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자의 고독 - 개정판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5
노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김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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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닙니다만,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084663>라는 책의 제목처럼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심지어는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까지도 언젠가는 소멸될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열규교수님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http://blog.joinsmsn.com/yang412/4271393>에서, 우리네 선조들이 높게 쳐준 ‘갖추어진 삶’의 맺음, 즉 죽음을 맞는 장면을 보면, 안채 안방 혹은 안사랑에서 이른바 ‘와석종신’해야 하고, 임종자리에는 자식이 빠짐없이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현대의학이 발달해서 가족들이 도착할 때까지 심장이 뛰도록 하기도 합니다만, 돌아가시는 분의 마지막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임종의 순간을 지키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처럼 고독사(孤獨死)에 대한 기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057511).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 ‘고독사’는 정의가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없이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세태가 변해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외부에 알리기를 원치 않거나, 알릴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맞는 것인데, 이는 죽은 이가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사회 또한 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089778).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기대수명이 지난 세기에 비하여 획기적으로 늘고 있습니다만, 역설적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교수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죽음을 임종의 순간에서 노화가 일어나는 과정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화 과정에서 사람들이 고독하게 되는 현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병약해지고 노쇠해지는데, 서서히 쇠락해간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삶으로부터 격리시켜 점차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되지만 정작 그 사람은 여전히 사람들이 주위에 남아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떠나갈 때 절실하게 원하는 도움과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을 상기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들을 멀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처럼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고독한 가운데 죽음을 맞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은 문명화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저자는 역사를 통해 변해온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적 영향으로부터 유래한 지옥이나 천국 같은 내세적 관념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연속성의 신화를 만든 시기로, 사람이 죽음에 대처하는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둘째는 종교적 영향이 줄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면서, 두려운 죽음을 가능한 한 멀리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억압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태도로서 심지어는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타인의 죽음과 나를 분리시킴으로서 자신은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 인정하면서 타인과 나의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색하는 가장 최근 일어나고 있는 죽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새로운 태도입니다.

 

죽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 죽음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의지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태초의 낙원에서 영생하는 존재였던 인간이 신과의 약속을 깨뜨렸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인데, 살아가는 동안 신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내세가 보장된다는 교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사회에서는 대규모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등 사람들의 삶은 고단하고 짧았으며, 삶을 위협하는 이러한 위험요소들은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종교가 사람들에게 중요한 위안요소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중세 유럽사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도시가 성장하고 전염병이 강력한 힘으로 전 유럽을 휩쓸었다. 사람들은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했다. 성직자와 탁발승이 이 공포를 더 강화시켰다.(21쪽)” 니체는 <반그리스도교;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23753>에서 저자의 이러한 견해가 보다 더 오랜 과거에 성립된 것임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평화롭던 왕국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믿던 유대교의 신 야훼는 힘과 기쁨과 희망의 상징이었고, 신을 숭배하는 것은 민족의 강성함과 계절의 변화, 농장에서 얻은 모든 복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인의 침공으로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라는 황폐해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지게 되자 유대교의 성직자들은 ‘모든 행복은 신의 은총이며, 모든 불행은 신을 믿지 않은데 따른 벌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비극의 탄생 외, 479쪽)’라고 신도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조건없는 사랑을 베풀어온 신’을 ‘조건에 의하여 제약된 신’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재판과 같이 다른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추방, 투옥, 고문, 그리고 화형과 같은 끔찍한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중세와는 달리 현대에 들어 발전된 사회에서는 초자연적인 믿음에 기대어 삶을 위협하는 요소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려는 경향은 많이 누그러졌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질병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이 작용한다고 믿었던 상황들이 의학의 발전으로 설명이 가능해지고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진 덕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종교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집단 간의 충돌은 점차 심화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은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엘리자 그리즈월드는 <위도 10도;http://blog.joinsmsn.com/yang412/12464128>에서 특히 남북 위도 10도 사이의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적 갈등은 영토문제, 물과 석유와 같은 자원을 둘러싼 이해의 충돌 그리고 상대종교의 공격적인 포교에 자극을 받아 대응차원의 포교가 진행되가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만 나이지리아의 종교지도자들이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어 지구상의 종교갈등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희망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종교의 영향이 줄어들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 것인데, 하나는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죽음의 본질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과 현대국가의 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국가가 폭력을 효율적으로 독점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개인의 삶의 안전성이 높아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두려움의 대상이던 죽음이 꺼리는 대상으로 변환되고, 자기불명성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강화시키는 피드백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의학의 발전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변화를 일으키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습니다. 죽음의 본질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커지면서 죽음은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에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에 새롭게 등장한 문제점에 저자는 착안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31쪽)”

