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2
자크 스트라우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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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저는 열한 살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특별하게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일기로 적어 놓은 거라도 있으면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일기쓰기를 권장하지 않던 시절이라서... 그런 점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자크 스트라우스가 <구원>을 통하여 풀어놓고 있는 열한살 소년의 이야기는 너무 생생해서 마치 영상으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프롤로그에서“내 나이 열한 살이었을 때...”로 정리하는 기억으로는 난 친구 들 앞에서 울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난 학생 교통 순찰대에 가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컸다 등등 스무가지나 되는 일을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설마 열한살 짜리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사형집행에 대한 악몽을 꾸곤 했다거나, 나는 사람들이 아기를 원할 때만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등입니다. 그런 기억이 없는 저와는 달리 꽤나 조숙한 어린이였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옮긴 이는 “이 작품은 열한 살 아이인 잭 필제의 때로는 순진하고 때로는 영악하거나 치기 어린 생각과 행동,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과 정신적 성장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301쪽)”고 작품의 성격을 정리하였습니다. 성장 소설이라 하면 주인공의 시각으로 혹은 삼자적 시각으로 주인공이 변하는 모습을 그려내게 되는데, 이 작품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고 하는 우리에게 생소한 나라에 살고 있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하겠습니다.

 

주인공 잭은 영국계(루이닉) 엄마와 네덜란드계 백인(보어인) 변호사 아빠 사이에서 누나와 여동생을 둔 사내아이입니다. 주인공을 둘러싸고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집안일을 돌보는 많은 흑인들 가운데 수지와 그녀의 아들 퍼시는 잭의 생각이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수지는 잭을 아들이라 부를 정도로 친밀하면서도 야단치는 일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과보호하고 있는 요즈음 부모들이 참고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잭의 부모와 수지와 같이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른들이 사랑과 함께 아이들의 행동을 적절하게 제어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인공처럼 열한 살에 자위를 하고 어른들이 보는 성안내서를 읽고 이해할 정도로 조숙한 아이들은 위태로울 수 있겠다 싶습니다. 십대 중반에 동정을 잃은 이매뉴얼처럼 말입니다. 잭 역시 수영장에서 자위를 하는 모습을 수지의 아들 퍼시에게 들키면서 생긴 수치감과 수지의 관심을 나누어야 한다는 죄의식으로 갈등을 겪다가 퍼시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퍼시가 집에서 쫓겨나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 옮겨가고 결국은 퍼시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불행한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잭은 심적 충격을 받게 되는데, 결국은 수지가 퍼시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주인공과 헤어지는 원치않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도 수지가 잭의 잘못된 행동에 야단을 치기도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잭의 부모님의 역할에서도 주목할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엄마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하는 비난의 행태이자 어떤 행동에 대한 가장 심한 질책은 그것을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었다.(208쪽)”면서 다양한 사례에서 엄마가 야단치는 용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는 교육면에서 바람직한 모습을 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을 맨 처음 가르쳐 준 사람도 아빠였다. 당시 나는 아주 어렸다.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이었을 것이다. 철학은 착한 것과 나쁜 것에 관한 것이고, 왜 우리가 살아 있는지에 관한 것이며, 하느님과 악마가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라고 아빠가 말했다.(216쪽)”

 

