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1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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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집 <라쇼몽>을 읽게 된 이유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어떤 책에서 ㆍ<라쇼몽>에 담긴 ‘덤불 속’을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덤불속에서 칼에 찔려 죽은 채 발견된 남자의 주검과 관련된 사람들 - 죽은 남자를 처음 발견한 나무꾼, 죽은 남자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탁발승, 살해 용의자를 체포한 수색꾼, 죽은 남자의 장모, 죽은 남자를 살해한 용의자, 죽은 남자의 아내 그리고 무녀의 입을 빌린 죽은 남자 등 7명 - 의 진술 가운데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중점적으로 검토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건의 목격자들의 경우 기억의 불확실성을 그리고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범인과 죽은 남자 그리고 아내의 경우는 처한 상황에 따라서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정황인데, 이 부분에 대하여 작품해설에서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거짓과 과장이 없다 하더라도, 정물 하나도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보는 이의 시력과 관념 때문에 달리 보인다. 그러니 정물이 아닌, 스토리가 사람들과 얽힌 사건에 대한 통일된 증언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사건은 ‘덤불’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269쪽)” 이 단편의 제목이 ‘덤불’인 것도 작가의 심려를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열입곱 편의 단편들 가운데 주체 못할 정도로 긴 코를 가진 스님의 마음고생을 코믹하게 묘사한 <코>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기묘한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작가가 죽던 해 발표된 <세 개의 창>에서는 세 사람의 군인이 맞는 죽음을 그리고 있어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타인의 눈으로 바라본 것은 아닌가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여기 수록된 열입곱편의 단편을 통하여 다양한 군상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라쇼몽>이라는 이름의 단편이 가장 앞에 온 것은 여기 수록된 단편들에 담긴 에피소드가 동명의 영화에 담겼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지진과 화재 등 온갖 재해로 황폐해져 사람들 발길이 끊긴 라쇼몽은 연고없는 시체가 버려지는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인데, 비를 말린 뱀고기를 건어라고 팔다가 전염병으로 죽은 여인의 머리털을 뽑아 가발을 만들어 팔려는 노파와 노파의 옷을 벗겨 달아나는 하인의 모습에서 더 이상 무너져 내릴데가 없어 보이는 인간상을 보여주고, 흔들리는 관솔불이 미치지 못하는 누각 밖은 ‘오로지 깊은 동굴처럼 새카만 밤이 보일 뿐’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세상살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난감할 따름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흔히 예술하는 사람의 생각을 일반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도 합니다만, <지옥변>에 등장하는 당대 제일의 화공 요시히데야 말로 그런 예술인의 전형이라고 하겠는데, 정말 현실에서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지옥변상도를 그리라는 호리카와 대신의 영을 받아 그림을 그려나가던 요시히데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장면을 보아야 하겠다고 청을 넣게 됩니다. “대체로 본 것이 아니면 그릴 수가 없고, 잘 그려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리지 못한 것과 같다.(78쪽)”고 하는데 완성단계에 이른 작품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레에 탄 귀족부인이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화룡첨정으로 하고자 하니 수레에 귀족부인복장을 한 여인을 태워 불태워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대신은 그 수레에 요시히데의 딸을 태웠고, 불타는 수레에 탄 여인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난 화가는 불을 끄러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붓을 들어 그림을 완성하더라는 범인(凡人)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에서 유난히 귀기(鬼氣)가 느껴져 공연히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요시히데의 그림에 대한 집요한 욕망을 다룬 <지옥변>도 그렇고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에 깔린 아내의 고통을 거두어주려 살해한 남편의 이야기를 다룬 <의혹>도 그렇고, 마음에 구김이 가는 이야기는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은 것은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일까요?

 

