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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로지 신체일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영혼은 신체에 대한 무언가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Body am I entirely, and nothing more; and soul is only the name of something in the body.”

모헤브 코스탄디의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뇌과학 지식 50’에 인용된 말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한 말이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저 말의 주체는 각성(覺醒)한 자, 잘 아는 자이다.
책에 의하면 각성한 자는 “육체는 하나의 거대한 이성(理性)이며 하나의 의미를 가진 다양성이고 전쟁이며 평화이고 짐승의 무리이며 목자”라는 말을 더하기까지 했다.(문예출판사 출간, 황문수 옮김 66 페이지)

의식(意識)이 문제이다. 의식을 뇌라는 물질의 산물로 보는 사람들 즉 유물론적인 사람들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말이 있다.

티브이 모니터(를 비롯한 하드웨어 일체)가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니듯 뇌라는 하드웨어가 의식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방송 프로그램이 모니터(를 비롯한 하드웨어 일체) 없이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모니터를 비롯한 하드웨어 일체를 통과해야 방송이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듯 의식도 뇌라는 하드웨어를 거쳐야 생성되는 무엇이란 말이 가능하다.

우혈(宇穴) 선생의 혈기도 지침서인 ‘몸이 나의 주인이다‘가 나왔다.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고만 있었던 스승이고 기법이다.

저자는 몸이 있어야 마음도 있을 수 있고 정신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마음을 맑고 밝게 하려면 몸을 수련해 깨끗하고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음 수련이 아니라 몸 수련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 몸 수련이 유일한 것이다.

창덕궁 앞에 있는 도장(道場)을 곧 방문할 것이고 어쩌면 올 한해 내내 몸을 만들어 의식, 마음, 정신 등을 다듬는 장정(長征)에 들어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내가 만들(조율 할) 것이라 말한 몸에는 당연히 현기증에 취약한 내 뇌도 포함된다.

기대 반 두려움 반이 아니라 기대 반 궁금증 반이라 할 시간들이 가고 있다. 희유(稀有)의 시간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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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일상에 커트 보네거트가 자주 등장한다.

보네거트는 영어 선생, 소방수, 자동차 외판원 등의 일을 하면서도 글쓰기의 집념을 꺾지 않고 세계적 명성의 작가가 된 분,

자신의 작품이 특정 장르로 평가받는 것을 거부하며 주류와는 확연히 다른 SF를 쓴 분,

우울하지 않으면 진지한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한 분이다.

실제로 보네거트의 어머니는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었고 작가 자신도 우울증으로 자살을 기도했었다.

한 논자는 보네거트의 삶을 우울증과의 전쟁으로 점철된 시간들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보네거트가 만들어낸 쓴 웃음을 짓게 하는 상황 또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너무도 진지하게 그려내는 필력은 대단하다.

여담이지만 보네거트가 전한 글쓰기에 관한 조언이 실린 한 사이트에서 나는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 1938 - )의 말을 만났다.

˝언어 사용은 우리가 죽음과 침묵에 맞서 싸우게 할 만한 유일한 것(The use of language is all we have to pit against death and silence.)”이라는 말이다.

나는 오츠의 말에 공감한다. 글의 힘은 생각의 힘이다.

그리고 그것은 효과면에서 사경(寫經)과도, 절 수행과도, 면벽(面壁) 좌선(坐禪)과도 통하는 신통한 수단이다.

그 수단 또는 방편을 누리는 의미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 나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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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물질(反物質)은 물질과 질량 및 스핀이 같고 전하(電荷)가 반대인 물질이다.

물질이라는 말 대신 입자(粒子)라는 말을 써도 변하는 것은 없다.

두 입자(입자와 반입자)는 서로 닿는 순간 감마선이라는 에너지로 바뀌면서 폭발(소멸)한다. 이를 쌍소멸이라 한다.

