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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 서광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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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주문


세계 철학계에 큰 획을 그은 임마누엘 칸트는 이성과 관련된 형이상학을 당시에 전무했던 고유한 사유체계로서 정립해 그의 이론을 변형해 이론을 받아들인 수많은 사상가들을 고려한다면 참으로 인류 역사에 대단한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의 이 책인 ‘영구 평화론은’ 프랑스 혁명 이후 맺어진 바젤 강화 협약을 배경으로 정치와 철학, 역사가 망라된 칸트의 고유한 사고가 여실히 잘 드러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전세계에 영구적 평화가 가능한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갖고 읽는다면 의외로 칸트의 여럿의 선견지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지 않나 감히 평가해봅니다.

칸트는 여기에서 전쟁이란 각 국가가 폭력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연 상태 (이 경우 적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법률 기간은 없다) 라고 밝힙니다. 전쟁 상태에 이르거나 그것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전제 군주정일 경우에 단지 유희나 재미만으로도 이 전쟁이 발생 할 수 있으며 다만 온전한 공화제여야만 영구적 평화를 비롯한 전쟁이 없는 상황애까지 이를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종의 간기와도 같은 단기 평화에 대해서는 칸트가 따로 언급은 하고 있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국가의 실질적 정체가 다소 불확실하더라도 평화를 이루는 여러가지 조건과 수단들을 잘 구성해서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습니다. 이 책이 나왔던 1796년과 지금의 시점은 꽤 현실의 간극과 체제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칸트가 왜 시대를 앞서는 사상가였는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국가를 구성하고 이를 주도하는 권력 체제에 있어서 이 국가권력을 쥐는 사람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대의성은 커지며, 그 체제는 공화정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칸트는 전제합니다. 이러한 민주제에선 폭력 혁명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그 체제가 유지되고 이러한 것이 각 국가들간의 평화를 위한 선결 조건임을 밝히는데요. 평화와 공화제와의 관계는 오늘날에도 꽤 의미심장합니다. 어쩌면 ‘민주평화론’이 칸트의 이 글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약간 비약일 수도 있지만요. 그리고 뒤이어 국내법, 국제법, 세계 시민법이라 열거하는 이른바 ‘공법’이 국가들간의 행동 논리의 기준과 목적이 되고 개인에게 보편적 의지가 있다는 것을 굳게 인지한다면 세계 시민법에 의거해 많은 이들이 보편적인 우호로 나아갈 것이라는 체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이 보편적 의지와 이기심을 동시에 갖고 있다면 확실히 여기에는 법의 필요성이 요청되는 것이겠죠.

뒤이어 추가조항이과 부록에서는 영구 평화의 보중과 영구 평화를 위한 비밀 조항에서는 정치와 법과 정치와 도덕을 바탕으로 정치와 철학의 측면에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자연 상태의 인간’ , ‘섭리’, ‘공화적 체제’ 등에 평화에 이를 수 있는 배경적 이론을 강화하고자 하는데요. 자연에게 부여받은 인간이 생활하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 자연의 의지가 담긴 섭리, 궁극적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는 평화에 이로운 공화 체제를 결국 국제법에 귀결시키면서 우리의 이해를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더불어 도덕과 정치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지만, 주관적으로는 특유의 이기적 성향으로 인해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고 보고 이것은 또한 양자 사이에 존속할 수 있고, 존속해도 좋다고 칸트는 말합니다. 약간 무의미한 동어반복이라고 느끼실 수도 있는데요. 결국 이것은 정치와 도덕간의 갈등이 인간이 진보하는데 숫돌과 같은 역할로 도움이 되리라고 여기는 칸트의 중요한 의미 부여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와 정략을 구분하고 앞에서 “별다른 저의 없이 공개적으로 표현되고 과감하게 제시된 정치 이론가의 의견이 국가에 어떤 해독을 끼치지 않을까 의심해서도 안된다”라는 언급이 바로 이런 취지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물론 이것은 어떠한 악의적인 해석이 개입되지 않기를 바라는 칸트의 바람이지만 정치가 평화에 이르는 길을 닦을 수 있다는 어떤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결국 이런 영구적 평화의 마지막 길에는 세계 연맹을 비롯한 세계 국가의 필요성이 요청된다고 결론내는데요. 