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심리학 부글 클래식 boogle Classics
귀스타브 르 봉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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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논저 '군중심리'의 저자 귀스타브 르 봉은 명확한 개념이 잡히지 않았던 사회학과 심리학으로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던 지식인었습니다. 그런 자신에게 큰 명성을 얻게 해준 '군중심리'가 출판되기 전에, '국민들의 진화의 심리학적 법칙 Les Lois Psychologiques de l'Évolution des Peuples'이라는 제목의 민족에 대한 해석을 담은 글을 1894년에 출간하게 되는데요. 국문 제목으로 '국민의 심리학'인 이 책이 앞선 글을 번역한 것이 되겠습니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다른 글들에서 '민족의 심리학'이라고 지칭되는 글이 바로 이 글로 여겨집니다. 최근에 군중심리를 다시 일독하고나서 정리되지 않는 미진한 부분들이 다소 머릿속에 남아 있었는데요. 다행히 이 '국민의 심리학'을 접하고 나서, 그에 대한 의문이 정리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Les Lois Psychologiques de l'Évolution des Peuples'로 189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 번역된 판은 아마도 영역본을 번역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역자가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나오지 않아 영역본으로 추정해 보게 되었습니다. 국내 번역본 출판은 2019년 11월로 나오는데 이것도 출판 날짜 항목란에 따로 스티커를 붙여놓은 것이라 서지정보가 정확한 것인지는 마찬가지로 추정하기 어려웠습니다.

본래 의학을 전공한 학자가 문화와 문명 기록에 관심을 갖고 여기에 심리학적인 논증까지 동원해 만든 결과물이 바로 이 글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분명히 당시 사상적 조류에 걸맞게 르 봉의 이 책 역시 '진화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 본인은 민족의 문명적 특성을 고려하며, 그것을 심리학적 분석이라 강조했지만 원시적인 민족부터 열등한 민족, 평균적인 민족, 우등한 민족 즉, 세계의 대표적인 민족들을 4개의 분류로 나눈 것은 내용상의 논증으로 볼 때, 심리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진화론적인 입장에 더 가깝지 않나 개인적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더욱이 그의 다른 논저인 '전쟁의 심리학'에서 "전통적인 심리학이 인간의 영혼까지 다룰 수 있었다"는 진술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한 르 봉의 믿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뿐만 아니라, 민족적 특질에 의해 규명되고 있는 국민성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든 현재의 양태로든 국가내의 다수의 민족들이 융합되면서 단일화가 이루어질 경우, 민족의 고유한 정신이 '혼혈화'에 의해 사실상 종말을 고할 수 있다고 르 봉은 논증하고 있었습니다. 민족의 이런 고유한 정신은 오래도록 조상들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서, 무엇보다 이처럼 어느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차별화시키는 것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바로 이것을 증명하는 예로써, 르 봉은 영국의 앵글로 색슨 민족을 제시하고 있었는데요. 우선 이 혼혈화에 따른 '고유한 민족 정신의 일종의 해체와 재구성'에 대해 언급해 보자면, 민족은 크게 3가지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조상들의 영향과 부모의 영향 및 환경의 영향입니다. 오늘날 규명된 프랑스 민족의 복잡한 유전적 인종 구성을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차치한다면 여기서 르 봉은 프랑스인들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적 구분을 '라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라틴의 민족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프랑스인들은 스스로 고개를 숙이며 '지배당하기를 원하며' 이들이 전유럽에 파급을 끼친 혁명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혁명적 기질이 나폴레옹에 의해 잦아들었고, 그는 이것을 1부 2장에서, "나폴레옹의 온순한 노예들"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영국의 앵글로 색슨은 앞선 증명으로, "민족의 심리적 등급"이라는 기반하에, 3부 1장에서, "이런 상태는 라틴계 민족의 이상과 정반대이다. 영국에서 항만과 운하, 철도, 교육 시설 등은 언제나 사적인 개인들의 주도로 창조되고 유지될 것이며, 그런 분야를 국가가 주도하고 나서는 예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영국엔 혁명도 없고 헌법도 없다"고 이처럼 비교 분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시는 '전쟁의 심리학'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데요. 영국의 앵글로 색슨은 개인의 자유,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자유를 추구하지만 독일의 게르만 인들은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미덕을 중요시하게 생각한다며, 이는 더 나아가 1차 대전 당시 독일이 전쟁을 결정하게 된 주요한 요인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흔히 오늘날에도 유럽 여행에 나서는 많은 한국 여행객들이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 '프랑스인들은 기질적으로 스페인 사람들과 많은 차이가 난다.','영국인들도 민족성이라는 측면에서 프랑스인들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인정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인식론이 현대에 직접적으로 르 봉에게서 이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제국주의 시기에 영국이 자신들의 지배하에 있는 피지배민족의 열등성을 규명하기 위해 벌였던 학문적 작업과 자신들 말고 다른 인종에 대한 극명한 경멸과 구분은 이러한 민족적 구별성을 전제로 한 작업들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의 '전쟁의 심리학'에서도 독일인들이 언론과 지식인들의 주장들을 터무니 없이 신뢰하고 있었고, 이는 정부의 명령에 수많은 독일인들이 순종하게 된 연유라고 지목되고 있는데요. 제가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18세기 중반 무렵의 진화론이 이처럼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알게모르게 편협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짐작되며, 르 봉이 스스로 꽤 새로운 개념으로 여기고 있는 이 '우등한 문명', '열등한 문명'의 비교가 단순히 군사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우위만을 받들어, 그렇지 않은 열등한 민족과 문명이 지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제국주의적 시각과 다름 없이 기술된 것은 꽤 유감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선 문단들에서 제가 언급을 했지만, 르 봉은 글 초입에서 소위 유럽의 민족들을 분리해 이해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 이유로 자신들의 오래된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기질'의 특수성을 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유전학 형질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 지속적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식의 이해가 생각나기도 하는데요. 이는 우리의 피속에서는 조상들의 경험과 영향이 끼치고 있다는 일종의 '진화심리학적인 결정론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많은 연구자들이 각 민족의 유전적 특성에 집중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 연유에는 이것을 순수 과학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열망도 분명 있겠는데요. 르 봉에게는 영국의 앵글로 색슨의 사례처럼 그 고유한 민족적 등급 내지는 민족적 특성을 유지하는 것이 그 개별 문명의 고유성 유지를 넘어, 결과론에 입각해서도 꽤 중요하다는 점을 논증을 통해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앵글로 색슨의 신(新) 국가인 미국이 제도 자체를 답습하기에 바빴던 남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기에 이릅니다. 르 봉은 바로 이 부분에서 영국이 미국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여기는 듯했는데요. 물론 이 글에서 비교 사례로서 분석되는 주된 대상은 중국인과 영국인들이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르 봉이 역사적인 민족의 문명의 특성을 거론하면서 몽고인과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을 평균에 속하는 민족들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제가 무조건적으로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유럽의 백인 우월적인 시각이 여실히 보여지는 점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계몽주의에 있어서 자유의 대상이 유럽 백인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는 지난 역사의 사실과 유사한 부분일텐데요. 더욱이 군사적 발전과 팽창에 힘을 기울였던 과거 로마 제국의 사례를 문명화의 일반적 관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에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국민의 특별한 기질로서 탄생했던 것이, 앵글로 색슨의 영향하에 있던 미국이라고 보는 르 봉의 3부 2장의 해석은 다음에 나오는 '자유'와 관련해 특별히 제 이목을 끌었습니다. "영국인들이 그 지역을 세계의 강국들 반열로 끌어올리는 데는 1세기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는데요. "오직 앵글로 색슨족만이 독립과 에너지가 넘치는 이런 분위기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마찬가지로 첨언하고, "미국이라는 위대한 공화국은 틀림없이 자유의 땅"이라고 규정하면서, "라틴계의 두 괴물인 평등과 형제애의 땅은 절대로 아니다"라고 단언하기에 이릅니다. 얼마간 인용되었던, 앵글로 색슨의 개인에 대한 관념과 아직 잉태되지 않은 개인주의에 있어 영국인들은 르 봉이 보기에 매우 적합해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혁명을 겪지 않은 영국의 그늘이 자유를 잉태하고, 피비린내는 혁명을 거친 프랑스가 평등과 형제애 혹은 박애로 대비되는 것은 꽤 신선한 시각이었습니다. 물론 이후의 미국인들이 민족의 특별한 기질이라고 할 수 있는 '도덕성'과는 상당한 거리가 먼 역사를 만들어내지만, 이 '도덕성의 부재'를 그 시점에서 남미 국가들의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응하고 있으니, 만약 여기서 조금 더 나간다면 거의 인종주의적 시각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 라틴계의 공화주의자들을 저대로 놔둔다면 순수한 야만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는 단언했는데요. 이 지역 대부분이 근현대 시기에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었기에, 르 봉의 저런 예견들을 전부 억측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엘리트 계층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나, 꽤 높은 교육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지식인이나 반대로 일반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르 봉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분명히 입장의 차이가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어제 서평을 쓴 군중에 대한 그의 해석도, 다음 날부터 읽기 시작한 이 민족과 국민에 대한 진화심리학적인 연원도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른 시대상을 고려하여 읽는 것이 독자들에게 필요하다 여겨졌습니다.   

