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
정영숙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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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장석주님의 <일상의 인문학>을 소개하면서 보스턴에서 열린 학회를 다녀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국에서 적지 않은 독성병리학자들이 참석했는데 전공분야나 관심분야가 다양하기 때문에 학회 참석 이외의 활동을 같이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에는 혼자서 가게 되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9810). 국내 미술관은 별로 가보지 않는 제가 외국에 갈 때마다 그곳 미술관 혹은 박물관을 꼭 찾는 이유는 예술에 대한 안목을 높여보려는 차원이라기보다 일종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미술관에 있는 어떤 작품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다는 허영심 말입니다. 사진 촬영이 허용되기라도 한다면 나중에 사진을 이용할 수도 있겠다 싶은 속셈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공무 혹은 학술행사로 가는 해외여행이다 보니 미리 여행지에 대하여 충분히 공부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미술관 소장품을 감상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주마간산으로 돌아보기 마련입니다. 근래 들어 예스24 블로그 커뮤니티를 통하여 미술작품을 해설한 책을 읽을 기회는 많아지고 있습니다만, 그림을 보는 눈을 뜨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것 같습니다. 책을 읽는 것은 스스로 깨치는 일이라서 핵심을 챙기는 일이 쉽지 않다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초대받은 부서 워크숍 행사의 경험은 제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회의실을 빌어 열린 워크숍의 공식일정을 마치고, 큐레이터의 안내를 받아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윤명로화백의 기획전 ‘정신의 흔적’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115536). 시간여유가 많지 않아 전시된 모든 작품을 꼼꼼하게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윤명로화백의 핵심작품마다 당시 화가의 삶이라던가 작품의 제작기법에 대하여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작품을 보면서 설명내용이 확인되면 “아하!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역시 전문가의 압축된 설명이 그림을 이해하는 안목을 높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결국 발품을 팔아야 그림을 감상하는 눈도 열리는 것이겠지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중회의실과 대강당이 있는데 대관료 없이 이용할 수 있고, 인원이 된다면 큐레이터의 해설을 들으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3월 26일 부터 6월 23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회를 전한 와이뉴스의 송광호기자는 “실험성이 돋보이는 ‘문신’연작, 독자적인 표현방식을 모색한 ‘균열’ 연작, 전통적인 사물에 행위를 결합한 ‘얼레짓’ 연작, 자연의 거대한 에너지를 담아낸 ‘익명의 땅’ 연작과 겸재에게서 추상을 본 ‘겸재예찬’ 시리즈는 그를 추상미술의 명인으로 끌어올렸습니다.”라고 요약하고, ‘빈 공간에 최초의 한 획을 던지면 그 공간이 요동치고, 그 요동의 순간과 함께 호흡하면서 맞춰갔다’는 윤화백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추상의 대가 윤명로 화백이 느낀 궁극의 추상은 결국 자연의 숨결이었습니다.”라고 정리하였습니다.(연합뉴스 2013년 3월 28일자 기사. “자연을 닮아가는 추상미술의 거장, 윤명로)

 

최근 미술작품에 관한 책들을 읽을 기회가 많아진 것은 제임스 엘킨스교수의 <그림과 눈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35742>이 기여한 바가 많습니다.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는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통하여 “이제 우리 영혼의 용량은 리큐르 잔으로 재야 할 겁니다.”라고 갈파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건조해졌는지, 간혹 무언가를 느낄 때도 그 작은 감정들에 조차 얼마나 인색한지를 비꼬았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인용하고 있는 엘킨스교수의 ‘눈물이 말라버린 시대의 그림에 대하여’라는 서문을 읽으면서 숨 가쁘게 살아오면서 저의 감성 역시 덩달아서 메말라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눈물을 쏟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역시 그림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저의 부족함 때문일 것입니다.