이 이론적 토대들이 현재의 국제 정치에 써먹을 수 있는지는 대충 보더라도 불확실해 보입니다만 막연한 평화주의로서 구호에 이르기보다는 “이성은 인간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한다”고 중요하게 여겼던 칸트의 사상이 철학과 역사, 정치 등을 포함하는 진실로 ‘영구 평화가 달성될 수 있다’고 봤던 것 같습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여러 정치적 불안정성을 내포하며 시작된 1790년대에 칸트는 어쩌면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를 예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측 모두를 파괴하고 일체의 정의마저 파괴할 수 있는 섬멸전은 영구 평화를 한낱 인류의 거대한 묘지속에서나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칸트의 외침은 거대한 인류의 죽음에서만 비로소 평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의미와 함께 바로 우리의 시대가 인류 멸절의 무기로 무장된 시대임을 에둘러 표현한 것 같은 기시감을 안겨준다고 해야할까요. 그가 이 인류 멸절의 무기를 예상했을리는 없지만 지금의 이 세계의 평화는 더할나위 없이 영구적인 것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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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03-22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칸트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는지, 또 있다면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베터라이프 2022-03-22 18: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김민우님 ^^ 일단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용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국가간의 전쟁 상태와 관련해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칸트의 이해가 어느 정도는 배경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내용이 드문드문 기억 날 뿐입니다 ㅠㅠ 일단 제가 귀가해서 다시 한번 일독을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알려드리도록 할게요 ^^ 감사합니다. 그리고 유튜버 헬마우스님이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리뷰 영상을 올린적이 있는데 논란 가능성이 있긴하지만 그냥 가볍게 보셔도 될 듯한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Redman 2022-03-22 19:1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님!! 헬마우스라는 유투버도 있었군요 ㅋㅋ

베터라이프 2022-03-22 20:28   좋아요 0 | URL
참고로 헬마우스라는 분이 정치색이 있으신 분이라 그걸 감안하고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전체 일독을 하셨는데 요약이 되어 있으니 참고만 하세요! 소리가 제법 크니 볼륨 조절도 적당히 하시고요 ^^
 
다시 쓰는 전쟁론 (반양장) - 손자와 클라우제비츠를 넘어
마틴 반 크레벨드 지음, 강창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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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마틴 반 크레벨트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일생의 대부분을 이스라엘에서 보낸 군사사와 전략에 대한 세계적인 석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런던정경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보아 엄밀히 말하면 그를 역사학 학자로 인식해야 하지만 이스라엘을 비롯한 노르웨이와 캐나다 등지에서 국방 조직 자문가로 활동했던 특이한 이력도 갖고 있습니다. 아마도 전쟁사나 군사사의 대부분이 역사와 관련되어 있어서 역사학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전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손자와 클라우제비츠와 같은 소수의 전쟁 전술 이론가들만이 알려져 있는데요. 과거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는 많은 전쟁의 일면들이 전략과 전술만으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게 되었습니다. 