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 개역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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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공부할 적에 저의 선생님께서는 공부하는 동안 미국을 두루 돌아보라고 권하셨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 그리고 미국인을 이해하려면 그만큼 그들의 삶을 겪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유명하다는 곳을 구경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따로 다녀가려면 부담이 적지 않겠다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소는 물론 그곳으로 가는 길 주변에 흩어져 있는 자잘한 장소까지도 두루 섭렵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행 때마다 일정을 빠듯하게 잡기 마련이고, 요즘 젊은이들 용어로 인증샷 찍고 바람같이 다음 장소로 달려가는 주마간산식의 여행이 되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아내가 운전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서 하는 운전이었는데도, 하루 평균 500마일을 이동해야 했고, 하루에 1200마일을 운전했던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식의 여행이다 보니 공들여서 일정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일단 여행 장소와 일정이 결정되면 놓치지 말고 구경해야 하는 장소에 대한 정보를 모으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들을 최대한으로 엮어서 여행코스를 정하고, 구경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감안해서 하루 단위로 나누는 작업을 합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는 여행기간 동안 사고 없이 계획된 일정에 맞추어 이동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기 때문에 여행하는 일보다는 여행을 계획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한 곳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여행을 통해서 저나 가족들이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이었나 싶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부모님들 그리고 처가식구들을 한국 사람들이 즐겨 찾는 미국의 명소로 안내했다는 자기만족을 빼고 나면 명소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들을 메모해두었다가 저녁에 숙소를 정하면 그런 느낌들이 희미해지기 전에 글로 정리하기는 했습니다만, 간략하기만 하고 건조한 느낌으로 가득한 글만 남았습니다.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에 대하여;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86857>를 읽으면서 강한 인상이 남았던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진즉 읽었더라면 미국에서의 여행이 실속과 의미를 더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art of travel’입니다. 흔히 ‘art’를 예술 혹은 미술로 이해하게 됩니다만, 영한사전에는 ‘기술, 기교, 재주, 기예, 방법’ 등의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행의 기술>이라는 제목이 전혀 생뚱맞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래도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무언지 모르게 건조하고 가벼워 보이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에리히 프롬의 ‘The art of loving’을 <사랑의 기술>로 번역한 이래 생긴 관성효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뭐 원제목에 담겨 있을 예술적인 느낌을 살리는 우리말은 무엇이 있을까요?

 

알랭 드 보통이 소개하는 여행을 잘 하는 기술을 소개해 드리기 전에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점을 먼저 짚어보려고 합니다. 이 책에서 그는 바베이도스, 마드리드, 시나이 사막, 프로방스, 레이크 디스트릭트, 암스테르담 등의 여행을 통하여 느낀 점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출발, 동기, 풍경, 예술, 귀환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에 맞게 여행의 느낌을 나누고 있는데, 바베이도스로 출발해서 바베이도스에서 귀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먼 곳에 다녀오기 위해서 공항을 이용하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출발할 때와 도착할 때 이용하는 공항에서 떠오르는 느낌도 다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어떻든 여행을 하게 되면, 동기가 있을 것이고, 여행지의 풍경을 구경하게 되고, 특히 방문한 장소에 박물관과 같은 예술품을 감상할 기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출발한 장소로 돌아오게 되겠죠.

 

여행에 관한 이 책의 독특한 서술구조를 먼저 적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 아홉 꼭지로 나뉘어 있는 여행에 관한 작가의 서술은 자신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그가 소위 안내자로 지목하고 있는 사람과 관련된 여행 이야기가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동기’편에 나오는 이야기 ‘호기심에 대하여’에서는 저자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마드리드를 방문하는 여행을 알렉산더 훔볼트라는 이름의 스물아홉 살 난 독일인 안내한다고 요약되어 있습니다. 생물학, 지리학, 화학, 물리학, 역사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훔볼트가 1799년 떠난 남아메리카 탐험여행의 기록을 요약하면서 자신의 마드리드 여행을 버무려 놓고 있는 것입니다.

