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Der Frühling ist gekommen.)˝고 쓴 한 페친의 글을 보고 잠시 봄 생각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글보다 글을 쓴 사람이 차려 입은 가벼운 옷, 싸이클을 탄 모습의 사진이 봄을 느끼게 해준 것이다.

어떻든 나는 봄을 느끼기도 했지만 착각도 했다.

유쾌하다고도 아쉽다고도 할 수 있는 기억이 내 무의식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슈만의 봄(교향곡 1번 4악장, 원제; Frühling op 38)을 들으며 떠올리던 봄이란 뜻의 독일어 Frühling을 순간 같은 의미를 가진 프랑스어 쁘렝땅(Printemps)으로 착각한 결과이다.

이 착각은 결국 을지로에 있던 쁘렝땅백화점에 대한 추억을 더듬는 데로 나아갔다.(쁘렝땅백화점은 지난 1997년 문을 닫았다.)

지난 1989년 내가 맡던 시골 교회 주일학교의 5학년 아이들 다섯 명을 데리고 을지로 나들이를 했었다. 벌써 28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홀로 민중신학에 빠져들며 내가 속했던 극히 보수적이었던 시골 교회에서 소외감을 느꼈었다.

그럼에도 행복했던 것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였다. 산책을 하며 음악을 듣기에 좋은 시간이 되었다.

슈만의 ‘봄‘보다는 전악장이 봄과 참 잘 어울리는 같은 작곡가의 첼로 협주곡을 들으며 산책하는 것으로 봄을 맞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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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가 a~님과 저녁 식사를 한 곳이 관철동에 위치한 ‘된장 예술과 술’이란 밥집이란 사실을 안 것은 다시 찾을 것을 생각하고 받아든 명함 주소를 통해서였다.

종로(鐘路)라야 교보문고, 알라딘 중고서점, 인사동, 정독도서관 등을 알 뿐 이면(裏面)의 요소 요소를 알지 못하기에 심사가 조금 복잡했던 것은 의외의 일이 아니다.

저녁 전에 들른 2층 커피 하우스에서 차를 마시고 내려오는 길에 쓰인 계단조심(階段操心)이란 문구마저 명구(名句)인 듯 느꼈던 것은 서울 도심과 어울리지 않는 낯선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탓일 것이다.

밥집 대표 이름이 李弼莘이기에 이 필자 신자인가요? 물었더니 대표는 친절하게도 필(弼)자 재(宰: 재상 재)자인데 잘못 인쇄된 것이란 말을 했다.

알기로 관철동(貫徹洞)은 1914년 4월 1일 동 이름 개정시 관자동(貫子洞)의 ‘貫’과 그 북쪽의 다리인 철물교(鐵物橋)의 ‘鐵’을 합해 만든 이름이다.

재(宰)와 신(莘)이 다른데 그냥 둔 심사를 알지 못하지만 문제는 오식(誤植)이 아니라 두 지명의 앞 글자를 일률적으로 합치는 상투적인 조어(造語) 방식이 아닐지?

물론 꼭 앞 글자만을 채택하지는 않는 것은 인사동(仁寺洞)의 경우 인사동 부근의 옛 지명인 관인방(寬仁坊)의 仁과 사동(寺洞)의 寺를 합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왜 관(寬) 대신 인(仁)을 택한 것일까? 다시 말해 관사동이라 하지 않고 인사동이라 한 것일까?

유학자 이기동 선생은 인(仁)이란 글자를 엄마가 아기를 밴 모습, 사람과 사람이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 아니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부축한 채 기댄 모습을 형상화한, 한국인의 심성을 잘 설명하는 단어라고 소개한다.(이은선 지음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70 페이지)

지금은 사실 사람들이, 그리고 세상이 다시 말해 천지가 인(仁)하지 못한 시대이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의 시대이다.

지난 해 12월 8일 문화 해설사 수업차 찾은 북촌 한옥 마을에서 내가 눈여겨 본 것들 중 꼭두박물관을 빼놓을 수 없다.

그날은 존 그레이(‘불멸화 위원회’란 책에서 볼셰비키를 영지주의(靈智主義)의 일종으로 본...)가 ‘꼭두각시의 영혼’이란 책을 출간한 날이었다.

그레이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처형한 볼셰비키의 행위를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 아래 벌인 의도적 행위로 보았다.