총력전과 같은 단계에서 경제와 사회를 빼놓고는 설명이 안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책은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6장인 전략을 다룬 부분까지 종래의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전쟁을 설명하고 있고, 7장인 해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양상의 전쟁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인 마틴 반 크레벨드는 전쟁의 속성에 관해서 ‘전쟁은 국제적 무정부 상태의 산물’이라고 정의합니다. 일찍이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은 전쟁 자체가 고도의 정치적 산물이라고 여겨왔죠. 국제 정치가 본래 무정부주의적인 어떤 틀에 연연하지 않는 혼란스런 상황임을 우리가 인지한다면 크레벨드의 앞선 전쟁에 대한 언급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더불어 글의 마지막 장에서도 ‘전쟁은 악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아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전쟁을 분석하고 분류했지만 이것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불행한 일이라는 인간의 양심이 느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보기에도 ‘전쟁의 원인이 전쟁의 일부가 아니다’라는 저자의 단언에 절로 동의하게 되는데요. 여기의 이 글에서도 많은 부분에 걸쳐 할애되고 있는 전쟁의 동기와 과정 그 결말이 연구적 결과물의 문체로 설명되고 있지만 ‘살육과 무차별적인 강간, 재산피해, 약탈’ 등은 고대의 부족 사회의 소규모 전쟁에서부터 있어왔던 파급물로 계몽주의 시대에 사상가들이 이런 전쟁에 대한 연구를 일정 수준의 틀로 해석하고 분석했지만 이 전쟁의 과정과 결과로 나타나는 인간과 문명의 파괴를 제대로 설명하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장자크 루소가 ‘인간의 기본적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말한 것은 간혹 인간 본연의 이성으로도 포장하기 힘든 최악의 모습을 전쟁 자체가 속성으로서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전략, 전술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전쟁의 일반적인 측면의 언급과 주장을 위해 사용되는 대체적인 수단들은 저자의 전공답게 로마 시대부터 근현대의 여러 전쟁 등을 꽤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많은 전쟁사들의 향연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사실 많은 문명의 역사들이 정복과 지배가 빠질 수는 없어서 그것의 실현 수단으로 애용됐던 전쟁이 제외될 수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책의 제목만 봤을 때는 군사학의 측면에서 한정되고 유일한 개론서로 처음엔 느껴졌지만 크레벨드의 정확한 취지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서적인 약간의 유익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갖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글의 장점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이후 7장부터 논하고 있는 해전부터 인류 역사에서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전쟁의 변화에 대해 단순히 전략의 유무에 대한 한정이 아니라 총력전과 같은 분위기에서 제한적인 성격으로서의 전쟁 유발은 이제 더이상 보기 힘들어졌다는 요지가 중점적인 성격인 것 같습니다. 1차대전에는 다소 미미했지만 2차대전 이후부터는 독일과 일본에 행해진 공군력에 의한 폭격으로 엄청난 민간인 희생과 괴멸적인 파괴를 불러와 상대 적국에 대한 제한적인 군사적 승리 만으로는 전쟁의 추를 바꿀 수 없어 총력전의 시점에서 대량 파괴가 수반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 전쟁을 더이상 정치적 수단으로만 여길 수 없는 의미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전쟁 수행에 대한 요건과 과정, 리더쉽과 같은 꽤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뒤이어 나오는 핵무기 시대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전쟁의 승리에 대한 전통적인 우리의 개념이 우리들의 손에서 멀어지지 않았나 또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아쉽게 이 부분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꼭 국제 사회에서의 전쟁법이 전쟁 자체의 비이성적인 측면을 강제할 수도 있고 그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전쟁 범죄를 행한 국가에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게 만드는 명분이 됨으로 승자와 패자로 갈리는 전쟁의 일반적인 결과론적인 상황은 핵무기 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의미해지지 않았나 싶네요.