 

마른 감성의 눈으로 그저 그림을 바라보는 저 같은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그림을 통하여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미술사를 전공하는 조이한교수님은 <그림, 눈물을 닦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68341>에 그런 생각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죽을 것만 같아서 도망치듯 시작한 독일 유학이니 낭만은커녕 하루 버티기도 힘들어 오기로 버틸 때, 에곤 실레의 작품 <해바라기> 만나고 눈물을 쏟았다는 고백을 한 조이한 교수님은 그때의 느낌이 다음과 같았다고 적었습니다. “여름 내 쏟아져 내린 뙤약볕 아래서 마지막 수분 한 방울마저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해바라기는 서 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이파리. 까맣게 타 버린 씨앗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선 모습. 해바라기의 자존심. 내가 거기서 본 것은 해바라기가 아니라 내 모습이었다.(조이한 지음, 그림 눈물을 닦다. 204쪽)”

 

<그림, 눈물을 닦다>에서 조이한교수님은 눈물, 즉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소설, 시, 영화, 사진, 조각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이끌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그림이 말하려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안규철화백의 작품 <먼 곳의 물>에는 하얀 식탁보가 깔린 탁자에서 주홍색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있고, 물고기 앞에는 물이 반쯤 채워진 투명한 유리그릇이 놓여 있습니다. 식탁보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는 결코 유리그릇에 담긴 물에 닿을 수 없기에 조이한교수님은 이 작품을 ‘너무 멀리 있는 물’로 읽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안도현 시인의 시(詩) <그대에게 가고 싶다>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 (…) 사랑이란 /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 그대에게 가고 싶다 (…)”

 

그림에서 시를 읽은 이는 또 있습니다. 윤향기 시인입니다. [북소리]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키스 스캔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24442>에서 시인의 공상적 그림읽기를 볼 수 있습니다. 클림트, 뭉크, 실레, 브랑쿠시, 마그리트, 비어즐리, 루벤스, 워터하우스 등 대가들이 그린 키스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씨줄로 하고, 다양한 작가들의 시(詩)는 물론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키스에 관한 이야기들을 날줄로 엮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꽃잎을 훔치는 키스’나 ‘위험한 욕망의 키스’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시지요? “당신이 일상에서 잊어버린 키스! 그러나 어쩌면 당신의 영혼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 키스! 生의 에너지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키스에는 요란한 온도와 불빛이 있다. 그것은 때로 당신이 느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넓고 훨씬 신비롭다.(윤향기 지음, 키스의 미학, 53쪽)”라고 적고 있는 시인은 치유의 방법으로 키스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조이한 교수나 윤향기 시인은 그림이라는 씨줄에 시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작품을 섞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만, 그림에 시만을 오롯이 짜 넣은 글이 있습니다. 정영숙 시인의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읽기>입니다. 요즈음 개그프로에서도 <대한민국 행복 업 프로젝트>라는 코너가 뜨고 있는 것을 보면, 여자가 행복해지는 일이 무엇일까 관심을 가질 만한 것 같습니다. “샤를 보들레르 이래 시인은 언제나 화가의 암호를 풀어내는 해독자였고, 화가 역시 시인의 정신을 형상화하는 재현자였다. 시인은 시 안에 그림을 넣어두고, 화가는 그림 속에 시를 숨겨둔다. 마치 암수한몸과 같다.”라고 박제천 시인이 말한 것처럼 그림을 읽어내는데 시(詩)만한 것이 없겠다 싶기도 합니다.

 

정영숙 시인의 설명에 따르면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은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화가들의 그림을 본 후에 쓴, 시가 있는 기행문 형태의 산문과 시를 먼저 읽고 그 시에 맞는 그림을 찾아서 쓴 산문을 엮었다고 합니다. “이 글들은 내 삶의 흔적이다.”라고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10여년에 걸쳐 써온 글들이기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가슴에서 소용돌이치던 불꽃들이 명화를 통해 시로 승화하거나, 아이들을 기르면서 부딪쳤던 어려움이나 아이들의 미래를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는 글이고 보면 책의 제목에 시인의 마음을 제대로 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봄에 책을 세상에 내놓 것을 염두에 두었던 듯, ‘마법사가 만든 봄’이라는 제목 아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봄’을 가장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피렌체에서 ‘비너스의 탄생’을 감상하고서 ‘봄날 하느님을 만나다’는 제목의 시에 느낌을 담았다고 했습니다. “비온 뒤, 하얀 목련 꽃봉오리 속에서 / 비너스의 탄생을 본다 / 바람의 신이 파도에 태어난 금발의 여인을 / 봄의 여신이 있는 /성스러운 섬 키프로스에 데려다 주고 있다(17쪽)”고 시작하는 시에서 조가비를 타고와 키프로스 섬 해안에 내리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얀 목련 꽃봉오리 속에서’는 봄기운이 느껴지는 계절을 의미할 수도 있겠고, 비너스가 타고 온 조가비를 목련 꽃봉오리에 비유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역시 시도 그림만큼 해석이 다양할 것 같습니다.

