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ant more

도발적으로 상상하라!

페미니스트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페미니즘 열풍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 것인지를 그려보아야 할 때입니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미국 페미니스트 57인과 한국 페미니스트 7인이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미래,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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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내일, 당신이 살고 싶은 그곳

리아 페이-베르퀴스트·정희진 외 지음|김지선 옮김


* 김지양(플러스 사이즈 모델), 김하나(브랜드라이터), 은하선(섹스칼럼니스트), 이진송(계간홀로편집장), 정희진(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최서윤(월간잉여편집장), 최은영(소설가) 필자로 참여했다.



더 많이 원한다.
우리는 이 간단한 말을 입 밖에 내기가 참 어렵다. 여자라서, 
더 많이 원하도록 허락받지 못해서. 
음식, 권력, 섹스, 사랑, 시간…….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갈구하면 
게걸스럽다느니 이기적이라느니 헤프고 대책 없고 어리석다느니 하는 욕을 먹는다. 
덜 원하고 덜 배고파하는 게 우리한테는 ‘합리적’이란다. 
이렇게 한참 살다 보니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게 된다. 
여성 혐오가 우리의 상상력까지 짓밟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이 한창 뜨고 있지만, 아직 우리는 내일 필요할 것을 생각하기는커녕 
당장 위기에서 숨 돌릴 틈도 없다. 
가부장제와 끊임없이 술래잡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슨 재주로 그런 큰 꿈을 꾸겠는가? 
지금 당신의 손에 들린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문들을 불쏘시개 삼아 태어났다. 
에세이, 이야기, 시, 시각예술 등을 망라한 작품 64편은 
당신의 페미니즘을 위한 창조적 상상력을 먹여 살릴 양식이다. 
당신이 꿈꾸는 페미니즘에 우리가 불을 지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다 함께 야심만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욕심쟁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머리말 중에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실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5명)


* 서평단 신청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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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집 인원: 5명

- 모집 기간: 2월 24일 ~ 3월 2일

- 당첨자 발표: 3월 3일 금요일 예정 (휴머니스트 서재 공지)

- 도서 발송: 발표 게시물 비밀댓글로 당첨자 정보 취합 후 일괄 발송     


* 서평단 활동 방법

1. 도서를 받으신 후, 일주일 내에 알라딘 서재(필수)와 개인 블로그 또는 SNS 1곳에 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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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피노자를 좋아하게 된 배경이나 이유가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물론 미지의 것으로 보이는 남녀간의 호감도 헤아려보면 이유가 있으니 철학자를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쩌면 스피노자 사상의 핵심인 신 즉 자연(神 卽 自然) 사상에 깊은 호기심을 가졌을 수도 있고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는 그의 담백한 성품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다.

복잡하고 군더더기가 많은 감정들 사이에서 길을 잃기 잘하는 내가 스피노자에게서 느끼는 가장 큰 부러움은 인간의 감정을 기쁨과 슬픔이라는 두 가지 감정으로 분류한 그의 명쾌함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결코 평탄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숱한 고난을 이겨낸 의지의 인물이었다. 그의 성(姓)이 ‘고통스러운 곳으로부터‘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에스피뇨자(espinhosa)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스피노자 전문가인 스티븐 내들러(Steven Nadler)에 의하면 스피노자 안에서 철학과 과학을 통해 세상의 더 넓은 지식을 찾으려는 욕구를 깨어나게 한 것은 교육에 대한 관심과 유대 공동체에서의 종교적 삶에 대한 불만족, 그리고 지적 호기심만이 아니다.

스피노자로 하여금 더 넓은 지식을 찾게 한 것은 평범한 직업이 가져다주는 허무함에 대한 깊은 의식, 그리고 진리에 대한 욕구였다.(‘철학을 도발한 철학자 스피노자‘ 211 페이지)

스피노자를 수행자와 같은 인물로 대하는 시선이 있는 만큼 신비와 은둔의 철학자로 대하는 시선도 있는 듯 하다.