저자인 크레벨드도 9개국이 보유한 핵무기가 그 자체로 어떠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없으며, 핵확산 방지에 나서는 비핵보유 국가들의 상당수가 이미 핵보유국들 간에 ‘핵무기적 국제 균형’이 이미 심각하게 불안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국제적 행동을 보이는 것이라고 저는 그리 해석이 되었습니다. 핵보유국 국가들간의 재래식 전쟁이 결국 그 끝에 인류 파멸을 항상 끌어들이려 하고 있는 측면의 절멸 파괴성으로 굳이 2격을 논하지 않더라도 이 ‘불안한 균형의 시대’가 어찌 될지는 학문의 방법으로 유추하기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케네스 월츠와 같은 신현실주의자들이 국제사회에 핵확산이 평화에 이롭다는 주장은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바로 이 점이 그 증거가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저자는 전쟁의 미래는 있는것인가? 라는 자문을 통해 우리 시대에서도 정치/정책의 산물이라고 봐도 무방한 이 전쟁이 거대한 아포칼립스적인 파멸로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국제 정치 행위자들이 이 짧은 시기의 평화를 우습게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에게 있어서 충동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엘리트들이 밝히고 싶지 않은 내심처럼 전쟁 상태에서 다수의 국민들을 익명의 지원병들과 같은 수단으로 취급해 여차하면 전쟁으로 해결하겠다는 매우 편의적인 생각을 우리들이 제어하고 관리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올더스 헉슬리나 조지 오웰이 전망했던 전쟁에 의한 디스토피아를 이렇게 예방할 수 있는 것도 분명 가능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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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칼 폴라니 - 우리 시대의 경제적 고통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와카모리 미도리 지음, 김영주 옮김 / 생각의힘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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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와카모리 미도리는 일본 오사카 시립대학교 경제학 교수로서 칼 폴라니의 사상을 기반으로 인간의 경제활동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글 또한 이러한 저자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현재의 일본 학계의 분위기에서 이러한 글이 일본인 학자에 손에서 쓰여졌다는 것이 다소 놀랄만하게 느껴졌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더 신고전주의적 경제학으로 유명한데요. 밀접한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영향아래 있는 일본의 경제 및 경제학계를 고려하면 개인적으로는 여기의 이 글이 꽤 대단한 성과물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시대의 경제적 고통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라는 이 책의 부제는 칼 폴라니의 사상적 핵심과 관련이 깊은 주제라고 느껴지는데요. 역으로 더 들어가면 “우리의 사회와 삶에 깊이 스며든 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과연 우리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라는 질문의 칼 폴라니의 전체적인 답변이라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저자인 와카모리 미도리 교수는 칼 폴라니의 저작 ‘거대한 전환’을 틀로 삼아 그의 일생의 행적과 맞물려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장 경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점이 선이라 일컫는 전통적인 주장들에 대해 칼 폴라니의 놀라운 해석을 담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일찍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난 후에 애덤 스미스를 필두로 기본적인 시장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와 연계되어 시장에 참여하는 권리에 대한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을 만들었고 도식적으로 시장 본연의 역할을 자유의 입장으로서 침해하면 안된다는 불가분의 정언 명령과 같은 견고한 이론을 이끌었는데요. 산업 혁명 이후 인간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취급하고 이를 가지고 생산 활동의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 초기 산업 사회의 모습이 칼 폴라니의 입을 빌어 그것이 인간에게 유익했는가와 더불어 이 시기부터 인간의 자유는 시장 경제와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얽혀 있었다는 측면으로 다르게 증명이 된 셈입니다. 더욱이 초기 시장 경제주의의 태동에서 멜서스의 이론으로 초래된 ‘생태학에서 비롯된 인간도태론’에 대한 무비판적인 이론적 추가는 길게는 오늘날의 시장 경제에서 무늬만 바뀐채 수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인간의 능력 여부에 따라 도열된 순서로 밑에 있는 계층들은 당연하게 도태되는 것은 자연순리적이라는 은밀한 주장과 이를 복지와 맞물리게 된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복지가 자연적인 인간의 도태를 방해한다”는 멜서스주의적인 주장들과 함께 말이죠.

이렇게 폴라니에 따르면 “시장 경제라는 제도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정신을 구현한다는 것이며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기 조정적 시장에 의해서 사회 생활을 재편하려는 끝없는 욕망”이며, 이러한 자기 조정적 시장이 가능하려면 경제 영역이 정치나 문화와 같은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분리된 영역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중요한 핵심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노동의 실업 문제를 보다 문화적인 것으로 인지했던 폴라니의 해석을 곁들인다면 앞의 이 자기 조정적 시장의 가능성을 믿고 이 자체가 시장 경제체제의 본질이며 시장 경제 영역과 정치 영역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을 새삼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시장 경제가 사회와 정치 영역을 침범해 다른 대안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상황을 조장했다는현실에서 앞의 중요한 전제 조건은 의미심장한 것이죠.