 

“훔볼트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해발 5,076미터인데도 눈 위로 바위 이끼가 보였다. 이끼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800미터 정도 아래서였다. 봉플랑 씨[훔볼트의 동행자]는 해발 4,500미터에서 나비를 한 마리 잡았으며, 거기에서 500미터를 더 올라가서도 파리를 볼 수 있었다.’(153쪽)”라는 인용만 보더라도 훔볼트의 남아메리카 탐험여행은 놀라운 것입니다. 물론 탐험여행이라고는 하지만 훔볼트의 뛰어난 관찰력과 관찰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은 그가 박물학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사실 여기에서 작가는 마드리드 탐험에 나섰다고는 하지만, 당시 마드리드에 관한 측정치는 모두 알려져 있던 것이라고 눙치면서, 정작 마드리드에서 느낀 점은 내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만만치 않는 관찰력과 관찰한 내용을 환상적인 글로 옮기는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다른 여행이야기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마드리드의 호텔 근처 공터에 서있는 건물들 사이로 돌아가는 고속열차의 움직임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안에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부엌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열차 안의 많지 않은 승객들은 뿔뿔이 흩어져 바깥의 도시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신문을 읽고 있었다. (…) 승객과 아파트 거주자들은 서로에게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서로 만나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궁상맞은 호텔을 피하고 싶어 산책에 나선 관찰자의 망막에서만 짧은 순간 만났을 뿐이다.(273쪽)”


작가는 과거에 살았던 다양한 안내자의 여행을 통하여 뽑은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윌리엄 워즈워스가 태어나고 삶의 대부분을 보냈던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았을 때, 워즈워스가 이곳을 산책하면서 얻은 영감을 작품에 담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의 시인들이 시의 소재가 되는 자연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의식(儀式)의 틀 내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워즈워스는 자연현상이야 말로 고귀한 시재(詩材)가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워즈워스는 여름이 지난 뒤 나이팅게일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느낀 기쁨을 “오, 나이팅게일이여! 그대는 진정 / 불의 심장을 가진 생물이로다……. / 그대는 마치 포도주의 신 덕분에 발렌타인 같은 순교자라도 된 듯이 노래하는구나.”라고 적은 것에 대하여 작가는 “이런 시들은 아무렇게나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자연에 대한 심오한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175쪽)”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 2월부터 정착해서 작품 활동을 했던 프로방스를 찾았을 때는, “그해 겨울 파리에서 아를로 오면서 얼마나 마음이 들떴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236쪽)”는 고흐의 회고담을 인용하고, 고흐의 그림을 통하여 프로방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반 고흐가 없었다면 올리브 나무 역시 지금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전날 내 눈에 띄었던 올리브 숲을 땅딸막한 덤불로 치부해버렸다.(248쪽)”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작가의 프로방스 여행기에는 흑백사진이라서 많이 아쉽습니다만, 고흐가 프로방스에서그린 많은 작품들을 인용하여 독자들이 작가의 느낌에 공감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우리가 일단 아름다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면, 예술 작품은 자잘한 방식으로 우리가 여행하고 싶은 곳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236쪽)”고 적은 것처럼 문학 혹은 예술과 관련된 장소를 여행할 때 유념해야 할 점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게 됩니다. 아마도 여행지에서 느낀 감동을 나중에 다시 회상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카메라가 없던 과거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림에 조예가 있는 분이라면 그림으로 남겼을 것이고, 글쓰기에 조예가 있는 분이라면 글로 남기려 했을 것입니다. 물론 고려말 시인이자 문장가 김항원이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 풍광을 돌아보고, 부벽루에 걸려 있는 다른 이들의 시가 감동을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뜯어냈지만 막상 자신의 느낀 감동을 글로 적으려니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이라고 점을 찍고 말았다는 고사(古事)처럼 글로 옮기기에 너무 벅찬 감동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네 선조들은 자연을 유람하면서 느낀 감동을 유기(遊記)라는 장르의 글로 남겨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그때의 감동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나종면 지음,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7235)

 

작가 역시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을 붙드는 방법은 19세기 말 런던에서 태어나 사람들에게 데생을 가르쳤던 존 러스킨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심리적이고 시각적인) 요인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에 관해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277쪽)”라고 하였습니다.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재능이 없는 사람도 데생을 연습할 가치가 있는 것은 데생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풀밭에 누워 자라는 풀잎을 그리곤 했다. 초원의 구석구석, 또는 이끼 낀 강둑이 나의 소유가 될 때까지.(283쪽)”라는 러스킨의 말을 듣고 보면, 데생은 분명 사진과 차원에서 자연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가 하면 러스킨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와 같은 여행자들의 맹목과 성급함에 개탄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으면서 본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281쪽)

