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일하는 분들과 한달에 한번씩 영화를 감상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행사로 고른 작품이 더스틴 호프만의 감독데뷔작인 <콰르텟>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고 있는 요양병원 평가업무와 연관을 지을 수도 있겠다는 무의식적 생각이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 <콰르텟>은 은퇴한 음악인들이 모여 사는 곳 비첨하우스입니다. 이곳에 사는 음악인들은 은퇴는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 음악도를 위한 강좌를 열기도 하고, 전성기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기도 합니다. 특히 연례 갈라 콘서트를 통해서 모금한 돈은 비첨하우스의 운영에 크게 기여하영국의 내로라하는 연주가 혹은 성악가들이 입주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 장점도 될 수 있겠습니다만, 때로는 젊은 시절 경쟁관계에 있던 경우에는 다소의 긴장관계도 볼 수 있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로 경쾌하게 시작되는데, 바그너의 탄생을 맞아 열리는 비첨하우스 운영자금을 모으는 갈라 콘서트를 준비하기 위한 연습이 한창입니다. 아무래도 나이가든 분들이다 보니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어 갈라 콘서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분이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콘서트에 나설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새로운 입주자의 등장은 갈라콘서트의 분위기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빅카드가 됩니다. 입주자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모셔온 새로운 입주자는 오페라계의 프리마돈나 전설의 소프라노 진 호튼(매기 스미스 扮)입니다.

 

 

진의 등장은 입주자들에게 놀라움이었지만, 특히 젊었을 적에 진과 결혼했다가 헤어졌던 테너 레지(톰 커트니 扮)는 심기가 불편해집니다. 진 역시 레지가 살고 있는 비첨하우스에 입주하기로 결정하면서 레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마음에 사과하는 말을 미리 연습하기도 합니다만, 레지는 대화 자체를 거부합니다. 나이가 들면 완고해진다고 하죠? 하지만 진과 친하게 지냈던 알토 씨씨(폴린 콜린스 扮)와 베이스 윌프(빌리 코널리 扮)의 중재로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게 됩니다.

 

진의 등장은 갈라 콘서트를 준비하는 책임을 맡은 시드릭(마이클 캠본 扮)에게는 복음 같은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연히 진-레지-윌프-씨씨로 콰르텟을 구성해서 이들이 전성기에 들려주어 음악애호가들을 사로잡았던 베르디에 오페라 ‘리골레토’의 4중창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가씨여’를 부르자고 제안합니다. 이 영화의 각본가을 맡은 로날드 하우드가 “인간의 목소리를 위해 쓰여진 곡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극찬하였다는 노래입니다. 

 

하지만 진은 이미 음악을 접은 상태입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비평에 민감했던 진은 이미 하강기에 들어있는 자신의 음악에 좋지 않은 비평이 쏟아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더스틴 호프만 감독이 <콰르텟>을 “아직 남은 것이 너무 많은 ‘인생의 3악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라 정의한 것처럼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는 이들은 진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려 나서지만 완강하게 저항하는 진 때문에 씨씨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황을 지켜본 진 역시 마음을 돌려 리골레토의 연습에 나서게 됩니다. 

 

 

드디어 공연하는 날, 대기실에서 무대에 오를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돌발상황이 벌어집니다. 갑자기 씨씨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대기실을 나가려 하는 것입니다. 평소 가벼운 건망증 증세를 보이던 씨씨가 사실은 치매초기였던 것입니다. 공연과 같은 중요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치매의 중요한 증상이라는 점을 주위에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다행히 진이 씨씨를 다독여 상황을 바꾸게 되는데 이런 임기응변은 치매환자를 간병하는 분들이라면 마음에 챙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진의 대응과 달리 씨씨의 관심에서 멀어진 공연의 중요성을 이해하라고 씨씨를 압박하게 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고백하면 이 장면에서 씨씨가 어디로 가려했는지 그리고 진이 무슨 말을 해서 씨씨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연에 집중하도록 했는지 분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서 얼버무려 적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기억이 예전 같지 않다는 변명으로 가름하기에 읽으시는 분이 양해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씨씨가 진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병석에 누운 다음에 레지가 진을 설득하려고 건넨 명대사를 외우려 애를 썼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 아쉽습니다. 어두운 극장에서 부스럭거리면서 핸드폰을 꺼내 메모를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서 더욱 아쉽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씨씨에게 제2의 유아기가 온 것은 아니라는 진의 답변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에 나온 대사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에 위안을 삼습니다.

 

 

 

갈라 콘서트의 오프닝에서 입주한 음악가들의 주치의가 참석자들에게 전하는 인사말이 인상적입니다. “비첨하우스 직원들은 멋진 음악가들을 모시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 공연을 기다리며 이 분들은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덕분에 젊게 사시죠. 공연 시작 전 한 말씀만 더 드리죠. 비첨하우스 직원들은 이 분들께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고 삶에 대한 사랑을 전염시키고 희망을 주시니까요. 진심입니다. 감사합니다.” 실제로 영화의 중간 중간에 이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어린이,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삶과 예술에 대한 애정과 포용이 단지 노년에서만이 아니라 어느 세대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합니다.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소녀들의 연주를 들으며 진심이 담긴 성원을 보내는 음악가들의 모습이나 젊은 음악도들에게 오페라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는 레지의 모습을 보면 이 분들이 진정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레이디 가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랩과 같은 최근 음악의 유행에 관심을 가지고 젊은 음악도가 들려주는 랩을 듣고는 오페라와 랩이 결국 다를 것이 없으며, 어떤 나이에나 예술을 즐길 수 있고 그 형태가 다양할 뿐이라고 설명하는 레지의 강의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는 ‘나이듦’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비첨하우스에 들어가기 위하여 짐을 정리하는 진의 쓸쓸한 모습에서 나이듦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비첨하우스에 사는 분들의 넘치는 활력은 나이듦이 쇠락하는 육체에 대한 서글픔보다는 남아 있는 인생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진과 씨씨가 갈라무대에 오르기 전에 대기실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하여 젊은 시절 멋쟁이 테너에게 한눈을 팔았던 자신을 질책하는 진의 모습을 엿본 레지가 진에서 남은 여생을 함께 하자고 청하는 장면은 이들이 함께 여생을 즐기게 될 것을 예측하게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처와 같은 악처라도 등을 긁어줄 아내가 함께 하는 여생이 더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통하여 감독으로 데뷔한 더스틴 호프만은 “나이를 먹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라지만 인간의 영혼과 정신은 더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관대한 시선과 나이듦에 대한 낙관적인 자세 때문에 이 작품을 연출했다"고 했다고 합니다.(세계일보 2013년 3월 28일자 기사. ‘아직 남은 것이 더 많은 인생 3악장의 아리아’에서 인용) 

 

영화의 전편을 통하여 넘치는 따듯함이 저절로 마음에 흘러들었고 나이듦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객석을 가득 채웠던 것은 아니지만 엔딩크레딧이 끝나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객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화는 처음입니다. 제 생각에는 영화에 츨연한 잘 알려진 쟁쟁한 음악가들이 엔딩 크레딧에 줄줄이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엔딩 크레딧에서 영화 속에 실제로 등장한 음악가와 배우들의 젊은 시절의 사진과 그들의 빛나는 경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독은 예술에 평생을 바친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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