아무래도 성장소설의 독자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일 것 같습니다만, <구원>은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을 두고 있는 부모가 읽는 편이 더 어울리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내 아이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고 그런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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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폭풍 - 치명적 신종, 변종 바이러스가 지배할 인류의 미래와 생존 전략
네이선 울프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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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들어 중국 여성 2명이 신종 플루로 사망했다는 뉴스와 사스와 유사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희생된 사람이 있다는 뉴스에 이어서, 인류에 치명적일 수 있는 남극에서 신종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2957). 인플루엔자를 비롯하여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에 대하여 국제 보건 당국이 일반인이 보기에는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1918년 스페인에서 처음 등장해서 순식간에 확산되어 공식적으로는 2,000만명, 비공식적으로는 1억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는 스페인독감의 대유행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지나 콜라타 지음, 독감; http://blog.joinsmsn.com/yang412/3963341). 당시 유행했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H5N1형으로 조류독감이 돼지에 동시에 감염되면서 치사율과 감염력이 높은 새로운 변종으로 탄생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새로운 형의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만들어지지 않은 젊은이들이 주로 희생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치명적인 전염병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전문가들은 인류에게 치명적일 가능성이 있는 미생물이 처음 출현하는 단계에서 통제할 수 있도록 조기에 발견하고 억제하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합니다. <바이러스 폭풍>은 바로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전염병의 조기에 발견하여 억제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글로벌 바이러스 예보>를 창립한 네이선 울프박사입니다. 저자는 새로운 판데믹(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세계보건기구의 전염병 경보단계 중 최고 위험등급)이 처음 나타나는 때를 철저하게 추적하는 것. 그래서 그런 유행병이 전 세계로 확대되기 전에 철저히 파악하여 확산을 막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1쪽).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1부 ‘몰려드는 먹구름’에서는 병원균과 인류와의 관계를 뒤쫓고 있습니다. 특히 인류의 보건을 위협했던 미생물들이 사실은 인류 사이에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야생동물 사이에서 유행을 일으키는 동물전염병이거나 특별한 증상을 일으키지 않고 잠복하고 있던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활동범위가 확대되면서 이런 동물들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좁혀진 것이 일차적 원인이 되었고, 인류문명의 발전에 따라서 마차, 차량, 선박과 비행기 등 이동수단이 빨라지면서 병원미생물이 빠르게 확산될 수 있는 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2부 ‘공포의 판데믹’에서는 최근들어 판데믹 상황이 유난히 자주 맞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고, 판데믹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3부 ‘바이러스 사냥’에서는 ‘판데믹의 예방’이라는 이 분야의 전문가들의 시각으로 보면 꿈같은 일을 일구고 있는 사람들의 노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항생제와 백신을 개발해냈을 때 인류는 전염병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지만, 인류가 통제에 성공한 것은 천연두가 유일한 바이러스성 질환일 뿐이며,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를 비롯하여 새롭게 등장하는 바이러스의 유래를 추적하는 일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IT기술을 활용한다면 판데믹의 징후를 조기에 발견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것이 요점인 것 같습니다.

 

바이러스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을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이견이 있을 수도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이러스의 습격’편에서 설명하고 있는 광우병의 유래에 대한 설명 가운데 양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스크래피가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스크래피에 걸린 양을 소사료의 원료로 사용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인데, 스크래피 유래설보다는 비정형 광우병에 걸려 폐사된 소가 사료의 원료로 투입되었어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저자는 흥미로운 주제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판데믹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고, 또한 보건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판데믹을 조기에 차단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멕시코에서 시작한 독감이 유행하던 때, 보건당국의 권고사항을 기피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판데믹의 위험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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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척도 - 프랑스 혁명보다 위대한 미터법 혁명
켄 앨더 지음, 임재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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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덕분에 군생활을 병원부대에서 했습니다. 많지 않은 부서원들이지만 신체검사와 같이 평소 업무에 더한 특별한 과업이 있을 때는 부서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회식을 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군대회식은 삼겹살을 구워 소주잔을 기울이면 최고였습니다. 회식 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주문할 때는 어렵겠지만 몇 명이서 단출하게 고기를 주문할 때는 고기의 양에 눈길이 갈 수도 있습니다. 주문이 이어지다 보면 고기양이 달라 보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척관법(尺貫法)이 폐지되고 미터법을 상용하고 있는 요즈음도 식당마다 고기 1인분의 기준은 여전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고기를 접시에 담아낼 때 손님이 저울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식단에 표기되어 있는 양대로 내줄 것이라는 믿고 있지만 때로는 그렇지 못한 주인을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제가 눈썰미 있는 분과 같이 식당에 갔을 때 주문한 고기양이 적어 보인다며 저울을 가져다 무게를 다시 잰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식단에 표기된 1인분 무게의 3분의 2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을 내놓은 것을 확인하고 주인에게 야단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무게나 길이, 부피의 단위는 언제부터 정해져 통용되어왔는지 궁금해집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길이의 단위는 사람의 몸의 길이에서 유래했다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길이단위 한 자는 열 손가락을 쫙 편 너비, 즉 두 뼘에서 나왔다고 하고, 서양의 길이단위 인치는 엄지손가락 길이라고도 하며 30센티미터쯤 되는 1피트는 발길이에서 왔다고 합니다. 요즈음에는 우리나라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미터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만, 과거 에는 척관법을 사용해왔습니다. 척관법(尺貫法)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동남아시아로 전해져 내려온 도량형(度量衡)의 단위계입니다. 길이의 기본단위로는 자 또는 척(尺), 무게의 기본단위로 관(貫)이 있었고, 길이에서 유도되는 면적의 단위는 평(坪) 또는 보(步)를 사용했으며, 부피의 단위는 되 또는 승(升)이 있었습니다. 조선 고종은 광무(光武) 9년(1905년)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공포된 도량형규칙에서는 척관법의 기본단위가 되는 길이의 단위인 척은 0.303m로, 무게의 단위인 관은 3.75㎏으로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면 요즈음 미국과 영국과 같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미터법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로버트 P. 크리스교수가 쓴 <측정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5187, http://blog.yes24.com/document/7056880