끝내는 이렇게 시장의 허구적 욕망이 본질적으로 세계대공황과 이에 따른 파시즘의 발현을 초래했고, 이후의 금본위제 붕괴 또한 이러한 상황을 가일층 심각하게 만든 것으로 적지 않은 역사적 사례를끄집어 내며 덧붙이고 있습니다. “폴라니가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금본위제의 재건에 의한 시장 사회의 재생이라는 유토피아적 기획의 실패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또한 여기에는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이들의 반자유주의적 음모가 더해졌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것은 시장이 마비되고 경제가 붕괴되는 것은 그 자체의 원인이 ‘반자유주의적 행태’에 있다고 몰아가는 것이며 이것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 뿐만 아니라 매우 많은 곳에서 이론적으로 몰아가고 있는 현상이라 폴라니는 판단합니다. 뒤이어 도래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와 자동적으로 포섭당해 이러한 주장들이 널리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즉, 우리에게 이러한 경제적 고통을 초래하게 된 원인이 이 반대편에 있는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시장에 대한 반자유주의적 행동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시장 자체가 목적과 동일시 되어 국가의 역할을 나날이 제한시키고 인간을 도구화 시켜 시장과 자본 자체에 종속시켜 나타난 결과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세계가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은 반자유주의의 범람이며 이것은 곧 자기 모순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이것이 얼마나 그동안 이들에 의해서 견고하게 이론적으로 확산되었는지에 대한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이러한 시장주의적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경제적 교양과 정치적 교양을 갖춘 새로운 민중 문화”가 필요하며 하이에크가 주장한 민주주의는 결코 그 자체가 완전무결하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개념적 판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우리가 ‘시장의 자기 조정적 기능’을 어떻게 하면 다시 되살릴 수 있는지에 대해 민주주의적이고 정치사회적인 입장에서 다시 고찰해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지 않는가 다시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을 정말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는데요. 원문이 일본어임에도 역자의 노력이 제대로 구현되어 번역의 질이 나무랄데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 책의 뒷쪽에는 제가 좋아하는 홍기빈 선생의 추천사와 이곳 알라딘 북플의 유명한 어떤분의 흥미로운 짧은 글도 보였습니다. 정말로 어쩌면 무분별한 시장주의에 대한 이 책이 그 분의 입을 빌어 ‘강력한 해독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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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아슈카르, 중동을 이야기하다 - 중동 분쟁과 미국 대외정책의 위험한 관계
아브람 노엄 촘스키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사계절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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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 지성계에 더이상 어떤 말이 필요없는 노엄 촘스키 MIT 교수와 레바논계 프랑스 지식인으로 반전운동가이자 유럽에서 손꼽히는 중동 정세 전문가인 질베르 아슈카르가 거의 종합적이고 근원적인 측면에서 현재의 중동 문제에 관한 대담집을 지난 2009년 사계절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을 했습니다. 주로 촘스키의 글을 맡아 번역했던 강주헌씨가 번역을 맡았죠.