 

‘영원하고 말이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는 로댕의 작품 ‘나는 아름답다’는 ‘지옥의 문’의 오른쪽 기둥 꼭대기에 있는 작품이라고 해서 저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정영숙 시인은 ‘지옥의 문’을 미국 스탠포드대학 로댕박물관에서 보았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동경에서 열린 일본독성병리학회에 참석한 길에 들렀던 동경 국립서양미술관의 뜰에서 만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로댕박물관에서도 본 적도 있습니다. ‘나는 아름답다’는 ‘추락하는 남자(Falling Man)’와 ‘웅크린 여인(Crouching Woman)’으로 각각 독립된 작품으로 제작된 것을 접합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로댕이 당시 유행하던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 실린 ‘미(美)’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첫 구절을 소개합니다. “오, 인간들이여! 나는 꿈꾸는 돌처럼 아름답다 / 모든 사람을 상심하게 하는 나의 가슴은 / 시인에게 사랑 이야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생겼다 / 물질같이 영원하고 말이 없는 사랑을.(37쪽)” 고개를 하늘로 치켜든 채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는 팔뚝으로 웅크린 여인을 받쳐 든 남자에서 추락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웅크린 여성이 추락하는 것을 남자가 받아낸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표현했다는 해석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구요.

 

시인은 에두아르 마네의 1863년작 ‘풀밭 위의 점심’에서 퍼시 비쉐 쎌리가 1820년에 발표한 시 ‘종달새’가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명의 옷을 입은 남자들 곁에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의 천연스러운 표정과 셸리의 시에서 “사라지는 태양의 금빛 찬란한 빛 속에서 / 구름이 빛나는 위에서 / 그대는 떠올라서 달려간다 / 지금 막 달리기 시작한 몸을 떠난 기쁨처럼(76쪽)”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자연과 한 몸인 듯 앉아있는 그녀는 싯귀처럼 달려가 마침내 우윳빛 몸은 불의 구름이 되어 창공을 날아오를 것 같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모두 23명의 화가들의 그림을 중심으로 시를 엮어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비엔나의 벨베데레궁 오스트리아 회화관에서 만난 에곤 실레의 작품에 대한 느낌에서 다시 눈길을 멈추었습니다. “강한 붓터치와 말라비틀어진 왜곡된 몸의 곡선, 허공을 바라보는 퀭한 눈빛, 말라비틀어진 시든 해바라기의 줄기와 잎새들, 외로움에 떠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는 몸이 움츠러드는 듯한 아픔과 고통을 느꼈다.(68쪽)” 에곤 실레의 작품 <해바라기> 만나고 눈물을 쏟았다는 조이한 시인의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저도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는지 기회가 된다면 꼭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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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6 (보급판) - 왕의 귀환 2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외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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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반지원정대의 대부분의 대원들은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연합군에 가담하여 사우론과의 최후의 일전에 나서는 동안, 샘과 프로도만이 골룸의 안내를 받아 사우론의 본거지 깊숙한 곳에 있는 운명의 오로드루인산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절대반지가 만들어진 사우론 영토의 심장부에 있는 삼마스 나우르에 있는 화산추 속의 용암 속으로 던져 넣어야 절대반지의 위력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절대반지가 자신의 소유라고 굳게 믿고 호시탐탐 절대반지를 빼앗으려는 골룸의 안내를 받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습니다만, 작가는 절대반지의 마력을 깨는 장치로서 골룸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절대반지를 운명의 산으로 가져가는 역할을 왜 호빗족에게 맡겼는지도 말입니다. 책임감이 투철하고 역경에 처할수록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힘을 끌어올리는 호빗족의 능력은 어쩌면 작가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갖추기를 바라는 덕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프로도를 수행하는 샘을 보면, 그 충성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떠날 때 결심했던 건 무엇보다 주인님을 끝까지 돕는다는 거였어. 그러니 주인님과 함께 죽는 것도 내 소임이지. 그래 난 반드시 내 소임을 다할 거야. (…) 그러나 샘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사라지자, 아니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자, 그게 오히려 새로운 힘으로 나타났다. 샘의 평범한 호빗 얼굴은 안으로 다져진 의지로 인해 엄숙하고도 단호한 모습으로 바뀌었다.(86쪽)”

