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시라이 사토시 지음, 오시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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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출신의 사상가이자 정치학자인 시라이 사토시는 지난 2017년 번역 출간한 '영속패전론'이라는 논저로 유명한데요. 당시에 일본인 학자가 종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직접적으로 패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간단한 이력으로는 1977년생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 학사를 그리고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수여받았는데요. 이후에 이쿠루 상을 비롯 이시바시 탄잔상, 가도카와 재단 예술상을 수상한 바가 있습니다. 제가 그와 관련한 기사를 많이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극우 정치를 지지하는 지식인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 약간 민족주의적 의식이 느껴지긴 했지만 크게 우려할 만한 부분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외에는 다소 젊은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공동 저작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출간했고 몇 번의 티비 출연도 감행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2014년에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토론에 출연한 것은 꽤 인상적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글은 원제, "武器としての「資本論」"으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1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시라이 사토시는 글의 서두에서 자신의 전공 분야로서 그동안 연구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연구를 일반 독자들에게 보다 알기 쉽게 소개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는 취지로 밝히고 있었는데요. 전세계 대다수의 국가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기에 일반 시민이 '자본론'에 대한 기본적인 의의나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동안 반공과 그 체제에 따른 연유로 한동안 자본론이 금서로 지정되기도 하였는데요. 저에게는 이러한 지난 역사가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할 수 없다는 반공 정부의 의지로 느껴져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가 역사의 장막으로 사라지는 것보다 인류 문명이 종말을 맞는게 더 빠를 것이라는 금언이 요즘의 시대에 딱 맞는 표현이라고 여겨지는데요. 시라시 사토시의 이 글에서도 당연히 언급되고 있지만, 인간의 삶, 사회 구조, 정치 체제, 국가의 역할 등 인류가 쌓아올린 토대 전부를 오로지 '시장 자유'로 몰고 가는 맹렬한 신자유주의적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거의 부정할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물론 무지의 차원에서인지 현실 무감각의 극치라는 소산에서 나오는 인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혹자들은 신자유주의 자체가 실체가 없는 유령과도 같은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이브리드 자본주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자본주의 시즌 3' 이렇게 불러야 할까요?

마르크스가 생전에 제대로 된 돈을 벌어본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가 예견했던 자본주의 혹은 자본제 자체가 인간의 삶을 자본의 종속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의외로 통찰력이 발휘된 것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내 자신조차 상품으로 팔 수 있는 현란한 시대에서 상품 생산과 판매 그리고 숱한 잉여 상품의 확대라는 오늘날 대중 소비사회와 맥락을 같이하는 자본주의적 기본 인식을 과연 우리가 비판 없이 일종의 교조로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모두가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시라이 사토시는 '자본주의'라는 단어보다는 자본제라는 말을 더 선호하고 있었는데요. 자본주의라고 말하면 그 의미가 구체적이 되지 않을 수 있기에 자본제라고 지칭하는 것에 저역시 꽤 긍정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다룬 글 4장의 말미에서, 사토시는 "인간은 자본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그렇죠. 인간은 자본주의의 최적화되어 있다거나 자본주의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이전 포디즘이 인정했던 최소한의 시민과 노동자들의 안전 장치조차 당위로서의 자본 축적이라는 미명하에 사회를 재구조화하게 되었던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인간이 만든 체제 위에 군림하게 됩니다. 제가 그동안 이 신자유주의를 뭔가 다크 판타지의 괴물로 해석될 만큼 그 '악의 선명성'을 자주 읊어대기도 했는데요.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공격을 하거나 비판을 할 수가 없다는 식으로 이 하이브리드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자들의 논리들이 사실상 민주주의가 마땅히 자본주의를 제한할 수 있어야만 하는 정치적 함의를 무력화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 위에 위치할 수 없다는 당위이며,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이념은 다수 시민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시라이 사토시는 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 완화, 경쟁 원리"와 같은 키워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통렬한 해석대로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사고를, 감성을, 감각을 바꿨다"는 주장에 긍정하게 됩니다. 사실 모두가 알다시피 자본이 축적되는 것은 거의 무한대로 작용됩니다. 