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난아 지음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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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소설과 소설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937>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오르한 파묵 전작읽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두달에 걸쳐 <순수박물관>,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고요한 집>, <하얀성>, 그리고 <검은책>에 이르기까지 반환점을 돌면서 전작읽기는 중단된 상황입니다.

 

소설을 읽으실 때 소설 뒤에 붙어있는 작품해설을 먼저 읽으십니까? 아니면 작품을 다 읽은 다음에 읽으십니까? 제 경우는 일단 작품을 다 읽은 다음에 작품해설을 읽습니다. 미리 읽으면 작품해설을 통하여 파악하게 된 시각으로 작품을 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품을 읽으면서 미처 착안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작품해설을 읽으면서야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각각 일장일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전담해서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고 계시는 이난아교수님이 파묵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책 <오르한 파묵>을 내셨다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파묵의 작품이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생각에 공감하면서 “파묵의 작품을 좋아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고, 가능한 쉽게 풀어가려고 노력했다.(10쪽)”는 것이 이난아교수님의 집필동기이며 집필방향이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파묵의 작품들 가운데 하버드대학의 강연록을 묶은 <소설과 소설가>를 제외하고 첫작품 <제브데트씨와 아들들>로부터 작품이 나온 순서대로, <고요한 집>, <하얀성>, <검은책>, <새로운 인생>, <내이름은 빨강>, <눈>,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을 거쳐 마지막으로 <순수박물관<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작에 대하여 번역과정에서 이루어진 파묵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파악한 집필의도까지 소개하여 그의 독자들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특히 작품소개에 앞서 <오르한 파묵의 삶과 문학>이라는 소설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될 작가의 삶과 생각을 두루 정리하고 있는 것도 파묵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밖에도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는 파묵과의 개인적 소통을 통하여 얻은 그 무엇까지도 담고 있어 파묵의 진면목을 읽을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보니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내이름은 빨강>을 비롯하여 파묵의 후반기 작품들을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셈이라서 반환점을 돈 파묵 전작읽기를 어서 마무리해야 하겠습니다.

 

이난아 교수님의 친절한 안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부분도 남습니다. 예를 들면 <순수박물관>을 읽고서 적은 리뷰의 한 대목을 가져와 보겠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2677) “사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약혼을 앞둔 남성이 갑자기 등장한 먼 친척 여인을 적극적으로 유혹하여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 현실적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터키사회가 혼전관계에 대하여 보수적이고 서구문화를 접한 여성이 혼전순결을 지킨다는 터부를 깨는 용감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적지 않은 여성들이 혼전 관계 혹은 혼외정사를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다소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케말과 퓌순은 진정한 사랑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한 충동으로 맺은 인연이 떠나고 보니 천생연분이었던 것을 깨닫고 그 사랑의 흔적을 모아서 그리워하겠다는 케말의 엉뚱함을 ‘순수’라고 포장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파묵의 작품들에 공통된 모티프는 동서양 문명의 갈등, 충돌 및 대비를 통해 터키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파묵과 이난아교수님의 인연처럼 터키와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지정학적 유사성,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경계로서의 터키와 대륙문명이 해양문명과 충돌하는 반도에 위치하는 우리나라가 서로 닮을 수밖에 없는 요소가 분명 있다는 점과, 6.25남침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한 혈맹으로써의 과거사가 2002년 월드컵 4강에서 겨루게 된 것이 우리국민들에게 터키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난아교수님의 제목에 담은 것처럼 우리들의 관심의 변방에서 어느 사이에 관심의 중심으로 이동해 있는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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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5-1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묵의 전작을 시도하고 계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전 마음 먹은 지 몇해가 지났는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소설과소설가, 다음으로 이 책을 담아갑니다. 저도 작품해설을 먼저 읽진 않아요. 어떨 땐 작품을 읽는 거로 끝내고 해설은 아예 안 읽습니다. 땡스투유~~^^

처음처럼 2013-05-11 23: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대부분은 책을 읽은 다음에 해설을 읽게 되죠.
 
