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여성혐오(女性嫌惡)를 비판하는 글을 써야 하기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읽었고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3년만에 다시 읽고 있다. ‘혐오와 수치심은 알라딘 신간평가단 과제여서 리뷰를 썼지만 미흡하다는 생각 때문에 1개월여만에 리뷰를 다시 쓰다가 중단한 상태이다.

 

3년만에 다시 읽는 너스바움의 책에서는 월트 휘트먼에 대한 기술(記述)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이는 올해 읽은 두 권의 책(박홍규 지음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장석주 지음 은유의 힘’)에서 휘트먼에 대한 글을 만났기 때문이리라.

 

박홍규의 책에서 시집 풀잎의 시인인 휘트먼은,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헤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구스타프 그레저와의 관계하에서 거론되었고 장석주의 책에서는 은유와의 관계하에서 거론되었다.

 

구스타프 그레저는 자신의 성()인 그레저(Graser)는 그라스(grass)의 복수를 의미한다며 풀 잎 한 닢을 명함으로 삼았다.(‘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144 페이지) 휘트먼은 한 아이가 풀잎을 따와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 기분의 깃발, 희망찬 초록 뭉치들로 직조(織造)된 깃발이라고 말했다.(‘은유의 힘’ 25 페이지)

 

논점이 달라서이지만 이 책들에서 거론된 사실만으로 휘트먼의 온전함을 아는 데는 부족하다. 휘트먼은 몸의 흥분을 노래한다란 시에서 남자의 몸도 여자의 몸도 신성하다네./ 어느 누구의 것이든 몸은 신성하다네. 노동자 집단의 몸이라고/ 비천할까?”란 말을 했다.(‘혐오와 수치심’ 218 페이지)

 

너스바움에 의하면 전 생애에 걸쳐 휘트먼의 응답은 섹슈얼리티의 수용적이고 여성적인 측면을 기쁘고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같은 책 220 페이지) 너스바움은 휘트먼의 미국은 하나의 허구로 실제 사회는 그에 의해 표현된 방식으로 혐오를 이겨내지 못했다고 말한다.(같은 책 224 페이지)

 

너스바움은 휘트먼이 그린 사회를 이상적인 규범이라고 성급하게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너스바움이 말한 바는 여성 혐오가 없는 사회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성급하게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혐오가 없는 사회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성급하게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든 이유는 세 가지이다. 우리에게 혐오는 실제적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준 진화적인 유리함이 있었다는 것이고, 다양한 시기의 다양한 문화에서 또는 최소한 같은 문화 속의 여러 사람에게 혐오스러운 것과 매력적인 것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바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섹슈얼리티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휘트먼의 요구대로 하려면 결국 우리는 인생의 덧없음과 퇴화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껴안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같은 책 225, 226 페이지)

 

꽤 설득력 있지만 동의하기가 꺼려진다.(세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불교 수행을 참고한다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에노 치즈코는 성적으로 남성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여자라는 시시하고 불결하며 이해 불가능한 생물에게 욕망의 충족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남자들의 분노와 원한이 여성 혐오의 내용일 수 있다고 말한다.(‘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16 페이지)

 

치즈코는 여성 혐오라는 개념을 얻게 되면 왜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남이 실은 여성을 멸시하는지, 또는 왜 남자가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여자를 욕망하는지 잘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남성에게 이성애 질서는 남성이 성적 주체임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289 페이지)

 

정녕 시시한 존재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한면 분노나 혐오보다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겸허함이 필요한 것이 아닐지? 남자가 여성 의존도가 클수록 현실 부정에서 기인하는 여성 혐오는 클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니체가 말한 고상한 위선이 아닐지?

 

우에노 치즈코의 책은 복잡 다기(多岐)한 폭력과 도착(倒着)적인 현실을 잘 그려낸 책이다. 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읽는 데 꽤 불편하다.(우에노 치즈코는 사회학자라는 직업이 업보라 생각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기분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마음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쾌한 것, 화가 나는 것, 용서하기 힘든 것을 대상으로 골라 그 수수께끼를 밝혀내고자 골몰하기 때문이다.)