인간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고 그런 삶에 대한 가치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특징이라고 보았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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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상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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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04741>이 계기가 되어 요즈음 여행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어쩌면 멋진 여행기를 한편 써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행기를 처음 타고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장거리 여행을 몇 차례 다녀오면서 여행에서 얻은 느낌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사진을 제대로 챙길 수 없어 그때 적은 여행기는 아직도 파일함에 감추어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외국에라도 갈라치면 출발 전 준비과정부터 다녀와서 마무리할 때까지 전과정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도 읽는 맛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서 맛갈나는 여행기 쓰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결국은 그런 이유로 읽게 되었습니다만, 도서목록에 올려진 것은 저의 또 다른 관심사인 ‘눈물’과도 인연이 있습니다. 박지원의 산문을 새롭게 조명한 주영숙님의 책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20858>에서 조선 남자의 눈물에 대한 연암의 열린 생각의 단편을 소개한 것을 읽고서 더 자세하게 알아보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하는 <열하일기>에서, 7월 8일 요양의 백탑이 모습을 드러내는 산모롱이에 막 벗어난 연암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135쪽)”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툭 트인 경계를 보고 별안간 통곡을 생각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연암의 독특한 울음론이 이어집니다. 울음이란 지극한 정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슬플 때만 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갓난 아이가 태어날 때 우는 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을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오니 참으로 시원한 마음이 들어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한번 펼쳐내는 것이라고 해석한 연암은 그런 이유로 갓난아이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의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만경평야를 제외하고는 지평선을 볼 수 없는 좁은 우리나라 땅에 갇혀 살던 연암이 광활한 요동땅을 처음 보면서 느낀 감정이 바로 울음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적었을 것입니다. “이제 요동벌판을 앞두고 있네. 여기부터 산해관까지 1,200리는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꽤맨 듯하고, 예나 지금이나 비와 구름만이 아득할 뿐이야. 이 또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136쪽)”

 

연암은 명나라와의 관계에 매이지 않고 실용적인 면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봉황성에서는 벽돌을 구워 집과 성을 쌓은 모습을 보고서 돌로 쌓은 우리나라의 성과 비교하여 장단점을 논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문의 누각을 세우는 공사에서 사용하는 거중기의 모습을 신기하게 보면서 이를 창졸간에 배울 수 없는 것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거중기가 실용화된 것은 연암이 연경에 다녀온 것보다 조금 뒤가 되는 1792년 정조대왕이 다산 정약용에게 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을 내어주면서 방책을 강구하라 하셨고, 다산은 신형 거중기를 제작하여 공사에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니 불과 10여년 안팎의 일입니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일은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 익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저 산천과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으로도 여행의 가치가 작다할 수는 없겠지만, 여행을 통하여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무엇을 챙길 수 있다면 여행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하겠습니다. 특히 다양한 그림자료들을 풍부하게 곁들이고 있어 연암이 보고 들은 것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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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버트런드 러셀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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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북소리]를 통해서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교수가 1920년 3월부터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내용을 묶은 <철학이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10144>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철학공부에 관심을 붙이려면 기본을 먼저 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책읽기입니다.

 

