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하나 단순하거나 쉬운 것은 아니며 우리가 하는 호흡마저도 힘들어지면서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단편 ‘나는 고독한 별이었다‘ 중에서)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이 말이 피부에 와닿는 때는 달리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1월 26일 해설사 시험 합격 이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간 한 것은 없고 연구원 과정 등록을 한 기(期; 약 3개월) 늦췄을 뿐입니다.

5월 말 접수, 6월 중 결과 발표를 통과하면 연구 및 수습 과정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한 기를 늦춘 것은 한 분 외의 저희 36기 합격자들 대부분이 일요일 수습 일정을 맞출 수 없어서였습니다.

물론 저는 일정(지금 하는 일의 휴일)을 조정하면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기 수습 일정을 평일로 해줄 것을 요구한 제 의사가 반영되어 실력도 뛰어나고 인성도 좋은 동기들과 함께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한 호흡을 멈추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다음 기에도 일요일 일정으로 밖에 참여할 수 없다면 저는 홀로라도 참여할 생각입니다.

오늘 앞서 말씀 드린 일요일 일정에 지원한 분이 연구원 과정 합격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축하했지만 저는 걱정도 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저 뿐 아니겠지만 불안은 시스템을 잘 모르고 시나리오를 잘 써서 통과해 유료 해설을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오늘 올 해 첫 시행하게 된 서대문 역사 문화 해설사(자원봉사) 선발과 관련해 담당 직원과 통화했습니다.

당연히 이 과정 역시 서류 심사와 면접을 통과해야 합니다. 합격할 경우 주 1회 활동비를 받는 자원봉사 일을 하게 됩니다.

제게 절실한 것은 돈보다 말할 기회입니다. 문화해설이 고백은 아니지만 고백을 하는 마음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제 심성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고백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인 것은 왜일까요?

최근 ‘가족은 선택할 수 없지만 심리치유사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이 제게는 고백을 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기까지 합니다.

글 잘 쓰는 정희진 씨가 페북을 사기(詐欺) 수준의 인격 세탁이 일어나는 곳, 부정의의 온상이라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많지 않은 경험에 근거해 부정적인 면모를 일반화해 말한 지나친 생각이지만 귀기울일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희진 씨가 말한 것과 같은 포장과 세탁은 페북만의 고유 특징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행위를 페르소나 차원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포장하고 가리고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인간관계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진정성이 무조건 타당하지는 않겠지만 허위와 가식은 우선 자신부터 황폐하게 만드는 지름길임을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고요한 방에 들어가 휴식할 줄 모르는 단 하나의 사실로부터 비롯된다는 파스칼의 말이 생각납니다.

자신의 약하고 어두운 부분에 주목한다면 자연스럽게 진정성 있는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고백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기법의 문제입니다. 문화해설사 이야기를 하다 이렇듯 고백 문제까지 언급한 탓에 글이 길어졌습니다.

한 지인이 심리상담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한달쯤 전입니다.

진심으로 세션(session)이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이란 증상의 소멸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증상과 화해하고 그것과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백상현 지음 ‘라깡의 루브르‘ 98 페이지)

여성주의 심리학의 미리암 그린스팬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심리 치료를 받으러 갈 때 ‘내 감정을 없애주었으면’이 아니라 ‘이 감정에 대해 더 알고 그것이 내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내고 싶다’는 의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감정 공부‘ 참고)

과정을 즐길 필요가 있겠지요. 삶도 그렇고 그 삶의 한 부분인 해설사 과정도 심리상담도 정신분석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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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크립(Mission Creep)이란 말이 관심을 부른다. 원래 군사 작전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였으나 지금은 미 항공우주국(NASA) 등에서 주되게 쓰인다.

처음 설정한 목표에 새 목표를 추가하거나 처음의 목표를 달성했지만 새 과제를 더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소말리아 내전에서의 승리를 위해 작전을 추가해야 하는 어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워싱턴 포스트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이 1993년이었다.

