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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월이다. 새해는 아니지만 새해가 되면 마음에 새기곤 하던 한 스님의 다짐을 되새겨본다.
˝새해에는 시간을 아끼면서 살아가도록 하자....가차 없이 자신을 일깨우고 인간으로서의 관용과 서른이 넘은 남자로서의 기품을 닦아가도록 하자.

선(禪)에 더욱 정진하도록 하자. 인간으로서의 고독을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죽음이 목전에 있음을 항상 잊지 말고 되새겨야 한다.˝

일지 스님(1959 - 2002)이 산문집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에서 한 말이다. 이를 보며 스피노자(1632 - 1677)의 회심(回心)을 생각한다.

스피노자와 일지 스님 모두 사십대 중반에 타계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이 세계의 덧없음과 공허함을 보고 물질 추구에 전념하던 삶과 급격히 단절한 뒤 영원과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의 길을 걸었다면 일지 스님은 망각과 가난의 이유를 깨닫고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비정함을 배웠다.

스피노자와 붓다를 이성주의자이자 합리주의자로 규정(성회경 지음 ‘스피노자와 붓다‘ 43 페이지)한 글이 있다.

이 글을 보며 생각하는 것은 스피노자와 일지 스님이 공명하는 부분이다.

스피노자와 일지 스님은 세상의 허무에 주목하고 구원의 길을 모색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스피노자가 이성의 힘을 강조했다면 일지 스님은 자칭 불교인문주의자였다.

허무와 공허에 민감했던 일지 스님이 말하는 바 의상(義湘) 대사 역시 스피노자, 일지 스님과 같은 길을 걸은 분이다.

일지 스님은 의상 대사의 ‘백화도량 발원문‘을 일러 인간의 깊은 숙업과 번뇌를 누구보다도 깊이 깨닫고 있는 니힐리스트의 절망과 고독이 검은 잉크처럼 묻어나고 있다고 표현한다.

물론 일지 스님에 의하면 의상 대사의 글의 이면에는 신앙과 해탈에의 염원이 숨겨져 있다.(‘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28 페이지)

절망과 고독을 느낀다고 모두 신앙심을 갖지는 않으니 대단한 것이다.

스피노자를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인품을 지녔던 생활인, 강도 높은 작업과 지적 훈련으로 인해 검소한 삶을 살다가 간 은둔의 철학자로 설명한 한 철학자의 글도 생각하게 된다.(로저 스크러턴 지음 ‘스피노자‘ 32 페이지)

마음이 자주 외부 요인에 흔들릴 때 생각하는 것은 정념(情念)으로부터의 자유와 역량(力量;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과 기량)을 향한 자유를 강조한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지난 주 수요일 처음 들은 시인 특강에 참여한 것은 시(詩)를 써 등단이라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를 익히면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자유의 폭이 커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올해는 시(詩), 스피노자, 문화해설에 전념하는 원년(元年)이 될 것이다.

이런 다짐을 하는 지금이 내게는 원단(元旦; 설날 아침이란 말 말고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하는 날이란 뜻도 있는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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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수요일 들은 이승희 시인의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강의 가운데 한 가지 가르침이 기억에 남아 있다.

시란 다르게 보는 능력과 그렇게 본 것을 다르게 표현하는 능력이 있어야 쓸 수 있는 장르라는 것이다.

시인의 열강을 들으며 나는 passion이란 단어를 생각했다. 이 단어는 열정(熱情)으로 풀이할 수도 있고 정념(情念)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차이는 열정은 능동적인 뉘앙스의 말이란 점이고 정념은 수동적 뉘앙스의 말이라는 점이다.

준비하고 임하는 분(강연자)은 열정을 전하는 위치에 서지만 듣는 사람들의 경우 강연자의 준비에 맞먹는 간절함과 수용(受容) 의지를 갖추지 못하면 강의 시간은 겪어나가는 것이란 의미의 정념의 시간이 될 수 밖에 없다.

