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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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은 독특한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와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 담겨진 의미에 대하여 생각을 펼치고 있습니다. 라블레의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즉, 즉각적으로, 끊임없이 판단을 하려 드는, 이해하기에 앞서 대뜸 판단해 버리려고 하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인간 행위에 대립하는 것, 즉 도덕적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은 소설의 부도덕이 아니라 바로 소설의 도덕이라는 것(15쪽)입니다.

 

<배신당한 유언들>은 이처럼 라블레를 시작으로 세르반테스, 발자크, 프루스트, 카프카 그리고 헤밍웨이 등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사유는 문학의 범위를 넘어 작곡, 음악, 번역, 지휘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서로 연관을 짓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작품을 해석하는데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즉 작품이 완성되어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가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을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역설이 성립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상정하여 쿤데라는 ‘배신당한 유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게 된 것 같습니다.

 

<배신당한 유언들>을 통하여 많은 앞선 시대의 작가들, 음악가들, 심지어 화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삶이 조명되고 있습니다만, 특히 문학의 카프카와 음악의 스트라빈스키가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특히 사후에 자신의 작품들의 처리에 대하여 구체적인 유언을 남긴 카프카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작품들을 정리하기로 결심한 카프카는 친구 브로트를 유언집행인으로 하여 “내가 쓴 모든 것들 가운데, 유효한(gelten) 것은 다음 책들뿐이다. <판결>, <운전기사>, <변신>, <감화원>, <시골 의사>, 그리고 <단식 광대>라는 단편 하나.(<명상> 몇 부 정도는 남겨도 무방하다. 나는 누구에게도 그것들을 폐기처분하는 수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단 한 부도 재판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382쪽)” 하지만 브로트는 “내가 그의 단어 하나하나를 광적으로 숭배했다는 것을” 카프카가 알았다거나 “만약 그의 의사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진심이었다면 당연히 다른 유언집행인을 선택했을 것이다.” 는 등의 이유로 친구의 유언을 집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청개구리 우화와 반대사례가 되는것인가요? 평소 부모의 말이라면 거꾸로 행동하기 일쑤인 아들을 두고 눈을 감을 수 없었던 부모는 개울가에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남기는데 청개구리 아들은 부모가 죽자 평소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해서 부모님 유언대로 개울가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부모의 무덤이 떠내려 갈까봐 개굴개굴 운다던가요?

 

쿤데라는 죽은 이의 뜻을 따르는 것이 “두려움이나 속박 때문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믿지 않기 때문(414쪽)”이라고 말합니다. 망자의 마지막 의사에 대한 복종은 “신비적”이며 “모든 합리적, 실제적 성찰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의 친구 브로트는 절친이 마지막 남긴 간곡한 부탁을 외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것을 진즉에 알았어야 하는건데 말입니다.

 

쿤데라는 카프카의 사례를 들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없애기로 결심하는 이유를 몇 가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죽음의 순간에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애착을 가지지 않게 된 것인데 실패의 유물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작품들은 사랑하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남긴 작품이 자신이 혐오스럽게 여기는 미래의 처분에 맡기게 된다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작품을 사랑하고 미래의 세상에는 관심도 없지만 대중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대중의 몰이해로 인한 괴로움을 죽어서까지 겪을 수 없다는 생각이라고 합니다.

 