 

러스킨은 또한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를 하는 것에 더하여 아름다움에 대한 인상을 굳히려면 “말로 그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글로 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러스킨이 말하는 ‘말 그림’은 어떤 장소의 생김새를 묘사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심리학적 언어로 그 장소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분석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합니다. 러스킨이 알프스에서 만난 소나무와 바위를 묘사한 글을 소개합니다. “알프스 절벽 밑에서 소나무들을 올려다보노라면 오래지 않아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소나무들은 사람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의 돌출부나 위험한 바위 턱에 고요히 모여 있는데, 각기 옆에 있는 나무의 그림자 같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서로를 알지 못한다.(296쪽)”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말 그림’을 그려내려면 평소 주변을 잘 관찰하고 묘사하는 연습을 꾸준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은 저의 여행 패턴을 바꾸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작가의 의도대로 여행하는 방법을 개선하는 방향에 무게는 두는 책읽기가 된 셈입니다. 하지만 같은 책을 읽은 장성주님의 경우는 “여행은 장소들의 숭고함을 들이키는 문화적 행위이다”라고 정의하고 자연이 품고 있는 숭고함을 깨닫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읽어(장석주 지음, 일상의 인문학), 저와는 차원 다른 책읽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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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일하는 분들과 한달에 한번씩 영화를 감상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행사로 고른 작품이 더스틴 호프만의 감독데뷔작인 <콰르텟>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고 있는 요양병원 평가업무와 연관을 지을 수도 있겠다는 무의식적 생각이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 <콰르텟>은 은퇴한 음악인들이 모여 사는 곳 비첨하우스입니다. 이곳에 사는 음악인들은 은퇴는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 음악도를 위한 강좌를 열기도 하고, 전성기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기도 합니다. 특히 연례 갈라 콘서트를 통해서 모금한 돈은 비첨하우스의 운영에 크게 기여하영국의 내로라하는 연주가 혹은 성악가들이 입주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 장점도 될 수 있겠습니다만, 때로는 젊은 시절 경쟁관계에 있던 경우에는 다소의 긴장관계도 볼 수 있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로 경쾌하게 시작되는데, 바그너의 탄생을 맞아 열리는 비첨하우스 운영자금을 모으는 갈라 콘서트를 준비하기 위한 연습이 한창입니다. 아무래도 나이가든 분들이다 보니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어 갈라 콘서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분이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콘서트에 나설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새로운 입주자의 등장은 갈라콘서트의 분위기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빅카드가 됩니다. 입주자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모셔온 새로운 입주자는 오페라계의 프리마돈나 전설의 소프라노 진 호튼(매기 스미스 扮)입니다.

 

 

진의 등장은 입주자들에게 놀라움이었지만, 특히 젊었을 적에 진과 결혼했다가 헤어졌던 테너 레지(톰 커트니 扮)는 심기가 불편해집니다. 진 역시 레지가 살고 있는 비첨하우스에 입주하기로 결정하면서 레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마음에 사과하는 말을 미리 연습하기도 합니다만, 레지는 대화 자체를 거부합니다. 나이가 들면 완고해진다고 하죠? 하지만 진과 친하게 지냈던 알토 씨씨(폴린 콜린스 扮)와 베이스 윌프(빌리 코널리 扮)의 중재로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게 됩니다.

 

진의 등장은 갈라 콘서트를 준비하는 책임을 맡은 시드릭(마이클 캠본 扮)에게는 복음 같은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연히 진-레지-윌프-씨씨로 콰르텟을 구성해서 이들이 전성기에 들려주어 음악애호가들을 사로잡았던 베르디에 오페라 ‘리골레토’의 4중창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가씨여’를 부르자고 제안합니다. 이 영화의 각본가을 맡은 로날드 하우드가 “인간의 목소리를 위해 쓰여진 곡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극찬하였다는 노래입니다. 

 

하지만 진은 이미 음악을 접은 상태입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비평에 민감했던 진은 이미 하강기에 들어있는 자신의 음악에 좋지 않은 비평이 쏟아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더스틴 호프만 감독이 <콰르텟>을 “아직 남은 것이 너무 많은 ‘인생의 3악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라 정의한 것처럼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는 이들은 진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려 나서지만 완강하게 저항하는 진 때문에 씨씨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황을 지켜본 진 역시 마음을 돌려 리골레토의 연습에 나서게 됩니다. 