르 봉은 그의 고유한 민족 개념에서 그들 가운데 얼마나 특출난 지성의 소유자가 태어나느냐에 따라 우등과 열등의 경계를 결정하는 것으로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마치 특출난 개인의 출현이 문명적 발전에 중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1부 4장에서, "지적인 관점에서 보면, 민족의 가치는 문명의 과학적, 문학적, 산업적 발달을 이루는 원동력인 작은 엘리트 집단에 의존한다"는 점은 앞선 진술과 유사한 맥락이라 파악됩니다. 이는 사실 군중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의 요체를 언급하기 이전에, 르 봉에게 사회에 대한 통치의 권위를 가진 그룹은 소수의 소위 능력있는 자들로 지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학의 차원에서 민족별로 뇌의 크기를 비교하는 진술도 그렇고, 다수들 가운데서 소수의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민족 자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연결되기까지 하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그는 기질 차원에서 여성과 남성의 분명한 차이와 그러한 맥락을 거의 변할 수 없는 당위의 차원으로 여기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시대가 여성들에 대해, 기본적인 인식이 교육을 받았다는 지식인들조차 그들의 인식이 계몽의 언저리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생각됩니다.. 뭐 여성의 인식도 그러하거니와, 전반적으로 르 봉의 이 글에서 민족에 대한 개념이 오늘날의 다원주의적 인식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인식을 애써 배제시킨다 하더라도 의문이 드는 것은 과연 르 봉이 말하는 18세기 민주주의 이상의 발전된 민주주의는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진정 궁금했습니다. 또한, 군주제이든 대통령을 선출하는 공화제이든 권력 지배적인 모습일 뿐이라는 회의적 시각과 보편적인 자유에 대해, 르 봉의 인식이 크게 확장되지 않은 느낌도 받았는데요. 당시 자신이 살던 시대가 사상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시대이긴 하지만 이러한 시대가 영원히 지속하기란 어렵다고 인정하고 있었는데요. 이 부분과 더불어 앞선 초창기 자본주의 시기에 있어서 노동자들이 과거의 순수한 명장들처럼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술이나, 개인 자유에 대한 사실상의 회의적인 시각, 그러니까 시대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해석의 단락들이 꽤 많이 보였는데요. 어차피 그 정치체제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 권력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예시들은 무정부주의에 대한 스스로의 비판을 강화했으면서도 과연 그의 합당한 정치적 인식을 어디에 두고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는지 아직도 의문이 듭니다. 단순히 해부학의 대가로서 인간의 철학적 본성이 아니라 그저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관점에 이 민족을 다룬 것이라면 일견 그 이해의 상관성이 짐작됩니다. 그저 그것으로 국한되었다면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추론의 동물이라면 이와 같은 민족에 대한 편협적인 이해가 우리에게 어떠한 본질적 이해를 제시할 수 있는지 마찬가지로 르 봉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분명 그는 급진적인 혁명에 대해선 부정적인 시각과 함께 국가와 국민의 관계, 특히 양자가 어떠한 관계인지에 대해선 앞선 '군중심리'에서도 일견 느꼈지만, 선출된 권력에 대한 회의와 개인이 사실상 국가의 소산이라는 것과 동시에 국가의 한 부분임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개인이 기본이 된 자유주의적 맥락이 모두 사라져 버린 인상을 받았는데요. 글의 말미에서 그가 말하는 문명화의 진정한 의미 역시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르 봉의 글을 왜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선동가들이 탐독하게 되었는지 이 또한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은 각 민족의 제도와 예술, 신앙, 정치적 격변의 뒤에 그 민족의 진화를 결정하는 어떤 도덕적, 지적 특징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국민의 기질에 너무나 큰 변화가 나타나는 것 같지 않은가! 17세기오아 18세기의 프랑스 국민의 기질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역사학자가 있는가?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 국민 공회를 맹렬히 지지했던 사람들과 나폴레옹의 온순한 노예들 사이의 기질 차이보다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있는가?

도덕성은 지성의 결과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질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유전적인 것이 되고, 따라서 무의식적인 것이 될 때까지는 절대로 단단히 구축되지 않는다

6만 명의 영국인이 2억5천 만 명에 달하는 힌두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영국인들의 기질 때문이다

여자의 교육 수준이 대단히 높을지라도, 여자와 남자 사이에 정신적 분리는 엄연히 존재한다

앞에 언급한 내용은 민족들 간의 혼혈이 새로운 민족의 형성에 근본적인 용소로 고려되어야 함과 동시에 옛 민족들의 해체에 큰 역할을 한 요인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는 이런 미묘한 구분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역사가 언제나 허리를 굽히는 유일한 우월은 군사적 우월이다