물리학자 프랭크 클로우스는 이를 물질이 반물질이라는 자신의 분신을 만나 상쇄되면서 죽음의 춤을 춘다고 표현한다.

전자의 반물질이 양전자(陽電子)이다.(전자는 전기적으로 마이너스 즉 음陰이다.)

클로우스에 의하면 우주에서 138억년 전 있었던 물질과 반물질 사이의 전쟁은 물질의 승리로 끝났다.(‘반물질‘ 107 페이지)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동력은 효율 100 퍼센트를 자랑하는 반물질이라는 말을 한다.(‘스페이스 크로니클‘ 287 페이지)

타이슨은 반물질의 존재를 굳게 믿는다. 믿는다는 말을 하니 이상하지만 타이슨에 의하면 반물질의 존재가 처음 예견된 것은 1928년이다.

그 유명한 폴 디랙에 의해서이고 그로부터 5년 후인 1933년 칼 앤더슨은 반물질을 최초로 발견하여 노벨상을 수상했다.

세계는 반물질이 아닌 물질로 이루어졌다.

입자물리학자/ 우주론 연구자 리사 랜들에 의하면 통상적인 물질의 질량 대부분은 양성자와 중성자에 들어 있지 그 반입자에 들어 있지 않다.

랜들은 물질과 반물질 사이의 이런 비대칭성이 세계가 우리가 아는 대로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158 페이지)

소립자 물리학자 무라야마 히토시는 10억 분의 2 정도의 차이로 물질이 반물질보다 많았기 때문에 반물질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물질이 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히토시는 물질과 반물질은 분명 같은 수량이 탄생했을 테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우주에 남는 것이 하나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물질도 반물질도 없는 텅 빈 세상이 되어야 한다. 히토시는 우리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미스테리 해명의 열쇠를 중성미자(neutrino)가 쥐고 있을 것이라 말한다.(‘왜, 우리가 우주에 존재하는가‘15 페이지)

히토시는 표준이론에서 질량이 0인 것으로 알려졌던 중성미자에 무게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것을 사건이라 표현한다.(표준이론은 중성미자의 무게가 0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졌다.)

히토시는 중성미자는 예외 없이 왼쪽 돌기였다고 말한다.(89 페이지) 히토시는 중성미자의 반물질인 반중성미자를 이야기한다.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도 다른 물질 - 반물질 커플처럼 1;1로 생성되었지만 중성미자가 살짝 장난을 쳐서10억 개 중에 한 개만 반중성미자와 중성미자의 균형을 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104 페이지)

극단으로 놀라운 일이고 대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기막힌 사건이다.

그런데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소립자 세계의 이야기는 어렵다.

다만 내가 반물질을 이야기하고 중성미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히토시의 책 제목처럼 우리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지금은 그것을 밝힐 단계가 아니라는 이야기이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히토시는 중성미자를 이야기하며 우리는 우주에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번역의 문제)

결론은 무엇인가? 반물질을 이야기하고 중성미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이 너무 단조롭고 무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이 단조롭고 무미하다고 반물질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이니 입자물리학자이자 실험물리학자인 리언 레더먼이 한 말을 전하고 싶다.

˝반물질은 물리학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테마이다. 특히 입자물리학자의 삶은 반물질과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다.˝(‘신의 입자‘ 321 페이지)

반물질을 양자(量子) 이론이 일궈낸 또 하나의 위대한 성공이라 말하는 레더먼에 의하면 C(charge conjugation)P(Parity) 대칭이 살짝 붕괴되어 물질이 반물질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몽땅 사라진 후 남은 초과분이 우리를 포함한 현재의 우주를 만들었다.(‘신의 입자‘ 502 페이지)

그 대칭 붕괴가 다행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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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해설사 동기들과 함께 본 ‘매기스 플랜‘은 근 10년여만에 영화관을 찾아 직접 본 영화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특기할 만한데 내용까지 좋아 별 다섯개를 주고 싶다.