>를 보면 초기 미터법의 원기 에탈롱을 제작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에탈롱을 제작한 직접적 계기는 프랑스 혁명이었다. 모든 토지의 소유자인 왕이 권력의 정점에서 영주들을 다스리고 영주가 봉신에게 토지를 주어 다스리는 피라미드 계층 구조를 통해 권력이 배분되는 봉건제의 잔재, 이 잔재를 쓸어버리고 봉건제를 보편적이고 평등하고 합리적인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 혁명지도자들의 목표였다. 하지만 이 목표를 이루는데 왜 측정이 중요했는지를 알려면 프랑스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로버트 P. 크리스 지음, 측정의 역사 78쪽)”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터법에서 길이는 진공 속에서 빛의 속력을 상수로 하여 정하고 있고, 시간은 세슘 133 원자의 초미세갈라짐을 상수로 정하였으며, 국제질량원기를 상수로 하던 무게도 플랑크상수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가 ‘모든 시대를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 제안한 도량형에서는 길이와 무게의 표준을 자연에서 구했습니다. 즉,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의 4000만 분의 1로, 킬로그램은 물 1세제곱데시미터의 무게”로 정의하였던 것이며, 정의된 도량형에 따른 표준원기(標準原基) 에탈롱을 1799년 제작하여 프랑스 국가기록원에 보관하여 길이와 무게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길이의 단위를 정하기 위해서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의 길이를 정밀하게 측정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노스웨스턴 대학 역사학과의 켄 애들러교수가 ‘프랑스 혁명보다 위대한 미터법 혁명’이라는 부제를 달아 써낸 <만물의 척도>는 초기 미터법의 절대기준이 되는 미터를 정의하는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파리를 지나는 사분 자오선의 1,000만분의 1로 정한 것 자체가 자의적이라는 주장은 당시에도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오선의 호(弧)를 측량한다는 구실로 연금과 봉급을 챙기려 든다(147쪽)’는 비판도 있었다고 하니 과학계의 미묘한 행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 같습니다.


혁명가의 시각에서 바라본 크리스교수의 측정의 역사와는 달리 애들러교수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시각으로 측정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프랑스 학자들은 자신들의 나라의 도량형의 다양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이러한 다양함은 소통과 교역을 방해하고 국가의 합리적 행정을 방해했다. 또한 학자들끼리 실험 결과를 비교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 학자들은 이 같은 도량형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물건과 정보의 교환에 이성적인 질서를 부여할 보편적인 도량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1쪽)” 결국 학자들의 인식이 미터법 제정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애들러교수는 바벨탑의 의미를 착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일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하늘에 닿기 위하여 쌓아 올리던 바벨탑을 신이 무너뜨리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했던 것이기 때문에, 미터법이야말로 도량형의 바벨탑을 다시 쌓아올리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입니다.