주지의 사실인지 모르지만 스피노자는 지극히 합당한 이성(理性)의 눈을 가진 철학자였다. 그의 사랑론에 그런 점이 잘 드러난다.

스피노자는 성적 매력에만 이끌리는 것을 욕정으로, 경제적 매력에만 이끌리는 것을 예속으로 규정한 철학자였다.

스피노자는 상대의 일부가 아닌 완전하고 큰 전체에 주목하는 사랑의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는 부분 대상이 아닌 인격적 전체를 사랑할 것을 강조하는 정신분석적 가르침(‘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의 한 필자인 정지은 교수)과 상통한다.

일과 사랑, 진리, 그리고 그것들 모두를 아우르는 삶이란 무엇일까? 실현되기 어려운 것(칼레파 타 칼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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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만해는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한 드문 경우이다. 독립투사, 민족운동가, 선승, 종교운동가, 시인 등 만해를 수식하는 말들은 다채롭기만 하다. 만해는 승속을 넘나든 큰 인물이다. 조지훈 시인이 말했듯 만해는 혁명가와 선승, 시인이 일체화된 삶을 살았다. 만해는 유교를 극복하고 서구 사상을 수용하면서 불교에 귀의한,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만해는 스물 여섯에 출가했다. 만해의 삶 자체를 화엄경의 선재 동자의 구도행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론 만해의 출가는 석가모니의 처지와 너무 판이하다. 만해의 삶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삶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일제가 나라를 결단낼 때 일본을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으로 유명한데 이는 조선사찰령을 반포해 조선 불교를 장악하려한 일본의 만행에 대한 항거 차원에서 나온 선언이다. 조선 왕조는 숭유억불의 나라였다. 그런데 국난을 맞아 유생들이 망친 나라를 승려들이 궐기하여 왜적과 싸워 승전을 거듭했으니 특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만해는 문란해진 조선 불교계가 살 길은 불교의 독립과 통일, 그리고 이를 위한 전국 사찰의 통제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만해는 불교유신은 파괴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만해는 당시 참선인들의 십 분의 하나만이 겨우 진짜 참선인이라는 주장했다. 만해는 염불(念佛)과 호불(呼佛)의 차이를 논한다.

큰 소리로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조용한 마음으로 염불함이 좋을 것이라 말한다. 만해는 산간벽지에 물러앉은 사원의 위치를 독일 철학자 헤겔의 말까지 인용하며 가장 혹독하게 비판했다. 산간에 위치한 까닭에 진보적 사상이 위축되었고 경쟁심이 죽었다는 것이다.

만해는 또한 탱화를 불사르자는 주장도 했다. 물론 부처님과 보살상에 대해서는 모셔놓는 것이 옳다는 말을 했다. 만해는 걸식이 아닌 자립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는 근대적 자본 축적을 하자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만해는 조선 승려가 취가(娶嫁;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하지 않은 것은 역사적 종교 개혁이라도 완수할 큰 뜻에 따른 것이 아닌 듯 하니 차라리 결혼하는 것이 여러 점에서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승려 대처론은 식육론과 겹쳐 전개되었다. 조선 불교의 친일화와 파계를 염려하는 많은 승려들이 대처식육을 비판했다.

명리를 추구하지 않는 선사의 후예이던 승려들이 대처 생활을 하게 되면서 4 - 5배로 늘어난 생활비를 충당하는 과정에서 사원경제가 위기를 맞았다. 일제의 한국 병탄과 사찰령, 무단통치와 한국불교의 잠식 등으로 만해의 불교 유신론은 불교 개혁의 당위성을 제기한 채 뒷날의 과제로 실천운동을 남겼다.

조선불교 유신론에 사찰령에 대한 비판은 없고 오히려 일제의 통감에게 제출한 '통감부백서'가 실려 있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조선불교유신론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면도 있지만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마땅히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만해에게 오세암은 '님의 침묵'을 집필한 보금자리 같은 곳이다. 오세암은 만해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견성 체험으로 새롭게 태어난 만해는 오세암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19189월 만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교양 잡지인 '유심(惟心)'을 창간했다. 민족 독립의 정신을 주로 담은 잡지였다.