2017년의 매월 마지막 수요일에 열리는 이 강의 시리즈는 남은 시간들 모두가 주옥 같은 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문화가 있는 날 시인 특강‘은 일상에서 시의 소재를 어떻게 건져올리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등을 가르쳐주는 참 고마운 강의가 아닐 수 없다.

큰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 문제는 가르치는 분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리라. 이 부응은 백지의 사막을 홀로 건너는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야 가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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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으로 상상하라!

페미니스트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페미니즘 열풍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 것인지를 그려보아야 할 때입니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미국 페미니스트 57인과 한국 페미니스트 7인이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미래,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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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내일, 당신이 살고 싶은 그곳

리아 페이-베르퀴스트·정희진 외 지음|김지선 옮김


* 김지양(플러스 사이즈 모델), 김하나(브랜드라이터), 은하선(섹스칼럼니스트), 이진송(계간홀로편집장), 정희진(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최서윤(월간잉여편집장), 최은영(소설가) 필자로 참여했다.



더 많이 원한다.
우리는 이 간단한 말을 입 밖에 내기가 참 어렵다. 여자라서, 
더 많이 원하도록 허락받지 못해서. 
음식, 권력, 섹스, 사랑, 시간…….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갈구하면 
게걸스럽다느니 이기적이라느니 헤프고 대책 없고 어리석다느니 하는 욕을 먹는다. 
덜 원하고 덜 배고파하는 게 우리한테는 ‘합리적’이란다. 
이렇게 한참 살다 보니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게 된다. 
여성 혐오가 우리의 상상력까지 짓밟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이 한창 뜨고 있지만, 아직 우리는 내일 필요할 것을 생각하기는커녕 
당장 위기에서 숨 돌릴 틈도 없다. 
가부장제와 끊임없이 술래잡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슨 재주로 그런 큰 꿈을 꾸겠는가? 
지금 당신의 손에 들린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문들을 불쏘시개 삼아 태어났다. 
에세이, 이야기, 시, 시각예술 등을 망라한 작품 64편은 
당신의 페미니즘을 위한 창조적 상상력을 먹여 살릴 양식이다. 
당신이 꿈꾸는 페미니즘에 우리가 불을 지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다 함께 야심만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욕심쟁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머리말 중에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실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5명)


* 서평단 신청 방법

1. 본 게시물을 본인의 블로그나 SNS에 스크랩해 주세요. (전체 공개)

2. 스크랩 주소와 함께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를 아래 댓글로 남겨 주세요.


- 모집 인원: 5명

- 모집 기간: 2월 24일 ~ 3월 2일

- 당첨자 발표: 3월 3일 금요일 예정 (휴머니스트 서재 공지)

- 도서 발송: 발표 게시물 비밀댓글로 당첨자 정보 취합 후 일괄 발송     


* 서평단 활동 방법

1. 도서를 받으신 후, 일주일 내에 알라딘 서재(필수)와 개인 블로그 또는 SNS 1곳에 리뷰를 남겨주세요.

2. 당첨자 발표 게시물에 댓글로 리뷰 주소를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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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용어로 말하자면 인플루엔자와 감기는 ‘서로 소(素)‘이다. 무관(無關;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한 것이다.

그들의 무관은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혼자 가는 먼 집‘에 수록된 ‘혼자 가는 먼 집‘ 중 일부)이란 허수경 시인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결코 서로 소가 아니다. 나는 지금 사흘째 몸살과 맘살을 앓고 있다. 몸살이 맘살을 부른 것이다. 심란(心亂)하고 아프다.

그래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어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읽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당습(黨習)을 하지 말라고 분부한 부분이다. 당파에 기울어 다른 당을 배척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영조는 다섯 살의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겠다며 소동을 피웠을 만큼 소인이었다.

