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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목요일(1월 12일) 예정된 시험 때문에 읽고 싶은 책을 읽지 못하고 있다. 시험이 역사와 문화 분야의 것이기에 틈을 내 수험서에 나오는 사안을 내 관심사와 연결지을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교재에 수록된 남산한옥마을이란 항목에서 모탕고사란 말을 만났다. 집을 짓기 위해 나무 다듬기를 시작했음을 천지신명께 알리는 의식이다.

우리 민족은 한옥을, 신이 사는 공간 또는 신 자체로 보았다. 모탕고사 이후 상량(上梁) 고사를 지내 신의 탄생을 기뻐하기도 했다.

요한 호이징하는 ‘호모 루덴스‘에서 아갈마(agalma)를 이야기했다. 환희와 기쁨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독일어 프롤로켄(frohlocken)과 대등하게 쓰이는 말이다.

명사로는 장식, 내보이는 물건, 귀한 물건 등을 뜻한다. 밤의 아갈마는 별들을 시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입상, 신상(神像)도 아갈마가 의미는 중요한 개념이다.

호이징하가 아갈마란 단어로 의도한 것은 기뻐하며 제물을 바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호이징하의 사례는 우리의 모탕고사와 상량고사 등은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을 갖게 한다.

물론 축제(祝祭)를 축하의 제사를 의미하는, 일본식 단어로 규정, 비판한 이오덕 선생님이 생각나기도 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아갈마를 외모 안에 감추어진, 사랑하게 하는 무엇, 그리고 손에 넣을 수 없는 보물 등으로 설명한다.

잘 알려졌듯 호이징하는 ‘호모 루덴스‘란 책에서 정신과 손이 가장 자유롭게 움직이는 분야에서 놀이 기능이 특히 작용한다고 지적하며 놀이 요소는 도제(徒弟)가 장인

시험에 제출하는 작품 또는 장인이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조합에 제출하는 작품, 기술이나 능력을 걸고 내기하기 위해 내놓는 작품 등에서 뚜럿하게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이제 1월 19일 치러야 하는 시연(試演)에서 우리도 놀이(유희)성을 발휘하는 시나리오를 짤 수 있을까?

호이징하는 ‘문화사의 과제‘란 책에서 역사적 미문학(美文學) 즉 본질은 문학이며 역사는 단순한 액세서리에 불과한 분야를 설명하며 이를 자칭 역사인 체하는 학문으로 정의했다.

호이징하는 우리의 힘은 한계가 있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음을 새삼 느껴야 한다고 전제하며 역사가를 객관적 진리라는 이상에 자기 마음의

눈을 더욱 단단하게 붙들어 맬 수 있는 존재로 정의했다.(역사가 아닌 역사가를 보아야 한다는 말을 알게 해준 이**선생님께 감사를...)

시험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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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투지오 수도원 입구에 있는 표지판
- 침묵지대(Zone de Silence)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봉쇄수도원

여행객들은 왜 침묵을 엿보려 하는가
수도사들의 침묵과 고독을 넘보려 하는가
카르투지온들의 하얀 언어를 훔치고 싶어 하는가˝

조용미 시인의 ‘침묵지대‘의 도입부이다.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생피에르 드 샤르트뢰즈에 있다.

해발 1300미터에 있는 수도원까지 가는 길은 전나무 숲이 장관이라고...

월정사의 전나무 숲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카톨릭에는 봉쇄(封鎖) 수도원이 있다.

고독과 명상 속에서 신과 자신의 내면만을 향하도록 된 수도원이다. 신 역시 내면을 향해야 만날 수 있으니 결국 문제는 자신의 내면. 불교의 무문관(無門關)과 비교할 수 있을까?

에디트 슈타인이라는 철학자 출신의, 아우슈비츠 순교 성인인 카톨릭 수녀가 쓴 책을 읽은 기억을 되살려본다.

이해인 수녀께서 봉쇄수녀원 내에서도 친하게 지내는 무리가 있다는 말을 했듯 그 봉쇄 시설에서도 나름의 기쁨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점을 알고 싶어하는 것일까? 시인이 말하듯. 에디트 슈타인 역시 그런 고독과 유폐 속의 기쁨을 말한 바 있다.