가세트교수가 “철학은 우주에 대한 인식”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적 사유의 대상을 우주로 확대하면서 우주를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 철학과 물리학으로 대변되는 과학의 차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인식을 다루고 있는 물리학은 물질이라는 가시적이며 현실적인 대상과 직면하는 반면 철학은 연구대상이 되는 우주와 직접 대면하지 않고 사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철학자는 존재하는 일체의 전체성에 관심을 가지고 전체성 속에서 각 사물의 위치, 역할, 지위와 같은 각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 양상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세트교수의 철학 강연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가라앉고 있는 스페인의 사회적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이었고 합니다. 즉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스페인의 지성들은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를 통하여 국민들의 의식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가세트교수의 강연은 특히 철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되었고 합니다. 안밖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가 인문학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가세트교수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북소리] 리뷰가 어려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철학공부가 부족하다 보니 쉽게 설명하는 방법을 아직 깨치지 못한 탓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또 다른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소개해보려 합니다. 버틀란트 러셀(1872-1970)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입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와 동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러셀은 수학자, 철학자이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그리고 사회비평가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고틀롭 프레게,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분석철학을 창시한 철학자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The Problems of Philosophy”라는 원저의 제목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정한 제목이기 때문에 저자의 집필의도가 정확하게 담겼는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현상과 실재에 대한 철학적 접근방식을 논하고 철학적 지식의 한계와 가치를 논하고 있는 점에서 본다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책내용에 충분히 부합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나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철학의 문제들만을 다루었다.”고 서문에 적은 것처럼 철학적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는 문제를 제외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공부에 입문한 사람이 개념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러셀은 “이치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지식이 이 세상에 있는가?(7쪽)”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쌓아올리게 될 지식의 성격을 정의하기 위한 말머리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사유가 출발하는 기본적인 질문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과 사물이 사실상은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현상(現狀)과 실재(實在)’를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셈입니다. 러셀은 근대철학의 창시자 데카르트의 체계적 회의법-의심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밝혀질 때까지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의심한다-을 인용하면서 “한 본능적 신념이 다른 본능적 신념과 충돌하지 않는 한 그것을 배척할 이유는 전혀 없다. 따라서 본능적 신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면 그 체계 전체를 받아들일 만하다.(30쪽)”고 하였습니다. 즉 철학은 다른 방식으로는 답을 내놓을 수 없는 경우에도 궁극적 실재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세트교수가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의 한계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처럼 러셀 역시 “자연과학은 다소간 무의식적으로 무든 자연현상은 운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빠져 있다.(32쪽)”고 자연과학의 한계를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저술하던 무렵 나왔던 광양자설-1905년 광전 효과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제창한 가설-로 인하여 그동안 빛의 성질을 완벽하게 설명해오던 파동설의 위상이 흔들리던 시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러셀은 “과학적인 물질세계에는 색깔과 소리 등이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시각이나 촉각을 통해 알게 되는 <공간>도 없다.(33쪽)”고 주장하였는데, 논리적 추론을 통하여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입증할 방법을 찾아내는 과학 분야가 추구하는 목표가 거시적 대상으로부터 미시적 대상으로 변화하고 있는 추이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였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러셀이 물질의 존재와 본성에 이어 관념론을 논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지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관념을 통하여 인식하게 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직접지(直接知)에 의한 지식과 기술에 의한 지식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직접지란 직접경험을 통하여 얻는 지식을 말하며 기술에 의한 지식은 타인이 경험하고 남긴 기술을 읽고 얻은 지식을 말합니다. 러셀은 경험에 의하여 획득한 직접지는 기억을 통하여 축적된다고 하였고, 기술에 의한 지식은 경험에 의해 확인될 수도 없고 논파될 수도 없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신념에 바탕하고 있는 만큼 우리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러셀은 모든 지식은 경험에 의해 이끌어지고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어떤 지식은 선천적이라는 주장에 대하여도 가설적인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존재를 주장하는 모든 지식은 경험적인 것으로, 존재에 대한 선천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거나 존재할지도 모를 것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현실적 존재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특수한 사물에 대해 미리 어떤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이상하게 보인다고 하면서도 보편적 세계에 관한 지식, 예를 들면 ‘2+2는 4’라거나 더 나아가 ‘삼각형의 각 변에 그것과 대립되는 정점으로부터 수선(垂線)을 긋는다면 세 개의 수선은 한 점에서 만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어 선천적 지식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러셀이 인용하고 있는 일반적 명제라는 것도 그와 같은 사실을 먼저 깨달은 누군가가 남긴 기술을 통하여 습득한 지식에 의존하여 알게 된 것이며, 물체의 색깔과 같은 것도 사실은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합의에 의하여 정해진 용어가 전승되어 온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경험에 의한 직접지가 기억에 의하여 축적되고 있다는 점에 관하여 우리는 이미 기억의 불확실성은 물론 기억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만, “기억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믿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직관적 판단 일반의 신빙성에 대한 의심을 갖게 한다.(136쪽)”고 적고 있어 러셀 역시 이런 문제에 대하여 고민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니얼 샥터교수는 <기억 일곱 가지 죄악;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62617>을 통하여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기억이 일으키는 대표적인 오류로는 소멸, 정신없음, 막힘, 오귀인(誤歸因), 피암시성, 편향, 지속성 등 7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기억의 오류는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며 누구에게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지식의 속성으로 돌아가서 러셀은 우리들의 지식의 원천을 개관하여 사물에 대한 지식과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구분하고, 각각은 직접적인 것과 파생적인 것이 있고, 직접지라고 하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 지식은 특수인가 혹은 보편인가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기술에 의한 지식이라고 하는 사물에 대한 파생적 지식은 직접지와 진리에 대한 지식이 포함된다고 하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지식을 <직관적>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는 자명한 것으로 감관에 주어지는 것을 진술하거나, 추상적 논리 및 산수적 원리, 그리고 어떤 윤리적 명제 등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러셀은 사물에 대한 지식과는 달리 진리에 대한 지식에는 대립되는 것, 즉 <오류>가 있다는 점을 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인 진리를 믿는 것처럼 참되지 않은 진리, 즉 허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문제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일사분란하게 정리될 수 없어 각자의 신념에 따라 진리와 허위를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08년 광우병 파동, 천안암 침몰사건 등에서 전문가들조차 갈라 서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 것처럼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사회현상입니다.