우리는 그 민족들의 해체가 혼혈의 결과라는 점을, 그리고 통일성과 힘을 간직한 민족들, 예를 들면 과거으이 인도의 아리아인과 다양한 식민지들에 거주하는 현대의 영국인은 언제나 외국인과의 결혼을 신중하게 피했던 민족이라는 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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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심리 현대지성 클래식 39
귀스타브 르 봉 지음, 강주헌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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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북부 노장르로트루 출신의 19세기를 대표하는 사회심리학자인 귀스타브 르 봉은 그가 존경해 마지 않았던 허버트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민족학, 심리학, 사회학, 의학, 물리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던 학자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거의 그가 창안했다시피한 사회심리학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의해 세인들에게 더욱 알려졌고, 같은 사회학의 측면에서 연구 대안의 한 방편으로, 혹은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과 심리적 구조를 역사와 철학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적 차원으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후에 사회심리학과 관련해, 후에 뒤르켐과 논쟁하게 되는 가브리엘 타르드가 르 봉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인 르 봉은 1870년의 보불전쟁과 1914년 이후의 1차대전까지 직접 경험하면서 그가 스스로 이해해 왔던 세계관 전반에 큰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그의 학문적 경향이 1800년대의 유럽 정치 전반을 이끌었던 브루주아지를 대변했고 대표적 논저라고 할 수 있는 '군중심리'와 '민족의 심리학'에서 종래와는 다른 관점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군중으로 시작하여 초기 유럽 민족주의에 상당한 비판적 분석을 한 르봉에게 대전이 끼친 영향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군중심리'를 이미 다른 번역판으로 일독하여 편협한 서평도 쓰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작게는 책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그리고 여기에 의미를 더 부여하여 강주헌 역자가 번역한 이 판이 어떤지 강한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이 글의 역자는 주로 노엄 촘스키의 글을 번역했던 분인데요. 그래서 더 역자에게 관심이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Psychologie des Foules"로 지난 1895년에 출간되었고, 이듬해인 1896년에 "he Crowd: A Study of the Popular Mind"라는 제목으로 영역본으로도 출판되기에 이릅니다. 국내에는 여러 번역본들과 더불어, 그 중' 현대 지성'에서 2021년 10월 번역판이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8세기에서 19세기 초반의 상당한 교육을 받은 브루주아지들이 과거 구교와 신교의 권력 투쟁에서 사실상 승리한 상황을 먼저 언급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전의 유럽 사회가 구교라고 말하는 가톨릭의 정치사회적 개입에서 종교적 개혁의 정신으로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교 분리를 이룩해, 이 부르지아지들에 의해 계몽주의 시대에 걸맞는 사회를 열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른바 이 부르주아지의 대두라는 의미 자체가 여러 복합적인 사회적 산물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나중에 사회 전반에서 다소 이르지만 계급적인 구귀족들을 대체하기에 이르는데요. 이에 르 봉은 자신 스스로도 18세기 무렵에 항유하는 민주주의가 실제로 완벽하지는 않았다고 언급하며, 외형적으로는 갑작스러웠지만 군중의 궐기를 이끌어 낸 이'프랑스 혁명'이 비로소 '군중'이라는 아주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켰다고 봐야 할 텐데요. 저자는 이를 보다 명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하에 글의 서두에서 먼저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 프랑스 혁명은 다소 예측하기 어려웠던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졌고, 거의 전유럽을 전장 삼아 대략 300만의 희생자를 초래하게 되었는데요. 결과론적이지만 이는 기존에 불안하게 온존하던 유럽의 사회 체제를 일소에 붕괴시켰고 당시의 기득권층이 이런 전사회적 파탄을 초래한 군중들에 대한 기존의 역사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천편일률적인 해석이 상당히 미흡하다는 판단을 내린 르 봉은 이에 군중을 새롭게 규명하는데 나서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스로 역사적 소명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인지는 다소 불명확 하지만 혁명 자체를 옆에서 지켜본 지식인으로서 꽤 견고한 사명감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어느 학파, 어느 학술에 얽매이지 않은 학자이고 스스로 객관성을 유지하며 당시 유럽의 상흔을 초래한 이들 군중 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분석을 시도하는데요. 앞의 객관성이라는 말이 저자 스스로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그의 글이 히틀러를 비롯한 많은 왜곡된 정치인들에게 영감을 안겨주었고 오늘날에도 이 군중과 관련된 그릇된 인상을 재생산 하는데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함께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점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인간이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우리가 얼마간 차치하더라도 르 봉의 의견에서 '개인은 대체로 순진무구함에 가깝다'는 평가를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본성의 개인들이 모인 군중이 집단적인 무의식 상태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일을 벌일 수 있다는 저자의 믿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르 봉 자신의 통찰대로 사회가 신봉하는 제도자체가 단순히 몇 해에 걸쳐 이룩된 것이 아니라 꽤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온 민족 스스로의 관습, 고유한 정치적 상황과 사회 내부의 정당한 구속력에 의해 체제를 유지시킨 일종의 사회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맥락은 그의 다른 논저 '민족의 심리학'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이러한 제도는 "가진자나 못가진자 양자 중 어느 한 부류를 완벽하게 만족시키지는 않는다"는 조건에서 모두가 어느 정도 불만족하는 형태로 유지되어 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존의 제도 자체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도 분명 존재하고 또한 일부는 개선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볼 수 있겠는데요. 그렇다 하더라도 르 봉의 불안감처럼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사회 전체가 급격한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 자체가 아주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이 지점에선 집단으로 모인 군중들의 이성적 판단이 어느 정도로 가능할 수 있겠는가를 예측해 보는 것이 필요하겠으나 르 봉은 자신의 글 2부 2장에서 "군중은 예부터 진실을 갈망한 적이 없다"는 극대화 된 회의와 함께 서두에서도 보였던 "군중은 이성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논증하고 있는데요. 저자는 이와 관련해, 이 "격렬한 논쟁이 일어날 만한 문제"를 어떤 문명이 겪게 될 수밖에 사회적 진화라는 관점에서 사회학이 쥐고 나아갈 길이라고 판단되는 '실질적 가치'를 통해, 군중의 원인과 이들의 파급적 문제들을 면밀히 분석해 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찬가지로 1장 전반에서 논의되고 있는 군중의 기본적인 여러 속성들과 그에 따른 결과물들은 단순히 개인과 군중의 대비되는 비교 뿐만 아니라 양자가 엄연히 다른 형태의 소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 한데요. 흡사 이른 결론일수도 있겠지만 군중 자체를 부정적 요인만으로 사회에서 어떻다는 식으로 두려워 하거나 판단을 유보할 수도 있지만 저자 스스로는 이 군중의 출현과 더불어 이어지는 군중의 시대가 앞으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소산으로 여기는 듯 했습니다. 물론 르 봉의 이와 같은 전망은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인 것들이었고 지금의 민주주의를 고려한다면 대중이라는 의미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오늘날에도 그만큼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진술한대로 당시 유럽 사회에서 날로 주도권을 강화하고 있던 있던 많은 브루주아지들에 의해 가톨릭의 정치 개입이 성공적으로 불식되기에 이릅니다. 물론 이것의 역사적인 맥락은 다소 복잡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러나 이 브루주아지들이 프랑스 혁명에서 분노한 민중들의 폭력적 결기를 목도하게 됨으로써, 르 봉은 종교가 세속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브루주아지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대신 진술하기에 이릅니다. 그만큼 당시 군중의 출현은 기득권 상위에 있던 귀족 정치를 궤멸 시키는 정도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프랑스 혁명이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기본적인 사회적 관념으로 봤을 때, 이 글에서 르 봉이 분석하고 있는 군중 전반의 이해는 다소 선민사상과 엘리트주의에 경도된 해석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르 봉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군중의 감정은 여성들처럼 순식간에 극단을 치닫는다"와 같은 여성차별적인 인용을 보며 다시금 그 시대에 팽배해 있던 여성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을 짐작케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글 2부에서 자세히 논증되는 앵글로 색슨과 라틴 민족의 인종차별적인 대비는 더 나아가 정치 발전 과정에서 앵글로 색슨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의 라틴 민족으로 서술됩니다. 물론 근대의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데 있어 이를 그저 편협한 도식으로 이해하여 미국 건국 당시의 앵글로 색슨이 여타 다른 민족들에 비해 성공적으로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아 올렸다는 진술은 새뮤얼 헌팅턴 식의 그것을 쉽게 떠올리게 합니다. 차라리 르 봉은 이 부분을 좀 더 제도적이고 관습적인 문제로 돌려 말하며 스스로 심리학적으로 이해한 '민족에 대한 관념' 자체에 너무나 큰 과신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어찌됐든 앵글로 색슨보다 라틴 민족에서 군중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식으로 결론이 나지는 않아 사뭇 다행이었지만, 인종과 민족의 설득력이 없는 문명적 결정론과 같은 르 봉의 의견은 앞선 여성 차별적 인식과 함께 이 글에서 줄곧 보여지는 '군중'에 대한 현란한 분석과는 상반된 형태로서 더욱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정치적 외형으로는 '제도와 정부가 민족의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비교와 함께 그러한 인식적 맥락이 도출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찌됐든 여기에는 좀 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여러 사회적 개념들이 신중하게 규명되지는 않았기에 스스로 개화되었다고 여기는 지식인 조차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사회심리학이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으로 그저 국한시킬 수밖에 없는 건지 다소 난감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르 봉이 논증하고 있는 군중의 성격과 사회적 의미 자체는 꽤 귀담아 들을 만한 부분도 있다 생각됩니다. 오늘날 단편적인 군중심리로 널리 이해되고 있는 비이성적 판단에 따른 매우 즉흥적 행동, 즉 다수의 무리가 군집한 가운데 그러한 분위기에서 위험해 보이는 정신적 고양 상태와 폭력적 행동의 가능성 등은 사회 체제 전반에 어느 정도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진술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고 있었는데요. 이들이 어떠한 '정치적 식견이나 이상'을 위해 나서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이 우선되었기 때문이라는 르 봉의 분석은 그가 군중에 대해 갖는 해석의 또다른 모습 이라고 여겨집니다. 사실 군중 현상과 군중 자체를 결코 부정할 수 없다는 르 봉의 평가와 더불어, 군중 자체가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역사적 소산에서 '이들 군중을 조종하여 악용할 가능성이 있는 자'에 대해 논하는 즉, 더 나아가 선동적 정치인에 의해 무참히 휘둘림을 당해 정치 전반을 약육강식의 원시 시대로 돌리게 되는 것이 르 봉이 경계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 전반의 파국을 방지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2부 전반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데요.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로서 나폴레옹과 그가 주도했던 전유럽을 상대로 했던 전쟁 과정에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열렬히 환호했던 당시 프랑스 시민들을 꽤 절묘하게 매치시켜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프랑스 인들을 직접적으로 '군중'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합니다만 이러한 군중들이 이성적 판단이 전무하다는 강한 믿음과 이들이 쉽게 거짓에 선동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나폴레옹 전쟁 자체가 프랑스만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던 것은 이처럼 분명해 보이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시기부터 나폴레옹이 최종적으로 몰락하게 되는 워털루 전투가 마무리되는 이 시기의 시민들이 어쩌면 군중과 다름없었다는 최종적 진술에 반론을 내기가 어려운 부분도 그와 같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 자체가 단순히 인스턴트 식으로 만들어진 체계는 결코 아닐 겁니다. 르 봉의 주장대로 정치와 정부 자체가 고유한 민족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제도 자체가 완벽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개혁의 필요성도 충분히 있어야 할 텐데요. 저자인 르 봉의 의견대로 완벽하지 않은 민주주의가 어떻게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유럽에 뿌리를 내리고 초기 브루주아지들이 이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는지는 역사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건전성이 아마도 사람들을 군중 상태로 내몰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르 봉 자신이 스스로를 역사가임을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미래의 군중의 대두로 인한 민주주의 체제가 몰락하거나 그에 준하는 비상한 결과에 이르지 않도록 건전한 지도자 뿐만 아니라 건전한 대중 혹은 시민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 글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되는데요. 아무리 높은 교육을 받은 계층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군중에 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 듀이와 토크빌이 강조한 '시민들 스스로의 재교육 그리고 진지한 성찰과 사회에 대한 통찰'이 무엇보다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날의 시민들의 무력감과 정치적 영향의 쇠퇴는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왜곡된 자본주의가 철저한 이기심과 맞물려, 다수의 정치 권력이 흡사 시민들이 넘게 만드는 군중에 이르게 하는 위험한 지경으로까지 내몰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부분은 지난 역사에서 유럽이 몸소 체험한 바가 있는 것이기도 한데요. 오늘날은 좀 더 정치적으로 교묘해져, 물 밖으로 나온 극우 포퓰리즘이 선동하는 자들 스스로의 정치 권력을 위해 시민을 더욱 오도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공익이 아닌 사익을 위해 움직이는 정치인들의 존재, 저는 이것이 우리 체제에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를 시민이 아닌 군중으로 몰아가는 어처구니가 없는 지식인들과 냉엄한 현실에서 말입니다.