새로운 디지털 시대 - Google 회장 에릭 슈미트의 압도적인 통찰과 예측, 개정증보판
에릭 슈미트 & 제러드 코언 지음, 이진원 옮김 / 알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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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디도스공격으로 트래픽이 늘어나 웨서버가 정지되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생활이 편리해진 점도 많지만 인터넷이 교란되는 상황으로 생기는 생활의 불편함은 해결방안이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아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IT부문의 발전을 뒤따라가기도 벅찬 까닭에 IT기술의 현주소는 물론 미래를 그려보는 일도 수월치 않습니다. 인터넷 검색방법을 중심으로 하는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구글의 회장 에릭 슈미트와 구글의 싱크탱크인 구글 아이디어의 제러드 코언소장이 같이 쓴 <새로운 디지털 시대>는 바로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저자들은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인류가 만들어놓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9쪽)”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전체의 모습을 그려볼 수 없게 된 인터넷세상은 어쩌면 스스로 진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 순간마다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지고 있어서 “엄청난 선(善)과 무시무시한 악(惡)의 근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터넷은 인쇄술의 도입으로 인류의 지적자산을 저장하고 유통시키는 방법에 일대 혁신을 이뤄냈던 인류가 만들어낸 두 번째 혁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인쇄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기술이 접목된 것이고 보면 그 영향력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라고 할 것입니다. 저자들은 <새로운 디지털 시대>를 통하여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가 현실세계를 더 좋거나 더 나쁘게, 아니면 그냥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적었습니다. 저자들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기술이 인류에게 가지고 올 미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전 세계적인 연결성의 확대로 인해 도전과제와 해결책을 모두 갖고 있는 미래이며, 무엇보다 시민권, 국정운영기술, 사생활, 전쟁 등 전 세계적으로 복잡한 이슈들이 가득한 미래”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가상의 세계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현실세계의 메커니즘이 보다 효율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며, 연결성이 확대되면서 세계화는 점점 더 빠르게 진행되어 더 많은 혁신이 가능해지고 새로운 교육의 기회를 맞게 될 것이며 이로써 우리의 삶의 질은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정보가 축적되는 공간인 만큼 보안과 사생활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란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법정에서 상기되고 싶지 않거나 신문 1면에 인쇄되어 나오길 원하지 않는다면 기록해서는 안된다.(96쪽)”고 적은 저자들은 인터넷의 발달로 국가의 파워를 증가시켜 시민의 개인정보를 쉽게 수집할 수 있게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새로운 도전과제 해결을 위한 대응전략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는데, 기술기업, 법, 사회, 개인의 범주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습니다. 즉 기술기업은 개인의 사생활과 보안문제에 대하여 합당한 수준 이상의 책임을 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며, 정부에서는 법적으로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라는 압박을 받게 될 것이고, 이를 위하여 사회적으로는 커뮤니키와 NGO와 같은 비국가적 활동세력 역시 필요한 조처를 요구하는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개인들은 사생활보호를 위한 개별적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커뮤니케이션기술의 발전은 체제유지에 강력한 힘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 독재정권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국가간에도 디지털도발과 사이버전쟁이 벌어지는 상황도 일어나게 될 것이며, 테러단체의 활동은 현실세계에서보다 더 정교해지고 식별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부차원의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기술이 파괴적인 역할 이외에도 예상치 못한 재난에 대하여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다는 점도 별도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인터넷기술은 그야말로 야누스의 얼굴과도 같다고 할까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터넷세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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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
정영숙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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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장석주님의 <일상의 인문학>을 소개하면서 보스턴에서 열린 학회를 다녀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국에서 적지 않은 독성병리학자들이 참석했는데 전공분야나 관심분야가 다양하기 때문에 학회 참석 이외의 활동을 같이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에는 혼자서 가게 되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9810). 국내 미술관은 별로 가보지 않는 제가 외국에 갈 때마다 그곳 미술관 혹은 박물관을 꼭 찾는 이유는 예술에 대한 안목을 높여보려는 차원이라기보다 일종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미술관에 있는 어떤 작품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다는 허영심 말입니다. 사진 촬영이 허용되기라도 한다면 나중에 사진을 이용할 수도 있겠다 싶은 속셈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공무 혹은 학술행사로 가는 해외여행이다 보니 미리 여행지에 대하여 충분히 공부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미술관 소장품을 감상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주마간산으로 돌아보기 마련입니다. 근래 들어 예스24 블로그 커뮤니티를 통하여 미술작품을 해설한 책을 읽을 기회는 많아지고 있습니다만, 그림을 보는 눈을 뜨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것 같습니다. 책을 읽는 것은 스스로 깨치는 일이라서 핵심을 챙기는 일이 쉽지 않다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초대받은 부서 워크숍 행사의 경험은 제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회의실을 빌어 열린 워크숍의 공식일정을 마치고, 큐레이터의 안내를 받아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윤명로화백의 기획전 ‘정신의 흔적’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115536). 시간여유가 많지 않아 전시된 모든 작품을 꼼꼼하게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윤명로화백의 핵심작품마다 당시 화가의 삶이라던가 작품의 제작기법에 대하여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작품을 보면서 설명내용이 확인되면 “아하!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역시 전문가의 압축된 설명이 그림을 이해하는 안목을 높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결국 발품을 팔아야 그림을 감상하는 눈도 열리는 것이겠지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중회의실과 대강당이 있는데 대관료 없이 이용할 수 있고, 인원이 된다면 큐레이터의 해설을 들으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3월 26일 부터 6월 23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회를 전한 와이뉴스의 송광호기자는 “실험성이 돋보이는 ‘문신’연작, 독자적인 표현방식을 모색한 ‘균열’ 연작, 전통적인 사물에 행위를 결합한 ‘얼레짓’ 연작, 자연의 거대한 에너지를 담아낸 ‘익명의 땅’ 연작과 겸재에게서 추상을 본 ‘겸재예찬’ 시리즈는 그를 추상미술의 명인으로 끌어올렸습니다.”라고 요약하고, ‘빈 공간에 최초의 한 획을 던지면 그 공간이 요동치고, 그 요동의 순간과 함께 호흡하면서 맞춰갔다’는 윤화백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추상의 대가 윤명로 화백이 느낀 궁극의 추상은 결국 자연의 숨결이었습니다.”라고 정리하였습니다.(연합뉴스 2013년 3월 28일자 기사. “자연을 닮아가는 추상미술의 거장, 윤명로)