 

최근 개봉한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로 향했던 키티의 마음을 다시 붙드는데 성공한 레빈은 키티의 진정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빈이 자신의 의구심을 풀어내는 계기는 바로 형 니콜라이의 죽음입니다. 키티는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는 니콜라이를 스스럼없이 깨끗이 닦아주고 따듯함이 절로 느껴질 정도로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에누리 없는 애정을 보여주는 것, 그것은 신체적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것과는 별도로, 남아 있는 사람이 해줄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37쪽) 사람들이 점차로 죽어가는 사람들로부터 물러서 있게 되고 죽음에 대하여 침묵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짧게 요약한 것처럼 타인과의 죽음에 거리를 두어 죽음에 대한 연상이 자신의 죽음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는 잠재적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어가는 사람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상을 저자는 죽어가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산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심리적 현상으로 설명하지만, 사회의 발전에 따라 등장하게 된 개인화와 자아인식의 발전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죽어가는 과정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의 세계, 그것과 연결된 독특한 기억, 나만의 감정과 체험, 나 자신의 지식과 소망 등을 오롯이 지키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죽음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기나긴 꿈속으로 떠나가고 세상은 사라진다. 두려운 것은 죽어가는 고통이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산 자의 상실감이다.(73쪽)” 어떻게 보면 죽은 자에게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을 뿐이며, 오히려 산 자에게 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슬픔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절대로 스스로의 생명을 끊는 짓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은 자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 살아있는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은 안타까운 일인 것 같습니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서구문명의 문명화과정을 정리해온 저자가 죽음에 대한 서구인들의 의식변화를 정리한 것입니다. 옮긴이가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살아있는 자와 죽어가는 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죽음을 분석한 것인데, 저자는 현대로 들어서면서 죽음이 위생화되는 과정이 살아 있는 자의 권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죽어가는 자와 노인을 격리시킨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일대학교의 셸리 케이건교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59113>에서 영혼의 존재와 영생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반드시 죽는 존재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무게를 실어 죽음과 삶의 의미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앞서 저자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해온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유형 가운데 마지막,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 인정하면서 타인과 나의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많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가 주목하는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고독사에 대한 사회적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구체적인 고민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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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명작소설을 새롭게 해석한 영화를 자주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의 불후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76051>는 2007년에 <톱 텐>이라는 책에서 발표한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문학작품 순위에서 당당 1위를 차지한 까닭인지, 그동안 여러 차례 영화화 된 바 있습니다. <톱 텐>의 순위는 영국, 미국, 호주의 유명작가 125명이 뽑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문학작품 10권을 종합한 것이었으니 아무래도 전문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번 개봉된 <안나 카레니나>는 조 라이트 감독 작품으로 키이라 나이틀리(안나 카레니나 역), 주드 로(알렉시 카레닌 역), 애론 테일러-존슨(브론스키 역), 돔네일 글리슨(레빈 역), 그리고 알리시아 빈칸데르(키티 역) 등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영화의 틀을 깨트리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배우들이 플로시니엄에서 연기하는 장면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기법을 적용한 것인데, 단순히 플로시니엄으로 국한되지 않고, 플로시니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공간이 배우들의 연기공간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대에서 퇴장한 배우가 무대장치 등을 조정하기 위하여 무대 위 공간에 설치된 비계로 이동하여 다른 장면으로 연결시킨다거나, 퇴장한 배우가 대기실을 통하여 연결된 회랑을 따라서 무도회장으로 이동하는 등입니다. 극장이라는 공간이 다중의 공간으로 변형되기 때문에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숨가쁘게 배우들을 뒤쫓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대가 경마장의 관중석으로 변모하기도 하고, 무대 뒤 공간이 마차가 질주하는 거리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귀족사회가 시대적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에 화려한 모습의 연극무대가 제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레빈으로 상징되는 러시아 농민들의 세계는 열린 공간의 현장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리얼리티를 살리는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 원작의 <안나 카레니나>의 원작을 읽고서 브론스키를 매개로 하여 카레닌-안나 부부, 레빈-키티 부부의 상반된 사랑의 행로를 대비시키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처음 만나는 순간 마음을 빼앗긴 안나가 고위관료인 남편과 8살 된 아들을 버리고 브론스키와 불륜의 관계에 빠지고 카레닌에게 이혼을 요구하다가 결국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리는 과정에서 카레닌은 자신의 위치를 고려하여 안나와 브론스키가 세인의 주목을 끌지 않는다면 눈감아 주겠다고 하지만 두 사람은 세인의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는 행동을 보인 끝에 카레닌의 분노를 사고 말아 결국은 “복수는 내가 하리라, 내 이를 보복하리”라는 결말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원작을 보면 당시 러시아 사교계에서도 비밀리에 불륜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는 것인데, 안나-브론스키 커플이 파경에 이르게 된 것은 자신들의 사랑을 드러내고 인정받겠다는 두 사람의 도전정신이 사교계의 일반적 정서에 반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브론스키를 완전하게 소유하려는 안나의 끝없는 욕심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파멸에 이르게 되는데... 