전세계의 화약고라 불리우는 이 중동의 문제는 매우 복합적인 양상의 원인이 있는데요. 2차대전 이후 연합국에 의해 유대인들의 정착이 이뤄진 이스라엘의 건국과 심각한 내부 갈등 요인을 힘으로 누르고 중동의 맹주라고 자위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미국의 묵인 등이 이슬람 근본주의를 주창하는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 조직이 자생하여 왜곡된 정치체제, 종교적 폐쇄성, 외세의 개입, 빈번하게 촉발되는 내전 등이 현재의 중동을 초래한 대체적인 원인일 것입니다. 이에 아슈카르는 테러와 관련된 주제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사회 조직과 사회 안정망이 와해된 것”이 신자유주의와 테러사이의 본질이라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판단과 동일합니다. 촘스키는 한술 더 떠서 “미국이 전세계에 어필하고 강조하는 민주주의란 친미적이고 미국에 협조하는 민주주의 체제”라고 밝히며 그렇지 않은 국가들은 “미국의 정부적 테러”에 의해 공격당했다면서 과거 레이건 행정부가 일으킨 이란-콘트라 사건의 니카라과나 콜롬비아 등과 같은 합법적 선거로 선출된 민주주의 정부를 무너뜨리는데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의 입김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미국이 현재의 중동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지원에 인색한 것은 만약 이들 지역에서 선거를 통한 정부가 탄생한다면 거의 반미 정부가 될 것이므로 세계 민주주의의 맏형이라 불리우는 미국이 이를 반기지 않는 것은 정말 한편의 희극과 같은 상황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아슈카르는 “워싱턴이 원하는 결과는 미국의 지배하에 있지만 민주주의란 얼굴을 가진 정부”라고 일침하는데요. 이것을 이념적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현재까지 CIA가 그런일을 해왔고 민주주의란 얼굴을 표명하지만 국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국가에 비민주적인 일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촘스키의 또 한가지 통찰력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 1970년대 까지도 미국은 국내 소비를 위한 중동의 석유 수입이 필요치 않았지만, 중동의 원유 자원을 장악하고 관리함으로써 서유럽과 일본에 석유를 보냄으로써 이들 서구 국가들에 대한 일종의 경제적 지렛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분석하는데요. 이런 것은 매우 명쾌하다고 생각합니다. 9.11 테러 이후 이라크 전에 뛰어든 것도 바로 이런 연유와 비슷한데요. 즉, 전세계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과 영향력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증거를 특히 서유럽과 일본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현재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와 봉쇄에 대해 서유럽과 일본은 말을 잘 듣지만, 중국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아 많은 미국 관리들은 이 때문에 중국을 매우 싫어한다고 촘스키는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에 관한 부분에서도 얼마전에 국내에도 출간되었던 존 미어샤이머의 ‘이스라엘 로비’에서와 같은 미국 의회에 대한 유대인 단체들의 로비 공세가 중동 문제를 악화시키는 진정한 요인이 아니라 미국 내에 지식인들,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조직적으로 친유대적인 발언과 지원을 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촘스키는 덧붙이고 있습니다. 미국 내부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거의 이스라엘은 미국의 ‘분국’과 마찬가지로 여기게 만들고, 사실상 중동의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는 주변의 중동 국가들에게 훌륭한 지렛대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미국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문제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와는 달리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의 문제가 큰 변수로 남아있는데, 이란은 그들의 지리적 위치와 외부 압력으로 인해 매우 당연하게도 핵무기를 개발할 이유를 갖고 있었다고 촘스키는 단언하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이 글의 개정판 후기에서 과거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 공격 가능성에 대한 입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은 대체로 이란 공격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매우 찬성하고 있어서 미국의 행정부가 이스라엘의 이러한 요구를 잘 관리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대입해 볼 수 있는 문제겠죠. 물론 촘스키도 이란과 같은 나라는 함부로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글에서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유심히 지켜봐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격을 받으면서 핵무기 사용을 심히 고려했다는 것을 끄집어내며, 자국의 안보와 관련된 문제에서 이란도 이스라엘과 같은 결정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핵무기가 아니더라도 중동을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할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보는 것은 얼마나 순진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타협하지 않는 민족주의와 만나서 시리아의 내전을 통해 IS를 만들었고 친미 국가로 다시 태어난 이라크에서도 심각한 내부 갈등을 초래했습니다. 