 

최근 미술작품에 관한 책들을 읽을 기회가 많아진 것은 제임스 엘킨스교수의 <그림과 눈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35742>이 기여한 바가 많습니다.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는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통하여 “이제 우리 영혼의 용량은 리큐르 잔으로 재야 할 겁니다.”라고 갈파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건조해졌는지, 간혹 무언가를 느낄 때도 그 작은 감정들에 조차 얼마나 인색한지를 비꼬았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인용하고 있는 엘킨스교수의 ‘눈물이 말라버린 시대의 그림에 대하여’라는 서문을 읽으면서 숨 가쁘게 살아오면서 저의 감성 역시 덩달아서 메말라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눈물을 쏟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역시 그림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저의 부족함 때문일 것입니다.

 

마른 감성의 눈으로 그저 그림을 바라보는 저 같은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그림을 통하여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미술사를 전공하는 조이한교수님은 <그림, 눈물을 닦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68341>에 그런 생각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죽을 것만 같아서 도망치듯 시작한 독일 유학이니 낭만은커녕 하루 버티기도 힘들어 오기로 버틸 때, 에곤 실레의 작품 <해바라기> 만나고 눈물을 쏟았다는 고백을 한 조이한 교수님은 그때의 느낌이 다음과 같았다고 적었습니다. “여름 내 쏟아져 내린 뙤약볕 아래서 마지막 수분 한 방울마저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해바라기는 서 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이파리. 까맣게 타 버린 씨앗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선 모습. 해바라기의 자존심. 내가 거기서 본 것은 해바라기가 아니라 내 모습이었다.(조이한 지음, 그림 눈물을 닦다. 204쪽)”

 

<그림, 눈물을 닦다>에서 조이한교수님은 눈물, 즉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소설, 시, 영화, 사진, 조각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이끌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그림이 말하려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안규철화백의 작품 <먼 곳의 물>에는 하얀 식탁보가 깔린 탁자에서 주홍색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있고, 물고기 앞에는 물이 반쯤 채워진 투명한 유리그릇이 놓여 있습니다. 식탁보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는 결코 유리그릇에 담긴 물에 닿을 수 없기에 조이한교수님은 이 작품을 ‘너무 멀리 있는 물’로 읽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안도현 시인의 시(詩) <그대에게 가고 싶다>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 (…) 사랑이란 /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 그대에게 가고 싶다 (…)”

 