 

우에노 치즈코에 의하면 여성 혐오는 남성에게는 여성 멸시, 여성에게는 자기 멸시이다.(13 페이지) 저자는 여성이 성녀로 추앙되든 매춘부로 업신여겨지든 모두 한 동전의 양면이라 말한다.(27 페이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이 생식용 여성(아내)와 쾌락용 여성(매춘부)의 이분법적 시각이다. 전자는 생식의 영역으로 소외되고 후자는 생식으로부터 소외된다.(53 페이지) 물론 이때 말하는 쾌락이란 오로지 남성의 쾌락만을 의미한다. 저자는 남성에 의해 성녀와 창녀로 나뉘는 여성의 현실을 분할 통치라 말한다. 성녀와 창녀는 여성 억압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며 양쪽 모두 허울 좋은 타자화에 지나지 않는다.(57 페이지)

 

저자는 남성이라는 성적 주체에 대한 동일화는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에 의해 성립하며 그 경계에는 수많은 혼란이 존재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며 이렇게 생각하면 여러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풀리게 된다고 말한다.(39 페이지)

 

저자는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갈파(喝破)를 언급한다.(4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남자는 다른 남자의 성적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남성이라는 성적 주체가 된다. 이로 인해 남성됨의 방식에는 다양성이 없다. 음담패설이 정형화되고 나는 ...’식의 일인칭 말하기가 성립하지 않는다.(43, 4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남자가 남성으로서의 성적 주체화를 달성하기 위해, 여성 멸시를 아이덴티티의 핵심 깊은 곳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 여성 혐오이다.(51 페이지) 중요한 것은 호모 포비아이다. 남성은 자신이 여자 같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 없이 증명해야 한다.(51 페이지)

 

이브 세지윅에 의하면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남성 간 연대를 성립시키는, 분리하기 어려운 한 쌍의 계기이다. 자신이 남성임을 다른 남성에게 인정받으려면 자신이 여자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02 페이지)

 

남성과 여성의 균형은 끝까지 남성 우위를 지킴으로써, 다시 말해 여자가 남자를 떠받드는 것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는 연약한 것이다.(79 페이지) 여성 혐오를 기반으로 조직된 사회를 가부장제 사회라 한다.(111 페이지) 여성 혐오는 남자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여자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저주하는 것이다.(112 페이지) 페미니스트는 스스로의 여성 혐오를 자각하고 그것과 싸우는 사람이다.(297 페이지)

 

여자의 질투는 남자를 빼앗은 다른 여자에게로 향하지만 남자의 질투는 자신을 배신한 여자에게로 향한다. 그것은 소유권의 침해, 한 명의 여자가 자신에게 소속됨으로써 유지되던 자신의 자아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뜻하기 때문이다.(125 페이지)

 

남자는 바보 취급 가능한 여자를 결코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 여자를 한 명 확보해 놓는 것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시키기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177 페이지)

 

어떤 의미에서 여성이라는 사실을 혐오하는 감정은 모든 근대 산업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보편적 감정이라 할 수 있다.(154 페이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전편이 밀도 높은 데다가 정신분석적 개념에 근거해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9어머니와 딸의 여성 혐오가 그렇다.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라캉 학파의 계승자인 사이토의 모녀관계론은 프로이트 이론에 익숙한 이라면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딸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남성에게 해부당하는 것은 어쩐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든다.”.(169 페이지)

 

저자는 말한다. 페미니즘이 부정하는 것은 남성성이지 개개의 남성 존재가 아니라고.(302 페이지) 그리고 이브 세지윅에 의거해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남성 간 연대를 성립시키는, 분리하기 어려운 한 쌍의 계기라는 말을 한다. 자신이 남성임을 다른 남성에게 인정받으려면 자신이 여자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갈파(喝破)를 언급한다. 치즈코에 의하면 남성됨을 인정해주는 것은 이성인 여성이 아니라 동성인 남성이다. 남성의 성적 주체화에 필요한 것은 자신을 남성으로 인정해주는 남성 집단이다.

 

물론 나는 이런 남성 집단의 인정에 별 관심이 없다. 오래 전부터 그래왔다. 이 부분에서 나는 김영민 교수(철학)의 말을 떠올린다. 그는 사람은 자식이라는 생산성을 통해 불멸성을 선사받는다는 플라톤의 향연의 논의를 겨냥해 자신에게는 자식이라는 생산성을 통해 불멸하려는 욕심이 없다는 말을 했다.(‘보행’ 319, 322 페이지)

 

어떻든 정녕 시시한 존재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한다면 분노나 혐오보다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겸허함이 필요한 것이 아닐지? 남자가 여성 의존도가 클수록 현실 부정에서 기인하는 여성 혐오는 클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니체가 말한 고상한 위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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