애들러교수의 <만물의 척도>는 1792년 6월 두 명의 프랑스 천문학자, 장바티스트조제프 들랑브르와 피에르프랑수아앙드레 메솅이 됭케르크에서 파리를 거쳐 바르셀로나에 이르는 자오선 호(弧)를 측정하기 위하여 떠나 무려 7년에 걸친 고난 끝에 마무리한 측정의 결과를 세계 최초의 국제 과학협회인 국제위원회에 제출하여 미터의 길이를 정하기까지의 과정을 뒤쫓고 있습니다. 미터법의 탄생에 관하여 ‘아무 것도 생략하거나 묵과하는 일없이 원정대의 관측결과를 모두 밝히기 위하여’ 들랑브르가 저술한 2,000쪽이 넘는 <미터법의 원리>를 읽어나가면서 미심쩍은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미터법의 탄생사를 완전하게 기술한 것이 아니라 미터법 탄생에 얽힌 비밀, 즉 미터법에 은밀한 오차가 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은밀한 오차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위성 측량에 따르면, 극점과 적도를 잇는 자오선 거리는 10,002,290미터다. 달리 말하면, 들랑브르와 메셍이 계산한 미터는 정확한 값에 비해 대략 0.2 밀리미터, 즉 이 책 2쪽에 해당하는 두께만큼 짧다.(18쪽)” 그 은밀한 오차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작가는 뒤쫓고 있는 것입니다. 메솅과 들랑브르가 자오선 호를 측정하는 동안에도 유럽사회는 여러 나라들이 서로 연합하여 전쟁을 치루는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측지(測地) 작업을 수행하는 일이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작업을 진행하는 곳에 거주하고 있는 지역민들은 이들의 작업이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움은커녕 방해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작업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됭케르크에서 시작하여 파리로 연결되는 북쪽의 자오선 호 측정을 맡은 들랑브르는 측지작업을 원활하게 진행하여 측정값을 메솅에게 보냈지만, 파리에서 시작하여 바르셀로나에 이르는 남쪽 구간의 측정을 맡은 메솅은 측정값을 공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스페인의 몬주익에서의 측정값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을 곳곳에 남기고 있습니다. 몬주익성의 위도를 계산하기 위하여 메솅은 폴라리스, 투반, 코카브, 미자르, 엘나스, 폴룩스 등 6개의 항성을 측정하게 되었는데, 미자르를 측정한 값에서 다른 값과 비교하여 4초, 즉 120미터 정도 어긋난 수치를 얻었던 것이 끝까지 메셰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 ‘이 이야기는 오류와 오류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사용한 측지방법은 반복 경위의를 사용한 삼각측량법입니다. 삼각측량은 삼각형의 세 각의 크기와 한 변의 길이를 알면 나머지 두 변의 길이를 알 수 있다는 기하학의 기초적인 정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들이 측지를 진행하는 구간의 지표가 완벽하게 편평하기 않기 때문에 몇 가지 보정이 필요하였습니다. 측정에서 얻은 값을 공통의 수평면에 있는 삼각형에 맞게 조정해야 하며, 관측기구를 언제나 삼각형의 꼭지점에 정확하게 놓을 수 없기 때문에 관측값을 보정해야 하고, 대기굴절로 인한 시야왜곡을 보정하기 위하여 모든 각크기를 빛의 굴절에 비추어 수정할 필요가 있으며, 곡면에 있는 삼각형 각도의 합이 정확히 180도가 되지 않는 것도 수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메솅은 과학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과학자들을 두달 여 기다리게 한 끝에 자신이 맡은 구간의 측정을 마치고 그 결과를 과학회의에 제출하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가 과학회의를 어떻게 주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는 유럽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보나파트르 나폴레옹의 야심이 작용했다는 점을 일깨워준 작가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메솅이 제출한 측정값은 들랑브르의 측정값과 잘 맞아 떨어져 표준 미터값을 정하는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메솅은 1804년 스페인의 발렌시아 지방으로 떠난 측지작업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을 맞게 됩니다.


