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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1994년도에 나온 영화 레옹의 OST로 쓰인 Shape of my heart를 부른 것으로 유명한 스팅은 그 외에도 숱한 히트곡들을 불렀는데, 그 중에 유명한 곡이 바로 Englishman in New York입니다. 뉴욕에 따로 떨어져 입에 맞지 않는 뉴욕음식을 먹고, 눈에 익지 않은 뉴욕풍경을 보며 그 거리를 걸어가는 영국신사의 모습을 서정적인 음률로 잘 그려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곡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만약에 뉴욕이 아니라 다른 도시였다면 그 영국신사가 그만큼이나 헤맸을까요? 뉴욕이 그만큼이나 다양한 사람이 섞이고, 발전이 빠른 도시였기에 더욱 대비효과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책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저 스팅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뉴욕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책의 서두는 갓 열여덟이 된 저자, 피터 버거가 오스트리아에서 (스팅의 노래와는 다르게 영국신사는 아니었지만) ‘뉴욕’ 으로 건너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갓 열여덟이 된 피터 버거는 ‘종교적 열정에 불타고’ 있었기에 목사를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야간에 학업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을 골라야만 했었고, 결국 사회 조사 뉴스쿨, 이라는 곳에 등록하여 강의를 듣게 되지요. 그때부터 그의 좌충우돌 사회탐방기가 시작됩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미국 사회학’ 을 배우는 줄 알았다고 푸념하는데, 사실 그의 푸념이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닌 것이, 뉴욕은 당시에 미국은 미국이었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진) 매우 ‘독특한 세계시민주의’ 를 습득할 수 있는 장소였고 일종의 근대화의 성소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의 초기 지적 여정에서 이 ‘뉴욕’ 과 ‘뉴욕식 교육’ 이 미친 영향은 그의 반생을 걸쳐 지속됩니다.

 

이 뉴욕, 이라는 도시와 함께 피터 버거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뉴스쿨에서 배운 강의였습니다. 당시 뉴스쿨에서는 일종의 삼총사, 라고 불릴만한 세 명의 교수가 있었는데, 알베르트 잘로몬, 알프레트 쉬츠, 카를 마이어가 바로 그들이었지요. 그들로부터 그가 영향을 특히 받은 것은 ‘일상생활에서 지식으로 통하는 모든 것을 다루어야 지식사회학이다’ 와 같은 명제와, ‘일상생활이라는 일차적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넘어가는 복수 현실’ 의 개념과 같은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깊게 영향을 받은 것은 ‘막스 베버’ 적 관점으로 사회를 관찰하는 것이었지요. 그가 베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던 사람은 위의 세 교수들 중에서도 특히 카를 마이어였는데, 카를 마이어는 전적으로 ‘베버의 관점’에서 종교를 분석하며 현재에도 잘 알려진 카리스마의 일상화와 같은 개념을 그에게 알려줍니다.

 

뉴욕과 막스 베버. 자서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사회학자로서의 이력의 궤적을 쫓아가는 이 책의 근원에는 위의 두 존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서 피터 버거의 지적 이력에 마지막으로 영향을 끼친 존재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 이지요. 앞서 피터 버거는 미국으로 건너올 때 ‘종교적 열정에 불타있었다’ 고 했었지요. 원래 그는 루터교 목사를 하고 싶었고 신학대학원까지 진학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그만두고 사회학자가 되고 말았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학자가 된 것을 후회하거나 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 곳곳에서는 종교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잘 드러납니다. 당장 이 책의 원제에 쓰인 Accidental Sociologist라는 단어만 보아도 그가 사회학자와 목사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느낄 수 있지요. Accidental, 곧 어쩌다가 사회학자가 되었다는 말은 사회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혹은 삶의 정상적인 궤도를 밟아나갔다면 자신은 신학에 종사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테니 말입니다.