물론 “부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은어”이지만 상황에 따라 명예의 배지가 될 수도 있다.(크리스 임피, 홀리 헨리 지음 ‘스페이스 미션’ 160 페이지)

레너드 서스킨드의 ‘블랙홀 전쟁’에 grok(그락)이란 말이 나온다. 끈 이론의 선구자인 서스킨드에 의하면 이 단어는 로버트 하인라인이 공상 과학 소설인 ‘낯선 땅 속의 이방인(Stranger in a Strange Land)’에서 어떤 현상을 직관적이고 거의 본능적으로 아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이다.

서스킨드는 10 차원 시공간, 10의 1000 제곱 같은 숫자에 관한 한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grok은 먹통이고 전자(電子)의 세계나 불확정성 원리는 더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진술은 이 이후에 나온다. 20 세기가 시작될 무렵 당시까지 인간이 가지고 있던 직관이 여지 없이 무너져 내렸다는 부분이다.

완전히 생뚱맞은 현상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물리학계 전체가 쩔쩔맸다는 내용도 그렇다.

리언 레더먼은 사과 바구니에 사과를 더 담으면 사과가 항상 더 많아지지 줄어드는 일은 결코 없지 않은가란 말로 뉴턴이 상정한 빛 입자들이 이곳에서는 상쇄되고 저곳에서는 보강되어 간섭 무늬를 만들어내는 현상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는 말을 한다.(리언 레더먼, 크리스토퍼 힐 지음 ‘시인을 위한 양자물리학’ 97 페이지)

레더먼과 힐이 말한 상상하기 어려운 빛의 입자 - 파동 이중성은 서스킨드가 말한 완전히 생뚱맞은 현상들의 일부이다.

이론 물리학자 리사 랜들은 이 거대한 우주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가 헛된 기대를 가질 만큼 가까이 있어서 감히 그 안에 뛰어들어 이해하려고 하게 만든다는 말을 한다.(‘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78 페이지)

시인 린다 그레거슨(Linda Gregerson: 1950 - )이 말했듯 우리가 숭고한 것을 볼 때 불안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지각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서스킨드가 이야기하는 것은 신경망 재배선이다.(‘블랙홀 전쟁’ 9, 10 페이지) 우리 또는 적어도 우리 중 몇몇의 뇌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 기존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신경망이 환상적으로 재배선된 결과 막연한 현상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현상들을 다루고 설명할 수 있도록 수학적으로 추상화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직관에 반하는 새로운 개념이 도출되었다는 것이다.

서스킨드는 아인슈타인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암중모색(暗中摸索)을 이야기한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낡은 뉴턴적 배선을 바꾸기 위해 10년간 암중모색했다는 것이다.

나는 암중모색이 미션 크립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미션 크립을 느끼는 경우가 자주 있다.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자면 고미송의 ‘그대가 보는 적은 그대 자신에 불과하다’가 그런 예에 속한다.

이 책이 미션 크립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인식 체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고 적(敵)은 적이라 생각하는 세상에서 저자의 논의 전개는 수용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준다.

여성주의자로서의 정체성과 구도자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되었었다는 저자는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자신이 아무런 의심 없이 출발하고 있는 지점을 의심해보는 일이며 이것이 수행자적 태도의 핵심이라 말한다.(274 페이지)

이해하기 어렵고 수용하기는 더욱 어렵지만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자신이 아무런 의심 없이 출발하고 있는 지점을 의심하는 것”이란 말은 긍정할 법하다.

이은선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도 내게는 그런 책이다. 고미송의 책이 불교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균형점을 모색한 책이라면 이은선의 책은 유교, 기독교, 페미니즘의 대화를 모색한 책이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와 이현재의 ‘여성 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을 읽은 이래 생각한 바이지만 거듭 확장되는 독서 목록 앞에서 내가 느끼는 바가 바로 미션 크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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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
김경윤 지음 / 생각의길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김경윤의 '철학의 쓸모'는 열 차례에 걸쳐 일산 대화동에 자리한 사과나무치과 병원에서 진행된 '동서양 철학자의 만남'이란 강의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 공자와 플라톤(차라리 당당한 소인이 낫다), 맹자와 루소(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노자와 스피노자(영원한 물음 - 신은 존재할까?), 장자와 디오게네스(소유의 삶, 무소유의 삶),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정의로운 욕망은 없는가?)를 각각 비교한 강의이다.