 

러셀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신념이 참된 것으로 되기 위해 신념과 사실 사이에 있어야 하는 대응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정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1) 진리가 대립적인 것, 곧 허위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2) 진리를 신념의 성질로 만들고, 3) 진리를 신념과 외부의 사물의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성질로 만드는 진리론을 추구해야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굳게 믿는 진리가 참인지 오류인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 즉 최고도의 자명성을 갖추지 못한 경우를 개연적 의견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많은 과학적 가설들이 정설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가설을 설명할 수 있는 증거들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일반적인 철학적 가설 역시 개연적 의견으로 출발하여 정합성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가세트교수가 “철학은 우주에 대한 인식”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적 사유의 대상을 우주로 확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러셀은 철학적 지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글에서 우주 전체에 대한 지식은 형이상학에 의하여 획득될 것 같지 않다고 토로하면서, “비교해부학자가 한 개의 뼈를 보고 전체적으로는 어떠한 동물이었는지를 아는 것처럼, 헤겔에 따르면 형이상학자는 실재의 한 조각을 보고 이 실재가 전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러셀은 사고의 세계에서나 사물의 세계에서도 본질적인 불완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고의 세계에서도 추상적인 또는 불완전한 개념을 검토하는 경우, 이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잊으면 우리는 모순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사실 비교해부학자가 단지 한 조각의 뼈를 가지고 어떤 동물의 것인지 명확하게 짚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앞서 러셀이 자연과학의 한계를 넌지시 내비쳤다고 적었습니다만,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과학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지식은 본질적으로 과학적 지식과 다르지 않다. 철학에는 열려 있으나 과학에는 열려지지 않는 지혜의 특별한 원천은 없으며 철학에 의해 획득된 결과는 과학으로부터 획득된 결과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철학을 과학과 다른 학문으로 만드는 철학의 본질적 특징은 <비판>이다.(176쪽)”이라고 정리하여, 철학은 과학과 일상생활에서 채용되는 원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비정합성을 발견할 수 없을 경우에 이 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러셀은 철학적 가치를 철학이 추구하는 불확실성에서 찾고 있습니다. “철학은 스스로 제기한 의심에 대해 확실성을 갖고 무엇이 참된 대답인가를 말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들의 사고를 확대하고 관습의 전제로부터 해방시키는 많은 가능성을 시사할 수 있다(183쪽)”는데 가치를 두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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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서광의 유쾌한 책 읽기
김의기 지음 / 다른세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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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매체라고는 하지만 독자가 있는 매체에 고정코너로 쓰는 리뷰는 아무래도 개인블로그에 적는 리뷰와는 다른 무엇을 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분들의 리뷰쓰기에 관심이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리뷰쓰기가 1년하고도 절반을 넘어서면서 무언가 변화를 주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더하여 지난 번 부서 워크숍에서 책읽기에 대한 작은 발표를 한 다음에 내용을 더 보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책읽기와 리뷰쓰기에 관한 책들을 읽을 기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어느 독서광의 유쾌한 책읽기>는 오랜 책읽기가 바탕이 되어 국제통상전문가로 성장하고 지금은 WTO 등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김의기님이 자신의 책읽기를 정리하는 의미로 펴낸 책이라고 합니다. “새 책을 읽으면 새 애인을 만나는 것 같고,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 옛 애인을 만나는 것 같다.(9쪽)”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는 저자는 진한 커피 향처럼 은은하고 깊은 맛이 나는 책들, 재미와 감동을 주는 책들을 선정하여 자신의 느낌을 가볍고 경쾌하게 서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30년간 적은 자신의 독서노트에서 특별한 고전 30권을 뽑아, 이들 작품을 영어 원문으로 읽었고, 원문이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인 경우 영어 번역본으로 읽고 리뷰를 썼다고 했습니다.

 