 

톨스토이의 원작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화르르 타버리는 불꽃같은 사랑과 브론스키에 팔려 레빈의 청혼을 거절했던 키티가 안나에게 빠진 브론스키 때문에 받은 상처가 아문 다음에 레빈의 사랑이 진실함을 깨닫게 되면서 결혼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성적인 레빈의 사랑이 때로는 편집증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키티의 원만한 대응으로 이들의 사랑은 원만하게 무르익어가는 것으로 안나-브론스키의 정열적인 사랑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안나의 불꽃같은 사랑이 시작하고 마무리되는 과정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어 레빈과 키티의 사랑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새겨볼 수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1796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원작에서 영화의 스토리전개에 꼭 필요한 장면을 원작에서 추출했다고는 하지만 등장인물의 행동 배경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생략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스토리 전개를 우리가 흔히 보는 막장드라마 수준으로 이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 원작을 읽으면 등장인물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정부의 고위관료인 카레닌과 브론스키 사이에서 안나가 갈등을 보이다가 결국은 브론스키로 기울게 되는 것은 카레닌이 안나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이라는 점도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카레닌과 브론스키 사이에서 안나의 생각이 여러 번 바뀌게 되는게, 첫 번째 변곡점은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출산하는 시점입니다. 안나와 이혼을 결심한 카레닌이 모스크바에서 머물고 있을 때, 안나로부터 돌아와 달라는 편지를 받게 됩니다. 출산과정에서 얻은 산욕열 때문에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된 안나가 죽음을 앞두고 카레닌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쓸 무렵 만해도 산욕열에 걸리면 백명 가운데 아흔 아홉 명은 죽는 치명적 부작용이었습니다.