 

프로도 역시 잠깐씩 절대반지에 대한 소유욕을 샘에게 드러내지만, 이내 자신이 맡은 사명을 샘에게 미루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곤 합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순간, 즉 삼마스 나우르의 용암 앞에 서서는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난 이일을 할 수 없어. 아니, 하지 않겠어. 이 반지는 내 것이야!(110쪽)”라고 외치면서 절대반지를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소멸될 위기를 맞은 절대반지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프로도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이겠지요.

 

바로 이 순간 골룸이 프로도에게 달려들어 반지를 끼고 있는 손가락을 물어 잘라내는 순간 발을 헛디디고 끓는 용암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골룸도 할 일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던 간달프의 예언이 적중하는 순간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난 그 반지를 파괴하지 못했을거야. 그 쓰라린 순간까지 와서 우리의 원정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어.(114쪽)”라고 프로도 역시 자책을 하면서 골룸을 용서하게 됩니다. 사실 프로도가 절대반지의 소유를 주장하면서 손가락에 끼는 순간 바랏두르의 거대한 힘이 요동을 치고 사우론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절대반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만 이미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된 순간입니다. 오로드루인산은 대폭발을 일으키며 모르도르의 파괴가 시작되고 사우론을 비롯한 반지의 악령들은 모두 소멸되는 운명을 맞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사족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절대반지의 소멸과 함께 전쟁을 주도하던 세력이 몰락하면서 그 군대를 지리멸렬 흩어지고 말아 전세가 단숨에 기울고 말았습니다. 승리한 연합군이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이 이어지고, 아라고른이 왕위에 오르는 대관식이 진행되고, 반지원정대에 참여했던 호빗들은 떠나왔던 고향 샤이어로 돌아가는데, 샤이어는 3편에서 마크의 영주와 겨루어 패했던 사루만이 프로도 등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미리 쳐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어놓은 상황입니다. 프로도와 샘, 그리고 메리와 피핀 등은 침략자들에게 장악되어 눌려지내던 호빗족들을 독려하여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평화를 되찾는다는 마무리였으니 정말 사족 같아 보입니다.

 

샤이어가 평화를 되찾은 다음 프로도는 빌보와 함께 또 다른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샘과 메리, 피핀은 이 여행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섭섭해 합니다. 이별을 슬퍼하는 세 사람에게 간달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 편하게 돌아가게나! 울지 말라고 하지는 않겠어. 눈물이라고 해서 전부 다 불행의 눈물은 아니니까”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눈물도 많으니 말입니다. 불행의 눈물과 환희의 눈물을 그 조성이 다르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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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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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위대한 개츠비>까지 최근 고전명작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를 자주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영화화 된 명작들을 극장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물론 원작까지 읽게 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우연히 원작을 읽고서 <레 미제라블>을 관람하게 되면서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이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 역시 이름은 익숙하지만 원작은 아직 읽어보지 못한 까닭에 개츠비씨가 왜 위대한지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話者) 닉 캐러웨이가 자신의 옆집, 무려 160제곱미터나 되는 잔디밭과 정원이 달린 대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던 것과 비교될 것 같습니다.

