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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평점 :
인문학 모임 이달의 도서라 아주 오래전 눈물 흘리며 읽었던 이 책을 다시 만났다. 우리에게 쓰라린 역사인 임진왜란을 그린 책이다. 웬만한 전쟁 영화보다 재미있는 당시의 기록은 실제이기에 더 애통하기도, 통쾌하기도 했다. 유성룡은 원래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얻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했고, 도체찰사와 영의정에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평양에 도착해서는 반대파의 탄핵으로 파직당했다. 다시 서울에 들어간 후 영의정으로 복직되었고, 선조가 서울로 돌아온 후 훈련도감의 제조를 맡아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인재 양성과 군비 강화에 힘을 썼다. 정유재란 이후 다시 탄핵되어 고향에서 저술 활동에 힘썼다. 이 책도 그 시기에 썼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겪으며 지휘했던 그는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며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그때 메모를 했을지도 모른다. 본문 중간에 그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했던 공책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사람의 이름과 지명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메모가 틀림없이 있었을 것 같다. 이 책은 현재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책으로서는 드물다고 한다. 전쟁을 가장 직접적으로 겪은 그가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하는 의미로 기록한 이 책 속에는 이순신 장군도 때때로 등장한다. 이번에도 장군의 활약을 읽으며 또 눈시울을 붉혔다. 나라만을 생각했던 그의 뛰어난 지략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다.
책의 초중반은 계속 패하는 이야기라 맥이 빠진다. 미리 대비하지 않은 우리의 군사들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우수수 패하고 도망하고 죽임을 당한다. 그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 나의 마음도 답답하고 힘들지만 결국 왜구를 몰아냈음을 알기에 그렇게 이어져 온 역사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계속 읽었다. 하지만 승리의 역사는 그렇게 길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 중 결정적인 사건들만을 담았기 때문이리라.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 기다리는 안타까운 장면과 이웃 나라의 전쟁에 힘을 다했던 장수와 군인들, 그리고 그들을 도왔던 저자의 눈물겨운 투혼이 감동적이다.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의 승리로 보급과 군사 지원이 끊어지고, 의병과 명나라 지원군으로 패색이 짙은 일본이었지만 돌아가면서도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부산에 오래 머무르는 등 전쟁은 쉽지 않았다. 치질에 걸려 누워 지냈음에도 사신을 맞이하고 전국을 돌며 전쟁에 대비했던 유성룡의 노력과 애국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가 애씀을 통해 많은 이들이 힘을 얻고, 마음을 모았으리라. 전쟁이나 난리로 영웅이 탄생하기도 한다. 수많은 의병장들과 이름 없이 죽어간 조상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다시 또 이런 외침이 있지 않도록 수백 년 전에 기록으로 남긴 저자의 경고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전 두 개로 나뉘어 서로 다툼을 하며, 전쟁의 위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안일하게 대처했던 것이 큰 화를 불렀다. 지금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지 모른다. 외세는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고, 나라는 분열되어 있다. 서로를 헐뜯기 바쁜 이때 조상이 경고한 메시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 귀신 장군이라는 말을 들었던 이순신 장군처럼 태평성대에 안일해지지 말고 늘 대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1633년 처음 출간된 후 일본에도 그 가치가 알려져 1695년 일본 교토에서도 간행되었고, 1712년 조선 조정에서 일본 수출을 엄금하는 명을 내리기도 했던 소중한 우리의 보물을 자랑스럽게 여겨야겠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 나도 중국 병사들과 함께 들어갔는데 성 안의 백성들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질 않았는데, 살아있는 사람들조차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있어 얼굴빛이 귀신같았다. 날씨마저 더워서 성 안이 죽은 사람과 죽은 말 썩는 냄새로 가득했는데 코를 막지 않고는 한 걸음도 떼기가 힘들었다. 건물은 관청과 개인 집을 막론하고 모두 없어져 버렸고, 왜적들이 거처하던 숭례문에서 남산 밑에 이르는 지역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와 세 대궐, 종류, 각 사, 관학 등 대로 북쪽에 자리잡은 모든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재로 변해 있었는데, 소공주 댁은 왜장 히데이에가 머물던 곳이라 건재했다. 나는 먼저 종묘를 찾은 다음 엎드려 통곡하였다. (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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