메솅이 죽은 다음에 그의 기록을 입수하게 된 들랑브르는 메솅의 초고뭉치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메솅은 쪽수를 매긴 공책이 아니라 철하지 않은 종이에 연필로 관측기록을 적었고, 본인이 예상한 값, 혹은 남들이 기대한 값을 반영한 값에 자료를 맞추려 끊임없이 자료를 고쳤다는 것입니다. 들랑브르는 메솅의 뒤죽박죽인 종이더미를 영구적인 기록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는데, 연필로 적은 부분을 모두 잉크로 칠하고 종이 더미를 시간순서대로 배열한 뒤에 풀로 이어 붙여 공책으로 엮어 마치 역사가처럼 전에 있지도 않았던 일지를 만들어 메솅의 여정을 재구성했다는 것입니다.(432쪽) 그는 손수 자료를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엉터리 수정값을 제거하고 메솅의 자료를 다시 계산하여 공개해도 될 만한 새 일람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랑브르는 “메솅이 관측값을 얻은 대로 발표하지 않고 실제보다 정확하고 일관성 있게 꾸민 일은 잘못이다. 하지만 그는 평균값이 변하지 않는 한도에서만 최종 관측값을 수정했다. 따라서 실제로 그의 행동에 진짜로 해로운 부분은 없는 셈이다.(435쪽)”고 적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들랑브르의 이런 행동도 미심쩍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당시 너무 많은 학자들이 미터의 정확성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솅의 측정값의 오류는 무엇일까? 오류를 이해하는 방식에 문제는 없었던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은 메솅이 죽은 25년 뒤에 장니콜라 니콜레라는 젊은 천문학자가 메솅의 관측값을 재분석한 결과를 통하여 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메셍이 보고한 몬주익 위도와 자료를 적절히 분석하여 얻은 해답이 겨우 0.4초(12미터)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443쪽)


앞에서 제가 들랑브르의 미심쩍은 행적을 지적한 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비하여 사적인 문서를 없애고 자신에게 온 편지를 따로 모아두는 등의 조치를 취한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솅이 태워달라는 간청한 편지들은 자신을 변호하는데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보관하였다는 것입니다. 메솅이 6개의 항성을 측정하여 관측값을 보정한 반면 들랑브르는 2개의 항성만 측정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애들러교수의 <만물의 척도>는 크리스교수의 <측정의 역사>와 함께 읽는다면 오늘날 우리 생활에 밀접한 미터법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학연구에서 오류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기회가 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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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가족 프로젝트 - 평생 돈 걱정 없는 '우리 가족 주식회사' 만들기
박승안 지음 / 알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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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 때 재개발지역의 딱지가 이슈가 되었을 적에도 몇 줄 상념을 적은 적이 있습니다만(http://blog.joinsmsn.com/yang412/12901329)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탓에 부동산을 투자 대상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식 역시 별로 아는 바 없으면서 섣불리 뛰어들었다가 상투잡고 투자금을 송두리째 날릴까 하는 걱정 때문에 미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식투자와 같은 다양한 투자관련 책을 읽기라도 하면 어디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기도 합니다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용기가 사그라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 재테크라면 건강에 유념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은행의 박승안 부장 PB(Private banker, 개인자산관리 전문가)가 저 같은 사람도 부자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책 <부자가족 프로젝트>를 냈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잘아는 축구의 박지성선수와 영화배우 조인성씨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다고 해서 유명하다는 분입니다. 스스로는 아직 부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많은 고객들의 자산관리를 해오면서 체득한 노하우를 이 책에 담아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두 아이를 키우고 가르치느라 돈을 모을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저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부자로 되는 길을 따라갈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돈은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잘 벌어서 잘 쓰는 것이 중요하다. 돈을 잘 밝혀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전제를 새겨둡니다.