 

출산이나 유산을 한 뒤 첫 10일 동안 38℃ 이상 되는 열이 있는 경우에 산욕열을 의심하게 됩니다. 분만이 진행되는 동안 여성의 생식기계통에 많은 손상을 입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세균감염이 일어나게 되면 골반염, 복막염 나아가서는 패혈증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어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세균이 감염병을 일으킨다거나 소독법으로 감염을 줄일 수 있다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는 출산은 죽으러 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헝가리 출신 산과의사 젬멜바이스가 산욕열이 분만의사의 위생상태에 따라서 생긴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하고, 소독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고서야 산욕열이 줄어들게 되었고, 항생제의 발견은 산욕열에 희생되는 산모를 획기적으로 줄이는데 기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젬멜바이스가 산욕열의 정체와 예방법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맞는 불행한 인생행로는 핼 핼먼이 쓴 <의사들의 전쟁; http://blog.joinsmsn.com/yang412/5157822>에서 상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산욕열이 그만큼 무서운 병이었기 때문에 안나는 자신의 잘못된 사랑으로 벌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고 브론스키와 이별하는 조건으로 카레닌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을까요? 하지만 안나의 생명을 그 사랑만큼이나 끈질겼던지 산욕열의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구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안나와의 이별을 이겨내지 못한 브론스키가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이 다시 안나의 생각을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입니다만, 톨스토이 원작에서는 레빈의 형 니콜라이가 결핵으로 죽음을 맞는 장면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이 죽어가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레빈은 형을 만나러 모스크바로 가게 되면서 키티에게는 영지에 머물도록 요구하지만 키티는 레빈과 동행하여 모스크바의 호텔로 가서 니콜라이를 헌신적으로 간병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레빈의 마음을 감싸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키티에 대한 레빈의 사랑이 한층 깊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환자는 홀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특히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니콜라이의 마음을 달래주는 키티의 특별한 능력이 영화에서는 병든 형이 레빈의 영지로 찾아와 죽음을 맞기까지 과정을 짧은 에피소드로 처리하고 있어 이 장면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해졌을까 싶기도 합니다.

 

폐결핵은 초기에는 대부분 특별한 증상이 없습니다만, 병이 진행함에 따라 권태감, 미열, 식은 땀, 기침, 가래 등의 증세가 나타납니다. 폐결핵의 진단은 흉부엑스선검사와 객담에서 결핵균을 검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통하여 조기에 진단을 하고 집중적인 약물치료로 완치가 가능한 전염병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정리를 하면, 조 라이트 감독은 안나와 브론스키 사이의 위험하고도 절절한 사랑에 집중하는 대신,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며 개인을 파멸의 길로 내모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의미를 깊이 파고든 원작자 톨스토이의 의도를 되새겨볼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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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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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마르케스와 함께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쓴 <왜 고전을 읽는가>를 읽고 있습니다. 고전과 그 작가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에 앞서 저자는 무려 열네 가지나 되는 고전의 정의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처음 읽으면서도 마치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데,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라는 다소 진부한 듯, 정곡을 찌르는 정의도 있습니다만,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라고 한 첫 번째 정의는 가벼운 것 같지만 독자를 배려한 프로작가 다운 면모를 읽는 것 같습니다.

 