 

줄거리는 요즘 우리네 안방극장에서 만나는 드라마의 줄거리보다 간단하달 수도 있습니다. 미국 중서부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 출신 닉 캐러웨이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뉴욕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먼 친척 여동생 데이지와 대학동창인 남편 톰 뷰캐넌을 뉴욕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것도 뉴욕 맨하탄의 동쪽에 있는 웨스트에그와 이스트에그지역에 각각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데이지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사랑했던 제이 개츠비와 헤어지고 톰과 결혼을 한 것이었고, 데이지를 잊지 못한 개츠비는 돈을 모은 다음 데이지가 살고 있는 이스트웨그의 집이 건너다보이는 웨스트에그에 대저택을 사고 데이지와의 재결합을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막상 두 사람을 다시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하게 되고, 데이지 이외에도 다른 여성과의 관계가 복잡한 톰은 막상 데이지가 게츠비와의 관계를 복원하려들자 맹렬한 질투를 보입니다.

 

부모의 반대로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 데이지와 개츠비는 옛사랑을 다시 이어가려 하지만 운명은 두 사람을 이어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톰이 비밀스럽게 만나던 머틀의 남편 조지 윌슨이 아내의 외도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투는 과정에서 집을 뛰쳐나간 머틀이 집으로 향하던 데이지와 개츠비가 탄 차에 치여 즉사를 한 것인데, 사고를 낸 차가 톰의 차인 것을 알고 있는 조지가 톰을 찾아가 추궁을 하게 되고, 톰은 개츠비가 운전을 했다고 알려주게 됩니다. 조지는 개츠비가 머틀의 남자이며 고의로 머틀을 죽인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개츠비의 집을 찾아가 총으로 쏘고 자살하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미국 사회의 모습, 무너진 도덕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개츠비가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의 불법성, 닉 캐러웨이를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의 도덕불감증 등인데, 주요들장인물들이 살고 있는 장소를 둘러싼 풍경, 청교도들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미국의 동부지역이 변한 모습을 개츠비가 주말마다 여는 파티에서 쏟아져 나온 과일 껍질들, 조지의 정비소 근처에 있는 쓰레기 계곡, 그리고 근처에 서 있는 광고탑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1차 대전에 참전하기 전에 만나 사랑했던 여인 데이지가 5년 뒤에 전쟁터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첫사랑을 다시 찾겠다는 일념을 버리지 못합니다. 낭만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안개만 끼지 않았더라면 만 건너에 있는 당신 집이 보일 겁니다. 당신 집의 부두 끝에는 항상 밤새도록 초록빛 불이 켜져 있더군요.(135쪽)”라고 고백한다거나, “난 모든 것을 옛날과 꼭같이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그녀도 알게 될 겁니다.(159쪽)”라고 의지를 보이는 개츠비는 요즘으로 치면 스토커로 분류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츠비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날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작가는 개츠비의 죽음을 대하는 주위사람들의 반응이 안타까운 캐러웨이의 눈을 통하여 개츠비가 꿈꾸었던 것들을 독자들에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개츠비가 데이지의 부두 끝에서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하여, 그리고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고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김욱동교수님이 옮긴 민음사판 <위대한 개츠비>는 2003년 처음 번역한 것을 젊은 독자들의 감수성에 맞게 2010년에 다시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읽는 느낌이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면 개봉하는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위대한 개츠비>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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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귀환 - 희망을 부르면, 희망은 내게 온다
차동엽 지음 / 위즈앤비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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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한 것에 분노한 제우스신은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내렸을 뿐 아니라 진흙으로 빚어 만든 여성 판도라를 내려 보내게 됩니다. 판도라에게 제우스는 생명을 주었고, 아테네는 지혜를,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을, 헤르메스는 거짓을 말하는 혀를 주었다고 합니다. 제우스는 생명에 더하여 호기심을 더 얹어주었다고 합니다. 한편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를 하나 주면서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살게 된 판도라는 결국 날로 커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서 상자를 열게 되고, 상자에서는 제우스가 넣어둔 온갖 불행의 씨앗들이 튀어나와 인간 세상에 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상자를 열자 쏟아져 나오는 불행의 씨앗들에 놀란 판도라가 엉겁결에 상자를 도로 닫았을 때는 오직 희망만이 상자 안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서 튀어나온 온갖 불행의 씨앗들이 때문에 인간 세상에 불행이 퍼지게 되었지만 상자 안에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마음에 희망이 남을 수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세상에 나왔어야 할 희망이 상자에 갇히고 말아 인간 세상에 널리 퍼지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무지개 원리>로 우리와 친숙해진 차동엽신부님은 근래 우리의 마음의 지형이 심란하기 짝이 없고 예외 없이 거의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20~30세대는 너무 일찍 비정한 경쟁사회의 ‘쓴맛’을 알아버렸고, 40세대는 제대로 용 한번 써보기도 전에 ‘피로 및 노쇠’증후군에 시달리고 있고, 50~60세대는 떠밀리듯 인생 메이저리그와의 결별 고민에 불쑥불쑥 ‘황망’에 빠지곤 하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틀림없다.(19쪽)”고 적고, 절망의 환청을 견디다 못해 악몽을 꾸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힐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신부님은 그것이 바로 ‘희망’이라는 답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 갇혀버린 희망을 우리 곁으로 불러주려 하신 것이 바로 <희망의 귀환>입니다.