이 마지막 이유는 바로 작품의 해석에서 다양한 접근을 넘어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부류들이 작가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입니다. 쿤데라가 <배신당한 유언들>이라는 제목을 정한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원작자의 의도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것을 ‘배신당한 유언’이라는 은유로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저자가 권하는 카프카의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카프카의 소설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것들을 소설 읽듯이 읽는 것뿐이다. K라는 등장인물에게서 저자의 초상을 찾는다거나 K의 말들에서 암호화된 신비한 메시지를 찾으려 들 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동거지, 그들의 말, 그들의 생각을 주의 깊게 좇으면서 눈앞에서 상상해 보는 것 말이다.(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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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사다
명승권.신재원.양광모 외 지음 / 청년의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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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5월 보건의료전문지 <청년의사>가 주관하는 팟캐스트 <나는 의사다>에 출연했다는 말씀을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2900). 미국에서 네 번째 광우병소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미국산 쇠고기의 검역을 중단해야 한다면서 촛불시위가 다시 시작되는 등 사회적으로도 민감한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발견된 광우병 소는 영국에서 시작해서 유럽으로 확산되고 사람에서 인간광우병까지 일으켰던 정형 광우병이 아니라 나이먹은 소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되는 비정형 광우병으로 밝혀져 쇠고기 유통을 크게 위협할 상황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출연한 <나는 의사다>에서는 진행과 관련하여 사전에 약속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주 패널이 준비한 큰 틀의 범위에서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숫자라거나 과거 사실들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사항은 가감없이 전달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의사다>는 ‘나는 가수다’라는 제목의 TV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몰이를 할 무렵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가 인터넷을 주로 사용하는 젊은이들 사이에 화제가 되면서 <청년의사>가 의료계의 화제를 이슈로 하는 팟캐스트를 출범시키면서 그 제목을 <나는 의사다>로 정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국민에게 올바른 의학 상식을 전달하고 보건의료 분야의 이슈와 뒷이야기를 전해줄 목적”으로 2012년 1월 10일 ‘한미 FTA와 보건의료’를 시작으로 월 2~3회 방송해왔다고 합니다. 저는 앞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10회에 출연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의사다>를 주관하는 <청년의사>에서는 그동안 진행된 팟캐스트를 다운로드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데 있어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녹음된 내용을 듣다보면 내용을 훑어본다거나 건너뛰는데 불편함이 따르고, 원하는 정보를 선택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방송내용을 요약하여 책으로 묶어내게 되었는데, 팟캐스트의 제목을 따서 <나는 의사다>로 정한 것 같습니다.

 

다양한 주제들이 모두 여섯 분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남녀의 성에 관한 부분입니다. 성에 관한 은밀한 이야기에서부터 성과 관련된 질환에서 임신과 출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암에 관한 내용인데, 암예방에 관한 주제는 음식에서부터 발암과 관련된 환경요인, 암투병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중독인데, 성형, 다이어트, 성범죄, 음주, 흡연 심지어는 자살에 이르기까지 설마 이런 것들도 중독일까 싶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네 번째 주제는 비타민, 피임약을 비롯한 약과 음식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다섯 번째 주제는 예방접종과 희귀질환 등 다양한 질병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마지막 주제는 건강보험, 건강검진, 상비약 수퍼판매와 같은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보건의료정책에 관한 것들인데, 제가 출연했던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목은 미친 소가 우리 건강을 위협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제가 <눈초의 광우병 이야기>를 통해서 상세하게 설명해 드렸던 것처럼 영국에서 시작되어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광우병은 이제 소멸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2010년 7월 19일자 AFP통신은 “유럽연합은 광우병(BSE)와의 전쟁에서 위대한 진전을 이루었고, 마침내 연방 내에서 질병이 박멸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존 달리(John Dalli) 유럽 보건 및 소비자 정책국장의 발언을 전한 바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1709030). 국제수역사무국 통계에 따르면 2012년에는 세계적으로 모두 21건의 광우병 소가 발견되었으며, 2013년 4월까지 1건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비정형광우병이 포함되기 때문에 0건으로까지 줄어들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해 제가 출연한 팟캐스트를 들은 일부 시청자들의 반발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몇 가지 저의 책을 포함해서 출간되어 있는 보다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읽어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좀 애매하게 알고 있었던 의학 정보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청취자의 반응이 있었던 것처럼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초대해서 속속들이 파헤치는 건강상식은 독자들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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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 -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
아르튀르 드레퓌스 지음, 이효숙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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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하는 것 같아 불안해보이지만, 생각이 열려있는 젊음에서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볼 수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는 20대 젊은이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은퇴를 기다리는 것 말고 다른 해결책들이 있기는 할까? 로또에 당첨된다거나 노숙자가 되는 것 말고.”