그레이는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를 쓰기도 했는데 이 책의 원제가 바로 ‘지푸라기 개’를 의미하는 ‘Straw Dogs’이다.

이는 “하늘은 어질지 않다. 만물을 지푸라기 개로 여길 뿐이다(천지불인天地不仁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란 노자 ‘도덕경’ 5장에서 유래한 말이다.

어질지 않은 세상에서 인(仁)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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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는 스승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제론’, ‘타자론’, ‘에로스론’ 등을 해설한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청각과 시각의 근원적인 지향적 차이를 날카롭게 자각’했다는 유대교적 사고에 대해 논했다.

타츠루에 의하면 신의 모습을 조형적으로 본뜨는 것은 신의 타자성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다.

반면 신에게 말을 붙이는 것은 소통의 의미를 지닌 것 즉 신의 절대성에 대한 훼손과 무관한 긍정적 현상이다.(138 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고대 근동(近東)과 히브리적 사유에서 말이 가진 위상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앗시리아나 바빌론 등 고대 근동에서 신적인 말은 비길 데 없이 역동적인 힘을 가졌다.

반면 구약 성서에 표현된 야훼의 말은 자연력(自然力)이 아니라 언제나 의식적이며 윤리적이고 인격적이었다.

물론 고대 근동의 신적인 말을 상기시키는 신의 말이 소개된 구약 성서 구절들이 일부 있는 것도 사실이다.(토를라이프 보만 지음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70, 73 페이지)

보만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에게 특징적인 것은 그들의 말은 작용한다는 것이고 그리스인들에게 특징적인 것은 말이 있다는 것이다.

보만에 의하면 그리스인의 자명한 전제는 세계 안에 있는 사물들과 그 유동 과정 자체 안에서 로고스가 원초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법칙을 지배하는 바 이 법칙이 인간의 로고스 안에서 인식과 이해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한다.(82 페이지)

나는 ‘혼돈이 묘비명이 될 것(King Crimson의 ‘Confusion will be my epitaph’)이라는 가사를 ‘고백이 묘비명이 될 것(‘Confession will be my epitaph’)이란 다짐으로 고쳐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제 그런 내가 그에 합당한 분과 의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내 주도로 그 시간은 일상 이야기 7대 인문적 사유 3의 비율로 채색되었다.

다섯 시간의 동석(同席)을 마치고 귀가하며 나는 르네 마그리트와 반 고흐를 생각했다.

마그리트와 고흐가 트라우마에 대처한 방식은 다르다.

마그리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로 갖게 된 트라우마를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반면 고흐는 일상적인 처리로 트라우마에 대처했다.

이성과 감성의 관계가 그렇듯 일상과 이론 역시 적절하게 균형이 맞춰져야 한다.

7대 3이라면 괜찮은 것이 아닌지? 긴 동석을 가능하게 해준 분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다시 새로우면서도 연속성을 가진 고백을 위해 시를 읽고 인문서를 읽고 문화해설 공부에 몰두해야 하리라.

물론 여행까지 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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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로지 신체일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영혼은 신체에 대한 무언가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Body am I entirely, and nothing more; and soul is only the name of something in the body.”

모헤브 코스탄디의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뇌과학 지식 50’에 인용된 말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한 말이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저 말의 주체는 각성(覺醒)한 자, 잘 아는 자이다.
책에 의하면 각성한 자는 “육체는 하나의 거대한 이성(理性)이며 하나의 의미를 가진 다양성이고 전쟁이며 평화이고 짐승의 무리이며 목자”라는 말을 더하기까지 했다.(문예출판사 출간, 황문수 옮김 66 페이지)

의식(意識)이 문제이다. 의식을 뇌라는 물질의 산물로 보는 사람들 즉 유물론적인 사람들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말이 있다.

티브이 모니터(를 비롯한 하드웨어 일체)가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니듯 뇌라는 하드웨어가 의식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방송 프로그램이 모니터(를 비롯한 하드웨어 일체) 없이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모니터를 비롯한 하드웨어 일체를 통과해야 방송이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듯 의식도 뇌라는 하드웨어를 거쳐야 생성되는 무엇이란 말이 가능하다.

우혈(宇穴) 선생의 혈기도 지침서인 ‘몸이 나의 주인이다‘가 나왔다.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고만 있었던 스승이고 기법이다.