그림에서 시를 읽은 이는 또 있습니다. 윤향기 시인입니다. [북소리]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키스 스캔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24442>에서 시인의 공상적 그림읽기를 볼 수 있습니다. 클림트, 뭉크, 실레, 브랑쿠시, 마그리트, 비어즐리, 루벤스, 워터하우스 등 대가들이 그린 키스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씨줄로 하고, 다양한 작가들의 시(詩)는 물론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키스에 관한 이야기들을 날줄로 엮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꽃잎을 훔치는 키스’나 ‘위험한 욕망의 키스’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시지요? “당신이 일상에서 잊어버린 키스! 그러나 어쩌면 당신의 영혼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 키스! 生의 에너지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키스에는 요란한 온도와 불빛이 있다. 그것은 때로 당신이 느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넓고 훨씬 신비롭다.(윤향기 지음, 키스의 미학, 53쪽)”라고 적고 있는 시인은 치유의 방법으로 키스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조이한 교수나 윤향기 시인은 그림이라는 씨줄에 시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작품을 섞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만, 그림에 시만을 오롯이 짜 넣은 글이 있습니다. 정영숙 시인의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읽기>입니다. 요즈음 개그프로에서도 <대한민국 행복 업 프로젝트>라는 코너가 뜨고 있는 것을 보면, 여자가 행복해지는 일이 무엇일까 관심을 가질 만한 것 같습니다. “샤를 보들레르 이래 시인은 언제나 화가의 암호를 풀어내는 해독자였고, 화가 역시 시인의 정신을 형상화하는 재현자였다. 시인은 시 안에 그림을 넣어두고, 화가는 그림 속에 시를 숨겨둔다. 마치 암수한몸과 같다.”라고 박제천 시인이 말한 것처럼 그림을 읽어내는데 시(詩)만한 것이 없겠다 싶기도 합니다.

 

정영숙 시인의 설명에 따르면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은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화가들의 그림을 본 후에 쓴, 시가 있는 기행문 형태의 산문과 시를 먼저 읽고 그 시에 맞는 그림을 찾아서 쓴 산문을 엮었다고 합니다. “이 글들은 내 삶의 흔적이다.”라고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10여년에 걸쳐 써온 글들이기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가슴에서 소용돌이치던 불꽃들이 명화를 통해 시로 승화하거나, 아이들을 기르면서 부딪쳤던 어려움이나 아이들의 미래를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는 글이고 보면 책의 제목에 시인의 마음을 제대로 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봄에 책을 세상에 내놓 것을 염두에 두었던 듯, ‘마법사가 만든 봄’이라는 제목 아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봄’을 가장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피렌체에서 ‘비너스의 탄생’을 감상하고서 ‘봄날 하느님을 만나다’는 제목의 시에 느낌을 담았다고 했습니다. “비온 뒤, 하얀 목련 꽃봉오리 속에서 / 비너스의 탄생을 본다 / 바람의 신이 파도에 태어난 금발의 여인을 / 봄의 여신이 있는 /성스러운 섬 키프로스에 데려다 주고 있다(17쪽)”고 시작하는 시에서 조가비를 타고와 키프로스 섬 해안에 내리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얀 목련 꽃봉오리 속에서’는 봄기운이 느껴지는 계절을 의미할 수도 있겠고, 비너스가 타고 온 조가비를 목련 꽃봉오리에 비유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역시 시도 그림만큼 해석이 다양할 것 같습니다.

 

‘영원하고 말이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는 로댕의 작품 ‘나는 아름답다’는 ‘지옥의 문’의 오른쪽 기둥 꼭대기에 있는 작품이라고 해서 저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정영숙 시인은 ‘지옥의 문’을 미국 스탠포드대학 로댕박물관에서 보았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동경에서 열린 일본독성병리학회에 참석한 길에 들렀던 동경 국립서양미술관의 뜰에서 만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로댕박물관에서도 본 적도 있습니다. ‘나는 아름답다’는 ‘추락하는 남자(Falling Man)’와 ‘웅크린 여인(Crouching Woman)’으로 각각 독립된 작품으로 제작된 것을 접합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로댕이 당시 유행하던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 실린 ‘미(美)’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첫 구절을 소개합니다. “오, 인간들이여! 나는 꿈꾸는 돌처럼 아름답다 / 모든 사람을 상심하게 하는 나의 가슴은 / 시인에게 사랑 이야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생겼다 / 물질같이 영원하고 말이 없는 사랑을.(37쪽)” 고개를 하늘로 치켜든 채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는 팔뚝으로 웅크린 여인을 받쳐 든 남자에서 추락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웅크린 여성이 추락하는 것을 남자가 받아낸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표현했다는 해석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구요.