“다른 해결책들도 있지” 나는 단언했어.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

“아니, 여행을 한다거나,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것 같은 일들 말이야.”

“여행은 돈이 들어.” “별로 안 들어, 사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야.”

그러자 너는 네가 가진 에르메스 팔찌와 롱샴 필통을 가리켜 보이더구나.

(…)

몇 초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러고 나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 자살은 생각해봤니?” “뭐라고”

“네가 네 인생의 향후 45년을 너의 ‘자유’인 ‘은퇴’를 향해 지겨운 과도기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건 네 인생을 오늘 끝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45년 뒤의 은퇴를 미리 당겨서 고민하는 20대, 그런 고민을 하는 친구에게 자살을 생각해보았냐고 조언하는 20대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일자리를 찾기 위하여 오늘도 동분서주하는 우리나라의 청년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저자는 친구에게 지나친 조언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표지에 있는 말풍선에 ‘사소한 일상에 대한 철학적 단상’이라는 글귀가 들어 있습니다. 20대 작가다운 ‘튀는 생각’들을 따라잡기에 벅찰 정도입니다. 작가의 생각이 튀는 만큼 편집도 따라서 튀고 있습니다. 빨강, 까망 그리고 여백을 의미하는 하양마저도 글씨가 되고 있고 글씨 크기도 변화무쌍해서 글을 읽는 것인지 그림을 읽는 것인지 헷갈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자는 친구의 고민에 대하여 “진짜 문제는 지겨움이 아니라 허영심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죽음과 삶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허영심을 속여 삶에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볼 속셈인 것 같습니다. 저자는 체사레 파베세의 <삶이라는 직업> 책을 끌어오고 있습니다. 삶을 직업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행복한 독자는 읽을 필요가 없다는 차원을 넘어서 ‘행복할 경우는 읽지 말것!’이라는 말풍선을 달아두었습니다. “행복하십니까? 그러면 이 책을 읽지 마십시오!” 읽지 말라고 하니 더 읽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다가 ‘당신은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떤 답을 하실건가요?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니 당연히 ‘행복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자는 열여덟명이나 되는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들은 답변을 적고 있습니다. 행복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 끝에 저자는 “행복하다는 것이 너한테는 어떤 의미니?”라는 질문에 “글세, 날마다 철저히 사는 것, ‘카르페 디엠’ 아닐까?(62쪽)”하는 답변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습니다.

 

카르페 디엠은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의 한 구절 “현재를 즐겨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미래에 더 많은 시련이 있을 수도 있고, 큰 행복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포기하거나 미래의 행복을 미리 당겨서 흥청망청 낭비하지 말고 절제하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키면서 현재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자는 여행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나는 공항이라는 장소를 좋아해.(91쪽)’라는 말이나 자비에 드 메스트르 백작의 <내 방 일주여행>을 인용하는 것을 보면 작가가 알랭 드 보통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04741).

 

