 자율성을 답보하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의무 자체가 바로 우리의 세금으로 가용된다는 점을 우선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이런 인식은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에 대해 소극적인 권력 관계가 아님을 시민들에게 주지시키는 것인데요. 결국 복지 프로그램은 누구에게 얼마간의 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유주의가 그동안 옹호해 온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동선에 기반한 가치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한 원천적 수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끝으로 곳곳에 보이는 저자의 신랄한 논증을 통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엄연히 이 사회에 실존하고 있으며, 이들이 사회 각 분야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점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그동안 보수 우파들이 신자유주의는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주장들과 간혹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더불어, 현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이 우리가 알고 있던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아님을 저자를 통해서, 다시금 여실히 깨닫게 되었는데요. 모두가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기 불편한 지난날의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결탁', 이러한 결합 형태가 저자가 밝히는 복지에 대한 이들의 근본적인 거부감 뿐만 아니라, 이들이 다른 모든 형태의 타협 불가능한 주장들에 비해서, 사실상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시녀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추정하건대, 과거 루퍼트 머독과 같은 언론계의 보수주의자가 마거릿 대처와 같은 정치인들과 자신들의 국가와 사회를 위해 논의했던 바는 거의 분명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결국 국가는 시민들의 보모가 아니라는 것이었겠죠. 이러한 연장선 상 가운데, 개인주의와 능력주의 그리고 심각한 불평등이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이행 초반에 필연적으로 잉태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글의 4장에 복지를 설명한 저자의 문장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는데요. 글 말미에 이 문구를 따로 남기고자 합니다. 


"복지국가는 다양한 수준의 불평등과 양립할 수 있으며, 불평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결코 복지국가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그러나 복지 국가를 구축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삶의 기회를 보다 평등하게 만들고, 사회적 최소한도를 제공하고, 모든 사람이 시민적 권리, 정치적 권리, 사회적 권리를 누리는 공동의 시민권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간 복지 체제의 핵심 교의 중 하나였다." 


그러나 2008년 금융 붕괴와 그것이 초래한 심각한 여파로 인해 복지국가는 축소와 긴축의 새로운 시대에 직면해야만 했다.

많은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당신은 복지국가가 살아남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복지국가를 해체하는 데에는 정치적 장애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복지 국가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우울하게 결론 내릴 수도 있다.

금융 붕괴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사상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전략에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의회의 과반수를 확보하고 국가 관료제의 기존 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정치권력을 획득하여 자신들의 강령을 실행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브레턴우즈 고정환율 체제 Bretton Woods fixesd exchange rate regime가 해체된 이후 훨씬 더 개방적이 된 세계 경제에서 자국 경제는 국제금융시장으로부터 덜 보호받았고, 자본통제 종식, 규제 완화, 민영화, 소득과 부에 대한 세금 인하, 그리고 고용권 및 노동조합의 약화를 통한 유연한 노동시장 창출 등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많은 나라에 도입되었다.

복지국가가 그간 표명해 온 약속은 모든 시민은 자신이 시장에서 이룬 성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시민권에 근거하여 부여되는 불가침의 사회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국가를 이용하는 것의 실질적인 이점이 명백해지자,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국가를 변화시켜 왔고 자신들이 국가를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만들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일부 보수주의자들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 및 다른 신자유주의자들과 제휴하여 고도 집산주의 시대 - 복지국가가 미래의 물결일 것처럼 보였던 시대 - 의 혜택을 일부러 줄이고자 했던 이유이다.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따르면, 개인은 자녀의 교육에 대한 비용을 스스로 지불해야 하며, 건강상의 위험이나 실업 또는 장애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20세기 대부분 동안의 도덕적 논쟁에서는 국가의 복지 제공을 확대하고 개인이 삶에서 직면하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승리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재정 긴축에서 앵글로-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질서-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모두가 채무불이행에 대해 취한 입장은 세금이 아닌 지출을 줄이는 것이었고, 그리스와 몇몇 다른 질서-자유주의적 국가에서 이것은 핵심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의 삭감을 의미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4-02-23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시녀쯤으로 여긴다‘는 부분에
씁쓸하게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복지국가라는 북유럽 나라들에
의외로 노숙자가 많다는데 유일하게 핀란드는 그 수를
줄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방관할 경우 사회적 비용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살곳을
마련해주었대요. 물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요. 길에서 폭력,마약,도둑질..등 문제를 일으킬때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들었고 다시 사회로 복귀할 기회도 높였다네요.

우리나라도 극도로 보수적이다보니 복지가 퍼주기라는 인식이 만연한데
세세하게 따져보고 복지에
대한 인식을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알아야할게 너무 많은것 같고요. 덕분에 이부분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정리해볼 기회가 되었네요.
베터님 잘읽었습니다^^

베터라이프 2024-02-24 06:46   좋아요 2 | URL
복지국가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해당 시민들이 사회 민주주의적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복지 자체가 예전 자유주의적 소산임을 인식한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과거 자유주의와 상이한 차이가 있는지
변질된 보수주의 정치와 연계해서 개념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민주주의 정치 기반에서는 말이죠

소위 ‘퍼주기 복지‘와 관련해서도 과거 레이건 행정부 때
당시 신자유주의자들이 저런 식으로 포커스를 맞춰
사회 부조에 대한 혐오감을 시민들에게 안겨줬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구조적으로 정치공학이 관여해 왜곡된 기본 인식들이
제가 알기로는 전통적인 보수정치의 연원은 아님은 분명합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국가에 보수를 자처하는 대다수의
정치 세력들은 기득권 세력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영국도 그런 부분에서 많이 변질 되었죠

항상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