 

시인은 에두아르 마네의 1863년작 ‘풀밭 위의 점심’에서 퍼시 비쉐 쎌리가 1820년에 발표한 시 ‘종달새’가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명의 옷을 입은 남자들 곁에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의 천연스러운 표정과 셸리의 시에서 “사라지는 태양의 금빛 찬란한 빛 속에서 / 구름이 빛나는 위에서 / 그대는 떠올라서 달려간다 / 지금 막 달리기 시작한 몸을 떠난 기쁨처럼(76쪽)”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자연과 한 몸인 듯 앉아있는 그녀는 싯귀처럼 달려가 마침내 우윳빛 몸은 불의 구름이 되어 창공을 날아오를 것 같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모두 23명의 화가들의 그림을 중심으로 시를 엮어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비엔나의 벨베데레궁 오스트리아 회화관에서 만난 에곤 실레의 작품에 대한 느낌에서 다시 눈길을 멈추었습니다. “강한 붓터치와 말라비틀어진 왜곡된 몸의 곡선, 허공을 바라보는 퀭한 눈빛, 말라비틀어진 시든 해바라기의 줄기와 잎새들, 외로움에 떠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는 몸이 움츠러드는 듯한 아픔과 고통을 느꼈다.(68쪽)” 에곤 실레의 작품 <해바라기> 만나고 눈물을 쏟았다는 조이한 시인의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저도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는지 기회가 된다면 꼭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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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6 (보급판) - 왕의 귀환 2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외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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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반지원정대의 대부분의 대원들은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연합군에 가담하여 사우론과의 최후의 일전에 나서는 동안, 샘과 프로도만이 골룸의 안내를 받아 사우론의 본거지 깊숙한 곳에 있는 운명의 오로드루인산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절대반지가 만들어진 사우론 영토의 심장부에 있는 삼마스 나우르에 있는 화산추 속의 용암 속으로 던져 넣어야 절대반지의 위력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절대반지가 자신의 소유라고 굳게 믿고 호시탐탐 절대반지를 빼앗으려는 골룸의 안내를 받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습니다만, 작가는 절대반지의 마력을 깨는 장치로서 골룸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절대반지를 운명의 산으로 가져가는 역할을 왜 호빗족에게 맡겼는지도 말입니다. 책임감이 투철하고 역경에 처할수록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힘을 끌어올리는 호빗족의 능력은 어쩌면 작가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갖추기를 바라는 덕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프로도를 수행하는 샘을 보면, 그 충성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떠날 때 결심했던 건 무엇보다 주인님을 끝까지 돕는다는 거였어. 그러니 주인님과 함께 죽는 것도 내 소임이지. 그래 난 반드시 내 소임을 다할 거야. (…) 그러나 샘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사라지자, 아니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자, 그게 오히려 새로운 힘으로 나타났다. 샘의 평범한 호빗 얼굴은 안으로 다져진 의지로 인해 엄숙하고도 단호한 모습으로 바뀌었다.(86쪽)”

 

프로도 역시 잠깐씩 절대반지에 대한 소유욕을 샘에게 드러내지만, 이내 자신이 맡은 사명을 샘에게 미루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곤 합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순간, 즉 삼마스 나우르의 용암 앞에 서서는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난 이일을 할 수 없어. 아니, 하지 않겠어. 이 반지는 내 것이야!(110쪽)”라고 외치면서 절대반지를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소멸될 위기를 맞은 절대반지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프로도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이겠지요.

 

바로 이 순간 골룸이 프로도에게 달려들어 반지를 끼고 있는 손가락을 물어 잘라내는 순간 발을 헛디디고 끓는 용암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골룸도 할 일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던 간달프의 예언이 적중하는 순간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난 그 반지를 파괴하지 못했을거야. 그 쓰라린 순간까지 와서 우리의 원정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어.(114쪽)”라고 프로도 역시 자책을 하면서 골룸을 용서하게 됩니다. 사실 프로도가 절대반지의 소유를 주장하면서 손가락에 끼는 순간 바랏두르의 거대한 힘이 요동을 치고 사우론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절대반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만 이미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된 순간입니다. 오로드루인산은 대폭발을 일으키며 모르도르의 파괴가 시작되고 사우론을 비롯한 반지의 악령들은 모두 소멸되는 운명을 맞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사족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절대반지의 소멸과 함께 전쟁을 주도하던 세력이 몰락하면서 그 군대를 지리멸렬 흩어지고 말아 전세가 단숨에 기울고 말았습니다. 승리한 연합군이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이 이어지고, 아라고른이 왕위에 오르는 대관식이 진행되고, 반지원정대에 참여했던 호빗들은 떠나왔던 고향 샤이어로 돌아가는데, 샤이어는 3편에서 마크의 영주와 겨루어 패했던 사루만이 프로도 등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미리 쳐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어놓은 상황입니다. 프로도와 샘, 그리고 메리와 피핀 등은 침략자들에게 장악되어 눌려지내던 호빗족들을 독려하여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평화를 되찾는다는 마무리였으니 정말 사족 같아 보입니다.