이 소동은 임인옥사 때 사형당한 서덕수를 신원한 자신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사직(辭職)으로 항의한, 사도세자의 스승 이광좌에게 영조가 놓은 맞불이었다.

영조는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에게 대리청정은 역모가 아니며 자신은 왕위에 초연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거적을 깔고 전교(傳敎)를 거두어 달라고 대죄(待罪)해야 했던 사도세자였다.

이 아프고 안타까운 역사를 돌아보는데 어찌 눈물이 없겠는가. 나는 곧 출근을 해야 한다. 눈물을 거두어야 할 시간이다.

허수경 시인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혼자 가는 먼 집‘에 실린 ‘마치 꿈꾸는 것처럼‘ 중 일부)란 말을 했지만 인생에 병가(病暇)라도 내고 싶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혼자 먼 집을 가는 나는 참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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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상처라고 가르치는 정원은/ 밤낮없이 빛으로 낭자했어..˝ 장석남 시인의 ‘오래 된 상처‘라는 시의 한 부분을 펴본다.

시인은 오래 된 정원을 하나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몸이 아프고 아픔은 침묵이 그립고/ 내 오래 된 정원은 침묵에 싸여/ 고스란히 다른 세상으로 갔지...˝란 부분을 보면 시인이 말하는 정원이란 마음에 대한 은유로 쓰인 말인 듯 싶다.

정신분석 비평을 하는 박지영 시인에 의하면 시인들은 증상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다. 나로서는 정원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지만 마음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박지영 시인은 프랑스 이야기를 한다. 그 나라에서는 가족 중 누군가 죽으면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는 것이다.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우리나라에서는 속으로 삭이고 지나간다는 사실이다.(‘욕망의 꼬리는 길다‘ 93 페이지)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는 것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이리라. 그런데 죽음 말고도 트라우마가 되는 것들은 많지 않은가.

박지영 시인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신과 상담을 받기보다 손쉽게 점집을 찾는다고 말한다. 박지영 시인은 주역이나 역학에 관심을 갖는 것을 현실도피의 한 방편으로 본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현실도피의 한 방편임을 증거하기보다 아픈 사람들이 많음을 증거하는 말로 보고 싶다.

왜 삶은 아픔으로 가득한 것일까? 부정편향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프다. 그렇기에 존재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고통을 당함으로써 인식되는 자아는 강력한 자아가 아니라 어떻게 하든 자신을 잊어버리려 하고 애원하고 항의하는 자아˝이다.(박승찬 외 지음 ‘괴로움, 어디서 오는가‘ 182 페이지)

아픔에 잠식되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 휩싸인다는 말 만큼 리얼한 것은 없을 것 같다.

정신분석가 이승욱은 삶의 핵심과 관련된 고통일수록 단박에 잘라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 고통을 받아들여 친구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상처 떠나보내기‘ 264 페이지)

이 말은 ˝정신분석은 증상의 소멸이 아니라 주체가 증상과 화해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말(백상현 지음 ‘라깡의 루브르‘ 98 페이지)과 차원이 같다.

이런 논리가 다른 심리 분야에도 있는지 알 수 없다. 무엇을 권할 수 있을까?

최근 내가 읽은 심리상담 책 중 권하고 싶은 것은 명법 스님의 ‘은유와 마음‘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의도대로 조작할 수 없다는 은유의 실체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모든 저항을 뚢고 휘몰아쳐서 본심을 드러˝내게 하는 은유는 너무 강력해 내담자는 그에 빨려들어가 내가 해체됨으로써 깊은 무의식의 내용들이 드러난다고 한다.(‘은유와 마음‘ 118 페이지)

은유 스토리텔링은 내담자와 상담자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함께 은유를 확장시켜나가는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새로운 은유로 전환해 심리 문제를 해결하는 기법이다.(113 페이지)

권할 것이 아니라 내가 참여하고 싶은 프로그램이다. 굳이 권한다는 말을 하려면 문제를 드러내는 듯 감추는 나에 대해서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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