군중 세력을 부정하려는 주장은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서구 문명의 최종 단계 중 하나가 군중의 등장이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군중 속의 개인이 행동만 본래의 자신과 다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독자성을 상실하기 전에 이미 그의 생각과 감정부터 바뀐다.

군중의 일원인 개개인의 기질이 무척 다양하기 때문에 군중이 직접 목격한 사건을 무척 다양한 방법으로 왜곡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30년이 지나자 너그럽던 영웅(나폴레옹)은 권력과 자유를 찬탈하고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3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음의 늪으로 몰아넣은 잔혹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중세의 기독교 사상이나 18세기의 민주주의 사상, 현재의 사회주의 사상은 그 수준이 대단히 높다고 볼 수 없다. 철학적으로는 그 사상들이 오류투성이에 변변치 못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상들은 지금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어떤 사상의 정당성이 입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상이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최고행정재판소세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되어 방데 전쟁을 끝냈습니다. 이슬람교도가 되어 이집트에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교황권 지상주의자가 되어 이탈리아의 성직자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유대 민족을 다스려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솔로몬의 성전을 다시 세우겠습니다"

군중의 확신은 맹목적 순종과 야만적 편협성, 폭력적 수단을 써서라도 전파하려는 욕구를 가지며 이런 특성은 종교적 감정에도 내재한다.

미국 같은 나라는 민주적 제도를 활용해 크게 번영하고 있는 반면 중남미의 스페인계 공화국들은 거의 같은 제도를 갖추고도 무정부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건은 자신에 대한 강력한 믿음 말고는 내세울 것 없는 무명의 신념가에 의해 일어났다.

프랑스 역사에서 1790년부터 1820년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인 30년, 이른바 한 세대로 여겨지는 시간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이 기간에 프랑스 군중은 처음에 왕정주의자였다가 혁명을 지지했고, 그 후에는 제정주의자가 되었고, 다시 왕정주의자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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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식 2022-01-25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어린 글 잘 읽었습니다만, 글쓰기는 좀 가다듬어야 할 것 같네요. 장황한 건 둘째치고 어색한 문장,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요.

베터라이프 2022-01-25 09:20   좋아요 0 | URL
지적 감사합니다. 조만간 글을 수정하겠습니다.
 