아니 어쩌면 기쁨은 그런 유폐의 처소에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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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습니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 없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담론‘의 서문에서 신영복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독자가 텍스트가 말하는 세계를 넘어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이때부터 텍스트는 없고 독자가 부여한 의미만 남는다.˝ 이는 철학자 리쾨르의 말이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보며 나는 인터넷 글에 대한 반응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미는 쓰는 사람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 의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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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사회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가 타계 했다. 1926년 생 작가의 죽음. 내가 아끼는 그의 책은 ‘벤투의 스케치북‘. 벤투는 스피노자를 말한다. 위키피디아 등에는 그의 풀 네임을 바뤼흐 스피노자라 쓰고 있는데 알다시피 그는 유대교에서 파문된 후 바뤼흐를 버리고 라틴어 베네딕투스로 바꾸었다.

그러니 바람직한 명명은 존 버거의 책 제목인 ‘벤투의 스케치북‘임을 알 수 있다.(벤투는 포르투갈 버전) 사람들은 그가 내일 지구가 망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마틴 루터의 말이다.

물론 이는 베네딕투스로 이름을 바꾼 스피노자를, 유대식 이름인 바뤼흐라 부르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다. 하기야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의 가르침대로 슬픔이 멈추도록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슬픔의 원인을 이해하면 슬픔은 정념이기를 즉 슬픔이기를 멈춘다고 말했다.(‘에티카‘ 5부 정리 18 주석) 그리고 덧붙이자면 ˝...글을 쓴다는 것/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기대 없이,/ 하도록 돼 있는 일을 하는 것...˝이란 시 (2016년 4월 발간 ‘곡면의 힘‘ 수록 서동욱 시인의 ‘스피노자‘)를 기억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드로잉을 즐겼고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지만 발견된 그림은 없다. 존 버거는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드로잉을 시작할 때마다 우리는 그때만의 서로 다른 희망을 가지며 매번 드로잉은 예측할 수 없는 그때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드로잉은 비슷한 상상력의 작동으로 시작된다고 말했다.

존 버거가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이끌어가는 어딘가 또는 그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자신과 벤투가 공유했다는 인식에 기반해 그 점을 설명해낸 것이다.

버거의 다른 책인‘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문제의식과도 공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버거는 이 책에서 제도화된 암묵적 전제들과 다른 새로운 시각을 요구했다.

조용미 시인의 ‘나의 다른 이름들‘의 한 구절을 본다. ˝나는 내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으로 똘똘 뭉친 이 진실/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오늘도 내 속에 적절히 숨어서 내가 아닐 가능성을 엄밀/하게 엿본다˝ 같은 구절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구절들이다. 존 버거의 죽음을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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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7-01-03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타깝습니다. ‘벤투의 스케치북‘ 궁금했던 궁금증 푸네요. 애도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03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의 죽음이지요. 감사드립니다...
 

1월 8일 사직동(社稷洞)에서 열리는 시 낭송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읽을 시를 아직 고르지 못했다. '그대와 나'라는 단어가 있는 시를 고르다가 우연히 2 + 1의 시를 찾았다. "...그대와 나 사이 언덕에 달/ 이 뜨고 풀빛 어둠 촘촘해 오니.."(고옥주 시인의 '녹차 한 잔')와

 

"...그대와 나 사이, 끊을 수 없는 생각으로 내/ 리는 봄눈 머뭇거리며 눈발로 흩날리네"(한이나 시인의 '차를 마시며')... 그리고 그대(와 나)라는 말은 없지만 다음의 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식물은 아름답구나 뜨거운 물 속에서/ 휘저어지고 색을 풀어놓으며...누구인가 끓는 물에 식물을 풀어/ 그 색을 처음 받아 마셨던 이... "(이혜미 시인의 '초록의 쓰임새')

 

어제 시 낭송회를 주관하는 Y 시인과 통화를 해 J 시인은 오지 않느냐 물었다. Y 시인은 J 시인이 지난 11월에 참석했었는데 그때 참석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한 번만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J 시인이 참석하게 되면 알려주겠다고 덧붙이셨다.

 

지난 11월 참석하지 못한 것은 일정이 맞지 않아서였다. 만일 그때 참석했다면 J 시인의 시를 읽지 못했을 것 같다. 당사자 앞에서 시를 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부담되는 일이다. 더욱 나는 고른 시를 설명하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당사자 앞에서 시를 설명하고 느낌을 말하겠는가. 이번 참석에서 나는 J 시인의 부재를 틈타(?) 그 분의 시를 읽을 것이다.

 

이번 참석 후 어쩌면 "..백리향, 천리향, 만리향 이런 다정한 이름들과 함께 고요/ 하던 내 방은 향기로 어지러워졌다// 다음 날 다른 줄기에서 흰 꽃이 피기 시작했다 창밖으/ 로 삼월의 눈이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는 그 분의 다른 시를 그 분 앞에서 읽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3월 아니면 4월쯤.. 그 분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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