저는 저자가 권유한대로 오늘 행복할 수 있는 ‘카르페 디엠’을 골라냈습니다. 불행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마도 읽고는 바로 답이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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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 개역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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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공부할 적에 저의 선생님께서는 공부하는 동안 미국을 두루 돌아보라고 권하셨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 그리고 미국인을 이해하려면 그만큼 그들의 삶을 겪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유명하다는 곳을 구경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따로 다녀가려면 부담이 적지 않겠다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소는 물론 그곳으로 가는 길 주변에 흩어져 있는 자잘한 장소까지도 두루 섭렵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행 때마다 일정을 빠듯하게 잡기 마련이고, 요즘 젊은이들 용어로 인증샷 찍고 바람같이 다음 장소로 달려가는 주마간산식의 여행이 되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아내가 운전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서 하는 운전이었는데도, 하루 평균 500마일을 이동해야 했고, 하루에 1200마일을 운전했던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식의 여행이다 보니 공들여서 일정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일단 여행 장소와 일정이 결정되면 놓치지 말고 구경해야 하는 장소에 대한 정보를 모으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들을 최대한으로 엮어서 여행코스를 정하고, 구경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감안해서 하루 단위로 나누는 작업을 합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는 여행기간 동안 사고 없이 계획된 일정에 맞추어 이동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기 때문에 여행하는 일보다는 여행을 계획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한 곳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여행을 통해서 저나 가족들이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이었나 싶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부모님들 그리고 처가식구들을 한국 사람들이 즐겨 찾는 미국의 명소로 안내했다는 자기만족을 빼고 나면 명소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들을 메모해두었다가 저녁에 숙소를 정하면 그런 느낌들이 희미해지기 전에 글로 정리하기는 했습니다만, 간략하기만 하고 건조한 느낌으로 가득한 글만 남았습니다.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에 대하여;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86857>를 읽으면서 강한 인상이 남았던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진즉 읽었더라면 미국에서의 여행이 실속과 의미를 더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art of travel’입니다. 흔히 ‘art’를 예술 혹은 미술로 이해하게 됩니다만, 영한사전에는 ‘기술, 기교, 재주, 기예, 방법’ 등의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행의 기술>이라는 제목이 전혀 생뚱맞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래도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무언지 모르게 건조하고 가벼워 보이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에리히 프롬의 ‘The art of loving’을 <사랑의 기술>로 번역한 이래 생긴 관성효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뭐 원제목에 담겨 있을 예술적인 느낌을 살리는 우리말은 무엇이 있을까요?

 

알랭 드 보통이 소개하는 여행을 잘 하는 기술을 소개해 드리기 전에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점을 먼저 짚어보려고 합니다. 이 책에서 그는 바베이도스, 마드리드, 시나이 사막, 프로방스, 레이크 디스트릭트, 암스테르담 등의 여행을 통하여 느낀 점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출발, 동기, 풍경, 예술, 귀환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에 맞게 여행의 느낌을 나누고 있는데, 바베이도스로 출발해서 바베이도스에서 귀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먼 곳에 다녀오기 위해서 공항을 이용하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출발할 때와 도착할 때 이용하는 공항에서 떠오르는 느낌도 다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어떻든 여행을 하게 되면, 동기가 있을 것이고, 여행지의 풍경을 구경하게 되고, 특히 방문한 장소에 박물관과 같은 예술품을 감상할 기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출발한 장소로 돌아오게 되겠죠.

 

여행에 관한 이 책의 독특한 서술구조를 먼저 적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 아홉 꼭지로 나뉘어 있는 여행에 관한 작가의 서술은 자신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그가 소위 안내자로 지목하고 있는 사람과 관련된 여행 이야기가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동기’편에 나오는 이야기 ‘호기심에 대하여’에서는 저자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마드리드를 방문하는 여행을 알렉산더 훔볼트라는 이름의 스물아홉 살 난 독일인 안내한다고 요약되어 있습니다. 생물학, 지리학, 화학, 물리학, 역사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훔볼트가 1799년 떠난 남아메리카 탐험여행의 기록을 요약하면서 자신의 마드리드 여행을 버무려 놓고 있는 것입니다.

 

“훔볼트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해발 5,076미터인데도 눈 위로 바위 이끼가 보였다. 이끼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800미터 정도 아래서였다. 봉플랑 씨[훔볼트의 동행자]는 해발 4,500미터에서 나비를 한 마리 잡았으며, 거기에서 500미터를 더 올라가서도 파리를 볼 수 있었다.’(153쪽)”라는 인용만 보더라도 훔볼트의 남아메리카 탐험여행은 놀라운 것입니다. 물론 탐험여행이라고는 하지만 훔볼트의 뛰어난 관찰력과 관찰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은 그가 박물학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사실 여기에서 작가는 마드리드 탐험에 나섰다고는 하지만, 당시 마드리드에 관한 측정치는 모두 알려져 있던 것이라고 눙치면서, 정작 마드리드에서 느낀 점은 내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만만치 않는 관찰력과 관찰한 내용을 환상적인 글로 옮기는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다른 여행이야기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마드리드의 호텔 근처 공터에 서있는 건물들 사이로 돌아가는 고속열차의 움직임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안에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부엌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열차 안의 많지 않은 승객들은 뿔뿔이 흩어져 바깥의 도시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신문을 읽고 있었다. (…) 승객과 아파트 거주자들은 서로에게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서로 만나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궁상맞은 호텔을 피하고 싶어 산책에 나선 관찰자의 망막에서만 짧은 순간 만났을 뿐이다.(273쪽)”