 

 

드디어 공연하는 날, 대기실에서 무대에 오를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돌발상황이 벌어집니다. 갑자기 씨씨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대기실을 나가려 하는 것입니다. 평소 가벼운 건망증 증세를 보이던 씨씨가 사실은 치매초기였던 것입니다. 공연과 같은 중요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치매의 중요한 증상이라는 점을 주위에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다행히 진이 씨씨를 다독여 상황을 바꾸게 되는데 이런 임기응변은 치매환자를 간병하는 분들이라면 마음에 챙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진의 대응과 달리 씨씨의 관심에서 멀어진 공연의 중요성을 이해하라고 씨씨를 압박하게 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고백하면 이 장면에서 씨씨가 어디로 가려했는지 그리고 진이 무슨 말을 해서 씨씨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연에 집중하도록 했는지 분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서 얼버무려 적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기억이 예전 같지 않다는 변명으로 가름하기에 읽으시는 분이 양해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씨씨가 진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병석에 누운 다음에 레지가 진을 설득하려고 건넨 명대사를 외우려 애를 썼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 아쉽습니다. 어두운 극장에서 부스럭거리면서 핸드폰을 꺼내 메모를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서 더욱 아쉽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씨씨에게 제2의 유아기가 온 것은 아니라는 진의 답변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에 나온 대사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에 위안을 삼습니다.

 

 

 

갈라 콘서트의 오프닝에서 입주한 음악가들의 주치의가 참석자들에게 전하는 인사말이 인상적입니다. “비첨하우스 직원들은 멋진 음악가들을 모시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 공연을 기다리며 이 분들은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덕분에 젊게 사시죠. 공연 시작 전 한 말씀만 더 드리죠. 비첨하우스 직원들은 이 분들께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고 삶에 대한 사랑을 전염시키고 희망을 주시니까요. 진심입니다. 감사합니다.” 실제로 영화의 중간 중간에 이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어린이,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삶과 예술에 대한 애정과 포용이 단지 노년에서만이 아니라 어느 세대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합니다.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소녀들의 연주를 들으며 진심이 담긴 성원을 보내는 음악가들의 모습이나 젊은 음악도들에게 오페라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는 레지의 모습을 보면 이 분들이 진정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레이디 가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랩과 같은 최근 음악의 유행에 관심을 가지고 젊은 음악도가 들려주는 랩을 듣고는 오페라와 랩이 결국 다를 것이 없으며, 어떤 나이에나 예술을 즐길 수 있고 그 형태가 다양할 뿐이라고 설명하는 레지의 강의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는 ‘나이듦’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비첨하우스에 들어가기 위하여 짐을 정리하는 진의 쓸쓸한 모습에서 나이듦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비첨하우스에 사는 분들의 넘치는 활력은 나이듦이 쇠락하는 육체에 대한 서글픔보다는 남아 있는 인생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진과 씨씨가 갈라무대에 오르기 전에 대기실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하여 젊은 시절 멋쟁이 테너에게 한눈을 팔았던 자신을 질책하는 진의 모습을 엿본 레지가 진에서 남은 여생을 함께 하자고 청하는 장면은 이들이 함께 여생을 즐기게 될 것을 예측하게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처와 같은 악처라도 등을 긁어줄 아내가 함께 하는 여생이 더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통하여 감독으로 데뷔한 더스틴 호프만은 “나이를 먹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라지만 인간의 영혼과 정신은 더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관대한 시선과 나이듦에 대한 낙관적인 자세 때문에 이 작품을 연출했다"고 했다고 합니다.(세계일보 2013년 3월 28일자 기사. ‘아직 남은 것이 더 많은 인생 3악장의 아리아’에서 인용) 

 