첫 강의에서 저자는 공자와 플라톤은 성공한 정치가였을까?란 질문을 던진다. 공자는 주(周)나라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공자는 주나라를 받아들여야 할 이상으로 생각했다. 주나라는 은(殷)나라의 제후국이었다. 은나라를 정복했지만 자신과 함께한 다른 나라들을 다시 무력으로 정복할 수 없었던 주나라는 종법(宗法)제도와 봉건(封建)제도로 주변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주나라가 망하지 않고 세력이 남아 있던 시대, 혼란스러웠던 춘추시대 말에 공자가 태어났다. 전국시대(戰國時代)는 그나마 있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시대였다.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는 주나라의 예법이 살아 있는 나라였다. 노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장악한 무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어린 성왕(주공에게는 조카)을 잘 보필한 주공(周公)의 충성스러움에 감동해 주공의 후예들에게 준 나라이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가 대세인 시대에 귀족정치를 옹호하다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 공자는 무당 출신의 열네 살의 어머니와 칠십 고령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그나마 세 살에 아버지가 사망한, 불우한 서자였다. 공자는 끊임없이 노력해 신분상승을 꿈꾸었던 사람이다. 공자는 말년의 별명이 상갓집 개(상가지구喪家之狗)였을 만큼 고생이 심했다.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春秋)'가 공자가 유일하게 자기의 관점으로 쓴 책이라면 공자를 유명하게 해준 책은 공자 사후 제자들이 공자의 어록을 모은 '논어'이다. 공자와 플라톤은 너무 대조적이다. 공자가 가장 밑바닥에 처해있으면서 평생 신분상승의 꿈을 꾸었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인물이었다면 플라톤은 귀족으로 태어난 인물이었다.

플라톤 역시 떠돌았다. 존경하던 스승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한 것을 보고 정치에 환멸을 느낀 결과이다. 플라톤 역시 자신의 이상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이다. 공자와 플라톤은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공자는 망해가는 주나라를 모델로 삼았다. 과거지향적이었던 것이다.

공자의 복고주의는 현실 정치의 많은 군주들에 의해 버림받았다. 평민이었던 공자는 한 번도 스스로를 평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공자는 대부가 되기를 희망했다. 공자는 법가를 제일 싫어했다. 공자는 가족 중심의 사유, 인정 중심의 사유를 추구했다. 물론 인간의 본성인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려 한 공자의 가치는 인정할 만하지만 대안은 지극히 과거 지향적이었고 보수적이었다.

공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담긴 군자와 소인이란 개념은 신분적 개념이다. 대인은 대종지인(大宗之人)의 약자, 소인은 소종지인(小宗之人)의 약자이다. 대인은 권력을 승계하는 귀족, 소인은 권력 승계에서 멀어진 귀족이다. 본처의 맏아들에게만 권력이 계승되는 것이 종법 제도의 핵심이다.

소인은 동(同) 즉 이퀄리티를 바라고 적장자 귀족계급은 화(和)를 희망했다. 화는 귀족의 이데올로기이다. 동이불화는 평등을 원하지만 조화롭지 않다는 의미이고 화이부동은 조화를 추구하고 평등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51 페이지) ‘국가(폴리테이아: 정치 체제)’를 통해 알 수 있는 바 아테네 시민이었던 플라톤이 정말로 추구했던 정치에 가장 가까운 모델은 스파르타의 귀족 정치이다.(57 페이지)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공자나 플라톤이나 평생 귀족주의적 구상을 실현하려 애쓴 사람들이다. 맹자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사람이다. 전국시대는 전쟁이 다반사로 일어난 시대였다. 맹자는 추(鄒)나라의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공자가 세 살때 아버지를 여의었듯 맹자도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쫓겨나 전국을 돌았다면 맹자는 자발적으로 전국을 돌았다. 공자는 수레 한 대만을 가진 가난한 주유자(周遊者)였고 맹자는 수레가 열대가 넘었던 부유한 주유자였다. 공자는 스스로 찾아 다녔고 맹자는 초청을 받아 돌아다녔다. 맹자는 자기 돈으로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물론 맹자는 돈보다 자기 철학의 실현에 중점을 두었다. 맹자 사상의 핵심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이었다. 맹자는 말년에 더 이상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책을 썼다. '맹자'라는 책이다. 맹자는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과 맞장을 뜬 싸움꾼이었다. 공자는 관조하는 스타일이었다.