작가는 과거에 살았던 다양한 안내자의 여행을 통하여 뽑은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윌리엄 워즈워스가 태어나고 삶의 대부분을 보냈던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았을 때, 워즈워스가 이곳을 산책하면서 얻은 영감을 작품에 담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의 시인들이 시의 소재가 되는 자연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의식(儀式)의 틀 내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워즈워스는 자연현상이야 말로 고귀한 시재(詩材)가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워즈워스는 여름이 지난 뒤 나이팅게일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느낀 기쁨을 “오, 나이팅게일이여! 그대는 진정 / 불의 심장을 가진 생물이로다……. / 그대는 마치 포도주의 신 덕분에 발렌타인 같은 순교자라도 된 듯이 노래하는구나.”라고 적은 것에 대하여 작가는 “이런 시들은 아무렇게나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자연에 대한 심오한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175쪽)”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 2월부터 정착해서 작품 활동을 했던 프로방스를 찾았을 때는, “그해 겨울 파리에서 아를로 오면서 얼마나 마음이 들떴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236쪽)”는 고흐의 회고담을 인용하고, 고흐의 그림을 통하여 프로방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반 고흐가 없었다면 올리브 나무 역시 지금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전날 내 눈에 띄었던 올리브 숲을 땅딸막한 덤불로 치부해버렸다.(248쪽)”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작가의 프로방스 여행기에는 흑백사진이라서 많이 아쉽습니다만, 고흐가 프로방스에서그린 많은 작품들을 인용하여 독자들이 작가의 느낌에 공감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우리가 일단 아름다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면, 예술 작품은 자잘한 방식으로 우리가 여행하고 싶은 곳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236쪽)”고 적은 것처럼 문학 혹은 예술과 관련된 장소를 여행할 때 유념해야 할 점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게 됩니다. 아마도 여행지에서 느낀 감동을 나중에 다시 회상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카메라가 없던 과거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림에 조예가 있는 분이라면 그림으로 남겼을 것이고, 글쓰기에 조예가 있는 분이라면 글로 남기려 했을 것입니다. 물론 고려말 시인이자 문장가 김항원이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 풍광을 돌아보고, 부벽루에 걸려 있는 다른 이들의 시가 감동을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뜯어냈지만 막상 자신의 느낀 감동을 글로 적으려니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이라고 점을 찍고 말았다는 고사(古事)처럼 글로 옮기기에 너무 벅찬 감동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네 선조들은 자연을 유람하면서 느낀 감동을 유기(遊記)라는 장르의 글로 남겨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그때의 감동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나종면 지음,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7235)

 

작가 역시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을 붙드는 방법은 19세기 말 런던에서 태어나 사람들에게 데생을 가르쳤던 존 러스킨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심리적이고 시각적인) 요인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에 관해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277쪽)”라고 하였습니다.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재능이 없는 사람도 데생을 연습할 가치가 있는 것은 데생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풀밭에 누워 자라는 풀잎을 그리곤 했다. 초원의 구석구석, 또는 이끼 낀 강둑이 나의 소유가 될 때까지.(283쪽)”라는 러스킨의 말을 듣고 보면, 데생은 분명 사진과 차원에서 자연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가 하면 러스킨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와 같은 여행자들의 맹목과 성급함에 개탄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으면서 본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281쪽)

 

