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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이다. 마침 오늘은 일요일이다. 일월 일일 일요일이란 말을 조용히 되뇌어본다. 만트라(진언) 같이 느껴지는 말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결국 흘러갈 것이다. 문제는 정체(停滯)이다. 2016년은 문화유산해설사 공부를 위해 그 어느 해보다 서울을 많이 찾은 해이다. 

 

서울은 그 유래에 있어서 몇 가지 시나리오를 갖는다. 어떤 것이 정설인지 관계없이 나는 지금의 서울이란 말이 좋다. 시인 릴케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는 말('말테의 수기')을 했지만 적어도 공부를 위해 찾는 서울은 참 좋다.

 

전쟁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경복궁, 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남산한옥마을, 북촌, 선정릉, 한양도성 등을 수업을 통해 만났고 개인적으로 덕수궁(이중섭전), 세종문화회관(호안 미로전) 등을 찾았다. 다시 진언 같은 일월 일일 일요일이란 말을 되뇌며 나의 2017년이 그 부드러운 유음(流音)처럼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흘러가길 기도해본다. 아니 그렇게 흐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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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7-01-01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록 사람이 그어놓고 만든 시간이긴 하지만, 2017년 한 해도 생각하신 일 모두 이루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구요 ㅎㅎ 저도 문화공연이나 전시 때문에 서울 가는데 참 좋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01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러시군요. 서울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되네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님도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맞으시길 바랍니다...
 

 

CIA는 세계 3대 요리학교의 하나인 Culinary Institute of the America의 약자이다. 그곳에서 유학한 뒤 귀국해 요리와 미술을 주제로 칼럼을 쓰다가 그림책까지 내게 된 최지영. 요리와 그림의 관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내 관심은 그가 미술서를 탐독하고 갤러리를 제 집 드나들 듯 오가며 애정을 키워 나간 끝에 미술 교양서를 썼다는 사실에 닿아 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세잔이다. 그는 사과를 많이 그린 화가이다. 그런데 그를 보며 그림과 먹을 것의 연관성을 논할 수 있는지 자신하지는 못하겠다. 세잔은 사과를 먹을 것으로 보고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잔은 참으로 다양한 색깔의 사과들을 그렸다. 세잔은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사과들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각도를 형성하는 화폭에 공존하는 그림들을 그렸다.(이정우 지음 ‘세계의 모든 얼굴’ 94 페이지)

 

세잔은 모델들에게 심한 부동성(不動性)을 요구했다. 세잔은 초상화 하나를 그리는 데도 백 번도 넘게 모델을 세웠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의 후기에는 주로 아내의 초상과 자화상이 주를 이룬다. 세잔은 모델에게 사과처럼 가만히 있을 것을 요구했다.(전영백 지음 ‘세잔의 사과’ 238 페이지) 이 글만 보면 세잔이 사과를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사람 대신으로 활용한 것으로 알겠지만 세잔에게 사과는 그런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다.

 

궁금한 것은 앞서 이야기한 ‘그림의 맛’의 저자(갤러리를 제 집 드나들 듯 오갔다는..)가 갤러리에서 어떤 걸음을 걸었을까, 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미술관 안에서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걸으라는 말을 했다.(요한 이데마 지음 ‘미술관 100% 활용법’ 25 페이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을 보기 위해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을까?

 

카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관(棺)을 닫기 전 어머니와의 마지막 인사를 거절했다. 반면 세잔은 생트빅투아르산을, 자신의 예술적 뜻을 이해해주고 끊임없이 후원해주었던 어머니의 장례가 있던 날에도 찾았다.(전영백 지음 ‘세잔의 사과’ 375 페이지) 세잔은 그 산에 오래 머물려 그림을 그렸다. 차이가 있다면 ‘그림의 맛’의 저자는 그림을 공부한 것이고 세잔은 화가여서 한 군데 오래 머물러야 했다는 점이다.

 

세잔은 빛에 반사된 산이 아닌 산의 존재감 자체를 그리려 한 화가라 말해진다. 대상을 입체적으로 조합한 뒤 분할하는 등의 방법 등으로 그림으로써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은 실재하는 생트빅투아르산과 사뭇 다른 모습이 되었다. 실재보다 그림을, 대상보다 표상을 중요하게 여긴 결과일 것이다. 그간 너무 소원(疎遠)했던 세잔을 통해 현대 미술로 진입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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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금요일 네 분께 경복궁 해설을 했다. 내가 치른 첫 full 해설이었다. 광명 출신의 네 여자 분인 그분들은 여중 또는 여고 동창들이었다. 그 분들 가운데 미술대학을 졸업한 분이 눈에 띄었다. 나이보다 10년 정도는 젊게 보이는, 모델을 해도 좋을 것 같은 그 분은 놀랍게도 최근 몇년간 마음 고생 때문에 얼굴이 많이 상한 것이라고 했다. 골프 때문에 팔꿈치가 아파 약을 복용하는 그 분을 보며 한 친구가 저 사람은 결혼 때문에 미술을 포기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내가 그 분에게 골프에서 힘 빼는데 삼년이란 말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사실이라 답했다. 그 분은 큰 근육을 쓰는 골프 때문에 그림의 섬세한 필치를 포기하게 되더라는 말도 했다. 힘 빼는데 삼년이란 말을 물은 것은 내가 힘을 뺀 스윙에 비유될 법한 쉬운 글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네 분들 가운데 문화 해설사가 있다. 그리고 올 여름 췌장 수술을 받은 분도 있다.