잊혀질 권리 - 디지털 시대의 원형감옥, 당신은 자유로운가?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 지음, 구본권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빅토어 마이어 쉰베르거는 오스트리아 젤암시 출신으로 현재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인터넷 연구소의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7년동안 법학을 공부했고, 이후 하버드 대학과 런던정경대를 거쳐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10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대니얼 솔로브와 비슷한 학문적 관심사인 네트워크 프라이버시, 인터넷 규제, 가상 세계에서의 거버넌스 구축 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의 또 다른 논저인 "데이터 자본주의"가 2018년에 파이낸셜 타임즈와 골드만 삭스가 공동으로 수여하는 올해의 비즈니스 북 어워드를 수상한 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Delete : The Virtue of Forgetting in the Digital Age"로 지난 200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지난 2011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이 글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여기 쉰베르거의 이 글은, 현재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에 소위, 디지털 메모리 Digital Memory가 어떻게 인간의 망각을 방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명사를 비롯 현실 전반의 인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설명해보면 인간은 누구나 사회에서 망각을 당할 권리, 즉 잊혀질 권리가 있으며,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로 글 전반에서 부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쉰베르거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대니얼 솔로브와는 사뭇 다른 구성으로 되어 있어 약간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상이한 두 개의 주제를 인위적으로 합쳐 놓은 것 같은 인상이 들어 약간이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즉, 1장에서 보여지듯이, 인터넷에 의해 강제로 기억된 보통 사람들의 행적들이 어떻게 이들의 삶을 파괴하는지에 대한 가감없는 르포르타주로 예상되었는데요. 하지만 실상은 인류의 문명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했던 '기억'과 기록에 대한 서사를 위한 목적의 2장이 과연 문맥상 필요했는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인상 때문인지 쇤베르거의 이 책이 '인터넷으로 과도하게 연결된 우리의 삶의 본질'이라는 고찰을 위해 다소 현실 인식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기도 했는데요. 물론 글이 나온 때가 2009년임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는 '노출된 우리의 프라이버시 문제'와 더불어 '과도하게 기억되고 있는 오늘날의 누적된 기억 매커니즘'에 대한 보다 명확한 나레이션이 마찬가지로 미흡해 보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웹 2.0의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더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내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들에 의해 강제로 노출되고 있는데요. 글 서두에서 소개되고 있는 스테이시 스나이더와 앤드류 펠드마의 사례는 개인들의 지난 행적들이 강제로 미래인 현재에 불필요하고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작점을 통해 본격적으로 르포르타주의 형식에서, 좀 더 현실적인 서술의 기법으로 글이 이어지리라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의 논조와 주제 의식은 대체로 평이하게 논증되고 인용된 사례 역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부분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구글이 막대한 저장장치를 이용해 전세계 개인들의 '검색 결과물'과 여러 사적인 디지털 기억들을 무차별적으로 저장해 왔고 이것은 마땅히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시민들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초기 자기 테이프부터 시작한 이 디지털 저장 장치의 혁신적인 기술 발전이 애초에 네트워크 시대의 빠른 연결성을 감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광섬유를 비롯한 인터넷 통신망의 획기적인 발전 그리고 그에 따른 전세계 이용자들의 '디지털 자취들'의 무차별적인 저장이 윤리적인 문제와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민주주의하에서 우리는 시민이자 소비자"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과거 기억들이 디지털화가 되어 통제력을 잃게 되는 현재의 상황이 'AI의 탄생의 디스토피아적 가능성' 보다도 우려스러운 상황임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쉰베르거 역시 이러한 사태와 관련해, 법과 제도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을 시민들이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사실상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5장의 6가지 대안들은 그런 측면에서 각자가 고찰해 볼 필요는 있지만 저자의 평가대로 이 대안들 자체가 직접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실효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다소 불확실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글에서 읽은 내용이지만, 미국 FBI가 안면 인식 데이터를 600만 건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체제 자체가 설사 민주주의라 할지라도 정부가 시민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원한다는 점에서 '시민의 자유' 라는 측면에서 마땅히 상충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조지 오웰이 예견한 살 떨리는 디스토피아는 아예 허망한 것이 아님을 이쯤에서 짐작할 수 있는데요. 저자는 글 5장에서, "아마존이 추천 도서를 제공하고, 구글이 좀 더 맞춤 검색 결과를 제공하는 혜택"을 과연 시민들이 포기할 수 있겠는가를 그럼에도 되묻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효율적 차원에서의 맥락은 아닐텐데요. 시민들이 자신들의 '디지털 풋프린트'를 어느 정도 용인하에 구글과 같은 인터넷 기업에 양도하고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자신의 소비와 정보 획득의 효율로서, 대체 어느 정도의 제한선까지 이를 수용할 수 있겠느냐가 앞으로 토론해야 될 부분이기도 한데요. 물론 이 책에선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국가 안보'라는 차원에서 어느 정권이든 시민들의 개인 정보에 접근하려는 욕구가 과거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점령한 네덜란드의 인적 정보를 낱낱이 뒤져 자신들의 의도대로 유대인들을 걸러낸 사례로 미루어 봤을 때, 정권이 다루는 시민들의 개인 정보 자체가 어느 정도 이러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생각됩니다. 사실 현재의 미국을 이러한 시민들의 사적 정보를 정보 당국이 소유하고자 하는 '시스템적 초기 시기'라고 규정했을 경우 미국의 사법 당국이 정보 당국의 이러한 의도를 시민의 이익과 사회의 공익을 위해 칼같이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시민이 민주주의 하에서 사법 제도를 신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독일계 변호사를 테러리스트로 오인해 멋대로 구금한 FBI의 사례를 보더라도 그런 오판은 개인의 삶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맨 서두에서 언급한 두 명의 미국 시민에 관한 일련의 '주홍글씨' 사건은 이들이 과거에 실수로 디지털적으로 영원히 낙인을 받을 것을 뜻합니다. 현재 미국의 교육계에선 청소년들에게 '페이스 북'과 같은 곳에 자신의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개하려는 행동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격이 갖춰지기 전인 청소년 시기에 남긴 글이나 행적들이 성인이 되어서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디지털 시대가 모든 평범한 인간의 '망각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개인 정보들은 복제되어서 더욱 확산될 수 있다는 면에서 일개 개인이 겪을 고초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는데요. 물론 그렇다고 저자의 의견대로 민주사회의 시민이 스스로 '자기 검열'이라는 기재에 막혀, 미처 할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은 방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내가 말한 의견이 사람들에게 공격 받을 것을 고려해, 의견 자체가 양심의 문제가 아닌 자기 검열에 떡하니 걸리게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슬픈 일일텐데요. 또한, 이것은 일전에 하버마스가 강조한 시민의 발언과 사회 비판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유사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이 과도한 '디지털 메모리'가 네트워크 시대의 기민한 연결 시대의 아무도 원하지 않는 암울한 측면으로서 강화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쇤베르거는 이런 저의 관점과는 다르게 인간의 자연스런 망각 작용이 디지털 메모리에 의한 과도한 기억 축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 자체가 피폐화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일반적인 '프라이버시 문제'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디지털 시대의 소위 많은 혜택들을 온전히 거부하지 않는 차원에서의 기업과 소비자들 간의 신사 협정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쇤베르거는 판단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체제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 프라이버시'와 개인의 삶의 보호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을지는 정부와 정보 당국 및 인터넷 기업에 대한 시민과 여론의 면밀한 견제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사법 당국이 이 시민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설사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미국이라 할지라도 대테러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다수 시민의 개인 정보들을 열람한 정보 당국의 선례와 같은 것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미국 의회내에 지금과는 다른 정보 당국을 견제하기 위한 강력한 소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언제나 미국의 민주주의가 건실하고 튼튼해야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이 이를 보고 건전한 정치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불거진 민간 의료 보험 문제를 개인의 자유로 강력하게 국한시켜버린 미국 시민들이 자신들의 프라이버시 문제도 똑같은 맥락으로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저는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미국 시민들의 앞날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다는 것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과거로부터 강제로 기억된 디지털 메모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에도 부정적 영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거대 인터넷 기업과 시민간에 불협화음이 상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시민의 프라이버시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어서 구글과 같은 기업들이 주도하는 시민들의 개인 정보 축적을 제도적인 측면에서 제어할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했던 모든 행동이, 그것이 위법이든 합법이든 간에 항상 현재 상태로 존재한다면 사고와 판단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과거의 행동들에서 분리할 수 있을 것인가?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에 이메일을 도입했을 때, 몇 년 뒤 케네스 스타 특별 검사가 자신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일상과 보좌진들이 보낸 이메일까지 낱낱이 드러나도록 마구 조사할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 골치 아픈 일은 미국의 건강보험 회사들의 3분의 2가 건강보험 가입 신청자들을 걸러내기 위해 이들의 과거 처방 기록에 디지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여러 해 전에 각기 다른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된 정보에 제3자가 접근하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정보 권력을 재분배하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종종 권력을 빼앗기는 사람들의 명확한 동의나 인지 없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 우리가 양식 있는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한 사람이 여러 해에 걸쳐서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고 얼마나 진화했는지 이해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누군가의 가치관과 사고, 그의 인격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우리가 보여준 모든 개인정보가 시간이 없는 콜라주일 때,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람을 오늘날 아는 것처럼 행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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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나보다 덜 내는가 - 불공정한 시대의 부와 분배에 관하여
이매뉴얼 사에즈.게이브리얼 저크먼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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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공저자중 한 사람인 이매뉴얼 사에즈(혹은 에마뉘엘 사에즈)는 본래 프랑스인으로 미국으로 귀화한 경제학자입니다. 특히 그는 근래들어 세인들에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경제학자인 토마스 피케티와 공동으로 연구에 착수하기도 하였습니다. 1999년에 MIT에서 경제학과 관련해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사에즈는 소수에 의한 부의 편중과 소득 불평등 및 자본 소득에 대한 과세 함의에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그는 무엇보다 조세 정의 및 현재 미국의 조세 제도 개혁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2009년에 그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공공 경제학 분야에서의 기여를 인정받아 수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소재한 버클리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공저자중 다른 한 사람인 게이브리얼 저크먼(혹은 가브리엘 주먼)은 프랑스 엘리트 교육의 요람인 그랑제꼴 grandes écoles 가운데, 미셸 푸코와 장폴 사르트르, 레몽 아롱, 토마 피케티,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등이 수학한 에꼴 노멀 파리-사클레이(이전의 ENS, 고등사범학교)를 수료하고 이후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 EHESS와 파리경제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갑니다. 그는 전세계 조세 피난처에 대한 문제와 공공 경제학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는데요. 주크먼도 또한 경제 불평등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앞선 사에즈와 마찬가지로 버클리 경제학과에서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공저자의 연구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원제, "The Triumph Of Injustice : How the Rich Dodge Taxes and How to Make Them Pay"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주류 경제학에서 이 두 사람과 같은 학자들이 조세 평등 및 조세 정의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것이 매우 보기 드문 케이스라는 걸 먼저 밝혀두고자 합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자본에 의한 소득이 20%에 달해도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은 이 자본 수입에 대한 과세를 반대하고 있는 실정인데요. 이들의 주장은 꽤 단일대오적인 상황입니다. 다들 익히 아시다시피 이들은 "경제에 적잖은 악영향을 끼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어차피 글 뒷부분에서 논증하게 되겠지만 두 공저자들은 '자본 과세'에 대해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는데요. 이 책은 단순히 자본 과세의 명분 쌓기로만 그치지 않고 꽤 견실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 경제학 전공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왠만하면 일독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이렇게 엘리트 교육을 받은 학자들이 민주주의적 가치와 공익을 수호하기 위해 이처럼 훌륭한 이론적 근거의 연구물을 생산해 냈다는 점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대략 1976년경까지, 당시의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수식어에 맞게 조세 정의에 있어서 확고한 자본주의적 국가였습니다. 특히, 글 3장에서 논증되고 있는 1988년 1월 1일부로 이러한 조세 정의 국가라는 수식어가 전면적으로 퇴색하게 되는데요. 당시 로널드 레이건에 의한 세금개혁법은 최상위 부유층에 대한 과세 후퇴로서, 여기에는 당시 민주당 상원 의원이었던, "테드 케네디, 엘 고어, 존 케리, 조 바이든 등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해 동의에 한 표를 던졌다"고 진술됩니다. 이 레이건식의 세금개혁은 실질 세율을 낮추는 것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의도대로 철저하게 세금 회피를 바로 잡겠다는 의도까지 포함된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의 진실은 이 개혁(?) 이후, 미국에서 조세 피난처에 따른 법인세 회피가 암묵적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기 new era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에 두 공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논증의 뒷받침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 하에서 충분히 이러한 조세 회피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글 6장과 7장에서의 논증이 이와 같은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면 이 지점에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풀어보겠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미국은 정의로운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투표권을 가진 시민들에 의해 사실상 정부가 구성되지요. 즉, 투표로 구성된 정부에게는 마땅한 합법적 권한이 있는데요. 일전에 제임스 뷰캐넌에 바로 반대에 있는 사회학자 존 롤스가 이 '조세권'이 민주적 정부 그리고 이 정부를 합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마땅한 권리이자 가치라고 증명했습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말하면, 조세에 저항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에 저항하는 이치가 되는것이죠. 몇가지 더 이론적 근거를 댈 수 있지만 글이 늘어질 것 같아 일단 이 정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시 앞선 진술로 돌아가서, 두 공저자가 마땅히 인정하는 대로 미국의 워싱턴 연방 행정부는 마땅히 조세 제도 자체를 개혁할 권한과 권리 그리고 의지를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전에 미국의 사회학자인 토마스 프랭크와 마틴 길렌스는 "유권자의 선택으로 탄생한 행정부가 그 유권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에 대해 뭔가 체념하듯 언급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물론 이 비슷한 취지의 문장이 이 글에서도 등장하는데요. 여기에서 공저자들은 '이 유권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치적 행동'은 현재의 미국 금권 정치와 연결시킵니다. 보수와 극우를 넘나들며 돈을 뿌리고 있는 코크 형제의 300억달러의 로비 자금은 이를 명백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미국 금권 정치의 매커니즘은 글 3장에서도 있듯이, "공화당은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에서 사용하던 조세 반대 레토릭을 부활시키고 현대화하여 미국의 고소득층을 결집시키고 남부의 백인들과 묶어 지지층을 만들어냈다"고 진술됩니다. 뭐 지금에야 월스트리트가 미 연방 대통령 켐페인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양 당에 같이 정치 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마찬가지로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는 부유층들 역시 정치권에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행정부에 돈을 투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정치를 자신들의 안전망에 가두고, 다수에 의한 횡포라는 측면에서 무지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게 그 리스크를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인 맥락은 이렇습니다만, 공저자들은 역사에서 루즈벨트 행정부의 사례를 들며, "민주주의는 언제나 금권 정치에 승리했다"고 유권자들에게 일종의 희망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미국과 거의 상관없는 저조차 미국의 금권 정치는 이미 민주주의를 극심하게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민주주의가 금권 정치에 승리하게 될지의 여부를 떠나서, 이미 도널드 트럼프 시기에 법인세율을 인하한 것은 그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런 위험요소의 정치인이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는 정치적 선례를 남겼다는 측면에서 미국 민주주의가 이미 훼손당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더욱이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을 매개로 유권자의 분노를 통해 워싱턴에 입성한 트럼프가 기존 체제에 대한 개혁없이 오히려 부유층의 이익을 위해, 또한 스스로 막대한 부자이기도 한 그의 미국 조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그러한 감세 정책이 이미 미국 정치에 타격을 입혔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두 저자들은 아직은 파국에 이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 같았습니다.

