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5
버지니어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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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런던 사우스 켄싱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지원에 힘입어 1900년 경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9살 경에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던 울프에게 많은 여성들과 낭만적인 관계를 맺으며 교류하고, 또한 사회에서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갖기도 했는데요. 그녀는 작금의 많은 여성주의 운동가들로부터 '여성주의 작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연유에,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대 명망있는 사람들을 모아 만든 블룸스버리 그룹이 당시 영국 문학에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이 울프의 문학적 기여와 더불어, 이 점이 오늘날 그녀가 크게 존중 받는 이유이기도 할 텐데요. 그런 울프와 유사하게 손수 자유주의 (혹은 자유지상주의) 그룹을 만든 에인 랜드가 오늘날 네오콘을 비롯한 보수주의 정치가들에게 숭배를 받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시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성계를 선도한 소수의 여성이 있었다는 산증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제가 에인 랜드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울프는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의식의 흐름'이라는 서사적 기법으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현재의 이 의식의 흐름은 간혹 난삽한 서술로 이해되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 댈러웨이라는 작품도 그렇지만, 서술 상의 논리나 근거가 뒷받침되고 극 전반을 일관되게 끌고 나가는 것이 먼저 전제 되어야 하는 게 기본적인 법칙입니다. 이는 마구잡이식 서사가 부여된 글쓰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큰 명성에도 불구하고 생애 말에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점은 버지니아 울프라는 개인에게 있어서 매우 불행한 일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그 와중에 직접 경험한 세계 제2차 대전의 아비규환과 지인들의 불행은 그녀를 삶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20세기가 낳은 가장 중요한 작가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울프의 여러 작품들은 시대를 관통하는 아픔의 주제와 그런 맥락들이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아가게끔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1925년 처음 출간되었고, 뒤에 역자가 밝히는 대로 1965년판의 원서를 기반으로 1992년의 Macmillan 판의 주석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번역본의 출간은 2019년 5월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모두가 책 제목으로 인지하고 있다시피 이 소설의 주된 인물이자 주인공은 댈러웨이 부인 즉, 클러리서 댈러웨이입니다. 댈러웨이 부인을 중심으로 그녀와 관계된 인물들의 풍부한 서사와 관계 전반의 관련성을 답보하면서 극의 중요 축인 참전 용사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의 죽음이 연관되어 진행됩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역자의 주를 통해 알게 된 영국 귀족 부유층의 파티가 안주인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고, 반대로 중요한 바깥 일을 남자들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극 전반에서 강조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클러리서가 간여한 댈러웨이 가家의 파티에서 영국 수상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자신의 신분에 대한 만족감과 이들 소수의 계급이 서로를 충족시켜 주는 속물적 욕구가 거의 극대화 되고 있었는데요. 약간 미심쩍었지만 이 델러웨이 부인에 대한 이 속물적 근성이 극 후반부에서야 드러나는 부분은 서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더불어, 극의 전환점으로 '돌아온 탕아'라고 볼 수 있는 피터 월쉬와 그녀와의 지난 관계를 약간 애매하게 묘사하는 가운데, 그녀가 남편인 리처드 댈러웨이와의 결혼 생활에 대체로 만족하고 행복해 하고 있다는 서술은 그것이 비록 서사에서 약간의 반전이라 할지라도 '여성의 제한적인 활동'과 이어지는 시대의 한계에 잘 맞물려 인식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울프가 언급하고 있는 영국 제국주의로서의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 역시 그러한 모순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한 손의 칼과 다른 한 손에 셰익스피어의 책을 들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실현한 이런 영국의 이중적인 태도는 버지니아 울프도 피해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1900년대의 영국 런던의 곳곳을 사진으로 생생히 보여주는 듯한 작가의 세심한 묘사는 인물의 서사와 맞닿아, 독자들이 당시 시대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문화적 금기라든지 영국 특유의 귀족 문화에 대해 마치 궁정 소설처럼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는데요. 그리고 당시 영국 제국주의적 영향을 받은 소수 부유층의 문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고, 이들과 같은 부유층의 문화가 대체로 각각의 '교양'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이는 극 초반에 사람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다고 읽히는 댈러웨이 부인이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스스로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은 뭔가 역설적이게 느껴졌는데요. 평범하지만 솔직한 남편 리처드와의 결혼 생활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뿌연 안개에 있는 것처럼 모호하게 그려지고, 그녀와 피터 월쉬와의 과거 얽혔던 감정들이 현재 리처드와의 결혼 생활과 상반된 관점으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더욱이 남편인 리처드와 피터가 절친이라는 점에서 후반부에 어떤 반전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보기도 했는데요. 무엇보다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걸 좋아하는 월쉬에게 일반적인 교양과는 아주 거리가 있어 보이는'주머니 칼'을 장난감처럼 만지작 거리는 버릇은 마치 댈러웨이 부인 스스로가 '성性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신의 결혼 생활과 동시에 부부간의 열정이 전무한 이들 부부의 상황과 묘하게 배치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다소간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피터 월쉬에와 과거 댈러웨이 부인이 (이에 대한 서사가 다소 부족함에도) 젊은 날의 열정으로 얽힌 기억은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중요한 인물로 그려지는 샐리 시튼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샐리는 클러리서의 잘 드러나지 않는 속물적 면모를 일찍이 간파하고, 월쉬와 클러리서의 관계가 진정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임을 예측한 바가 있는데요. 또한 지금 언급한 샐리 시튼과 뒤이어 등장하는 도리스 킬먼은 그 시대에 소수의 여자들만 갖고 있었다는 학위 소유자로서, 킬먼이 클러리서의 딸 엘리자베스와 얽히면서 단순히 그녀에 대한 댈러웨이 부인의 못마땅한 심정을 넘어, 귀부인인 댈러웨이 부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요소로 깊이 작용하게 됩니다.