 

내년 봄 다시 경복궁 또는 다른 궁 해설을 통해 그 분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김소연 시인의 ‘목련 나무가 있던 골목‘이란 시가 생각나 해설사분께 보내 주었다. 나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봄이 올 때까지 주먹을 펴진 않을 겁니다 내 주먹 안에/ 당신에게 줄 밥이 그릇그릇 가득합니다 뜸이 잘 들고 있/ 습니다 새 봄에 새 밥상을 차리겠습니다 마디마디 열리는/ 따뜻한 밥을 당신은 다아 받아먹으세요˝

 

모두 이 추운 겨울을 잘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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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31 0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벤투님^^ 올해 하반기는 경복궁 해설에 올인하셨던 거 같아요^^? 좋은 공부였을 거 같아요.
올한해 뜻하신 계획은 잘 마무리 되셨는지...
내년도 건강히 읽고 생각하며 쓰는 인간으로 또 함께 하길 바랍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벤투의스케치북 2016-12-31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새벽에 오셨네요. 올 한 해도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신 agalma님! 말씀대로 경복궁에 많은 애정을 쏟았습니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어느 해보다도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합니다. 감사합니다... agalna님도 건강,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가지고 있는 책들이 많지 않아도 나름의 방식으로 서가는 가득 차게 된다. 그러면 눕혀 두거나 상자에 담아 두는 등의 비일상적인 방법으로 책을 보관하게 된다.

그러다가 한 뭉터기를 솎아낸다. 뇌세포가 잘려나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읽은 책이든 읽히지 못한 채 버려지는 책이든 그 자체가 기억은 아니다.

읽지 않은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읽은 책이라 해도 하나의 통합된 이야기로 엮여 기존 지식의 집에 합류되지 않는 이상 그냥 종이들이거나 글자들일 뿐이다.

솎여지는 책은 차라리 몸과 뇌의 세포들이라 해야 옳다. 인간은 ‘24시간마다 모든 세포가 대체되는 췌장, 열흘만에 전면 갱신되는 백혈구, 한달만에 대부분의 단백질이 교체되는 뇌 등 복잡한 사건의 집합‘이다(송희식 지음 ‘존재로부터의 해방‘ 71 페이지)

그럼에도 몇 달 전의 나를 변함없이 나라 부르는 것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한 존재의 정체성과 관련되는 기억을 넓게 보면 생명체가 생명을 이어가는 것도 포함된다.(이정우 지음 ‘영혼론 입문‘ 67, 69 페이지)

이번에 정리한 장르는 일부 건강 및 심리학, 소설 등의 책들이고 비정상적으로 보관되다가 서가에 꽂힌 책들은 역사, 건축, 예술 등의 책들이다. 내 관심을 반영하는 일이다.

언제까지라고 기약할 수 없지만 앞으로는 시, 시비평, 역사, 건축, 예술, 철학, 정신분석 등을 주로 읽게 될 것이다. 하나의 전기(轉機)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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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교보 아트스페이스에서 본 제주 출신 강요배 화가의 ‘노각성 조부졸’이란 작품. 노각성 자부줄이란 이름을 오늘 듣고 다시 그 의미 탐색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확인했다. 하늘을 오르내리는 데 쓰인, 제주 신화의 줄인 노각성 자부줄은 삼승(산신: 産神) 할망과 관계된 실이라고..

물론 노각성이란 말, 자부줄이란 말의 어원은 오리무중이다. 다만 하늘을 오르내리는 데 쓰인 줄이라는 사실.

이런 실마리가 되는 것으로 아리아드네의 실이 있다. 니체로 인해 유명해진 디오니소스의 아내 아리아드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르스라는 반인반우(半人半牛)의 괴물을 죽이기 위해 미궁으로 들어가는 테세우스에게 애인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타래.

테세우스는 실타래를 풀면서 미궁으로 들어가 괴물을 죽인 뒤 풀린 실을 따라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한다. 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안다. 중저가 클래식 CD로 유명한 낙소스 레이블도 생각난다.

노각성 자부줄이 수직을 향한 것이라면 아리아드네의 실은 수평을 향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바벨탑 vs 종묘(宗廟)를 생각하게 된다.

바벨탑이 수직을 향한 탑이라면 종묘는 불천위(不遷位) 다섯 임금만을 모시려던 계획에서 후퇴(?)해 시조(始祖)에 준(準)하는 훌륭한 임금들을 추가로 모시기 위해 길이를 늘린 건축물이다.

한 철학자는 쌓아서 구원을 얻으려는 심리를 바벨탑 무의식이라 정의했다. 견고한 도시와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음으로써 이름을 떨치려 한 바빌로니아 사람들을 창세기의 신이 언어를 혼란시킴으로써 더 이상 의사소통하지 못하게 해 쌓지 못하게 한 탑.

종묘는 조선의 멸망으로 더는 수평 증축(增築)되지 않게 되었다. 한 건축 칼럼니스트는 “중력의 지배를 받는 지구에서 무언가가 우뚝 서 있다는 것은 그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어서 항상 눈에 띈다.”는 말을 한다.

권력 과시적 성격이 강한 건축물의 실상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여주는 글이다.(서윤영 지음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 187 페이지) 다른 건물보다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 역시 권력 과시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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