피케티 뿐만 아니라 다른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를 주장하는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두 저자 역시, 이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유층에 대한 실질적 과세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 자료들은 루즈벨트 시기부터 최근까지의 조세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입증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아일랜드와 버진 아일랜드, 버뮤다 등에 소득세 회피를 위한 다국적 기업들의 페이퍼 컴퍼니 설립을 국제 공조, 그러니까 G20 만이라도 조세 형평성이라는 공감대로 그 법인이 주요한 소득을 올리고 있는 G20 회원구들 중, 두 국가 혹은 세 국가에서 간략하게 합산된 조세 징수를 논의해보자고 제안하고 있었는데요. 이를테면 다국적 기업 'US 타이어'가 30퍼센트에 이르는 법인세를 회피하기 위해 다른 국가에 본사를 이전시키거나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다면 해당 국가에서 나머지 부분의 과세를 거둘 수 있게 협의 내지는 제도적 합의를 해보자는 맥락입니다. 사실 이러한 해석은 이 글에서 논의되고 있는 아일랜드의 사례처럼, 애플이 조세 회피를 위해 아일랜드에 역외 회사를 두고 있는것과 같은 현실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과 6장에서 조세 회피의 천국으로 여겨지는 아일랜드는 일종의 '주권 거래'를 한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법인세를 낮게 유지하게 되는 그 정치적 맥락이 어떻든 간에, 해당 기업의 본사가 위치한 본국의 조세 제도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어떻게 보면 범죄 행위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근래 미국 당국이 스위스에 소재한 은행들의 주요 고객들의 명단을 요구하는 실력 행사에 나섰듯이, 아일랜드 당국이 그 동안 자신들의 국가 수입을 위해 벌여온 그 같은 당근책(?)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국가간의 조세 협의를 통해 양자간 서로 이익에 근접할 수 있다고 보이는데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조세 제도 자체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국가의 조세 제도에 대한 거부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철지난 음모론 정도로 치부되어 왔는데요. 미국 각계 각층에서의 부유층과 기업들의 자본세에 대한 요구가 있었을 때, 기업들에 대한 자본세 징수는 경제적으로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일반 노동자들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주장되었지만, 실상은 자본세는 막대한 자본 수입을 거두고 있는 행위자들에게, 직접적인 소득세 증가는 수입이 적은 노동자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으로 자본세가 노동자들에게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증거 따위는 없다고 글 전반에서 논증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본세 논쟁은 마치 신자유주의의 허망한 경제 논법인 낙수 효과 trickle down와 매우 닮아 있는데요. 자본세 논의를 막기 위해 현재 막대한 로비 자금이 미국 정치권에 투하되고 있다는 점은 실상 세계화의 진실된 측면이라고 여겨집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막대한 자본을 소유한 부유층과 기업들만의 이익이 되었지, 거창하지 않은 노동 수입에 의존하는 다수의 시민들에게는 전혀 이익이 되지 않았다는 저자들의 주장과 동일합니다. 바로 이 세계화가 지금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했고, 프레카리아트, 이민 문제, 인종 차별, 극우 포퓰리즘 등의 세계 곳곳에 반민주주의적 파급을 초래한 중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에서 자유 시장 이론가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말하는, "시장이 인간의 이기심을 제어하며, 이를 올바른 쪽으로 공익에 이르게 한다"는 노름판의 야바위꾼만도 못한 주장을 현재는 믿을 분들이 거의 없겠지만, 이 세계화와 이로 인한 막대한 자본 수입은 부유층들의 손쉬운 부의 재창출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막대한 자본을 소유한 워렌 버핏이 2000만 달러 남짓의 세금을 내면서, 자신은 당국의 조세 정책에 마땅히 협조하고 있다고 그렇지 않은 도널드 트럼프에 빗대어 윤리적 우위를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몇 백억 달러를 소유한 버핏과 같은 케이스에 몇천만 달러의 세금 납입은 그 자체로 세금 관련 변호사들과 같은 그의 수월한 사회적 자원의 결과물이기도 하죠. 버핏이 트럼프 따위에 비해서는 도덕적 명분을 갖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버핏의 사례는 로널드 레이건이 구축한 세금 개혁의 여실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부가가치세가 전무한 미국 세법에서 법인세와 소득세는 실질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의료 보험과 같은 사회 보장 제도가 민간에 공개된 시점에서 이들 민간 보험들이 전혀 경쟁을 하지 않고 있다는 두 저자들의 분석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명인 토머스 제퍼슨이 다수에 의한 소수의 권리를 억압하게 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그것을 건국의 토대로 삼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부분은 현재의 미국 내 자유주의자들이 "세금은 도둑질이다"라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내뱉을 수 있는 훌륭한 자유주의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 건국의 기초가 유럽의 귀족들과 부유층에 의한 사실상의 과두제를 회피하기 위한 정치적 작업이라고 이해한다면 작금의 미국의 현실은 앞선 가치에 거의 이율배반적인 것이라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과연 미국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적 가치가 제대로 발휘될 수 있을지에 대해 미리 회의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림짐작 갈길이 먼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미국의 대다수 시민들이 주장하는 '자신들을 위한 자유'가 허망에 이르지 않도록 "모두에게 동등한 자유"를 외쳐야 할텐데, 조세 제도에 대한 건전한 함의 조차도 사회주의로 몰고가는 자들이 너무나 많으니, 일개 동맹국의 국민으로서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훌륭한 번역에 비해 글 150페이지에 있는 오타 한 곳은 실망스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선거로 뽑은 대표자들이 소수 기득권층의 수입을 올려 주기 위한 방향으로 조세 제도를 바꾸고 있다면, 민주적 제도에 대한 신념이 과연 남아날 수 있을까?