단순히 개인의 이기심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키고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이런 기존의 담론들과는 명백하게 배치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결국 1980년대 이후 국가 차원에서 배타적 부를 갖고 있는 자들의 더할나위 없는 부의 증대를 용인하고, 그러한 대중 소비사회를 촉진시켜 인간의 삶 자체를 사실상 변질시킨 것에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오 네그리는 "인간의 삶이 노동에 처해졌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로 7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인간의 노동력 제공이 본래의 삶을 위한 것에서 자본주의적 이익에 더 규합되는 쪽으로 왜곡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의 일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체제 자체를 마땅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함에도 사회에 무비판적으로 자본에 봉사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진 상황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저자인 사토시 역시 맹목적인 신자유주의화에 의해 시민이 혁명에 이르는 길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시민의 기본적 권리와 스스로의 삶에 대한 통제를 잃게 만드면서까지 노동력을 쥐어짜면서 고스란히 갖다 바치며 자본에 봉사하는 이러한 체제 자체가 과연 어떠한 공익이 존재하는지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전의 포디즘 체제에서는 그나마 자본주의가 인간성을 갖고 있었다고 단순히 긍정할 수는 없지만 겨우 존재했던 사회경제적 배려조차도 앞선 진술과 같이 시민들에게 휴지조각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시 경제학을 연구하고 있는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시장 논리에 대해 각종 이론을 갖추고 있는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의 맹목성, 그러니까 자본의 축적을 위해서는 어느것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그 희생 논리에 대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이러한 체제가 이끌고 있는 사회가 완전히 파국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체제 전반이 어떤 식으로 시민과 인간의 삶에 더 가혹하게 도움이 되지 않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발달 단계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봉건제가 걸림돌이 되어 러시아의 농노 해방과 같은 일련의 사회 변혁이 이뤄졌던 것은 그것이 얻어 걸린 것이라 할지라도 적당히 의미가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시민의 자아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도 꽤 긍정합니다. 그동안의 기술발전이 시민의 건강과 삶의 개선에 이바지한 것도 충분히 공감이 될 만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과거 역사에서 자본주의가 아무리 중대한 체제적 목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에 도래할지 모르는 고도화 된 AI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듯이, 그것이 우리를 이끄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거세당한 국가 담론의 문제라든지, 복지 국가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시민 안전에 대한 요구가 허버트 스펜서에 의한 것처럼 거부당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이 글 11장에서도 제한없는 자본 축적을 원하는 자본가들과 그 반대에 있는 시민들간에 전쟁이 도래할지도 모르는 것은 사회 체제와 시민 안전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일이 됩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적 제한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과거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승리가 되어야지, 자본주의만의 승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비해 보다 자유롭고 진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찌 철지난 자본론 이야기냐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있을겁니다. 누군가에겐 지금의 세상이 천국과 다름없다는 말의 극한이 뭐 어떤건지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만, 저자인 시라이 사토시가 말하는 우리가 자본론을 알아야하는 그 이유의 이면에는 자본제가 어떤식으로 체제의 우위로서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시민들이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에 의한 인간의 종속이라든지, 성상품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권력 지배, 비대칭적인 계급적 이해와 같은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19세기의 인물의 통찰력으로 살펴보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겁니다. 이에 대해 시라이 사토시도 금세기를 살아보지도 않은 마르크스의 해석과 이해가 지금에도 충분히 의미가 될 수 있다고 긍정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 삼권 분립처럼, 경제권력-정치권력-시민권력이 거의 동일하게 균형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이 날로 거세져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글 중간에, 마땅한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사고를 제압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상품은 애초에 부와 동의어이며 영원한 것으로 취급받게 된다. 이는 아직 상품화 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남김 없이 상품화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 옆에서 서서 능력이 없어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지 못하면 임금이 깎여도 당연하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라고 수긍하는 사람은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에 지배당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자본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결과 예전에는 반체제 문화의 텃밭으로 인식되던 노동자 계급 문화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이제 노동자가 아닌 태만한 빈곤층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성립해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기 위해서는 ‘구매할 수 있는 노동력‘이 있어야 한다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면 자본주의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수단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에 자본은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거나 인건비를 삭감하는 형태로 무리하게 잉여가치를 생산하려 한다. 그 부작용이 사회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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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6 0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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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6 0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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