생뚱맞아 보일 수도 있는 고전의 정의를 인용한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는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민음사에서 새로 번역해서 내놓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스완네 집쪽으로(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48920>을 [양기화의 북소리]를 통해서 독자들께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국일미디어에서 나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읽을 때, 사실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44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소설과 소설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937>에서 차별화 의식을 설명하면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랑스럽게 꺼내들어 읽었다는 이스탄블 공과대학의 신입생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이 신입생의 말에 공감하듯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주변을 의식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책읽기에도 계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게 된 것은 앞서 소개한 리뷰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박완서선생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에서 읽은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에서 다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신경과학 분야를 전공한 저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오래 전 아내가 구입해 책장 구석에 꽂혀있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인데, 다른 책들을 읽는 사이사이에 짬을 내다보니 장장 4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보면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이슈들 가운데 제가 이미 알고 있어 익숙한 것은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만,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정보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쉽게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북 같은 것을 읽고 시작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생각은 얼마 전에 읽은 폴 벤느의 <푸코, 사유와 인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0902>을 통하여 푸코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 알랭 드 보통이 전하는 프루스트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자기계발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비롯한 프루스트의 작품과 편지 그리고 대화 등을 통하여 우리가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방법을 가르쳐준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첫 번째 주제,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비롯하여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등등의 제목들을 그런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칼비노가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라고 정의하고, 읽는 사람마다의 독특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고전인 만큼 작품에 대한 이차 서적이나 주석본, 해설서 들을 가능한 피하고 원전을 직접 읽으라고 충고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작가의 원전을 읽을 수 있다면 최선이겠습니다만, 원전을 읽을 수 없다면 좋은 번역가의 번역서를 읽는 것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은 프루스트의 “어떻게 하면 시간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15쪽)”라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요약하였습니다. 당시 파리의 유력 일간지 <랭트랑지장>이 1922년 여름에 “지구가 갑자기 파멸하게 된다면 그 최후의 시간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프루스트의 답변으로부터 끌어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라는 베네딕트 스피노자의 미래지향적 모범답안을 떠올릴 것입니다만, 저는 최근에 읽은 <내 몸은 내가 지킨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73430>에서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나는 절대로 사과나무는 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제일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내가 제일 느끼고 싶은 것을 경험할 것이다.”라고 한 최명기 원장의 주장에 관심이 끌리고 있습니다. 지구가 파멸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잊지 않고 루브르의 새로운 전시실을 방문할 것이고, X양의 발치에 몸을 던질 것이고, 인도로 여행을 떠날 것(11쪽)”이라는 같은 맥락의 프루스트의 답변은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은 “한 가지 슬픈 일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아프거나, 아니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하기 전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다.”라고 한 프루스트의 동생 로베르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국일미디어판을 기준으로 11권에 44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분량이 우선 손길을 멈칫거리도록 만드는데, 읽기를 시작한 다음에도 화자를 둘러싼 분위기를 시시콜콜 서술하고 있는 점도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침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긴 문장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크기의 활자를 이용하여 일렬로 배열할 경우, 그 길이는 약간 못 미치지만 무려 4미터에 이르고, 웬만한 와인병의 아랫부분을 17번은 충분히 감을 수 있을 정도(41쪽)”의 문장을 제5권에서 볼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작은 글씨로도 한 쪽을 넘기는 분량의 이 문장은 베르뒤랭 부인의 응접실을 묘사하고 있는데 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입니다. 베르뒤랭부인은 ‘소돔과 고모라’편의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발베크에 있는 그녀의 별장에서부터 ‘갇힌 여인’ 편에서는 파리에 있는 그녀의 집 응접실이 사교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꿈나라로부터 솟아오른 소파 하나가 놓은 곳 주위로는”으로 시작해서 “그들의 연이은 집들, 베르뒤랭의 응접실 각각에 내재하는 듯했다.(42-43쪽)”에 이르는 문장을 여전히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산책을 나가는 양재천 산책길 한 모퉁이에는 산사나무들이 심겨있는 곳이 있습니다. 가을이면 빨갛게 익은 산사열매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프루스트처럼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솔길에는 산사나무향기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 산사 꽃향기는 마치 내가 성모마리아 제단 앞에 서 있기라도 한 듯이, 그 형태 안에 뚜렷이 드러나며 촉촉하게 내 주위를 감돌았고, 장식된 꽃들 역시 마치 성당의 붉은 복도 난간이나 채색 유리창살 대에 투조 세공을 한 딸기 꽃의 하얀 살로 피어난 꽃들처럼, 저마다 방심한 표정으로 섬세하고도 눈부시게 빛나는 불꽃 양식 잎맥 무늬 수술다발을 들고 있었다.(244쪽)”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돋보기, 아니 현미경을 들이대듯이 세밀하게 살펴 글로 묘사한 프루스트의 능력에 놀랄 따름입니다.