억만 장자들이 그들의 소득에 대해 낮은 세율을 부담하는 첫번째 이유는 그들의 소득 대부분이 개인소득세의 과세 대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는 소수의 슈퍼리치가 나라 전체의 부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해야 한다. 미국의 제도가 소수의 이익집단에게 포섭당할 만큼 약하지 않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민주주의는 언제나 금권정치를 이겼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사실 1950년대에 세상은 부자에게 유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건 당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공화당은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에서 사용하던 조세 반대 레토릭을 부활시키고 현대화하여 미국의 고소득층을 결집시키고 남부의 백인들과 묶어 지지층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레이건 시대의 세법 개정이 불평등을 폭증시킨 핵심적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그것을 일종의 빛나는 성과물로 여기고 있는 듯 하다

품속에 은밀히 공화당 당원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제학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전문가로서 띤 임무라도 되는 양 레이건 세법 개정의 미덕을 홍보하고 다녔다

누진세의 죽음은 민주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에 조세 회피와 탈세를 통제하기 위한 전략을 개발해냈고 그 전략은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자유주의자들은 "세금은 도둑질"이라는 신조를 되살려냈고, 따라서 탈세는 도덕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이는 흔히 실질과세의 원칙이라고 하는데, 그에 따르면 세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 외에 다른 그 어떤 목적도 없는 금융 거래는 무엇이 됐건 불법이라는 것이다

최상위 구간 세율을 낮춰 주면 사람들이 조세에 순응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런 소리는 현실 앞에 무력하게 짓밟힐 뿐이었다

금융 산업에 대한 규제가 줄어들고 불평등이 늘어남에 따라, 탈세 산업 역시 전에 없을 정도로 막강해졌고, 동시에 슈퍼리치들을 상대로 점점 더 집중되어 갔다

이런 세계관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세계화라는 것이 그 주된 승리자들, 즉 거대 다국적기업의 소유주들에게는 점점 더 낮은 세율을 적용하고 세계화의 혜택을 못 받는 노동계급의 가족들에게는 더 높은 세금을 물리는 것을 뜻한다면, 세계화에는 미래가 없을 것이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다국적기업들이 과거에 비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으며, 그러한 목적을 위해 공장과 사무실을 기꺼이 이전하기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부유세에 반대하는 흔한 레퍼토리인 유동성 문제에 대한 좋은 반박이 되기도 한다.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엄청난 부자들이 세금을 낼 만큼 충분한 소득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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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1-07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앗!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