그너머 이란은 더 위험한 국가이고 예맨은 현재 내전에 돌입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리전을 치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판단해보면 아마도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는 이러한 중동의 분열과 혼란을 유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합법적이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안정적인 체제를 지역의 각 국가들을 유도할 수도 있었음에도 자신들의 민주주의에 반하는 일들을 국익이라는 미명하에 방치했습니다. 아프리카에 왕처럼 군림하려고 하는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중동에서도 미국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이익을 보존하는데만 급급했지 별다른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정의롭고 합법적인 국가가 항상 정의로울 수 없다’는 처칠의 예언과 들어맞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전체적으로 촘스키와 아슈카르의 이 대담집은 중동의 미국 정책에 대한 아포칼립스적 입장을 담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을정도로 중동의 문제는 매우 극명해보입니다. 저는 이들의 문제를 그들의 믿고 있는 이슬람의 문제로 몰고 가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바라고 있고 얼마전의 이집트와 리비아에서는 이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어떠한지 잘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딱히 방법이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오늘날에 중동이 처한 거의 모든 정치와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어쩌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남북문제 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아프지만 혹여 중동 이슈에 관심이 있었던 분들이라면 ‘탁월한 지식인’ 촘스키 선생의 가차없는 분석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세계에 과거 버틀란드 러셀에 이어 촘스키라는 지식인이 존재하는 것은 뭔가 빗대어 대단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권력에 경도된 수많은 지식인들이 있는 상황에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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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국제질서론
사카이 데쓰야 지음, 장인성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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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에서 정치외교사와 국제관계 및 외교론의 영향력 있는 학자이자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사카이 데스야 교수의 이 책은 지난 2007년 동일한 제목으로 일본에서 출간된 것을 2010년 연암서가에서 서울대 외교학과 장인성 교수의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인데요. 특히 저자는 한국 학계에서도 꽤 알려져 있는 인물로 이 책이 번역 출간되었던 당시에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대 일본은 우리에게 치유할 수 없는 식민지배를 강요했던 이웃 나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물론 위의 표현은 상당히 순화해서 언급한 것이고 사실상 오늘날까지의 한일 관계의 모든 불협화음과 문제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저는 일본에서 권위있는 국제정치학계의 학자가 자신의 근대과 외교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는 꽤 중요한 부분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일정 부분 통사론적 입장인 이 책의 성격으로 봤을 때, 학자인 저자가 자국의 국체라고 여겨지는 일왕과 관련된 민감한 주제를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꽤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이므로 이를 감안하고 책을 일독하게 되었는데요. 미리 결론을 짓는다면 전체적으로도 꽤 유익한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근대 일본에서 자국의 국제 정치적 기조와 이념은 국제주의와 제국주의가 거의 한몸과 같았다는 저자의 분석은 꽤 설득적이었습니다. 일왕의 실질적인 일본 내 권력 복귀였던 메이지 체제의 시작과 동시에 정치권과 군부의 이념적 잣대였던 소위 ‘천황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시도된 것이며, 일부 하급 무사들과 그들을 추종하던 무리들을 미화시키는 여러 작업들이 있어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막부체제가 종식되고 개화가 이뤄지는 시점의 일왕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동아시아 정치 무대에서 큰 변곡점이라 할 만합니다. 물론 부정적인 입장에서 말이죠. 동시에 오늘날 일본의 정치외교학에서 한스 모겐소와 E. H. 카 등의 현실주의적 이론가들이 외면을 받고 있는것도 국제정치와 외교 자체가 홉스가 말한대로 무정부적 상태의 법의 역할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국가들간의 헤게모니 다툼이라면 앞의 두 거장들에게서 일본 국제 정치의 정당성이나 이론적 기초와 관련된 일왕제와 과거 ‘다이쇼 천황’이라 알려진 히로히토 일왕의 제국중심주의를 설명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즉, 서론과 종장을 포함한 사카이 데쓰야의 7편의 논문은 앞서 설명드린 어떻게 일본의 제국주의가 국제주의가 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및 정치적 분석일텐데요. 흔히 매번 나오게 되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과 허구에 불과했던 동아협동론 내지는 대동아공영론과 만주사변과 같은 불법적인 일본의 외교군사적 전술에 대해 같은 맥락으로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이상주의적 국제 정치에 경도되어 있던 많은 일본 지식인들이 만주사변과 만주괴뢰국에 관련된 태도에 있어서는 일본의 안보를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이었다는 식의 입장 선회에 저자 역시 일정부분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작게는 동북아 지역내에서 동북아협동론 체제의 주도국이 되어야한다는 입장 또한 마찬가지인데요. 