영화의 전편을 통하여 넘치는 따듯함이 저절로 마음에 흘러들었고 나이듦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객석을 가득 채웠던 것은 아니지만 엔딩크레딧이 끝나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객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화는 처음입니다. 제 생각에는 영화에 츨연한 잘 알려진 쟁쟁한 음악가들이 엔딩 크레딧에 줄줄이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엔딩 크레딧에서 영화 속에 실제로 등장한 음악가와 배우들의 젊은 시절의 사진과 그들의 빛나는 경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독은 예술에 평생을 바친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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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그럴듯한 착각들
실뱅 들루베 지음, 문신원 옮김, 니콜라스 베디 그림 / 지식채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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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제2차 광우병파동의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인연 때문인지 사회심리학에 관심이 큰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당신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그럴듯한 착각들>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에 쉽게 이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목차는 더욱 눈길을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무엇이 사람들을 패닉에 빠지게 하는가?’, ‘유언비어는 어떻게 널리 퍼지는가?’, ‘틀린 줄 알면서도 왜 다수의 의견에 따를까?’, ‘완벽해 보이는 그들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이유’ 등등 2008년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양 진영의 시각에서 보면 이해되지 않는 상대진영 사람들의 논리나 행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줄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책입니다.

 

사회심리학은 사회학과 심리학이 결합된 학문인데, “가상으로든, 은연중에든 혹은 명백하게든 타인의 존재와 그들의 특징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주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자극이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분석하고, 나아가 개개인이 갖고 있는 심리적 요인들이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과학적 연구영역”이라고 합니다.(8쪽) 저자는 심리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실험적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시람들이 저지르는 말도 안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답을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러한 실험들의 상당수는 비교적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심리학의 고전영역에 속하는 것들로 보인다는 점과 이러한 고전적 실험에 대하여 비판적인 실험들이 제시되지 않고 있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패닉에 빠지는 대표적 사례로 1938년 10월 30일에 미국에서 있었던 라디오방송에 대한 시민들이 공포에 빠진 사건입니다.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 <우주전쟁>을 각색한 라디오 드라마가 방송을 탔는데, 화성인이 지구를 습격하여 인류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상황을 그려내 수백만명의 미국 청취자들이 실제상황으로 오인하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공황에 빠진 사람들은 암시에 쉽게 걸리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를 난감한 상황에서는 냅다 뛰기 시작하고, 이를 본 사람들 역시 덩달아 뛰기 시작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 집단패닉이 발생하는 기전이라고 합니다.

 

유언비어, 소위 루머란 “사실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 자료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사실인 것처럼 전해지는 일반적 주장”이라고 설명되는데(55쪽), 전달내용이 조금씩 변질되는 ‘단순화 과정’에서는 구조가 단순화되면서 기억하기 쉬워지고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기도 쉽게 되고, 여기에는 ‘강조 과정’이라는 보완적 기전이 작용하게 됩니다. 본질적인 내용은 유지되면서도 두드러지는 몇 가지 사항이 선택되어 강조되면서 날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동화 과정’을 밟게 되는데, ‘없는 사실을 첨가시키거나 왜곡시키고, 망각하고 또는 부풀려 과장하는 것은 개인들이 연이어 정보를 전달하면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가치와 규범 그리고 행동체계에 그 정보를 감정이입하면서 동화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59쪽).

 

소포클레스 원작의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보면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하기는 정말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만, 저자 역시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외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67쪽). 뻔히 틀린 줄 알면서도 다수의 의견에 따라가는 이유는 다수의 환심을 사려는 심리, 개인이 스스로 남들과 비슷해지기를 바라는 동일화 심리, 그 집단에서 버림을 받을 까 두려워하는 내향성 심리 등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80쪽)

 

이러한 사례들 가운데 맹목적인 믿음과 인지 부조화로 인하여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왜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까요? 1930년대 초반에 인도의 비하르 주에서 강진이 발생한 적이 있는데, 주민들은 지진이 발생하고도 한동안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민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혹시라도 여진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지 등에 관한 구쳊적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급기야는 스스로 정보를 만들어내서 온갖 소문을 퍼뜨리면서 자신들이 처한 주변 상황과 주변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이성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인간 행동의 밑바탕에 깔린 심리적 원인들을 이해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실수나 어리석은 짓의 근원적인 문제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독자들이 사회활동을 하면서 흔히 만나는 인간관계로부터의 갈등을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는 심리학적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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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바다의 미래를 묻다 - 과학이 말하는 동해의 가치와 미래 푸른행성지구 시리즈 2
남성현.김윤배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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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방위백서에서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내용을 명기하더니, 이어서 외교청서에서도 같은 내용을 담아 한일 양국간의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얼마전 동해안 속초로 워크숍을 다녀왔습니다만, 일본정부가 문제를 부각시킬 때는 온 국민이 나서서 들끓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실제로 독도와 동해에 대하여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는 점은 나이토우 세이추우 선생의 <일본은 독도(죽도)를 이렇게 말한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48635>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독도를 품고 있는 동해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습니다. 지난 주 읽은 <바다에서 희망을 보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97624>를 통하여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바다를 어떻게 지키고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점을 알려준 해양학자 남성현박사님이 역시 해양학을 전공하는 김윤배박사님과 함께 동해에 관한 모든 것을 앞서의 책처럼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동해, 바다의 미래를 묻다>입니다.