한 연구가는 만해의 불교 인식을 유심도리(惟心道理)를 기초로 하고 있다고 논했다.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 즉 마음을 믿는 불교의 대의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조지훈 시인은 3.1 운동 당시 만해가 옥중에서 기초한 '조선독립이유서'를 육당의 '독립선언서'에 비해 한 걸음 진보한 것이고 조리가 명백하고 기세가 웅건할 뿐 아니라 정치 문제에 몇 가지 예언을 해 적중한 명문으로 정의했다.

3.1 운동에 만해가 기여한 몫은 지대했다. 만해는 시종 독립청원의 부당성을 설파하며 독립선언의 당위를 주창했다. 만해는 불교, 유림 민족대표 교섭 책임을 맡았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도 받았다. 일본 검사와 판사는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내란죄 죄목으로 걸었다.

만해는 구속되면서 3개 원칙을 제시했다. 1. 변호사를 대지 말 것, 2. 사식을 들이지 말 것, 3.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이다. 내 나라를 내가 찾자는 것인데 누구에게 변론을 받으며 온 나라가 감옥인데 밖에서 넣어주는 사식을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호의호식하자고 독립운동한 것이 아니잖는가, 일제 법률에 따르는 것이 되누 보석 신청은 안 된다는 것이다.(163 페이지)

만해는 연행된 뒤 경찰과 검사, 판사의 심문에 의연하게 맞섰다. 만해는 서대문 감옥에 복역중일 때 함께 3.1 운동을 주도한 최린에게 한시 한 수를 지어보냈다. 최린은 변절하여 만해를 분노하게 했다.

간진백화정가애看盡百花正可愛
종횡방초답연하縱橫芳草踏烟霞
일수한매장부득一樹寒梅將不得
기여만지풍운하其如滿地風雲何

온갖 꽃을 만나 정히 느껴보았고
안개 속 꽃다운 풀 이리저리 다 누볐다
한 나무 매화꽃은 아직 얻지 못했는데
천지에 가득한 눈바람 어찌 할 것인가

만해는 단 한 차례도 사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관순 열사도 받은 고문은 만해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대문 감옥의 고문방은 악명 높았다. 만해는 왜 피고는 말이 없는가란 일본인 검사에게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해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마땅한 노릇인데 감히 무슨 재판인가. 나는 할 말이 많다. 종이와 펜을 달라고 말했다.

만해는 '조선독립이유서'에서 일제의 조선 침략을 주도한 군국주의를 준열하게 꾸짖고 군국주의 일본도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처럼 반드시 패망할 날이 올 것이라 확언했다.(195 페이지) 한 논자는 감옥은 묘한 곳이어서 강한 자는 더욱 강하게 단련시키고 약한 자는 더욱 허물어지게 만든다. 만해는 강한 사람이었다고 썼다.

그 논자에 의하면 만해는 출감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자신은 옥중의 고통 속에서 쾌락을 얻었고 지옥 속에서 극락을 구했다고 했다. 만해가 옥중에서 쓴 시는 종교인으로서의 정진, 학자로서의 완벽한 논리, 시인으로서의 섬세한 정서가 하나로 응결된 작품이다.(205 페이지)