 

프루스트는 병약했다고 합니다. 열 살 때 시작한 천식은 평생 그를 괴롭혔는데, 특히 낮에 기침이 심했기 때문에 낮과 밤을 거꾸로 살았다고 합니다. 민감한 피부와 이웃의 소음도 그를 괴롭혔는데 이는 지나치게 발달한 오감을 통하여 주위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점에 대한 반대급부였을 것입니다. 보통은 오직 고통을 받을 때에만 우리가 적절하게 탐구적이 될 수 있다는 프루스트적 논리를 지적하고, “사람이 지혜를 얻는 두 가지 방법 - 하나는 선생님을 통해서 고통 없이 얻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삶을 통해서 고통스럽게 얻는 것 - 가운데 고통스러운 쪽의 지혜가 훨씬 더 우월하다는 프루스트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지혜를 모두 직접 경험을 통하여 얻을 수만은 없는 한계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들을 골라 그들이 받은 고통이 무엇이고 효과적인 대응방법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지위 상승을 열망하는 베르뒤랭 부인과 앙드레의 어머니, 정규교육을 받지 않아 아는 것이 많지 않은 프랑수와즈, 자기 확신이 넘치는 블로크, 애인 오데트의 마음을 독점하기 위하여 마음앓이를 하는 스완 등입니다. 프루스트는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들의 고통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독자들에게 보여줄 따름입니다. 보통의 작중인물에 대한 분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프루스트는 너그러웠고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그의 친구들은 ‘프루스트화하다’라는 동사를 만들어냈겠습니까? 이 단어는 “약간은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친절한 태도를, 아울러 속된 말로 표현하면 끝도 없이 유쾌한 겉치레”를 가리키는 것이다.(170쪽)”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주변에 이런 사람 하나쯤은 꼭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프루스트 역시 “대화, 이것은 우정의 표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상은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주지 않는 피상적인 여담에 불과하다. 우리가 평생 동안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어쩌면 단 일분의 공허함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151쪽)”고 했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보통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책을 내려놓는 방법’을 논하고 있습니다. 책읽기에 관한 이야기가 갑자기 샛길로 빠져서 마무리된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리는 책을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내놓은 저자는 우선 프루스트가 앙드레 지드에게 “우리 동시대인들 사이의 유행과는 반대로, 나는 인간이 문학에 대한 매우 고상한 관념을 가지는 동시에 문학을 향해 온화한 조소를 던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239쪽)”라고 한 말을 인용하고 다음처럼 해석하고 있습니다. “책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또는 오히려 물신주의적으로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위험에 관한 독특한 자각을 표현했던 것이다. (…) 우리가 다른 사람이 쓴 책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유익함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그 한계의 음미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독자들이 건강한 책읽기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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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5 (보급판) - 왕의 귀환 1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외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반지의 제왕 5편은 그동안 서로를 파악하기 위하여 암중모색하던 선과 악의 세력이 대규모로 충돌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3편에서 사우론의 사주를 받는 사루만이 마크의 영주 세오덴과 겨루어 패하지만, 본격적인 전투는 보로미르의 아버지 데네소르가 섭정하고 있는 곤도르의 미나스 티리스에서 시작됩니다. 미나스 티리스는 언젠가 간달프가 ‘일곱 개의 별, 일곱 개의 돌 그리고 하얀 나무 한 그루’가 있는 궁성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데네소르는 악의 세력으로 넘어가지 않은 사해(四海)의 종족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악의 세력에 가담한 연합군은 미나스 티리스로 몰려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을 맞게 되는데...