 

저자들은 동해를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나 해수욕과 일출감상으로 대표되는 낭만의 대상, 즉 존재하는 ‘풍경’으로서만이 아닌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먼저 한국과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동해의 명칭으로부터 동해에 대한 과학적 탐사에 관한 역사부터 정리하고 있습니다. 동해와 독도의 명칭에 관하여 반크를 비롯하여, 뉴욕타임즈에 실린 가수 김장훈씨의 독도광고처럼 사회적 운동을 통하여 우리의 입장을 반영하는 방법도 중요하겠습니다만, 유관학계에서 자연스럽게 동해 혹은 독도라는 명칭이 스며들도록 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동해의 해양학적 연구를 한국이 주도하여 진행하고, 국제적 학술지에 동해 혹은 독도라는 이름이 실려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연스럽게 우리말 이름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동해에서 한류와 난류가 만나기 때문에 어자원이 풍부하다는 사실은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이야기이고 최근에는 가스 하이드레이트와 같은 청정에너지 자원을 비롯한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듣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동해, 바다의 미래를 묻다>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동해가 해양연구에서 중요한 모델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흔히 동해는 우리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으로 둘러싸여 마치 내해처럼 보이기 때문에 변화가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반 동해를 집중적으로 탐사한 일본의 우다가 동해의 바닷물은 단일수괴로 되어 있다고 해서 ‘동해고유수’라고 하였지만, 해방후 국내외 학자들에 의하여 꾸준하게 탐사되어 축적한 자료를 보면 동해바다만큼 역동적인 바다도 드물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해의 이러한 환경은 군사적으로도 물론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지만, 해양에서의 바닷물의 흐름과 기후변화에 관한 연구를 행함에 있어 중요한 연구모델이 될 수 있다고 학계에서는 주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동해는 바로 대양의 컨베이어벨트처럼, 북부해역에서 용존산소가 풍부한 표증 냉수의 결빙과 침강이 일어나고 남하한 이들 냉수가 심층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남하하여, 여름철에는 울산 근처 감포 주변해역에서 해안선에 평행한 남동풍의 바람 등에 의해 깊은 곳의 바닷물이 표층으로 올라오는 용승현상이 존재하는 등 그야말로 대양의 많은 현상들을 볼 수 있는 ‘작은 대양’ 혹은 ‘대양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는 바다가 동해이다.(71쪽)”

 