 

제가 이 책에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우리가족 주식회사’입니다. 돌이켜 보면 저도 그렇습니다만, 제 선친께서도 저희 형제들까지 포함해서 자산과 관련해서 의논을 하신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장성한 아이들이 있다면 가족 전체의 자산관리에 대하여 기본적인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3장 ‘내가 우리 가족 주식회사의 CEO’편에서부터 설명을 풀어놓고 있습니다만, 아이들도 우리가족 주식회사의 주주라고 한다면 당연히 주주의 권리를 행사하고 역시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자녀들에게 돈을 써야 할 때 그것이 가치있는 소비인지, 투자적인 관점에서 의미있는 소비인지 생각해보라고 가르친다는 말씀을 듣고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저도 젊어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이 계획을 가지고 소비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큰 위험은 내가 가진 재산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이보다 더욱 오래 살게 된다.”는 ‘장수 리스크’에 대한 저의 대책은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건강을 지켜서 오랫동안 현장을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저의 전공을 살린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온 탓일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족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면 종잣돈을 어떻게 만들고, 3단계에 걸친 돈버는 전략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첫걸음은 절약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나가는 돈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우선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6장 ‘내가 만드는 투자의 공식’에서 풀어내고 있는 재테크 실전 강의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보험, 펀드, 주식 투자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점들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된 것 같습니다. 특히 주식투자와 관련하여 ‘모의투자부터 시작하라’는 저자의 권유가 인상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주식투자에 관심을 가져보라는 권유를 받으면서도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역시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서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길이 될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맺음말을 통하여 우려하는 것처럼 “이 책을 덮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길을 모색해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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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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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을 인용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특히 아직 읽어보지 못한 고전인 경우 꼭 그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책이었던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아주 인상적으로 인용한 책을 읽었기에 필독 도서목록의 위쪽에 올려 두었습니다.

 