구체적으로는 퀘이커교도인 성숙한 여주인공(매기)과 지젝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며 소설을 쓰는 인문학 교수인 남자 주인공의 가볍고 무책임한 인생 편력이 인상적인 영화였다고 기억하고 싶다.

오늘 한 페친의 타임라인에서 ‘매기스 플랜‘에 관한 인상적인 글을 읽었다.

영화평이 그런 것이 아니라 머리가 아파 영화를 보러가 ‘매기스 플랜‘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용이 이상해 보니 ‘퍼스널 쇼퍼‘라는 영화였다는 것이다.

이 일화(逸話)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는 페친이 나이 들어서 그러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십대 때부터 그랬다는 사실이다.

페친은 그 점을 다행으로 여겼다.

흥미 위주로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보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어떤 점에서는 페친의 그런 착오가 지성있는 여자의 특징으로 여겨지기까지 해 어느 면 부럽기까지 하다.

나도 실수를 하지만 그것은 영감과 창의 등이 빚어내는 실수와는 거리가 멀어 불만스러운 탓이다.

어떻든 부가적으로 이 부분에서 ‘퍼스널 쇼퍼‘가 어떤 영화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매기스 플랜‘을 보았기에 당분간 다른 영화를 생각할 여력이 없는 나는 페친이 연출한 상황과 비슷한 구절이 있는 시를 생각하느라 시간을 썼다.

시인도 생각나지 않고 제목도 긴가민가해 한 동안 머리를 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떻든 결국 그 시는 한강의 시 ‘저녁 잎사귀‘였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년 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 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년 쯤
볕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나로서는 아름다운 시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페친의 일화(逸話)에 힘입어 구체성까지 느낄 수 있게까지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일요일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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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지난 수요일 심우장(尋牛莊)에 간 날에도 이 만큼 비가 내렸었다.

만해 백일장 참가를 일주일 앞두고 답사(踏査)차 간 것이었지만 나는 결국 백일장 참가를 내년으로 미루고 말았다.

그래도 준비를 위해 평전을 읽었고 심우장을 둘러싼 성북동의 달동네스러움을 확인했고 몇 건의 댓글을 받았으니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지난 해 12월 29일 해설사 수업 시간에 한양도성 순례를 마치고 혜화문 앞에서 심우장 인근까지 동료 몇 사람과 함께 걸어 점심을 먹었었다.

이 기억 때문에 아프다. 왠일일까? 한용운도 나도 모두 정신분석해야 할 사연을 가진 것인가?

만해를 처음부터 정신분석적 대상으로 보고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정신과 의사 김종주 박사의 책(‘이청준과 라깡’ 303 페이지)에서 나는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만해의 성격은 충족되지 못한 의존적 욕구와 무의식에 억압된 적개심으로 표현되는 구강 성격과 항문 성격의 혼합된 형태로 보인다.”는 글이다.

위대한 글을 쓰는 작가는 결국 큰 억압을 이긴 콤플렉스적 존재일까?

내가 받은 댓글 가운데는 “외부는 그토록 전사(戰士)적인데, 시에서는 그토록 아니마적”이기에 독특하다는 글이 압권(壓卷)이라 할 수 있다.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글이 좋은 글이 아니겠는가.
평전에서 김삼웅 선생은 만해가 사로잡힌 동학군을 처형하고 혹독하게 취조한 아버지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 아버지 콤플렉스가 여성주의적 성향으로 전이되었다는 말을 했다.

되살리기 싫지만 광인(狂人) 왕 영조(英祖)도 친여성적인 만큼 남자들과 바람직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핏 스친다.

어쩌면 내가 스피노자를 탐독하는 것은 이성(理性)의 힘을 누구보다 신뢰하고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자유(自由)로 보고 적극적 감정인 기쁨을 강조한 그의 철학과 내가 정확히 반대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성적이지 못하고 관계 속에서 서툴고 수동적인 정념에 좌우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 위대한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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