 

샤이어가 평화를 되찾은 다음 프로도는 빌보와 함께 또 다른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샘과 메리, 피핀은 이 여행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섭섭해 합니다. 이별을 슬퍼하는 세 사람에게 간달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 편하게 돌아가게나! 울지 말라고 하지는 않겠어. 눈물이라고 해서 전부 다 불행의 눈물은 아니니까”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눈물도 많으니 말입니다. 불행의 눈물과 환희의 눈물을 그 조성이 다르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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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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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위대한 개츠비>까지 최근 고전명작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를 자주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영화화 된 명작들을 극장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물론 원작까지 읽게 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우연히 원작을 읽고서 <레 미제라블>을 관람하게 되면서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이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 역시 이름은 익숙하지만 원작은 아직 읽어보지 못한 까닭에 개츠비씨가 왜 위대한지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話者) 닉 캐러웨이가 자신의 옆집, 무려 160제곱미터나 되는 잔디밭과 정원이 달린 대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던 것과 비교될 것 같습니다.

 

줄거리는 요즘 우리네 안방극장에서 만나는 드라마의 줄거리보다 간단하달 수도 있습니다. 미국 중서부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 출신 닉 캐러웨이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뉴욕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먼 친척 여동생 데이지와 대학동창인 남편 톰 뷰캐넌을 뉴욕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것도 뉴욕 맨하탄의 동쪽에 있는 웨스트에그와 이스트에그지역에 각각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데이지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사랑했던 제이 개츠비와 헤어지고 톰과 결혼을 한 것이었고, 데이지를 잊지 못한 개츠비는 돈을 모은 다음 데이지가 살고 있는 이스트웨그의 집이 건너다보이는 웨스트에그에 대저택을 사고 데이지와의 재결합을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막상 두 사람을 다시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하게 되고, 데이지 이외에도 다른 여성과의 관계가 복잡한 톰은 막상 데이지가 게츠비와의 관계를 복원하려들자 맹렬한 질투를 보입니다.

 

부모의 반대로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 데이지와 개츠비는 옛사랑을 다시 이어가려 하지만 운명은 두 사람을 이어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톰이 비밀스럽게 만나던 머틀의 남편 조지 윌슨이 아내의 외도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투는 과정에서 집을 뛰쳐나간 머틀이 집으로 향하던 데이지와 개츠비가 탄 차에 치여 즉사를 한 것인데, 사고를 낸 차가 톰의 차인 것을 알고 있는 조지가 톰을 찾아가 추궁을 하게 되고, 톰은 개츠비가 운전을 했다고 알려주게 됩니다. 조지는 개츠비가 머틀의 남자이며 고의로 머틀을 죽인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개츠비의 집을 찾아가 총으로 쏘고 자살하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미국 사회의 모습, 무너진 도덕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개츠비가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의 불법성, 닉 캐러웨이를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의 도덕불감증 등인데, 주요들장인물들이 살고 있는 장소를 둘러싼 풍경, 청교도들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미국의 동부지역이 변한 모습을 개츠비가 주말마다 여는 파티에서 쏟아져 나온 과일 껍질들, 조지의 정비소 근처에 있는 쓰레기 계곡, 그리고 근처에 서 있는 광고탑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1차 대전에 참전하기 전에 만나 사랑했던 여인 데이지가 5년 뒤에 전쟁터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첫사랑을 다시 찾겠다는 일념을 버리지 못합니다. 낭만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안개만 끼지 않았더라면 만 건너에 있는 당신 집이 보일 겁니다. 당신 집의 부두 끝에는 항상 밤새도록 초록빛 불이 켜져 있더군요.(135쪽)”라고 고백한다거나, “난 모든 것을 옛날과 꼭같이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그녀도 알게 될 겁니다.(159쪽)”라고 의지를 보이는 개츠비는 요즘으로 치면 스토커로 분류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츠비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날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작가는 개츠비의 죽음을 대하는 주위사람들의 반응이 안타까운 캐러웨이의 눈을 통하여 개츠비가 꿈꾸었던 것들을 독자들에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개츠비가 데이지의 부두 끝에서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하여, 그리고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고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김욱동교수님이 옮긴 민음사판 <위대한 개츠비>는 2003년 처음 번역한 것을 젊은 독자들의 감수성에 맞게 2010년에 다시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읽는 느낌이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면 개봉하는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위대한 개츠비>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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