오래 벼르던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조만간 새로 만들어진 영화 <안나 카레니나>가 개봉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챙기는 것은 지난 해 뮤지컬 <레 미제라블;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72541>을 보면서 느낀 아쉬움 때문입니다.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제한된 시간으로 압축을 하다 보니 생략된 부분이 많은 탓에 등장인물의 성격, 심리상태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스토리 뒤쫓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영화로 만난 <레 미제라블;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9357>은 원작을 이미 읽은 다음이어서 배우들의 연기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1873년 집필에 착수하여 1978년에 출간한 작품으로, ‘위선, 질투, 신념, 욕망, 사랑 등 인간의 감정과 결혼, 계급, 종교 등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구조에 대한 톨스토이의 모든 고민이 집약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연진희 번역본은 모두 8부로 구성된 이야기를 세권으로 나누고 있는데 막상 읽다보니 네 권으로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각부의 분량이 서로 다른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8부 까지 이어지는 스토리 라인을 각각 두 개씩 묶어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었더라면 지나치게 두껍다는 느낌도 줄이고 스토리 전개를 파악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작품해설에서 밝힌 것처럼 8부에 등장하는 투르크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은 구상단계에서 미처 고려되지 않았던 사건이라서 안나의 죽음을 마무리하는 과정이 다소 장황하게 바뀐 것일 수 있겠습니다. 요즘 잘나가는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연장방영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를 고리로 한 카레닌과 브론스키의 삼각관계가 이야기의 한축을 이끌고, 한때 브론스키를 동경했던 키티가 결국 레빈을 선택하고 그들의 사랑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야기의 다른 한축으로 하여 다른 색깔을 가진 두 개의 사랑을 대비시켜 신의 섭리에 의한 최고의 선으로 수렴하고 있습니다. 스무살 연상의 카레닌과의 사이에 아들을 두고 있는 안나가 브론스키와 만나면서 서로 한눈에 반하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들의 사랑은 한때의 들뜬 감정으로 정리되지 못하여 안나는 브론스키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브론스키를 따라 집을 떠나게 됩니다. 안나를 둘러싼 이들의 운명과 같은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들지만, 브론스키의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독점하려는 안나의 중독된 사랑은 브론스키와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은 열차에 몸을 던져 자신을 버리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결국 안나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불같은 사랑을 제대로 꽃피우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 키티와 레빈의 사랑은 브론스키에 눈이 팔려있던 키티가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는 바람에 시작부터 중대한 위기를 맞지만, 키티와의 관계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던 브론스키가 안나를 선택하면서 키티를 버리는 바람에 키티는 실연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하지만 언니 돌리와 형부 스티바의 주선으로 레빈은 키티에게 다시 청혼을 하게 되고 두 사람은 결혼으로 맺어지는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레빈의 성격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두 사람의 관계도 갈등을 빚곤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부딪히는 상황이 생기면 문제를 서로 공유하고 해결방안을 같이 찾으려 노력하는 점이 안나의 치명적 사랑과의 차이점인 것 같습니다.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사랑이야기로 끝났다면 <안나 카레니나>가 명작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을까요? 작품해설에서 보면, 2007년에 발표된 <톱 텐>이라는 책에는 영국, 미국, 호주의 유명작가 125명에게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문학작품 10권을 꼽아달라 해서 순위를 매겼는데 <안나 카레니나>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저의 눈을 끌었던 점을 몇 가지 정리해보려 합니다. 첫 번째는 등장인물의 행동과 내면의 생각을 제3의 인물의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그 주변상황까지 포괄하는 넓은 시각에서 서술하고 그 사람의 내면의 생각으로 까지 접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자신의 시각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등장인물이 자신의 정신마저도 자신의 의지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의식의 흐름’에 스스로를 내맡기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의식의 흐름’기법은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등 20세기 작가들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안나가 오빠 스티바의 외도로 갈등을 빚고 있는 올케 돌리를 달래기 위하여 모스크바를 찾았을 때, 정거장에서 처음 만난 브론스키와 심상치 않은 감정이 오가는 것을 느끼고 일정을 바꾸어 페테르부르그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생각하는 장면입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의 기억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모든 것이 좋았고 유쾌했다. 그녀는 무도회를 떠올리고, 브론스키를 떠올리고, 사랑에 빠진 그의 순종적인 얼굴을 떠올리고, 그와의 모든 관계를 떠올렸다. 수치스러워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바로 이 부분의 기억에서 수치심은 더욱 강해졌다. 그녀가 브론스키를 떠올린 순간, 마치 어떤 내면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따뜻해. 아주 따뜻해. 타는 듯이 뜨거워’. (…) ‘과연 나와 저 풋내기 장교 사이에 단순한 지인 관계를 뛰어넘은 어떤 다른 관계가 있다는 건가? 아니 그런 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안나카레리나 1권 223쪽)”

 