 

호빗족 피핀으로부터 아들 보로미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 데네소르는 적의 공격이 임박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아들 파라미르를 매몰차게 대하고 전투를 지휘하러 성벽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탑안에 웅크리고 들어앉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데... 데네소르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팔란티르의 신석 때문이란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절대반지의 처리방안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사태를 꼬이게 만들었던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 왜 형이 아닌 제가 이실리엔에 남았는지 기억해 달라’는 팔라미르의 애원에 대하여 “내 자신이 타 놓은 쓴 잔을 더 이상 휘젓지 마라.(148쪽)”고 답하고, 절대반지의 처리에 대한 간달프의 생각과는 다른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그걸 사용하는 것 위험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각없는 반인족들에게 맡겨서 바로 적의 영토로 보내는 두 가지 어리석음은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절대반지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보로미르를 반지원정대에 보낸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 곤도르의 구원요청을 받은 아라고른, 레골라스, 김리 그리고 메리 등은 로한의 세오덴 왕과 함께 곤도르로 진군할 경로를 의논하고, 아라고른은 고향의 아버지가 보내온 사자(使者)로부터 ‘시간이 없다. 길을 서둘러야 한다면 사자(死者)의 길을 기억하라’는 전갈을 받고 고민에 빠집니다. 사자의 길은 산자가 지날 수 없다는 전설의 길입니다. 세오덴 왕은 나팔산성으로부터 산길을 따라 에오윈 공주가 기다리는 검산오름을 거쳐 에도라스에 이르는 경로를 선택하고, 아라고른은 부친의 전갈대로 사자의 길을 선택하여 세오덴 왕을 놀라게 합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이미 이런 정황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서약한 자의 후계자가 북쪽에서 오리라, 위급한 상황에 몰려 그는 사자의 길에 들어서리라.(84쪽)”

 

과연 아라고른은 사자의 길에서 실마리를 풀어내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곤도르의 왕 이실두르의 후계자 엘렛사르이기 때문이다.(101쪽)” 아라고른은 데네소르가 섭정을 맡고 있는 곤도르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사자의 길에서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자들을 이끌어 내서 전장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라고른의 선택은 미나스 티리스를 방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아라고른의 실체는 미나스 티리스를 수비하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파라미르, 에오윈공주 그리고 메리를 치료하는 기적을 보임으로서 그가 왕임을 증명하게 됩니다. 곤도르의 옛 전설에 의하면, ‘왕의 손은 치유자의 손’이라 했고, 그것으로 적법한 왕이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라고른은 자신이 고대의 언어로 ‘엘렛사르, 요정석, 그리고 엔비냐타르, 즉 부활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이들의 목숨을 살려내게 됩니다. 그래서 곤도르 왕이 돌아왔다는 의미로 ‘왕의 귀환’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 같습니다.

 

로한의 왕 세오덴 왕은 미나스 티리스가 함락될 위기의 순간에 도착할 수 있었고, 악의 세력이 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뿌려둔 어둠을 틈타서 악의 세력을 뒤에서 무찔러 들어가 대오를 흐트러트립니다. 미나스 티리스 성 인근의 숲에 사는 야인들이 길잡이로 도움을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공격에 나선 악의 세력이나 이를 막으려는 선의 세력 모두 대회전에 대비하여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왔음을 알겠는데, 도대체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종족들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집니다.

 

미나스 티리스 방어에 성공한 연합군은 차제에 대오를 정비해서 악의 세력의 본거지로 향하게 되는데, 아마도 이번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할 전투를 보게 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예정된 과정을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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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일보다 사람이 힘들까 - 눈치 보느라 지친 당신을 위한 촌철살인 심리 처방전
조범상 지음 / 알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갓 입사한 신입직원이거나 모든 직원들을 거느리고 있는 CEO를 불문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고민이 바로 인간관계일 것 같습니다. 남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에는 특히 더 답답하게 됩니다. 직장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유기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직장이든 간에 제대로 돌아가기 위하여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기 마련입니다.