정리해보면, 이 책을 통하여 동해의 가치, 특히 과학의 영역에서 동해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 하는 점을 알게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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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 - 악의 시대, 도덕을 말하다
샘 해리스 지음, 강명신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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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진화는, 상상 가능한 이론적 구성물 가운데에는 어떤 경우에서나 다른 구성물에 대해 결정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구성물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 문제에 대해 천착했던 사람들은 우리의 지각세계가,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어떠한 이론적 체계를 선택해야 할지를 실질적으로 결정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의 모든 원리로 이끄는 논리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에 대하여 과학의 대표적 분야인 물리학의 한계에 대하여 1918년 막스 프랑크의 회갑에서 아인슈타인이 한 말입니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인용) 가세트는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의 흥성으로 퇴조되고 있는 철학이 본연의 소명으로 회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과학적 진리는 비록 정확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이며 완전한 진리는 아니다.’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유와 존재의 상호 동화라고 정의되고 인식의 영역에 속하는 도덕적 진리를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자유의지는 없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4786>를 통해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 설파한 샘 해리스박사는 <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에서 발전된 뇌과학의 증거들은 도덕적 진리를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과학은 사실에 관한 것이지 규범에 관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 양태에 대해 무엇이 잘못인지는 알려줄 수 없다. 인간의 조건에 관한 과학은 있을 수 없다.(23쪽)”고 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제리 포더와 같이 반대하는 과학자들이 여전히 있는데도 말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연구결과를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도덕과 행복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도덕과 행복에 관한 과학적 연구에서 얻어진 것들을 도덕적 진리, 선과 악, 믿음, 종교, 행복의 미래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원저의 제목이기도 한 ‘도덕의 풍경(The moral landscape)’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습니다. 도덕의 풍경은 “가설적 공간이지만 실제적, 잠재적 결과의 공간으로, 봉우리의 높이는 잠재적 행복의 높이에 해당하고, 계곡의 깊이는 잠재적 고통의 크기에 해당한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즉 다양한 문화적 관습, 윤리 규정, 정부의 양태 등은 이 풍경에서 지점 사이의 좌표이동으로 표현되고, 이것은 또한 인간 번영의 정도 차이로 나타난다.(17-18쪽)”라고 설명되고 있는데, 다양한 변수를 데이터화하여 객관적으로 평가가 가능한 삼차원공간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면 다양한 높이의 산들이 펼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덕적 가치 또한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인데, 도덕적 진리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에 이와 같은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의 결과의 좋고 나쁨을 판가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을 ‘스리마일 섬 효과’로 설명기도 합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스리마일섬은 1979년 일어난 원자로 노심 용융사고로 세인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나쁜 일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각을 바꾸어 보면, 이 사고를 통하여 각국은 핵안전을 보다 강화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실행하게 되었고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도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됩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83563>를 읽으면서 ‘문화를 전달하고 모방하는 복제단위’를 밈(meme)이라고 정의하고 “밈풀에서 펴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323쪽)”라는 설명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고 적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생물의 진화는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개체와 이타적 유전자를 가진 개체가 균형을 이루어야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당 생물집단의 생존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킨스가 주장하는 밈이라고 하는 문화의 복제단위는 생존에 긍정적 요소만이 살아남고 부정적 요소는 소멸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샘 해리스는 밈의 존재를 인정하고 밈이 ‘전달된다’며, 숙주로 삼은 인간의 생식세포를 통해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점도 인정하지만, “밈의 생존은 개인이나 집단에 실질적인 이익(번식되느냐 아니냐)을 가져다주느냐 아니냐에 좌우되지 않는다. 수 세기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의 행복을 저하시키는 개념이나 문화적 산물에 매여 사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37쪽)”고 밈에 대한 개념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파푸어 뉴기니 하이랜드 지역에 사는 포레(Fore)족의 생존을 위협했던 쿠루(kuru)병의 확산과 소멸을 샘 해리스의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쿠루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의 습속이 포레족 마을에 들어온 이후에 새로 생겼다가 쿠루병의 정체가 드러남에 따라 호주 정부가 카니발리즘을 강력하게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소멸되어 갔던 대표적인 프리온질병입니다. 즉 카니발리즘이라고 하는 문화적 요인의 유입과 정착이 종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정적 방향으로 작용하는 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소위 밈이라고 하는 사회문화적 복제단위가 믿음이라고 하는 집단의 사고결과로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것이며, 집단적 행복추구를 위한 문화적 행동양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예로 든 포레족의 사례처럼 어떤 종족이나 사회가 품은 실재에 대한 믿음이 허위일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해로울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진화론이 생물학적 명령으로서 이기심을 수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부분에서 해석의 오류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수준에서의 선택압력은 개인의 생존보다는 혈연관계가 있는 존재들을 위한 희생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생존보다 유전자를 공유하는 존재들의 생존이 유전자집단의 소멸을 막을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이론이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의 호혜적 이타주의이론입니다. 혈연관계가 없는 친구들이나 심지어 요즈음 개그콘서트에서 보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한 프로젝트에서 보는 것처럼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협동이 가능한 이유가 설명되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개인과 집단의 행복의 지침이 되는 도덕이 분석범위에 있다는 가정을 다음처럼 요약하고 있습니다. “1. 뇌의 유전자 변화는 사회적 감정, 도덕적 직관, 언어 등을 발생시켰고, 2. 이로 인해 약속이나 명예 중시 등 점점 복잡한 협동 행동이 가능해졌으며, 3. 이러한 행동은 또 문화적 규범, 법, 사회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의 목적은 점점 발전하는 이 협동 체제가 그것을 상쇄시키는 힘에 맞닥뜨렸을 때에도 지속되게 하기 위함이다.(113쪽)” 물론 잘못된 믿음에 의하여 퇴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유전자의 변화도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 이론은 문화의 복제단위가 밈이라고 하는 가설적 구조가 아니라 유전자라고 하는 실재적 구조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실제로 뇌연구 결과 도덕적 인지와 관련된 뇌영역으로는 전전두엽피질(prefrontal cortex)과 측두엽(temporal lobe)의 많은 부분이 포함된다고 합니다. 전두엽 외측은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대한 분노를, 전두엽 내측은 신뢰 및 상호성과 관련된 보상의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뇌과학자 조르주 몰과 리카르도 데 올리베이라-수자 등의 연구에 따르면 다른 포유동물에서는 볼 수 없고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행위, “다른 사람에게 이로우면서 내게 직접적인 이익(물질적 혹은 명예에 대한 이익)이 없는 행위(진정한 이타주의)를, 특히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에도 뇌의 보상영역이 급격하게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161쪽)