저자는 몸이 있어야 마음도 있을 수 있고 정신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마음을 맑고 밝게 하려면 몸을 수련해 깨끗하고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음 수련이 아니라 몸 수련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 몸 수련이 유일한 것이다.

창덕궁 앞에 있는 도장(道場)을 곧 방문할 것이고 어쩌면 올 한해 내내 몸을 만들어 의식, 마음, 정신 등을 다듬는 장정(長征)에 들어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내가 만들(조율 할) 것이라 말한 몸에는 당연히 현기증에 취약한 내 뇌도 포함된다.

기대 반 두려움 반이 아니라 기대 반 궁금증 반이라 할 시간들이 가고 있다. 희유(稀有)의 시간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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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역사지리학자와 함께 떠나는 걷기여행 특강 1
이현군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시간을 그 자체로 느끼지 못한다. 공간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시간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의 저자 이현균은 장소에 남아 있는 시간의 흔적을 보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역사지리 답사라 말한다.

그의 말을 듣고 흔적의 의미를 생각한다. 저자는 역사는 계속 상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기에 어떤 면에서는 공허한 반면 지리 답사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저자에 의하면 답사는 두 가지로 나뉜다. 책에서 본 내용을 확인하는 것과 장소 자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접하는 것이다.

저자는 문화를 인간이 자연에 변화를 주는 것, 인간이 자연에 어떻게 그리고 왜 손을 댔는지를 찾는 문제로 설명한다.(12, 13 페이지) 문화사는 결국 왕조사, 시대사, 연대기별 역사 해석과는 다른 새로운 접근 수단이 될 것이다. 답사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가 하는 말에 귀기울이는 것이다.(15 페이지)

답사의 첫 걸음은 스스로 답사 경로를 짜는 것이다. 저자가 권장하는 답사는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을 발견하는 방식이다. 답사하는 과정에서 현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고대까지 자연스럽게 접하는 방식이다.(16 페이지)

저자는 개별 장소보다 도시나 지역 전체를 조망하는 경로를 짜볼 것을 추천한다. 전체를 조망한 후에는 지역의 범위를 나누어 소규모 지역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을 추천한다. 또한 산을 중심으로 한 답사, 하천을 따라 걷는 답사,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적합한 장소를 찾는 답사를 추천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도성을 쌓은 기준에 대해 서술된 부분이 있다. 조선 초 한양 정도(定都) 후 어디에 성곽을 쌓을까를 고민하고 있던 터에 어느 겨울날 눈이 녹은 쪽과 녹지 않은 쪽이 선명하게 나눠진 것을 보고 그것을 하늘의 계시로 보고 그 경계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한다.

기준이 된 산은 백악(북악), 인왕, 목멱(남산), 타락(낙산) 등이다.(대학로 뒤쪽의 나지막한 산이 낙산이다.) 저자는 좌향(坐向)이란 개념을 이야기한다. 내가 앉아 있는 쪽이 좌(坐), 바라보는 쪽이 향(向)이다.(31 페이지)

진산(鎭山)은 진호(鎭護)하다는 의미 즉 마을 뒤에 진을 치고 있어 그 지역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다.(31 페이지)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는 1장 조선의 심장부, 궁궐과 종로 답사, 2장 서울을 가르는 물길 청계천 답사, 3부 한양 읽기의 하이라이트, 도성 답사, 4부 성문 밖 이야기로 구성된 책이다.

저자는 도성(都城)은 군사적으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지녔었다고 말한다.(4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궁(宮)은 왕이 사는 곳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국왕이 즉위 전에 살던 집, 왕위를 물려준 은퇴한 왕이 살던 곳, 국왕의 생모가 살던 곳, 왕과 왕세자의 결혼식 때 신부를 맞이하던 집 등이 모두 궁으로 불렸다.(49 페이지)

종로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이어주는 중심축이다. 교보빌딩 동쪽 출입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종각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혜정교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다.(64 페이지) 이 다리는 중학천 위에 놓였던 다리로 탐관오리들을 공개처형하던 곳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주례'의 '고공기'를 참조해 도성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71 페이지)

저자는 한양의 경우 남대문과 북대문이 마주하지도 않고 경복궁에서 남대문으로 나가는 길이 일직선이 아닌 사실 등을 들어 조선이 '주례'의 '고공기'를 받아들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말한다.(72 페이지)