맹자는 인(仁)과 의(義)의 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특급 재야 정치인이었다.(83, 84 페이지) 조실부모한 고아 루소의 유일한 위안은 독서였다. 루소는 계몽주의 사상을 비판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학문과 예술은 지배자가 간악한 지배를 미화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모든 학문과 예술은 가짜 논리라는 것이 루소 사상의 핵심이다.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를 논하는 인성론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전제를 만들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89 페이지) 인성론은 어떤 측면에서 인간에 접근하는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가변적이다. 맹자는 잔인하고 난폭한 시대(전국시대)에 오히려 인간이 선하다는 주장을 했다.

공자는 인성론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맹자의 사단론(四端論)은 인간의 마음 밭에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등이다. 측은지심이 잘 자라면 인(仁)이 되고 수오지심은 의(義), 사양지심은 예(禮), 시비지심은 지(智)가 된다. 칸트는 인간의 선함이나 이성 등을 신적인 영역으로 넘기지 않고 자기 내부의 영역에 설정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을 펼치려 했다.

맹자는 칸트를 연상하게 한다. 맹자는 임금을 우습게 알았다. 맹자는 왕의 스승이었다. 맹자의 사상이 고스란히 전해진 곳이 조선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상소를 통해 왕을 가르친다는 정신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맹자는 군주에게 굉장히 괘씸한 사람이었다. 인기가 있을 까닭이 별로 없었다.

루소는 로크, 홉스 등처럼 인성론을 언급한 사회계약론자였다. 부르주아들이 권력자들에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양도해서 자기의 권리와 힘을 양도하는 계약을 맺은 것으로 근대국가를 설명하는 이론이 사회계약론이다. 물론 계약이란 가설적인 것이다. 루소는 국가 자체를 악으로 보았다. 또한 문명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가졌다.

루소는 기본적으로 소유 이전의 미개 사회로 돌아가기를 원했다.(107 페이지) 맹자는 인간이 선과 악을 구분한 것은 본성 때문이 아니라 소유 때문이라 보았다. 루소에게 자연이란 소유도 지배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군주보다 백성이 귀하다는 맹자의 사상과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정부는 이에 대한 집행기관에 불과하다는 루소의 사상은 여전히 울림이 크다.(111 페이지)

아니 오히려 시장(市場) 독재가 기승을 부리는 현시대에서야말로 새길 말이 아닐지? 고전의 저자는 유일하지 않다. 스피노자(1632 - 1677)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에 활약했던 사상가이다. 스피노자도 데카르트도 네덜란드에서 활약했는데 이는 그 나라가 모든 종교를 허용하는 관용적인 국가였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유대교의 신과 다른 비인격적인 신을 믿는 자신의 가치관을 감추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자기의 사상과 철학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신념대로 글을 썼다. 스피노자는 공화주의자였다. 사상과 정치, 종교의 자유를 외친 사람이었다. 스피노자는 철학자의 예수로 불린다. 실제 예수 같은 삶을 살았다.

아인슈타인은 신을 믿느냐는 물음에 스피노자의 신이라면 믿는 것이란 답을 했다. 중국 철학에서 서양의 신과 가장 가까운 개념어는 도(道)이다. 도가 세상 만물을 움직이는 원리라면 덕(德)은 그런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노자는 하늘의 법칙에 따라 사는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칭했다. 공자의 군자(君子)와 통하는 개념이다.

'도덕경'의 1장 중 유명한 말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다. 2장에서는 생이불유(生而不有), 위이불시(僞而不侍)가 유명하다. 낳았지만 자기 것이라 말하지 않는 것, 행동하지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보기엔 없는 것 같지만 그 없는 것 때문에 가득 비운 상태로 있는 것이 노자의 하느님이다.(138 페이지)

