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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 ㅣ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은 독특한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와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 담겨진 의미에 대하여 생각을 펼치고 있습니다. 라블레의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즉, 즉각적으로, 끊임없이 판단을 하려 드는, 이해하기에 앞서 대뜸 판단해 버리려고 하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인간 행위에 대립하는 것, 즉 도덕적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은 소설의 부도덕이 아니라 바로 소설의 도덕이라는 것(15쪽)입니다.
<배신당한 유언들>은 이처럼 라블레를 시작으로 세르반테스, 발자크, 프루스트, 카프카 그리고 헤밍웨이 등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사유는 문학의 범위를 넘어 작곡, 음악, 번역, 지휘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서로 연관을 짓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작품을 해석하는데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즉 작품이 완성되어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가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을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역설이 성립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상정하여 쿤데라는 ‘배신당한 유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게 된 것 같습니다.
<배신당한 유언들>을 통하여 많은 앞선 시대의 작가들, 음악가들, 심지어 화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삶이 조명되고 있습니다만, 특히 문학의 카프카와 음악의 스트라빈스키가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특히 사후에 자신의 작품들의 처리에 대하여 구체적인 유언을 남긴 카프카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작품들을 정리하기로 결심한 카프카는 친구 브로트를 유언집행인으로 하여 “내가 쓴 모든 것들 가운데, 유효한(gelten) 것은 다음 책들뿐이다. <판결>, <운전기사>, <변신>, <감화원>, <시골 의사>, 그리고 <단식 광대>라는 단편 하나.(<명상> 몇 부 정도는 남겨도 무방하다. 나는 누구에게도 그것들을 폐기처분하는 수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단 한 부도 재판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382쪽)” 하지만 브로트는 “내가 그의 단어 하나하나를 광적으로 숭배했다는 것을” 카프카가 알았다거나 “만약 그의 의사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진심이었다면 당연히 다른 유언집행인을 선택했을 것이다.” 는 등의 이유로 친구의 유언을 집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청개구리 우화와 반대사례가 되는것인가요? 평소 부모의 말이라면 거꾸로 행동하기 일쑤인 아들을 두고 눈을 감을 수 없었던 부모는 개울가에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남기는데 청개구리 아들은 부모가 죽자 평소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해서 부모님 유언대로 개울가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부모의 무덤이 떠내려 갈까봐 개굴개굴 운다던가요?
쿤데라는 죽은 이의 뜻을 따르는 것이 “두려움이나 속박 때문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믿지 않기 때문(414쪽)”이라고 말합니다. 망자의 마지막 의사에 대한 복종은 “신비적”이며 “모든 합리적, 실제적 성찰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의 친구 브로트는 절친이 마지막 남긴 간곡한 부탁을 외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것을 진즉에 알았어야 하는건데 말입니다.
쿤데라는 카프카의 사례를 들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없애기로 결심하는 이유를 몇 가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죽음의 순간에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애착을 가지지 않게 된 것인데 실패의 유물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작품들은 사랑하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남긴 작품이 자신이 혐오스럽게 여기는 미래의 처분에 맡기게 된다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작품을 사랑하고 미래의 세상에는 관심도 없지만 대중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대중의 몰이해로 인한 괴로움을 죽어서까지 겪을 수 없다는 생각이라고 합니다.
이 마지막 이유는 바로 작품의 해석에서 다양한 접근을 넘어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부류들이 작가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입니다. 쿤데라가 <배신당한 유언들>이라는 제목을 정한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원작자의 의도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것을 ‘배신당한 유언’이라는 은유로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저자가 권하는 카프카의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카프카의 소설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것들을 소설 읽듯이 읽는 것뿐이다. K라는 등장인물에게서 저자의 초상을 찾는다거나 K의 말들에서 암호화된 신비한 메시지를 찾으려 들 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동거지, 그들의 말, 그들의 생각을 주의 깊게 좇으면서 눈앞에서 상상해 보는 것 말이다.(3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