한편 조선독립이유서를 보자.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만해는 독일의 군국, 침략주의를 매섭게 비판했다. 이는 일본에 대한 간접 비판이자 경고였다. 조선독립이유서는 1. 개론, 2. 조선독립선언의 동기 1) 조선 민족의 실력, 2) 세계 대세의 변천, 3) 민족자결 조건, 3. 조선독립선언의 이유, 1) 민족자존성, 2) 조국 사상, 3) 자유주의, 4) 세계에 대한 의무, 4. 조선 총독 정책에 대하여, 5. 조선 독립의 자신 등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조선독립이유서는 분명한 한계도 가지고 있다. 일본의 넓은 도량으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내용, 동양 평화의 맹주를 일본이 아닌 누구에게서 찾겠는가 등의 내용은 납득 불가의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조선독립이유서는 부분적 미비점에도 불구하고 만해의 호방한 기질과 꺾이지 않는 기상, 불퇴전의 용기로 쓰인 일제강점기 독립정신의 최대성과물의 하나이다.(226 페이지) 저자는 만해에게 청정비구의 자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심산유곡의 절간에 앉아서 불경과 염불에 전념하는 학승이나 선승이 되기에는 나라 사랑의 열정과 불학(佛學) 연구의 정열이 너무 강했다는 것이다.(234 페이지)

만해는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을 강의했다. 유마경은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이 병석에서 주고 받은 말을 모아 지은 것으로 편협한 소승사상에 얽매인 마음을 계발하여 크고 자유로운 대승의 의식을 깨우치고자 이른바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가짜 병을 꾀하여 소승인들을 유인하여 대승의 뜻 깊은 묘리를 격조 높은 필치로 훈시한 내용이다.(23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속박은 밖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사견으로 인해 스스로 속박하여 자기의 자유를 빼앗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저자는 유마힐에게서 만해를 발견할 수 있고 만해에게서 유마힐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고 말한다.(241 페이지)

논자들 사이에서 만해가 80수의 시집 '님의 침묵'을 단시일 내에 신들린 사람처럼 썼다는 주장과 오랜 사유의 축적 끝에 썼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3.1 운동으로 치른 3년의 옥중 생활이 만해 문학의 대성을 위한 준비 기간이라는 견해가 있다.(247 페이지) 만해가 '님의 침묵'을 쓴 동기를 그가 타고르의 시집을 읽고 엄청난 공명과 불만을 함께 느꼈기 때문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249 페이지)

'님의 침묵'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는 님을 중심축으로 구성되었다. 논자들은 각기 님의 정체와 관련하여 민족, 조국, 민중, 불타, 중생, 불교의 진리 등으로 해석한다.(255 페이지) 저자는 님을 그리움의 대상이자 사랑의 대상, 존경의 대상으로 본다.(26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만해가 그토록 목메이게 찾던 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님이었다.(261 페이지) 만해의 님은 기다림의 대상인데 그것은 조선 시대 송강 정철류의 군주를 향한 것이 아니라 투쟁하고 추구하는 민족해방의 이상이자 가치이다. 저자는 만해의 님을 불타도 이성도 아닌 일제에 빼앗긴 조국으로 본 조지훈의 견해를 높이 친다.

만해는 심우장(尋牛莊)에서 1933년에서 1944년까지 살았다.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란 의미를 가졌다. 만해의 아호는 목부(牧夫)였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좌파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이었다. 만해는 최고 의결 기관인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신간회 발전에 성의를 다했다.(313 페이지)

만해는 신간회에 참여하기 2년전에 이미 좌우합작 노선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논설을 발표한 바 있다. 만해는 광주학생 운동으로 요시찰인이 되었다. 만해는 많은 글을 쓰고 발표한 타고난 문인이었다. 만해는 여성해방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만해는 여성 자각이 민족 해방 요소라고 주장했다.

만해는 농민과 노동자 문제에도 선각적 관심을 가졌다. 만해는 시, 시조, 한시, 논설, 산문, 수필, 시론, 소설, 불경 번역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학활동을 했다.(340 페이지) 만해는 1930년대를 거치며 불교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만해가 소설을 쓴 것은 신문사의 집필 의뢰, 만해 자신의 소설의 중간 장르(논설문의 직접성과 시의 상징성을 동시에 표출할 수 있는 장르적 성격), 모더니즘 시와 시론에 대한 반동 성향, 당대 작단에 대한 선민의식, 어려운 현실 생활에 도움을 준 원고료에 대한 관심 차원으로 볼 수 있다.(348 페이지)