노자가 보는 신은 동진(同塵)이다. 먼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노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도덕경'에 나오는 화기광 동기진(和其光 同其塵)의 여섯 글자를 네 글자의 성어로 만들어 최고로 좋아한다.(139 페이지) 화광동진(和光同塵)이다. 화기광은 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을, 동기진은 먼지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어디에나 도가 있다는 것, 어디에나 신은 존재한다는 말이다.(140 페이지) 이 세상 만물에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비과학적 태도이다.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은 하늘과 땅은 인격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신은 인격성에 포함될 수 없는, 인격성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방식으로 정의한 신은 무한하고(외부가 없고) 완전하고 영원하다. 스피노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고 보았다. 우리는 신의 한 조각이다. 신은 자연이고 이 세계가 바로 신이다. 스피노자는 사물 그 자체, 자연 그 자체에는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신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은 신의 의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인간이 남을 지배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빌려 쓴 것에 불과한 사기이다.(155 페이지) 스피노자는 선과 악을 제도나 종교 차원에서 개인 윤리 차원으로 바꿨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라 말했다.(‘에티카’ 4부 명제 35 주석)

노자도 스피노자도 신을 초월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신은 내재적인 존재이다. 이 세상에 내재하면서 이 세상의 모습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내재적 존재로 파악한 것이다. 외재의 반대로서의 내재가 아닌 바깥이 없는 존재로서의 내재이다.

장자는 충분히 권력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결코 권력 가까이 가지 않았고 오히려 권력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론, 삶의 태도를 꿈꾸었다.(175 페이지) ‘장자’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왕이나 지도자인 것과 다르다.

노자의 사상이 제국의 이념에 해당한다면 장자의 사상은 제국에 맞서는 약소국의 이념에 해당한다.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안티스테네스의 제자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라인과 다른 라인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라인이 권력의 길을 추구했다면 안티스테네스, 디오게네스 라인은 해방 또는 자유의 길을 추구했다.

장자와 디오게네스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었다. 반권력적인 인물(1)이다. 디오게네스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자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반문명과 청빈의 인물(2)이다. 디오게네스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기를 노예화하는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초연하게 죽은 인물(3)이다. 법가(法家)는 유가, 묵가, 도가 사상가들과 달리 복고적이지 않고 당면한 현실에 관심을 두었다. 한비자(韓非子)는 나라를 부드럽게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고 철저하게 운영하는 방식을 많이 공부했다. 유가나 묵가, 도가 사상가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별로 없지만 법가 사상가들은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다.

임금에게 칼을 쥐어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으로 그 칼이 그들 당사자들에게 향할 수 있는 것이다. 법가 사상가들의 비참한 죽음은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초법적 대우를 없애고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는 것은 기득권 세력들의 불만을 살 수 있기에 충분하다.

법가 사상가들은 자신을 지지해준 군주가 죽으면 그와 함께 자신도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226 페이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는 도덕적 잣대, 윤리적 잣대가 없다. ‘한비자’ 역시 그렇다. 군주는 두 개의 칼자루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병(二柄)론이다. 하나는 형벌이고 다른 하나는 덕이다.

‘군주론’에는 군주는 사자와 여우의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한비자는 똑똑한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착한 사람이 왕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세(勢) 덕분이라 보았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성악설을 내세운 순자는 유가 쪽의 사람이었지만 조금 법가 쪽으로 기운 사람이다. 성악설은 인간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의미이지 악한 존재란 말은 아니다. 법 앞에서의 평등은 욕망의 평등, 정의의 평등이다.(25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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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7-03-21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약 감사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3-21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감사합니다...
 

사순절 기간이다. 경건함으로 채워져야 할 기독교인들의 시간이다. 나는 바흐 성악곡 감상으로 홀로이지만 일정에 동참한다.

요 사이 CD 듣기가 귀찮아 유튜브로 음악을 들었다. 어제는 오랜만에 바흐 칸타타 198번을 들었다.

전편이 좋지만 마지막 파트(열한 번째 곡)인 합창곡 ‘Doch Konign! Du stirbest nicht‘가 하이라이트이다.

이상하지만 열정적인 이 부분을 들으면 예수의 수난(受難; Passion)이 생각난다. 당연히 내게 예수 수난의 핵심은 십자가의 형벌이었다.

그런데 요즘 예수는 바울에 의해 윤색된 존재로 보인다. 복음서의 예수를 보아야 한다.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주제로 말을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상이 된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된다.

그런데 한 정신분석 전문의는 그럴 경우 우리는 대상이 된 사람에 대한 정보도 얻지만 화자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얻는다는 말을 했다.