한편의 글이 평균 11쪽에 달하는 긴 글을 읽다보면 선정된 책의 원문을 넉넉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 소개된 책의 리뷰를 적을 때도 텍스트의 내용을 인용하기에 다소 부담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영어 원문 혹은 영어 번역문을 자신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적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부담을 느끼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원저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그 부분에서 얻은 느낌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독특한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선정된 30권은 모두 고전으로 분류되는 책이며, 특히 소설류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호메로스, 소포클레스와 같은 그리스 작가로부터 헤밍웨이와 같은 현대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기의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작품은 30권이지만 작가는 25명입니다. 호메로스, 톨스토이,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등 네 명의 작가는 각각 두 편의 작품이 선정되었으며,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무려 세편이나 선정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작가는 독특한 의미의 최고의 작품을 꼽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작품을 독자에게 추천한다면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작가가 읽고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작품은 도스토엡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인류가 수확한 문학의 최대 걸작은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정치학이나 철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책은 플라톤의 <국가론>을 꼽았습니다. 물론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독자에 따라서 다른 기준으로 책을 선정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선정한 30권의 책들 가운데 저는 겨우 9권을 읽었을 뿐입니다. 저도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최고의 책을 한번 골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저자 역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뽑았는데, 제가 가졌던 의문, 개츠비가 왜 위대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의외로 저자는 셰익스피어에 대하여 <햄릿> 한 편만을 선정하고 있고, 냉정한 입장인 것 같습니다. "고뇌는 있지만 결단이 없다는 것이 셰익스피어의 아쉬운 점(201쪽)“이라는 짤막한 논평이 그 이유라고 보이는데,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가운데 고뇌보다는 단순한 결단을 앞세운 <맥베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01840>도 있지 않을까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과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와 소포클레스의 <엘랙트라>를 현대적으고 각색한 사르트르의 <파리떼>에 대한 리뷰를 읽으면서 평소 그리스 비극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의문에 해답을 찾은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조만간 이들 작품들을 읽고 정리를 해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전소설을 읽으면서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는지를 개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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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오케스트라 - 리처드 용재 오닐과 함께한 1년의 기적
이보영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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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우리사회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타문화권 출신인 사람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이현정님의 <미래의 우리를 만드는 다문화교안;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71335>을 읽고서야 타문화권에서 온 분들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2011년 현재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우리 국민의 비율은 전 국민의 2.5% 이상이며 이 비율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현정님의 설명을 듣고서 다문화의 빠른 정착과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에 있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외국인노동자들을 위한 일을 하고 계시는 임선일박사님께서 엄마를 잃은 딸을 위하여 필리핀에서 온 젊은 신부와 재혼을 결정한 아빠의 의견을 존중해 준 딸이 젊은 새엄마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동화로 엮어낸 <언니, 엄마;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33095>는 감동적인 스토리였습니다. 다문화가정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읽을거리,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로서 <언니, 엄마>가 우리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하는 내용을 저도 리뷰에 담았던 것 같습니다.

 

역시 MBC는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주제를 잘 잡아내는 것 같습니다. <양심 냉장고>,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기적의 도서관> 등처럼 사회적 파장이 큰 기획프로그램들을 시청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다문화가정의 소년소녀들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단독 콘서트를 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을 방영했다는 사실을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이보영PD님의 책 <안녕?! 오케스트라>를 통해서야 알게 되어 많이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다문화사회로 가는 우리사회를 위하여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어느새 다문화가정의 어린이가 15만명이나 된다고 하니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무언가 시작해야 할 때라는 말이 실감난다 하겠습니다.

 

“<안녕?! 오케스트라>는 오케스트라의 이름이자, 프로그램의 제목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클래식을 접하는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모여서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그 아이들이 무대에 서기까지 고군분투하는 1년의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라고 이보영PD님은 기획의도를 프롤로그에 적었습니다. 그리고 방송에서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만난 가슴 훈훈한 사연들을 엮어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스물다섯 명의 단원들 - 그 가운데 두 명은 개인 사정으로 중도에 그만두었기 때문에 콘서트까지 같이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 그리고 이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기부한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꼬마단원들의 재능을 이끌어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과 카이 등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누구 하나 소홀함이 없도록 담아내고 있는 책이 바로 <안녕?! 오케스트라>입니다. 단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돋보이고 평소 학교에서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키워낸 것은 이 프로그램의 커다란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물다섯명의 단원들의 부모 중 한 분은 필리핀, 키르기스스탄, 콩고, 중국, 우즈베키스탄, 태국, 파키스탄, 일본, 한국, 러시아 등 열 나라에서 오신 분들이라니 다문화 오케스트라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리처드 용재 오닐이 맡은 것은 필연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이 “2012년 1월, 이보영PD에게서 베네주엘라의 저 유명한 엘 시스테마 같은 오케스타라를 이끌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전형적인 ‘나’는 그 일에 대하여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저, 하겠어요!’”라고 이 프로그램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개인적 배경의 영향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6.25사변으로 전쟁고아가 된 어머니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태어난 용재 오닐은 미국사회의 다문화가정 출신이었을 터라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MBC가 다문화가정의 어린이들과 우리사회를 연결하는 가교로 음악을 선택한 것은 아주 적절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 모든 이야기를 하지요. 음악은 완전하고 강력한 힘이 있어요. 설명도 필요없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있는 그대로 전해지는 것. 바로 그런 것이 음악입니다.(19쪽)”라는 용재 오닐의 설명은 바로 이점을 뒷받침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어린이들이 땀으로 일궈낸 공연을 보신 분들이나 보시지 못한 분들도 <안녕?! 오케스트라>를 읽으면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감동의 물결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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