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크립(Mission Creep)이란 말이 관심을 부른다. 원래 군사 작전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였으나 지금은 미 항공우주국(NASA) 등에서 주되게 쓰인다.

처음 설정한 목표에 새 목표를 추가하거나 처음의 목표를 달성했지만 새 과제를 더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소말리아 내전에서의 승리를 위해 작전을 추가해야 하는 어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워싱턴 포스트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이 1993년이었다.

물론 “부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은어”이지만 상황에 따라 명예의 배지가 될 수도 있다.(크리스 임피, 홀리 헨리 지음 ‘스페이스 미션’ 160 페이지)

레너드 서스킨드의 ‘블랙홀 전쟁’에 grok(그락)이란 말이 나온다. 끈 이론의 선구자인 서스킨드에 의하면 이 단어는 로버트 하인라인이 공상 과학 소설인 ‘낯선 땅 속의 이방인(Stranger in a Strange Land)’에서 어떤 현상을 직관적이고 거의 본능적으로 아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이다.

서스킨드는 10 차원 시공간, 10의 1000 제곱 같은 숫자에 관한 한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grok은 먹통이고 전자(電子)의 세계나 불확정성 원리는 더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진술은 이 이후에 나온다. 20 세기가 시작될 무렵 당시까지 인간이 가지고 있던 직관이 여지 없이 무너져 내렸다는 부분이다.

완전히 생뚱맞은 현상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물리학계 전체가 쩔쩔맸다는 내용도 그렇다.

리언 레더먼은 사과 바구니에 사과를 더 담으면 사과가 항상 더 많아지지 줄어드는 일은 결코 없지 않은가란 말로 뉴턴이 상정한 빛 입자들이 이곳에서는 상쇄되고 저곳에서는 보강되어 간섭 무늬를 만들어내는 현상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는 말을 한다.(리언 레더먼, 크리스토퍼 힐 지음 ‘시인을 위한 양자물리학’ 97 페이지)

레더먼과 힐이 말한 상상하기 어려운 빛의 입자 - 파동 이중성은 서스킨드가 말한 완전히 생뚱맞은 현상들의 일부이다.

이론 물리학자 리사 랜들은 이 거대한 우주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가 헛된 기대를 가질 만큼 가까이 있어서 감히 그 안에 뛰어들어 이해하려고 하게 만든다는 말을 한다.(‘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78 페이지)

시인 린다 그레거슨(Linda Gregerson: 1950 - )이 말했듯 우리가 숭고한 것을 볼 때 불안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지각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서스킨드가 이야기하는 것은 신경망 재배선이다.(‘블랙홀 전쟁’ 9, 10 페이지) 우리 또는 적어도 우리 중 몇몇의 뇌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 기존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신경망이 환상적으로 재배선된 결과 막연한 현상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현상들을 다루고 설명할 수 있도록 수학적으로 추상화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직관에 반하는 새로운 개념이 도출되었다는 것이다.

서스킨드는 아인슈타인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암중모색(暗中摸索)을 이야기한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낡은 뉴턴적 배선을 바꾸기 위해 10년간 암중모색했다는 것이다.

나는 암중모색이 미션 크립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미션 크립을 느끼는 경우가 자주 있다.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자면 고미송의 ‘그대가 보는 적은 그대 자신에 불과하다’가 그런 예에 속한다.

이 책이 미션 크립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인식 체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고 적(敵)은 적이라 생각하는 세상에서 저자의 논의 전개는 수용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준다.

여성주의자로서의 정체성과 구도자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되었었다는 저자는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자신이 아무런 의심 없이 출발하고 있는 지점을 의심해보는 일이며 이것이 수행자적 태도의 핵심이라 말한다.(274 페이지)

이해하기 어렵고 수용하기는 더욱 어렵지만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자신이 아무런 의심 없이 출발하고 있는 지점을 의심하는 것”이란 말은 긍정할 법하다.

이은선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도 내게는 그런 책이다. 고미송의 책이 불교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균형점을 모색한 책이라면 이은선의 책은 유교, 기독교, 페미니즘의 대화를 모색한 책이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와 이현재의 ‘여성 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을 읽은 이래 생각한 바이지만 거듭 확장되는 독서 목록 앞에서 내가 느끼는 바가 바로 미션 크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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