베터라이프 2021-11-07 18: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초딩님 ^^ 저도 지금에서야 확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간 어떨떨한 기분입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11-07 1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1-11-07 18:18   좋아요 1 | URL
새로운 책을 읽을때마다 마침 읽은 사람 란에 거의 이름이 있으시던 thkang1001님이시군요 ^^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댓글 남겨주신것도 감사드려요

thkang1001 2021-11-07 1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 저야말로 베터라이프님께서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신 데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시라이 사토시 지음, 오시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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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출신의 사상가이자 정치학자인 시라이 사토시는 지난 2017년 번역 출간한 '영속패전론'이라는 논저로 유명한데요. 당시에 일본인 학자가 종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직접적으로 패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간단한 이력으로는 1977년생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 학사를 그리고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수여받았는데요. 이후에 이쿠루 상을 비롯 이시바시 탄잔상, 가도카와 재단 예술상을 수상한 바가 있습니다. 제가 그와 관련한 기사를 많이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극우 정치를 지지하는 지식인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 약간 민족주의적 의식이 느껴지긴 했지만 크게 우려할 만한 부분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외에는 다소 젊은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공동 저작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출간했고 몇 번의 티비 출연도 감행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2014년에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토론에 출연한 것은 꽤 인상적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글은 원제, "武器としての「資本論」"으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1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시라이 사토시는 글의 서두에서 자신의 전공 분야로서 그동안 연구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연구를 일반 독자들에게 보다 알기 쉽게 소개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는 취지로 밝히고 있었는데요. 전세계 대다수의 국가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기에 일반 시민이 '자본론'에 대한 기본적인 의의나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동안 반공과 그 체제에 따른 연유로 한동안 자본론이 금서로 지정되기도 하였는데요. 저에게는 이러한 지난 역사가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할 수 없다는 반공 정부의 의지로 느껴져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가 역사의 장막으로 사라지는 것보다 인류 문명이 종말을 맞는게 더 빠를 것이라는 금언이 요즘의 시대에 딱 맞는 표현이라고 여겨지는데요. 시라시 사토시의 이 글에서도 당연히 언급되고 있지만, 인간의 삶, 사회 구조, 정치 체제, 국가의 역할 등 인류가 쌓아올린 토대 전부를 오로지 '시장 자유'로 몰고 가는 맹렬한 신자유주의적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거의 부정할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물론 무지의 차원에서인지 현실 무감각의 극치라는 소산에서 나오는 인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혹자들은 신자유주의 자체가 실체가 없는 유령과도 같은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이브리드 자본주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자본주의 시즌 3' 이렇게 불러야 할까요?

마르크스가 생전에 제대로 된 돈을 벌어본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가 예견했던 자본주의 혹은 자본제 자체가 인간의 삶을 자본의 종속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의외로 통찰력이 발휘된 것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내 자신조차 상품으로 팔 수 있는 현란한 시대에서 상품 생산과 판매 그리고 숱한 잉여 상품의 확대라는 오늘날 대중 소비사회와 맥락을 같이하는 자본주의적 기본 인식을 과연 우리가 비판 없이 일종의 교조로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모두가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시라이 사토시는 '자본주의'라는 단어보다는 자본제라는 말을 더 선호하고 있었는데요. 자본주의라고 말하면 그 의미가 구체적이 되지 않을 수 있기에 자본제라고 지칭하는 것에 저역시 꽤 긍정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다룬 글 4장의 말미에서, 사토시는 "인간은 자본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그렇죠. 인간은 자본주의의 최적화되어 있다거나 자본주의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이전 포디즘이 인정했던 최소한의 시민과 노동자들의 안전 장치조차 당위로서의 자본 축적이라는 미명하에 사회를 재구조화하게 되었던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인간이 만든 체제 위에 군림하게 됩니다. 제가 그동안 이 신자유주의를 뭔가 다크 판타지의 괴물로 해석될 만큼 그 '악의 선명성'을 자주 읊어대기도 했는데요.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공격을 하거나 비판을 할 수가 없다는 식으로 이 하이브리드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자들의 논리들이 사실상 민주주의가 마땅히 자본주의를 제한할 수 있어야만 하는 정치적 함의를 무력화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 위에 위치할 수 없다는 당위이며,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이념은 다수 시민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시라이 사토시는 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 완화, 경쟁 원리"와 같은 키워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통렬한 해석대로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사고를, 감성을, 감각을 바꿨다"는 주장에 긍정하게 됩니다. 사실 모두가 알다시피 자본이 축적되는 것은 거의 무한대로 작용됩니다. 단순히 개인의 이기심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키고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이런 기존의 담론들과는 명백하게 배치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결국 1980년대 이후 국가 차원에서 배타적 부를 갖고 있는 자들의 더할나위 없는 부의 증대를 용인하고, 그러한 대중 소비사회를 촉진시켜 인간의 삶 자체를 사실상 변질시킨 것에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오 네그리는 "인간의 삶이 노동에 처해졌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로 7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인간의 노동력 제공이 본래의 삶을 위한 것에서 자본주의적 이익에 더 규합되는 쪽으로 왜곡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의 일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체제 자체를 마땅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함에도 사회에 무비판적으로 자본에 봉사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진 상황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저자인 사토시 역시 맹목적인 신자유주의화에 의해 시민이 혁명에 이르는 길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시민의 기본적 권리와 스스로의 삶에 대한 통제를 잃게 만드면서까지 노동력을 쥐어짜면서 고스란히 갖다 바치며 자본에 봉사하는 이러한 체제 자체가 과연 어떠한 공익이 존재하는지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전의 포디즘 체제에서는 그나마 자본주의가 인간성을 갖고 있었다고 단순히 긍정할 수는 없지만 겨우 존재했던 사회경제적 배려조차도 앞선 진술과 같이 시민들에게 휴지조각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시 경제학을 연구하고 있는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시장 논리에 대해 각종 이론을 갖추고 있는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의 맹목성, 그러니까 자본의 축적을 위해서는 어느것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그 희생 논리에 대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이러한 체제가 이끌고 있는 사회가 완전히 파국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체제 전반이 어떤 식으로 시민과 인간의 삶에 더 가혹하게 도움이 되지 않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발달 단계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봉건제가 걸림돌이 되어 러시아의 농노 해방과 같은 일련의 사회 변혁이 이뤄졌던 것은 그것이 얻어 걸린 것이라 할지라도 적당히 의미가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시민의 자아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도 꽤 긍정합니다. 그동안의 기술발전이 시민의 건강과 삶의 개선에 이바지한 것도 충분히 공감이 될 만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과거 역사에서 자본주의가 아무리 중대한 체제적 목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에 도래할지 모르는 고도화 된 AI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듯이, 그것이 우리를 이끄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거세당한 국가 담론의 문제라든지, 복지 국가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시민 안전에 대한 요구가 허버트 스펜서에 의한 것처럼 거부당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이 글 11장에서도 제한없는 자본 축적을 원하는 자본가들과 그 반대에 있는 시민들간에 전쟁이 도래할지도 모르는 것은 사회 체제와 시민 안전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일이 됩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적 제한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과거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승리가 되어야지, 자본주의만의 승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비해 보다 자유롭고 진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찌 철지난 자본론 이야기냐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있을겁니다. 누군가에겐 지금의 세상이 천국과 다름없다는 말의 극한이 뭐 어떤건지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만, 저자인 시라이 사토시가 말하는 우리가 자본론을 알아야하는 그 이유의 이면에는 자본제가 어떤식으로 체제의 우위로서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시민들이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에 의한 인간의 종속이라든지, 성상품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권력 지배, 비대칭적인 계급적 이해와 같은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19세기의 인물의 통찰력으로 살펴보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겁니다. 이에 대해 시라이 사토시도 금세기를 살아보지도 않은 마르크스의 해석과 이해가 지금에도 충분히 의미가 될 수 있다고 긍정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 삼권 분립처럼, 경제권력-정치권력-시민권력이 거의 동일하게 균형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이 날로 거세져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글 중간에, 마땅한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사고를 제압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상품은 애초에 부와 동의어이며 영원한 것으로 취급받게 된다. 이는 아직 상품화 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남김 없이 상품화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 옆에서 서서 능력이 없어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지 못하면 임금이 깎여도 당연하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라고 수긍하는 사람은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에 지배당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자본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결과 예전에는 반체제 문화의 텃밭으로 인식되던 노동자 계급 문화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이제 노동자가 아닌 태만한 빈곤층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성립해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기 위해서는 ‘구매할 수 있는 노동력‘이 있어야 한다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면 자본주의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수단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에 자본은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거나 인건비를 삭감하는 형태로 무리하게 잉여가치를 생산하려 한다. 그 부작용이 사회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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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6 0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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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6 0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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