그리고 일본 정치외교에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이 아주 잠시 미미한 영향을 끼친것을 제외하면 이러한 일왕중심의 일본 주도의 제국주의론이 이론과 현실적 배경에서 근대 일본의 중심이었다는 정치역사적 배경을 저자가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 꽤 독자들 입장에서는 꽤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많은 일본 지식인들의 태도와 비슷한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다소 한 발 물러선 작위적인 객관적 입장의 서술과 표명을 학자의 양심이라 여기는 식의 분위기와 같은 글은 분명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국 과거 천황중심의 국가 통치 체제가 결론적으로 주권국민국가에 대한 노골적인 천대와 비판으로 귀결되고 많은 일본 정치인들이 같은 동맹인 독일의 나치 민족주의를 혐오하면서도 그들 자체도 그러와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을 애써 무시해왔다는 점에서 얼마나 일왕 중심 체제에 과도하고 무리한 정당성을 기울여 왔는지는 관동대지진이나 난징대학살 등과 같은 거의 인종 청소라 봐도 무방한 역사적 사건의 외면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자신들이 영국 및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라고 자부하면서도 실체로는 그 후진성과 폭력적 근성이 자리하고 있는 왜곡주의적 국가라는 것을 애써 인정하지 않은 것은 일본의 국가 지배 체제가 얼마나 허위에 기초하고 있는지 증명하는 것이겠죠. 이와 같은 입장에서도 오늘날의 ‘식민정책론’의 연구의 속성이 그러하고 “식민 정책학은 극히 국가주의적 이론 장치로 굳혀진 학문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이미 지적했듯이 이는 식민 정책학의 실상에서 벗어난 견해다”라는 저자의 판단은 약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과거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필요불가결한 이론적 근거를 위한 수단으로 ‘식민정책론’을 인용하고 있고 여기에 ‘역사 수정주의’가 맞물려 주변 국가들과의 이러한 파국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어 왔던 점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본질적인 의미에서 사카이 데쓰야 교수의 이 입장은 단순한 과거 정치역사적 통설의 근거한 제한적인 해석일텐데요. 조금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저자 역시 무비판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입을 빌어 식민정책론에 대한 완곡한 평가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것과 같은 부분말입니다. 이 5장의 뒤에서 식민지 없는 식민지정책과 자유주의적 기조가 덧입혀진 1920년대 이전의 일본의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보아 이 양자적 입장에 대한 분리를 저자는 시도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아직도 저로서는 판단하기 어렵군요.

지금까지도 “우리는 미국에게 진것이지 아시아 국가들에게 패퇴한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것과 패배주의적 역사를 극복해야 된다는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 주변의 국가들이 너무나 변함없이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고 내정간섭이다 라고 말하는 등의 근거는 결국에는 일왕의 책임을 끝까지 묻지 못한 1945년 당시의 정치 역학 구조에 비롯된 것이고 그것의 여파가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의 의식 구조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것으로 결국 일본 정치의 근간이며 핵심이므로 이것을 일본 정치인들 자신이 보편적인 입장으로 선회하기란 매우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물론 이 해석은 일본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매우 뿌리깊은 본질적인 국가 정체성의 문제로 결부시키는 핵심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저는 한국인들이 일본 왕에 대해 일왕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근거는 과거 역사에서 삼한시대의 백제와 고구려 등은 ‘내제외왕’ 즉 국내에는 왕이 황제로 자임하고 국외에는 왕으로 대신했는데요. 물론 매번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더불어 당시 백제는 당나라 황제를 당왕이라고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다 당태종을 이세민이라 지칭하기도 했죠. 즉 여기서 요점은 자국인들이 황제든 천황이든 마음대로 부르는 것은 관여치 않겠으나 동아시아인들의 입장에서 일본 왕을 ‘천x’이라 부르라고 직접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적 입장에서 천[하늘]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굳이 우리가 천뭐시기로 부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식민지배한 역사를 제외하더라도 대한제국 시절의 우리의 고종황제를 황제로 여기지 않는 일본의 역사학계의 입장을 봤을때도 그러하고 결국 우리는 한국인이지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왕이 아주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국외에서 자신들의 전제 군주를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격하라고 하는데 이것이 왜 격하의 표현인지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중국과 우리 그리고 동남아의 국민들까지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보편적이라고 봐야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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