 

신부님의 작품은 처음 읽었습니다만, 젊은이로부터 나이 지긋한 사람들 모두에게 쉽게 읽히는 평이한 글로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시에서, 때로는 책에서, 심지어는 동서양의 속담에서 뽑아낸 글귀들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에 숨어 있는 희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영접하여 포옹하기를 청하고, 불끈 도약하는 희망과 함께 춤을 추고, 즐기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잠시 어려운 점은 은근과 끈기로 맞서 이기고 심기일전하여 희망을 키워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부추겨 희망을 가지도록 하려는 마음이 간곡해서였을까요? “멀쑥하게 불편 없이 잘 자란 사람들은 신의 눈에는 별로다. 고통과 역경을 이겨낸 이들, 그 한가운데를 헤쳐 나간 이들에게 훨씬 더 큰 매력을 느끼지 않을까?(159쪽)”라는 저자의 질문에 공연히 삐딱한 답을 달아두고 싶습니다. 온갖 조건을 갖추어서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도 모든 것을 가졌다는 생각이 부담스러워 공연히 방황하지 말고 신이 그런 것들과 함께 준 과제를 마치기 위하여 신명을 바쳐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매 장의 끝에 붙인 <괜찮다 괜찮다>는 일종의 Q&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장의 말미에 있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괴롭힌다 극복할 길은?’이라는 제목의 질문에 대하여 저자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도 해결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제안에서 제 나름대로 건져 올린 내용은 이렇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심미적 삶, 윤리적 삶, 종교적 삶의 단계적 전이보다는 ‘공연히 남의 밭, 남의 들판을 기웃거리지 말고,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여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라는 것(35쪽), 그리고 누구의 인생도 카피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멘토가 되라(216쪽)’는 쪽에 더 마음이 기운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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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인문학 -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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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 4월 17일 뉴스매체들은 유서 깊은 보스턴 마라톤의 결승선 부근에서 폭발물이 터져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뉴스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보스턴 마라톤하면 1947년, 막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참석한 서윤복선수가 1위로 골인한 것을 시작으로 1950년에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세 선수가 1위부터 3위를 독식하면서 우리 국민들에게 친숙해진 경기이기도 합니다.

 