개천(開川)이라 불렸던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조선왕조실록과 옛 지도에는 청계천이란 말이 없다. 백악, 목멱, 인왕산 계곡의 물이 모두 모여 개천이 된 것이니 지금 복원된 하천은 개천의 극히 일부이다.(82 페이지) 개천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문이 오간수문이다. 개천의 최상류는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이다.(82 페이지)

삼일교에서 동쪽을 보면 수표교가 있다.(94 페이지) 그런데 이 자리는 조선시대 수표교가 있던 곳이 아니다.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 2가에 있었는데 1959년 복개공사 때 지금의 장충단 공원 입구쪽으로 옮겨졌다.

세종이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석을 세워 수표교라 불리게 되었고 영희전을 다녀오던 숙종이 장희빈을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도성 안을 나누는 기준선은 종로와 청계천이다. 종로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연결한 도로이고 청계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니 종로와 청계천에 의해 도성 안이 남북으로 양분된다.(105 페이지)

종종 북촌과 남촌의 구분선을 두고 종로다, 청계천이다 논쟁하는데 실제로 걸어보면 몇 분 걸리지 않는 곳이니 큰 의미가 없다. 종로와 청계천에 의해 남북으로 양분되는 도성의 북쪽 동네를 북촌, 남쪽 동네를 남촌이라 한다. 북촌, 남촌 등의 말은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온다.(106 페이지)

저자는 숭유억불의 조선의 정체성을 거론하며 조계사는 어떻게 도심 한복판에 있는지를 묻는다. 답은 조계사는 일제 강점기에 세워졌다는 것이다.(113 페이지) 인사동 부근의 옛 지명은 관인방(寬仁坊)이다. 현재의 인사동(仁寺洞은 관인방의 인(仁)과 사동(寺洞)의 사(寺)를 합쳐 만든 지명이다.(113 페이지)

경복궁 동쪽에 팔판동(八判洞)이 있다. 여덟 명의 판서가 배출된 동네라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임용시험이 아니었다. 과거시험과 실직(實職; 실제 벼슬)을 얻는 것은 별개였다.(115 페이지) 조선시대에는 북촌이 높은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었고 남산에는 딸깍발이 선비들이 살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북촌은 조선시대 양반세력이 강해서 일본인들이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남촌 쪽을 노렸다. 을지로와 명동 쪽에 근거지를 확보한 것이다.(119 페이지)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창의문, 인왕산과 남산 사이에 서대문, 서소문, 남대문이 있다.(126 페이지)

남산과 낙산(대학로 뒤쪽의 나지막한 산) 사이에 광희문과 동대문, 낙산과 북악산 사이에 혜화문이 있다.(126 페이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이후에도 백악을 주산으로 할 것인가, 인왕산을 주산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무학대사의 인왕산 주산론, 정도전의 백악산 주산론이 그것이다. 정도전의 견해가 받아들여졌는데 왕은 남면(南面)해야 한다는 논리가 이긴 것이다. 강북삼성병원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정동(貞洞)이 나온다. 태조(이성계)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태종(이방원)이 즉위한 후 이 능을 지금의 정릉(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정동은 덕수궁의 서쪽에 해당한다. 북한산은 진산, 북악산은 주산, 남산은 안산(案山), 관악산은 조산(朝山)이다.(159 페이지) 조선시대의 금산(禁山)은 현재의 그린벨트에 해당한다.(178 페이지)

도성 안이 유학 이념과 도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들 즉 종묘, 사직, 궁궐 등이 배치된 계획된 공간이라면 도성 밖은 실생활의 공간이다.(193 페이지) 도성 안 사람들이 지배층에 해당한다면 성 밖 사람들은 피지배층이다. 성 밖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196 페이지)

저자는 역사지리학의 궁극적 목표는 현재와 미래를 보는 것이라 말한다.(212 페이지) 저자는 조선시대 한양이 현재 서울과 다른 도시이듯 21세기의 서울은 20세기의 서울과 다른 도시가 되지 않을까? 라고 말한다.(220 페이지)

미래는 현재가 가진 현실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저자는 미래를 생각할 때 시간의 관점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 공간과 장소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보길 바란다는 말을 전한다.(22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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