만해의 소설은 시에 비해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만해의 필생의 화두는 대중불교, 민중불교였다. 만해의 마지막 의지처는 불법(佛法)이고 불교계였다. 만해는 언어의 마술사였다. 문학의 각종 장르를 넘나드는 정도의 학문적 온축(蘊蓄; 쌓음)과 문학적 재능이 남달랐지만 더불어 자유자재로 언어를 시구로 활용할 수 있는 출중한 능력이 있었다.(368 페이지)

만해는 근대적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과 독습으로 학문의 일가를 이루었다. 만해는 스토아학파의 제논이 제시한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한 것이라는 역설의 논리까지 제시할 만큼 서양철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369 페이지)

만해는 수필 '천하 명기 황진이'를 쓰고 논설 '전문 지식을 갖추고'도 썼다. '전문 지식을 갖추고'에서 만해는 "내가 언제나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람마다 제각기 전문 지식을 연구하여야 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청춘이 다시 돌아온다면 무슨 학문이든지 과학이고 철학이고 전문으로 돌진 전공하겠다."는 말을 했다.(385 페이지)

만해는 일제강점기에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았으니 은사(隱士)가 아니었고 굴복하지도 않았으니 노예도 아니었다. 그는 격투하는 전사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싸울 수 있는 무기가 없었고 전장은 갈수록 철벽으로 덮여 가고 있었다. 전우들도 대부분 진행하거나 묵언거사가 되고 후원자들은 발걸음을 끊었다. 민중들은 말 과 글과 성씨까지 잃게 되고 조선 천지는 거대한 수용소 군도로 바뀌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죄인 아닌 수인(囚人)으로 갇히게 되었다.(415 페이지)

만해는 광기의 시대에도 '불교'를 발행하는데 정열을 바치는 틈틈이 경판 인출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415 페이지) 193355세의 만해는 재혼을 하고 사망시까지 10년 간 거처하게 된 심우장을 마련했다. 만해는 여성적 취향을 가졌다.

만해의 여성주의, 여성해방 사상은 그의 소설에서도 잘 나타난다.(420 페이지) 만해는 소설에서이기는 하지만 결혼과 이혼을 자유로 하자는 주장을 할 만큼 앞서갔다. 만해의 여성 취향과 관련해 말할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이다.

만해의 아버지 한응준은 알려진 것과 달리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로잡힌 동학군을 처형하고 혹독하게 취조했다. 만해는 이 사실로 인해 평생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저자는 만해의 아버지 콤플렉스가 여성주의로 전이되었다고 주장한다.(425 페이지) 만해는 화초를 무척 좋아했다.

저자는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한 번도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거치지 못해 동원체제가 가능했다고 본다.(440 페이지) 메이지유신은 위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만해는 처음부터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끝까지 호적등재를 거부했다.(454 페이지) 그런 까닭에 외동딸 영숙이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만해는 불교사회주의에 경도되기도 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대승불교의 교리가 현대화한 것이다.(457 페이지) 만해는 석가의 경제사상을 현대어로 표현하라는 주문에 불교사회주의라 답했다. 만해는 자유혼의 상징이었다.

저자는 만해 사상의 핵심을 자유사상, 평등사상, 민족사상, 인권사상, 진보사상, 민중사상 등으로 평한다. 저자에 의하면 만해는 종교를 통해 현실을 잊고 현실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통해 현실을 좀더 깊이 있게 알았고 깊이 있게 삶으로써 현실을 넘어섰다.(469, 470 페이지)

한용운 사상의 한계로는 사회과학적 안목과 지식 부족을 들 수 있다고 말한다.(471 페이지) 만해는 술에 거나하게 취하면 "만일 내가 단두대에 나감으로써 나라가 독립된다면 추호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500 페이지)