러스킨은 또한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를 하는 것에 더하여 아름다움에 대한 인상을 굳히려면 “말로 그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글로 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러스킨이 말하는 ‘말 그림’은 어떤 장소의 생김새를 묘사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심리학적 언어로 그 장소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분석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합니다. 러스킨이 알프스에서 만난 소나무와 바위를 묘사한 글을 소개합니다. “알프스 절벽 밑에서 소나무들을 올려다보노라면 오래지 않아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소나무들은 사람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의 돌출부나 위험한 바위 턱에 고요히 모여 있는데, 각기 옆에 있는 나무의 그림자 같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서로를 알지 못한다.(296쪽)”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말 그림’을 그려내려면 평소 주변을 잘 관찰하고 묘사하는 연습을 꾸준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은 저의 여행 패턴을 바꾸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작가의 의도대로 여행하는 방법을 개선하는 방향에 무게는 두는 책읽기가 된 셈입니다. 하지만 같은 책을 읽은 장성주님의 경우는 “여행은 장소들의 숭고함을 들이키는 문화적 행위이다”라고 정의하고 자연이 품고 있는 숭고함을 깨닫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읽어(장석주 지음, 일상의 인문학), 저와는 차원 다른 책읽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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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일하는 분들과 한달에 한번씩 영화를 감상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행사로 고른 작품이 더스틴 호프만의 감독데뷔작인 <콰르텟>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고 있는 요양병원 평가업무와 연관을 지을 수도 있겠다는 무의식적 생각이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 <콰르텟>은 은퇴한 음악인들이 모여 사는 곳 비첨하우스입니다. 이곳에 사는 음악인들은 은퇴는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 음악도를 위한 강좌를 열기도 하고, 전성기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기도 합니다. 특히 연례 갈라 콘서트를 통해서 모금한 돈은 비첨하우스의 운영에 크게 기여하영국의 내로라하는 연주가 혹은 성악가들이 입주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 장점도 될 수 있겠습니다만, 때로는 젊은 시절 경쟁관계에 있던 경우에는 다소의 긴장관계도 볼 수 있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로 경쾌하게 시작되는데, 바그너의 탄생을 맞아 열리는 비첨하우스 운영자금을 모으는 갈라 콘서트를 준비하기 위한 연습이 한창입니다. 아무래도 나이가든 분들이다 보니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어 갈라 콘서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분이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콘서트에 나설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새로운 입주자의 등장은 갈라콘서트의 분위기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빅카드가 됩니다. 입주자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모셔온 새로운 입주자는 오페라계의 프리마돈나 전설의 소프라노 진 호튼(매기 스미스 扮)입니다.

 

 

진의 등장은 입주자들에게 놀라움이었지만, 특히 젊었을 적에 진과 결혼했다가 헤어졌던 테너 레지(톰 커트니 扮)는 심기가 불편해집니다. 진 역시 레지가 살고 있는 비첨하우스에 입주하기로 결정하면서 레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마음에 사과하는 말을 미리 연습하기도 합니다만, 레지는 대화 자체를 거부합니다. 나이가 들면 완고해진다고 하죠? 하지만 진과 친하게 지냈던 알토 씨씨(폴린 콜린스 扮)와 베이스 윌프(빌리 코널리 扮)의 중재로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게 됩니다.

 

진의 등장은 갈라 콘서트를 준비하는 책임을 맡은 시드릭(마이클 캠본 扮)에게는 복음 같은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연히 진-레지-윌프-씨씨로 콰르텟을 구성해서 이들이 전성기에 들려주어 음악애호가들을 사로잡았던 베르디에 오페라 ‘리골레토’의 4중창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가씨여’를 부르자고 제안합니다. 이 영화의 각본가을 맡은 로날드 하우드가 “인간의 목소리를 위해 쓰여진 곡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극찬하였다는 노래입니다. 

 

하지만 진은 이미 음악을 접은 상태입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비평에 민감했던 진은 이미 하강기에 들어있는 자신의 음악에 좋지 않은 비평이 쏟아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더스틴 호프만 감독이 <콰르텟>을 “아직 남은 것이 너무 많은 ‘인생의 3악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라 정의한 것처럼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는 이들은 진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려 나서지만 완강하게 저항하는 진 때문에 씨씨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황을 지켜본 진 역시 마음을 돌려 리골레토의 연습에 나서게 됩니다. 

