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彈劾) 축하의 의미가 있는 광화문 집회 현장 사진을 보고 40여년 전 책(원서)인 장 뒤비뇨의 ‘축제와 문명’을 들춰본다.

“정말 축제“라는 말에 영감을 받아서인데 유의할 것이 있다.

뒤비뇨의 논지는 축제는 다시 태어나야 할 죽음과 삶, 그리고 꿈 사이의 대화라는 것이고, 흥분이 아닌 전복(顚覆)이며 문화의 표상이 아닌 문화의 파괴라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광화문 주말 집회는 촛불 승리를 자축하는 성숙하고 건강한 모임이다.

뒤비뇨는 축제 속에서 파괴적인 긴장을 발견할 수 있음을 언급한다.

뒤비뇨는 사람들이 놀이와 축제를 혼동한다고 말하며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놀이는 규칙의 수용을 이야기하며 과격한 근육행위에 기호를 부여하고 자연적인 행위로부터 분리되어 스펙터클로 통합되는 것이고 축제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을 넘어 파괴하기까지 한다고.
뒤비뇨가 이야기하는 주요 사건 가운데 1968년 5월이 있다.

뒤비뇨에 의하면 1968년 5월은 언어적 탄압을 고발하였고, 언어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뒤비뇨는 축제는 차이점들을 없애버리려는 욕구를 갖는다고 즉 단일성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68 운동은 1960년대 지구촌 곳곳에서 펼쳐진 청년들의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 정점이다.(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총학생회 지음 ‘비참한 대학 생활’ 93 페이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된 삶을 극복하기 위해 축제와 같은 저항을 촉구한 조직으로 ‘스펙터클의 사회’의 저자인 기 드보르가 주도했다.

상황주의자들은 상품 논리를 극복하지 못한 이전 전위 예술 운동을 비판하며 대안으로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의 초월을 실현하고자 했다.(‘비참한 대학 생활’ 106 페이지)

경계를 허무는 이 같은 방식은 구축된 상황을 창출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파괴적 긴장이 있는 축제를 말하는 뒤비뇨의 논의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드보르가 말한 스펙터클은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자 상품이 인간의 사회적 삶을 총체적으로 점령하게 된 계기를 말한다.

사실 저항이든 운동이든 집회든 잘못된 가치 더 나아가 적폐(積弊: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弊端)를 깨부수려는 목표를 가지는 것이 아닌지?

우석훈은 푸코나 데리다 등이 쓴 책도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책은 현실과 부딪히고 싸워 이긴 사람들의 책이 아닐까?란 말을 한다.(‘나와 너의 사회과학’ 92 페이지)

그가 예로 든 책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레베카 솔닛의 ‘어둠 속의 희망’이다. 원제도 ‘Hope in the Dark’이다.

싸움이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이번 촛불 집회에 한 번도 참가하지 못한 채 기회를 다 보내고 말아 부끄러운 마음 그지 없다.

일정을 조정해 참가할 수도 있었지만 늘 그렇듯 심야 교통편과 관련한 귀환 걱정에 마음으로만 응원하는 데 그쳤다.

강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참여해 오늘의 승리를 이끌어낸 분들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함께 전한다.

촛불 집회를 할 일이 없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다음 기회에 필요해 열린다면 기꺼이 참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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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묘한 말... 반성하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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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개월간 하나의 연주회를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끝에 성공적이든 아쉽게든 일정을 마치고 갈채를 뒤로 하고 옷을 갈아입는 대기실에서의 오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 마치 우주에 홀로 있기라도 한 듯 외롭고 허탈하게 느껴진다는 연주자들의 사연을 접했다.

나는 우주 공간을 생각하면 그 상상 불허의 추위를 먼저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연주자 역시 우주 공간에서의 경험이 없을 것이기에 느낌은 상상이고 유추일 수 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실제하는 것이다. 지구의 모처에서 피어나는. 사실 우주 공간에서든 지구의 모처에서든 외로움의 퀄리티는 같고 허탈감의 무게는 비슷하지 않을지?

아무려나 우주와 무관한 나는 우주 공간에서 홀로 있는 느낌을 실제 경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연주자들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자신들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궁금하다.

시간이 지나며 일정이 반복됨으로써 그들은 그 감정들로부터 조금씩이나마 자유로워지는지? 아니면 소멸할 줄 모르는 아픔처럼 허무감과 외로움도 늘 새로운 짐으로 느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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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이란 말이 있지만 드라마틱한 8대0 전원일치의 탄핵 인용은 놀랍다.

탄핵 축하 파티가 곳곳에서 무수히 많이 열리리라. 탄핵은 국민의 수치이자 영광이란 말이 가장 크게 눈에 띈다.

탄핵은 수많은 이슈를 가로챈 블랙홀 같은 역할을 했지만 해피 엔딩이어서 아주 다행스럽다.

물론 탄핵에 이르기까지의 혼란과 갈등은 환멸을 느끼게 하기에 족했다.

정치란 너무도 근본적인 이슈이기에 잡음과 혼란 등이 없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현명한 비판과 감시의 눈이 필요하다.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인지 모르지만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은 대체로 환상에 빠져 소중한 표를 아깝게 버린 사람들이다.

아니 버렸다기보다 악의 세력에 힘을 실어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어떻든 5월 대선을 보게 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날씨가 투표율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 궁금하다.

진짜 봄(봄 다운 봄)을 맞고 있지만 가는 길이 꽃길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기쁘기 한량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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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소개로 알게 된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1948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베르네유쉬르아브르에서 태어난 작가이다.

음악가 집안 출신의 아버지로부터 음악적 감수성을, 언어학자 집안 출신의 어머니로부터 언어적 감각을 익힌 작가라는 점이 흥미를 부른다.
그러나 키냐르는 비극적이게도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집안 분위기로 인해 자폐증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18개월의 일이었다.

외삼촌의 기지로 사탕을 빨면서 자폐증에서 벗어났던 키냐르는 17세 무렵 재차 자폐증을 앓는데 이를 계기로 작가로서의 소명을 깨달았다고 하니 전화위복의 한 사례라 할 만하다.
물론 전화위복이란 평가가 비인간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부를 수도 있다.

의미로운 작품세계를 드러내 보여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가가 있겠지만 정작 그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 수 있기 때문이다.

키냐르는 ‘메두사에 관한 소론‘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생존을 위해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썼던 이유는 글만이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프랑스 작가는 카뮈, 사르트르, 레몽 장, 르 클레지오, 파스칼 레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마르그리트 뒤라스,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정도이다.

모두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 교수의 소개를 받아 읽었던 작가들이다.

첫 탐색을 위해 도서관에서 빌린 키냐르의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프랑스 작가들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해줄 작품이다.

˝시, 되찾은 단어, 그것은 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며, 어떤 이미지 뒤에나 숨어 있게 마련인 전달 불가능한

이미지를 다시 나타나게 하며, 꼭 들어맞는 단어를 떠올려 빈칸을 채우고.. 은유의 내부에서 실행 중인 단락을 재현하는 언어이다...˝

깊은 관심을 부르는 구절이다.

한 동안 키냐르를 읽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 분량이 적어 위압적이지 않아 좋다. 소개해준 분께 감사 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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