만해는 탁발하는 중에 대해 "탁발은 비록 보살만행 중 하나이지만 만행에서 9999행을 버리고 왜 하필 하나인 탁발을 택했는가? 구걸은 자기의 무능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의 천대를 받을 뿐"이라는 말을 했다.(510 페이지)

만해는 지식인은 자기의 지식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신앙을 주입시키기 어렵다는 말을 했다. 지식인의 지()는 치()라는 것이다.(515 페이지)

위당 정인보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며 만해를 본받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벽초 홍명희는 칠천 승려를 합해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했다.(528 페이지)

김삼웅 선생의 만해 한용운 평전은 묵직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정통이라는 말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처음 읽으려던 책은 소설적 구성과 문체를 특징으로 하는 박재현의 만해 평전인 만해, 그날들이다. 이 책을 마저 읽어 두 책을 비교하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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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6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2-27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다시 보니 박재현 님 것도 좋은 책이더군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읽어보겠습니다..
 

看盡百花正可愛(간진백화정가애); 온갖 꽃을 만나 정히 느껴보았고

縱橫芳草踏烟霞(종횡방초답연하); 안개 속 꽃다운 풀 이리저리 다 누볐다

一樹寒梅將不得(일수한매장부득); 한 나무 매화꽃은 아직 얻지 못했는데

其如滿地風雲何(기여만지풍운하); 천지에 가득한 눈바람 어찌할 것인가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죄목으로 서대문 감옥에 갇힌 만해 한용운(1879 - 1944) 스님이 함께 운동에 참여한 최린(崔麟; 1878 - 1958)에게 지어 보낸 ‘증고우선화(贈古友禪話)‘란 시다.

천지에 가득한 눈바람 어찌할 것인가란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친다.

칸트, 파스칼, 뉴턴, 헤겔 등의 서양 지성에도 정통했고 한시에도 능했던 만해의 예지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만해의 우려대로 최린은 결국 변절하고 말았다. 3.1독립운동이 있은 지 약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가 있다.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한 것들이 여전히 유효하듯.

어떻든 천지에 가득한 눈바람이란 구절이 일제의 탄압 또는 회유로 해석되지만 이는 실존적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고정희 시인이 ‘화육제 별사‘에서 말한 ˝잡초보다 무성한 안락에 대한 갈망˝ 같은 것으로 보고 싶다.

명상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마음이 마냥 밖으로만 향한다면 상처입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최소의 안전 장치를 알았지만 그간 마음 하나 체크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을 반성한다.

잡초보다 무성하게 (안락이 아닌) 고난을 갈망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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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가 관심을 끈다. 이미 타계(1922 – 2007)한 분이고 사회적 이슈가 형성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분도 아니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미국의 작곡가들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듯 미국 작가들에 대해서도 그런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커트 보네거트는 예외적이다. 보네거트는 벌지 대전투에서 정찰병으로 적후를 살피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에 수용되었었다.

벌지 전투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최후의 대반격에 대해 연합군이 붙인 이름이다.

‘제5 도살장‘은 드레스덴 폭격시 도살장에 포로로 갇혀있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쓰인 그의 대표작이다.

보네거트의 작품은 전쟁을 소재로 한 것에서도 위트와 유머가 빛을 발한다. 물론 이 점 때문에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은 내가 배워야 할 바이지만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의 이력 때문이다.

그는 영어 교사, 자동차 영업사원, 소방수 등의 일을 하며 퇴근 후 글을 썼다.

내가 그를 눈여겨 보는 것은 그가 영어 교사, 자동차 영업사원, 소방수 등의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하면서까지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그의 글들은 아직 내게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불확정적인 작품들일 뿐이다.

이력 때문에 비롯되었지만 작품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 거두어야 할 것이 호감이다.

당연하지만 이력 때문에 억지 관심을 두어서도 안 되고 이력 때문에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어떻든 커트 보네거트는 출판사와 잡지사에 출근해 온갖 허드레 글을 쓰고 퇴근 후 소설을 쓴 올더스 헉슬리와 비교해보고 싶은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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