보스턴 마라톤에는 직접 참여해보지 못했지만, 지난 해 마침 보스턴마라톤 결승점이 위치한 보일스톤 거리 근처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덕분에 역사적 현장에 서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소에 서서 그날의 함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느낌이 남달랐고, 휴일 보일스톤거리를 달리는 마라톤 행렬을 지켜보면서 보스턴시민들의 뜨거운 마라톤 사랑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한 테러의 주체가 오리무중에 싸인 채 미해결사건으로 남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무렵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전자시대를 맞아 수사정보의 원천이 다양해진 덕도 있었겠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수사협조가 크게 기여했다는 것 같습니다. 범인은 러시아의 체첸에서 이주해온 형제인데 체포과정에서 형은 총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동생 역시 총상을 입은 상태라 범행동기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격단체가 개입한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 모양입니다만, 혹시 미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쌓인 심리적인 불안감 등이 범행의 원인(遠因)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부 국가에서 구성원들의 불확실한 삶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인적 유동성이 증가한다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장을 생각합니다. (모두스 비벤디; http://blog.joinsmsn.com/yang412/11912980). 바우만은 최근 들어 국가 간의 거리가 좁아지고, 구성원들의 유대가 빠른 속도로 해체되어 소멸되어 감에 따라 사회적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지는 집단들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국경을 넘어서는 국제적 난민이 폭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면 역시 사회적 불안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일상의 인문학>의 서문에서 장석주님은 이처럼 불안과 공포와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이야말로 위험한 사회가 아니겠느냐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 모두는 사냥꾼이다. 또는 사냥꾼이 되라는 말을 들으며,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거나 강요당한다.(모두스 비벤디, 160쪽)”는 구절을 인용하여, 이미 세상은 사냥꾼들의 정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사냥꾼의 무리에서 이탈해서 사냥을 그만두는 순간, 우리는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짚었다면 해답도 찾았을 터. 장석주님이 제시하는 해답은 바로 책읽기입니다. ‘책은 생명보험이며, 불사(不死)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다.(움베르토 에코 지음, 책으로 천년을 사는 법)’는 구절을 인용하여 “살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하지만 그것보다는 죽지 않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일상의 인문학, 7쪽)”고 하였습니다. 자신 역시 책읽기와 더불어 사유의 싹이 트고 풍성하게 자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당장 밥이 나오는 것을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삶을 살찌우고 풍요하게 만드는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깨닫게 해주려는 말씀입니다.

 

앞서 안상헌님의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2938>이 문학, 역사, 철학을 묶는 인문학 분야의 책을 어떻게 읽어 삶의 본질을 찾아들어갈 것인가를 안내하는 안내서였다고 한다면, 오늘 소개하는 장석주교수님의 <일상의 인문학>은 ‘넓게 읽고 깊게 생각하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주제의 중심이 되는 책과 함께 관련이 있는 몇 권의 책을 읽어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인문학적 책읽기의 심화과정을 안내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일상’이란 일상범백사(日常凡百事)를 줄인 말입니다. 즉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하루가 쌓여가는 일상이기에, “흔하고 하찮은 것, 더러는 의미를 머금지 못한 채 날것의 덧없음으로 뒹구는 그 무엇이다.”라는 저자의 정의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속에서 남들과 다른 무엇을 길어 올리고 있습니다.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생명의 기하학이 역동한다.(8쪽)” 하루하루의 의미가 달라져 보이지 않습니까? 삶의 기본단위가 되는 일상이 없다면 당연히 삶도 없을 것이며 존재의 의미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50개의 주제에 대한 생각을 책을 꼬투리로 펼치고 있습니다. 자연히 특정한 책의 리뷰가 아니라 특정 주제에 관련된 책에서 건져낸 화두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생각을 에세이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저자가 주제를 이끌어내는 쉰한 권이나 되는 책들 가운데 김훈의 <칼의 노래>,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만을 읽어보았을 뿐입니다. 작가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관심이 가는 주제를 이끌어내고 있는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주문했습니다.

 

첫 번째 화두 ‘기다린다는 것’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주제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대학시절 연극부 활동을 할 때 몇 차례 공연을 통해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는 (…) 늘 오늘의 괴로움이 끝나는 내일을 기다린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13쪽)”고 적어 기다림을 인간이 타고난 숙명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딱히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느라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 서있는 시골길 위를 떠나지 못하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주고받는 의미없는 대사를 끌어왔을 것입니다.

 

저자와 겹치는 책읽기가 별로 없었던 탓에 정확한 비유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04741>에서 저자가 추출해낸 사유는 같은 책을 읽고 제가 느낀 점과는 크게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고생을 사서하는 여행에서 환희를 느낀다는 보통의 설명과 함께 “우리는 사막에 있지 않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우리 자신의 결함을 보고 스스로 작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알랭 드 보통 지음, 여행의 기술)”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행은 장소들의 숭고함을 들이키는 문화적 행위다.(140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을 간단하게 적거나, 책내용을 요약하여 전하는 수준의 리뷰에 머물고 있는 저와는 차원이 다른 글쓰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느낌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인문학공부의 심화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책읽기는 궁극적으로 글쓰기로 이어져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책읽기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에세이는 제가 가야할 글쓰기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테리 이글턴의 <반대자의 초상>을 인용한 서평쓰기에 대한 에세이에 주목하게 됩니다.