 

 

드디어 공연하는 날, 대기실에서 무대에 오를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돌발상황이 벌어집니다. 갑자기 씨씨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대기실을 나가려 하는 것입니다. 평소 가벼운 건망증 증세를 보이던 씨씨가 사실은 치매초기였던 것입니다. 공연과 같은 중요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치매의 중요한 증상이라는 점을 주위에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다행히 진이 씨씨를 다독여 상황을 바꾸게 되는데 이런 임기응변은 치매환자를 간병하는 분들이라면 마음에 챙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진의 대응과 달리 씨씨의 관심에서 멀어진 공연의 중요성을 이해하라고 씨씨를 압박하게 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고백하면 이 장면에서 씨씨가 어디로 가려했는지 그리고 진이 무슨 말을 해서 씨씨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연에 집중하도록 했는지 분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서 얼버무려 적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기억이 예전 같지 않다는 변명으로 가름하기에 읽으시는 분이 양해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씨씨가 진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병석에 누운 다음에 레지가 진을 설득하려고 건넨 명대사를 외우려 애를 썼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 아쉽습니다. 어두운 극장에서 부스럭거리면서 핸드폰을 꺼내 메모를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서 더욱 아쉽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씨씨에게 제2의 유아기가 온 것은 아니라는 진의 답변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에 나온 대사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에 위안을 삼습니다.

 

 

 

갈라 콘서트의 오프닝에서 입주한 음악가들의 주치의가 참석자들에게 전하는 인사말이 인상적입니다. “비첨하우스 직원들은 멋진 음악가들을 모시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 공연을 기다리며 이 분들은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덕분에 젊게 사시죠. 공연 시작 전 한 말씀만 더 드리죠. 비첨하우스 직원들은 이 분들께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고 삶에 대한 사랑을 전염시키고 희망을 주시니까요. 진심입니다. 감사합니다.” 실제로 영화의 중간 중간에 이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어린이,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삶과 예술에 대한 애정과 포용이 단지 노년에서만이 아니라 어느 세대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합니다.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소녀들의 연주를 들으며 진심이 담긴 성원을 보내는 음악가들의 모습이나 젊은 음악도들에게 오페라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는 레지의 모습을 보면 이 분들이 진정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레이디 가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랩과 같은 최근 음악의 유행에 관심을 가지고 젊은 음악도가 들려주는 랩을 듣고는 오페라와 랩이 결국 다를 것이 없으며, 어떤 나이에나 예술을 즐길 수 있고 그 형태가 다양할 뿐이라고 설명하는 레지의 강의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는 ‘나이듦’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비첨하우스에 들어가기 위하여 짐을 정리하는 진의 쓸쓸한 모습에서 나이듦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비첨하우스에 사는 분들의 넘치는 활력은 나이듦이 쇠락하는 육체에 대한 서글픔보다는 남아 있는 인생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진과 씨씨가 갈라무대에 오르기 전에 대기실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하여 젊은 시절 멋쟁이 테너에게 한눈을 팔았던 자신을 질책하는 진의 모습을 엿본 레지가 진에서 남은 여생을 함께 하자고 청하는 장면은 이들이 함께 여생을 즐기게 될 것을 예측하게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처와 같은 악처라도 등을 긁어줄 아내가 함께 하는 여생이 더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통하여 감독으로 데뷔한 더스틴 호프만은 “나이를 먹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라지만 인간의 영혼과 정신은 더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관대한 시선과 나이듦에 대한 낙관적인 자세 때문에 이 작품을 연출했다"고 했다고 합니다.(세계일보 2013년 3월 28일자 기사. ‘아직 남은 것이 더 많은 인생 3악장의 아리아’에서 인용) 

 

영화의 전편을 통하여 넘치는 따듯함이 저절로 마음에 흘러들었고 나이듦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객석을 가득 채웠던 것은 아니지만 엔딩크레딧이 끝나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객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화는 처음입니다. 제 생각에는 영화에 츨연한 잘 알려진 쟁쟁한 음악가들이 엔딩 크레딧에 줄줄이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엔딩 크레딧에서 영화 속에 실제로 등장한 음악가와 배우들의 젊은 시절의 사진과 그들의 빛나는 경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독은 예술에 평생을 바친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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