두 번째 눈에 띄는 점은 <안나 카레니나>는 1873년 집필을 시작하여 1878 출간한 작품으로 당시 러시아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당시 귀족들이 모이는 사교계가 무대가 되고 있음에도 사교계의 분위기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파리를 비롯하여 지방의 사교계 모임의 분위기를 세밀하게 묘사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다만 오페라 혹은 사냥 등과 같이 러시아 귀족들의 취미의 범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러시아귀족회의의 회장을 선거하는 과정이라거나 귀족들의 수입을 결정하는 직장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러시아 사회의 혼탁한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지에서의 레빈의 생활을 통하여 당시 러시아 농부들의 의식구조를 엿볼 수 있는 점은 새겨 읽을 만합니다. 포크로프스코에 있는 영지에서 직접 풀베기를 하고 양봉을 하는 레빈의 모습은 톨스토이가 야스나야 폴랴나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서의 생활하는 모습 그대로라고 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농노를 써서 운영하는 장원체계가 무너지는 단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출을 늘릴 수 있는 농기계의 활용과 같은 새로운 영농기술의 도입에 미지근하거나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얻게 됩니다. “농부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새로운 농사방법이나 새로운 농기구의 사용도 강요하지 않을 것을 모든 계약의 으뜸가는 절대조건으로 내세웠다.(안나 카레니나 2권 225쪽)” 시골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 역시 옛날식으로 집사에게 영지운영을 맡기고 자신은 주로 모스크바와 같은 대도시에서 무계획하게 지내다가 돈이 떨어지면 영지를 팔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현지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 바람에 손해를 입어도 알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유럽의 변방에 위치하다보니 뒤늦게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1부에서부터 죽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조우하는 기차역에서 경비원이 선로를 바꾸는 기차에 치여 죽는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아, 정말 끔찍해! 아, 안나, 네가 그 모습을 봤더라면! 아, 소름끼쳐!”라고 탄식하는 오빠 스티바의 이야기를 듣게 된 안나는 입술을 떨고 가까스로 눈물을 참는 모습으로 “불길한 징조예요.(안나 카레니나 1권 145쪽)”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앞날을 예견했던 것일까요? 슬픈 엔딩의 전조로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사이에 가진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산욕열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이릅니다. 당시만 해도 산욕열에 걸리면 백명 가운데 아흔 아홉 명은 죽는 치명적 부작용이었습니다. 안나가 투병하는 동안 카레닌은 증오를 접고 브론스키와 안나를 용서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 카레닌의 마음이 통했을까요? 안나는 산욕열을 이겨내게 되는데, 이번에는 브론스키가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게 되고 남편에게 기울던 안나의 마음이 다시 브론스키에게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5부에서는 특별한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1부에서 8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239개의 장으로 구성된 <안나 카레니나>의 이야기 가운에 유일하게 5부의 제20장은 ‘죽음’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레빈의 친형 니콜라이가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집에서 기다리라는 레빈의 말에 따르지 않고 동행한 키티가 니콜라이를 간병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레빈은 진한 감동과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니콜라이가 죽음을 맞는 과정에서 현대과학의 영향으로 신앙을 부정하게 된 레빈은 ‘당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 남자를 낫게 해주십시오. 그럼 당신은 그와 나를 구원할 것입니다.(안나 카레니나 2권 553쪽)“라고 기원하지만 니콜라이는 결국 죽음을 맞게 됩니다. 니콜라이의 죽음은 레빈을 사로잡았던 불가해함에 대한 공포, 즉 죽음의 접근과 불가피함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게 되지만 키티의 존재가 레빈을 절망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7부의 마지막에 만나는 안나의 죽음입니다. 남편 카레닌과 결별을 하고 브론스키와 같이 떠난 안나는 남편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서 브론스키와 재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몰리고 사교계에서도 추방당하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안나는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브론스키마저 자신에게 집착하는 듯한 안나를 달래지 않고 외면하면서 안나는 죽음이 유혹에 강하게 이끌리게 됩니다. 결국 브론스키를 만나기 위하여 기차여행을 하는 안나는 기차역에서 받은 브론스키의 쪽지를 읽고 그녀의 마음을 가냘프게 지탱하던 믿음의 끈을 놓고 죽음을 선택하게 됩니다. 산욕열을 앓을 무렵 ‘왜 나는 죽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 안나는 그녀의 영혼 속에 있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 죽는거야…!’ 하지만 막상 기차에 끌려가면서 그녀는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라고 독백을 합니다.

 

거울의 이미지처럼 안나의 대칭점에 서있는 레빈 역시 여러 차례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생사문제를 고민하게 된 레빈이 “죽음보다 오히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것이 무언인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생명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497쪽)”고 작가는 적고 있습니다. 레빈은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종속을 끊는 방법은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키티의 출산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에게 기도하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내면서 그리스도교가 준 영적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리스도교를 넘어 불교, 혹은 마호메트교로도 확대하여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8부에서 전개되는 투르크와 러시아 사이에 일어난 일종의 종교전쟁이 작가의 이런 생각에 기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작가는 신의 존재와 신의 섭리에 의한 최고의 선의 의미를 독자들이 깨닫기를 희망하였다고 정리해봅니다.

 

1796쪽이나 되는 대작이다 보니 리뷰가 길어졌습니다. 영화는 원작의 의미를 어떻게 살리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안나 카레니나(전 3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1권 520쪽, 2권 668쪽, 3권 608쪽

2009년 9월 4일

민음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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