 

내측전전두피질(MPFC)이 믿음을 담당하는 뇌부위로 생각되는 것 같습니다. MPFC는 자기표현과 관련되어 있는데, 남을 생각할 때보다 자신을 생각할 때 MPFC의 활성이 커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MPFC의 활성을 높인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는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믿는 것은 마치 그 명제를 확장된 자아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도파민 수용체 유전자가 종교적 믿음과 관여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활성이 높은 형태의 D4 수용체를 물려받은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회의적이고 기적을 믿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종교의 종류와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서로 공존할 수 없다며 극한 대결을 불사하는 종교집단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삶의 의미와 도덕 지침의 원천으로 믿을 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신을 믿는 가장 흔한 이유라고 합니다.(17쪽)”

 

이 처럼 과학적 연구를 통하여 종교적 믿음의 본질이 베일을 벗어가고 있지만, 과학자들은 그 사실을 공론화하는데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 공동체가 대체적으로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데도 불구하고 종교적 독단에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국립과학원, 국립보건원과 같이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관, 심지어는 네이처와 같은 과학 잡지까지도 종교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티븐 굴드의 ‘중복되지 않는 권위’ 개념, 즉 ‘과학과 종교는 전문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두 분야가 적절하게 관점을 규정하면 갈등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과학은 물리적 우주의 작동에, 종교는 의미, 가치, 도덕, 선한 삶에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는 뜻이 담겨 있다.(16쪽)”고 양해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도덕문제에서 신앙과 이성 사이에 타협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보는 저자의 경우에도 막상 공적 담론에서 과학의 역할에 대하여 논의할 때는 어떠한 경우라도 종교적 의견이라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혼란과 박해로 어두웠던 수 세기, 즉 종교적 암흑기를 지나 과학이 꽃을 피우게 된 지금에도 종교는 여전히 과학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서구에서 광신도의 손에 고문이나 살해를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지만, 미국에서는 종교에 공격적 태도를 취했다가는 연구비를 잃을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종종 흘러나온다.(42쪽)”는 인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우주를 선으로 이끄는 위대한 힘이자, 우주를 악으로부터 지키는 진정 유일한 보호자임을 자처하는 가톨릭교회의 본산 로마 교황청이 사제가 되려는 여성을 파면하면서도 어린이를 강간한 남성사제는 파면시키지 않는다거나, 여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낙태를 시행한 의사를 파면시키면서도 인종 학살을 자행한 나치당원은 단 한 명도 파면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도덕에 대한 교회의 판단기준은 혼란스러운 것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 존재의 가장 절박한 문제에 관해 과학을 적용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즉 도덕적 믿음도 과학적 믿음과 같이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게 될 것임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도덕적 믿음을 지켜온 종교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은 저자의 이런 견해가 옮긴이의 생각으로 걸러져 전달된 점은 없었는가 하는 우려입니다. 옮긴이의 글에 적고 있는 바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이 책은 주로 종교에 대한 반대로 종교가 도덕을 말할 수 없고 말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독단에 가까운’ 강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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