 

다양한 방식의 서평쓰기가 있습니다. 서평을 저널리즘의 한 형태로 보는 경향도 있는데, 독자들에게 책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만 해도 과거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서점을 찾아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살펴 책을 고르곤 했습니다만, 요즈음은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소개되는 서평이나 인터넷 리뷰어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서평을 읽고 책을 고르게 되면서 누군가의 서평을 참고하여 책을 고르게 됩니다.

 

저자는 월터 카우프만의 책에서 “서평은 정치다.”라는 문장에 꽂혔다고 합니다. 이유는 “서평은 어떤 책이 그 책값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봐주고, 그 책을 어떤 사람들이 읽어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108쪽)”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대개의 서평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갖는 문화적 신뢰성에 비해 그 내용이 부실하다. 그런데도 그 부실함이 들춰지지 않거나 추문이 되지 않는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서평만 읽고 정작 그 책은 잘 읽지 않기 때문이다.(109쪽)”고 잘라 말할 정도로 일반적인 서평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가혹하다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칭찬의 관용구를 남발하는 서평가 보다는 까칠한 태도로 저자를 신랄하게 꼬집고 괴롭히는 서평가의 글을 읽을 때가 훨씬 더 즐겁다는 고백도 서슴치 않는 것을 보면 작가로서 저자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임이 분명합니다. 저의 책에 대한 비판적인 서평을 읽으면서 작가의 본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된 리뷰를 적었다고 생각한 저와는 분명 다른 차원에 사는 분 같습니다. 저 역시 제가 판단하기에 오류투성이의 내용을 담은 책이란 생각에 정치적(?)으로 톤을 상당히 낮춘 서평을 쓴 적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서평에 대하여 해당출판사가 서평을 내려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경우도 있었고, 작가 자신이 서평을 올린 저의 블로그에 스토커 수준으로 덧글을 달면서 비난하던 경험도 있으니 역지사지(易地思之)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전복적 사유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살피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삶에 대한 작가의 단상에서 제가 살아온 삶의 궤적의 일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열광적인 독서광이었던 발터 벤야민은 문학․정치․영화․미술․철학 어느 하나에 고착하지 않고 그것들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중심에서 현대성의 의미를 건져 올렸는데, 예를 들면 철학과 시를 뒤섞고, 정치와 형이상학, 신학과 유물론이라는 재료를 비벼 독자적인 사유세계를 펼쳐냈다는 것입니다.(238쪽) 하지만 그의 글들은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가운데 1940년 불과 48세의 나이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철학적 사유들을 제대로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스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때이른 죽음으로 파리에 대한, 파리를 위한 철학적 대기획은 미완으로 그치고, 남은 것은 지식 유목민의, 변화하는 20세기 사회와 문화 지형에 대한 사유의 균열과 협로, 포식의 흔적들뿐이다.(239쪽)“고 적어 아쉬움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의과대학시절 면역학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했던, 의학에 대한 저의 꿈은 지극히 한국적인 장애를 만나 병원병리학으로 궤도수정을 하고, 신경병리학, 특히 퇴행성 뇌질환으로 좁혔던 관심은 너무 일렀던 탓에 기획을 펼칠 곳을 찾지 못하고 접어야 했으며, 대안으로 시작했던 독성병리학 역시 아직 뿌리내리기에는 척박한 우리나라의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지금까지의 제 삶은 의학의 노마드로 살아온 셈이라고 자위해야 할까요?

 

노마드(nomad)는 ‘유목민’ 혹은 ‘유랑자’로 번역되는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철학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노마디즘는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장석주님의 <일상의 인문학>은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라는 부제처럼 인문학공부를 심화학습하는 과정의 책으로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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