 

저도 나름대로는 인간관계를 중요시하여 좋게 유지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갈등을 만든 경험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때 누가 옆에서 콕 집어 해결방법을 제시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결국은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사 및 조직컨설팅을 하시는 조범상님이 쓰신 <나는 왜 일보다 사람이 힘들까>는 대부분의 직장인이 마음 한구석에 꽁꽁 감추고 있는 말 못할 고민을 콕 집어냈다는 생각에 눈길을 끌어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눈치 보느라 지친 당신을 위한 촌철살인 심리 처방전’이라는 부제는 ‘정말일까?’하는 의구심보다도 ‘그래 내가 필요한 바로 그거야!’하는 생각이 먼저 들게 합니다.

 

저자가 ‘들어가는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어느 직장의 분위기입니다. 불협화음이 큰 어느 영업부서에서 보는 상황입니다. “‘영업 특성상 각자의 개성이 강한데, 서로가 개성을 존중하기는커녕 으르렁대기만 한다’고 했다. 그리고 ‘상사는 부하직원들의 무능을 탓하고, 동료들은 경쟁에 눈이 멀어 실적싸움에 상대 흠을 잡는데만 몰두한다. 부하직원들은 상사의 리더십 부제를 흉보고 다니기까지 한다’고 푸념했다. 결국 서로가 각자 성벽을 쌓고 상대를 공격만 하고 있는 셈이었다.(6-7쪽)” 어째 꼭 읽는 사람을 둘러싼 회사 분위기와 상당히 비슷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자는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 직장생활 중에 맺어지는 인간관계를 스트레스 없이 원만하게 만들어가는데 작은 지침이 될 수 있는 책을 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역시 인사 컨설팅의 경험을 가진 분이라서인지, 문제점을 제대로 짚고 있습니다. 즉, 각각의 위치에서 해야 할 역할이 다른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를 풀어가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례를 두고 검토한 결과 상사는 리더십유형에 따라서, 동료는 성격유혐에 따라서, 그리고 부하직원은 일하는 유형에 따라서 심리를 분석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리를 해보면, “상사는 부하직원들의 일하는 방식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일하는 방식에 직원을 맞추려고만 하지 말고, 각자가 가진 장점을 살리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 부하직원들은 상사의 리더십스타일에 주목해야 한다. 상사는 ‘일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일이 되게끔 하는 사랆’에 가깝다. 상사의 리더십 유형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맞춰가는 것이 중요하다. (…) 동료관계는 상하관계에서의 해법과 사뭇 다르다. 서로의 궁합이 우선이다. 완벽하게 맞는 성격끼지 만날 가능성이 낮기에, 서로의 성격차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8쪽)”

 

저자는 상사의 리더십스타일을 워커홀릭형, 매니저형, 연예인형, 그리고 혁명가형의 4가지 타입으로 구분하고, 부하직원의 업무스타일은 질주형, 뚝심형, 말뚝형, 그리고 나 잘난형으로, 동료의 성격스타일은 앞잡이형, 사교형, 현상유지형, 그리고 주도면밀형으로 구분하여 그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직장 내에서 흔히 벌어지는 상황을 인용하여 읽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해당 타입의 상사, 부하직원 그리고 동료와 갈등을 피하기 위한 팁을 요약해서 정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자신이 해당 형에 들어가는지 테스트할 수 있는 장치를 두고 해당형이라고 한다면 주의해야 할 점을 정리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말 핵심을 잘 요약해서 머리 속에 쏙쏙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덤으로 조직이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팁을 부록으로 붙여두는 성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스맨이 많은 조직, 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는 조직, 해온 방식을 고수하는 조직, 냉소주의가 만연한 조직, 방관자가 많은 조직,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높은 벽이 쳐진 조직의 앞날은? 그렇죠. 망하는 지름길을 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계발서를 읽고 마음이 움직이는 경우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닙니다만, <나는 왜 일보다 사람이 힐들까>는 읽은 다음에 손에 잡히는 무엇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그런 책이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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