또 다른 서사의 주인공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자신과 밀접하게 가까웠던 에반스가 이탈리아에서 희생을 당하자 삶의 의미를 거의 상실하고, 거의 충동적으로 자신의 아내인 루크레이지아에게 청혼을 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인 레지아는 자신의 남편을 전쟁 영웅으로 이해하고 있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심각한 전쟁 후유증을 보이고 있는 셉티머스에게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삶이 스스로에게 전혀 의미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리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어쩌면 반쯤 도피처로 택한 이 결혼 생활과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등장하여 괴롭히는 상사인 에반스의 환영은 당시의 의사들조차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온전한 삶을 위한 투쟁은 그가 싸웠던 치열한 전쟁에서 만큼이나 중요한 과업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여실히 그러한 투쟁심을 그 전쟁 한 가운데서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점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극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이 영국 제국주의를 위해 전장에서 싸웠던 간에 아니면 개인의 사명감을 위해 싸웠던 간에 예나 지금이나 희생된 젊은이들에 대한 저만치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감상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였는데요. 영국의 성세를 포장하는 듯한 퍼레이드만이 댈러웨이 부인을 비롯한 많은 영국인들에게 얄팍한 의미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은 그것 자체로 모순으로 읽힙니다. 이처럼 임박한 그의 죽음과 부유층의 안사람이 주도하는 파티가 극단적인 삶과 죽음이라는 매개로 연결되고, 더 나아가 파티에서 극적으로 극화되기에 이릅니다. 울프의 이 작품이 보여주는 씁쓸한 뒷맛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과 댈러웨이 부인을 포함해, 각자가 자신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은 부수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도리스 킬먼을 통해 현실의 문제가 제대로 드러난다고 여겨지는데요. 도리스 킬먼의 억눌린 자의식은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깊은 감수성의 여성들을 대변하면서 노골적인 계급주의에 대한 폭로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댈러웨이 부인이 오십 줄이 넘어서 느끼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이 죽음의 실체라는 공포에 직면하여 진정으로 어떤 깨달음의 체화가 되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 그럼에도 당시 상류층이 주도하는 영국 사회의 일면과 이들이 사회 전반에서 괴리 되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데요. 물론 개인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신중한 결혼이 주인공인 클러리서와 피터의 '한때의 얽힘'을 통해 극명하게 대비되기도 합니다만 높은 교육을 통해 시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여성이 현실의 가혹한 경제적 궁핍에서 좌절 당하고, 오히려 사랑과 열정이 크게 작용하지 않은 결혼을 선택한 주인공을 극의 중심으로 삼아, 이러한 경제적 선택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울프는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문화적 금기에 별로 개의치 않고 진정한 탕아 기질을 갖고 있는 월쉬와 대체로 상반된 지점에 놓여 있는 리처드 댈러웨이와의 극명한 대비는 '얄팍한 교양의 부유층 부인'의 악어 눈물 만큼의 회한을 중심으로 맞물려, 그 서사는 꽤 치밀하여 어느 정도는 논리적 설득력과 소설적 과장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각 인물 간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묘사는 꽤 흥미진진하기도 했는데요. 전체적으로 왜 이 작품이 울프의 대표적 소설로 자리매김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가 삶을 그렇게 사랑하는지, 왜 삶을 그렇게 보는지, 구성하고, 하나를 중심으로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고 그리고 매순간 새롭게 삶을 창조하는지 말이야.

만약에 늙은 아일랜드 여인의 충성심을 위축시키는 순경의 눈을 보지만 않았더라면, 맥주 한 단지 값어치의 장미 다발을 세인트 제임스 거리로 던졌으리라.

바로 그날 밤 파티를 여는 여인의 가냘퍼 보이는 핑크빛 도는 얼굴이 보였다. 클러리서 댈러웨이, 그녀 자신의 모습이었다.

지금 그들은 육체적 쾌락이나 나날의 삶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핀즈베리 보도에서 텅 빈 무덤에 이르기까지 들고 가는 화환 때문에 엄숙한 모습이었다.

위안, 구원을 향한 열망, 이 불행한 난쟁이 같은 존재 밖에 어떤 것, 이 연약하고 추하고, 비겁한 남자 여자들 밖 너머에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클러리서의 친구들, 친분이 오래된 모든 패거리들 -휘트브레드, 킨덜리, 컨닝햄, 킨로크존스 가족들 - 중 아마도 샐리가 최고였다.

이제 그녀는 지배와 권세를 누리려 그렇게 번득이는 남편의 눈에 켜진 열망을 재빨리 만족시키느라 속박하고, 강압하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도려냈으며, 주춤거리다, 몰래 엿보곤 했다.

그것들이 무엇보다도 좋은 혈통을 갖지 못해ㅐ 생긴 이런 비사회적인 충동들을 저 아래 서레이에서 억제하는 것을 맡으리라고 그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브래드쇼 부부가 그녀의 파티에 와서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이유가 뭐람? 한 젊은 청년이 자살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의 파티에 와서 그 얘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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