바울도 예수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행적과 다른 예수이다. 어제는 바흐 칸타타198번을 들었고 오늘은 마태수난곡을 들을 것이다.

내일은 요한수난곡, 모레는 부활절 오라토리오이다. 그렇다면 내가 순례하는 것은 예수인가? 바흐인가?

바흐 CD 전집을 구입한 지 수년이 지났다. 내가 이 음반들에서 들은 바흐 곡의 비율은 전체의 50퍼센트 정도이다.

많이 들은 장르는 성악곡들, 소홀했던 장르는 평균율을 비롯한 건반 곡들이다.

명리학에서는 우리의 사주에는 오행(목화토금수)이 열 개가 아닌 여덟 개(사주팔자)만 배정된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다섯 기운이 조화롭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넘치거나 없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바흐 음악 감상에서 나타나는 편중을 오행과 팔자의 불균형을 보는 시각으로 보고 싶다. 막연하지만 첫 걸음을 떼어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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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임무성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수필(隨筆)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책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이다. 쉽고 편안한 장르라고 해도 비슷 비슷한 수준을 넘어서려면 정성을 다해 새롭게 써야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쓴 수필집이다. 저자의 술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수필도 공부를 해야 잘 쓸 수 있는 장르이다.

 

본문에는 글쓰기의 탈이 몇 가지 언급되어 있다. 쓰기에 반영할 만한 만큼 생각거리를 주는 글이다. 물론 쉽지 않다. 유의해야 할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수식이 많은 것, 남의 말을 빌어 오는 것, 혼자 아는 듯 아는 체 하는 것, 구체성이 결여된 것, 박학을 자랑하는 것 등...

 

수필은 무엇보다 일상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체험이 중요하고 소박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의미를 건져올려야 한다.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도 그런 룰에 들어맞는다. 편견일 수 있지만 수필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사람의 장르인 것 같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갈수록 수필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매너리즘 때문일 수 있고 어느 정도 쓰게 되면 자신이 지닌 단점이 보이기 때문일 수 있다. 또한 여행도 해야 하고 독서도 필수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색을 찾기 어려운 장르를 튀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개성을 담아 써야 하는 수필은 그 만큼 어렵다.

 

수필은 어떻게 보면 시, 소설 등을 공부하고 나서야 참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장르인지도 모른다. 음악 감상도 수필을 풍요롭게 하는 보물일 수 있다. 저자의 글은 편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성찰의 미덕을 보여준다. 이런 저자의 글을 접하면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어렵게 쓰는 것이 단점이고 남의 것에 많이 의존하는 것이 단점이다. 남의 것이란 이론을 말한다. 그러니 이는 결국 어렵게 쓰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필의 미덕은 소통에 있다. 어느 장르보다 그런 점이 강한 것이 수필이다.

 

산책도 글의 소재를 길어올리는 데 유용하다. 걷기를 사유 또는 철학과 연결짓는 세태를 떠올릴 만한 대목이다. 표제작인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를 보자. 다른 글에 비해 분량이 긴 이 글은 친구의 부음에 즈음한 회고조의 글이다. 나는 만일 젊은이가 친구의 죽음을 회고한다면 어떤 글이 나올지 궁금하다.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는 저자가 67세 되던 해부터 6년간 쓴 글을 모은 책이다. 1년에 열편씩의 글이다. 어느 만큼 써서 어느 정도의 글을 모은 건지 모르지만 하나 하나 정성들여 쓰고 골랐을 것이다.

 

나의 경우 하루에 한 편씩을 쓴다는 원칙을 고수해왔다. 연습의 의미가 강한데 이제 완성도를 유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 생각한다. 왠만한 분들은 긴장을 놓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법한 시기에 글을 쓴다는 자체만으로 칭찬 받기에 족하다.

 

이론을 가능한 한 배제한 채 쓴 담담한 글은 쉬운 듯 하지만 누구나 쓰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지? 더구나 멋을 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두고 두고 옆에 두고 펼쳐볼 책으로 추천한다. 본문에 나오는 수필(隨筆)의 정의는 새겨들을 만하다. 즉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닌 수시(: )로 쓰고 기록한다(: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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