 

 

 

결국 그의 지적 이력은 위의 그림과 같이 세 부분의 교집합들로 표현되어질 수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생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를 알아낸다면, 그 사람이 지금껏 거쳐 온 여정과 앞으로의 행로는 그 기본적인 요소들의 응축이거나 분리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물론 한사람의 삶이 꼭 그렇게 수학적으로 딱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서도 몇 번이고 ‘갑자기 어떤 일이 생겼다’ 혹은 ‘미국이라서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와 같은 언급을 통하여 자신의 생의 불확정요소들을 털어놓지요. 그러나 그런 불확정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삶의 풍랑이 거치더라도 등대의 불빛을 목표로 하는 (나아갈 곳이 있는) 배는 항상 희망을 품고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 피터 버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서, 위의 세 개의 구성요소들로 인하여 발생한 목표들, 그의 사회학적인 관심이 그의 지적 여로를 이끌게 됩니다. 위의 다이어그램을 봅시다. A에는 어떤 말이 적절할까요? 종교와 뉴욕의 교집합을 살펴보면, 뉴욕의 다양한 종교들, 오순절파나 루터교 등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는 더 나아가 뉴욕이라는 도시의 다원성과 맞물려 뒤에 피터 버거가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그의 종교에 대한 관심은 (그 뉴욕이라는 도시의 다원성 때문에) 크리스트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슬람교 등 셈족 계통의 종교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게 되었지요. 이는 이후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이분법의 폐해를 살피게 된 것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B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종교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앞서도 말했다시피 카를 마이어, 의 관점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그가 다양한 종교를 접할 때 항상 기본적으로 자신의 비판 준거로 삼는 것은 바로 막스 베버였습니다. 막스 베버 본인도 종교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었는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종파와 교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지요. 그 뿐만 아니라 ‘종교는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전환시킨다’ 라는 명제 아래에 종교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C에는 뉴욕의 다원성과 막스 베버와의 공통점에 어울릴만한 내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거듭해서 주장하듯이, 뉴욕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멕시코에서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그리고 중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 그리고 다시 미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요. 물론 그의 여행에 한계점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행을 갈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을 들르는 경우가 많지요. 결국 다녀본 곳만 가게 되는 경우가 많고, 정말 내밀한 곳을 들르기란 쉽지 않지요. 하지만 사회학자란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가장 가까운 유곽을 찾아가는 데 백만 달러 기부금이 필요한 사람’ 이기에 (이 말은 곧, 기부금이 있다면 소홀히 넘길만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평소라면 사회적 체면 때문에 들르지 못했을 유곽까지도 찾아간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구석구석까지는 훑지 못했더라도 대략적 그림을 잡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렇기에 그런 다원적인 모습을 막스 베버와 통합시켜서 근대화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시킵니다. 그는 수많은 나라들의 정치체제와 사회적 구조를 살펴본 결과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그나마 적합한, 그리고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모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그렇다면 그의 궁극적인 목표, 세 개의 원이 동시에 만나는 가장 한 가운데의 빈칸에는 어떤 것이 들어가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책의 말미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불가침’ 이라고 말이지요. 사회학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며,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가 어린 시절 선물로 받은 장난감 기차에서 가상의 승객들과 잡담을 나누었듯이 말이지요. 거기엔 사람들이 없잖아, 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아버린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의 수많은 문제들과 부조리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눈을 감게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지하고, 함부로 눈감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는 것, 그들의 소리를 듣는 것.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그 결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지요. 책 군데군데 드러난 유머러스한 문체는 이것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읽기를 방해하는 부분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저자 스스로가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모두 잘라내고, 자신이 어떤 대학을 다녔고, 어떤 기관에서 연구를 했느냐, 와 같은 딱딱하게 들릴 수 있는 부분만을 쫓아갑니다. 독자들이 궁금해할만한 사항을 ‘언급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생략해버리는 일도 종종 저지르는 것이지요. 특히나, 그가 왜 사회학자를 택했는가, 에 대한 이유는 자세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예의 여기에서 언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같은 말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갑자기 다른 곳으로 대화주제가 옮겨지듯, 이 책도 마찬가지라서 군데군데 자신의 지적 이력과는 크게 상관없는 부분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고는 다시금 적절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끊어버립니다. 지적 모험담, 이라는 부제가 붙듯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이야기하기에 딱딱한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독자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부분마저 (그것도 앞서 언급해두고) 생략한다는 것은 몰입에 방해를 줄 수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런 부분뿐만이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데 있어 좀 불친절한 면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연구결과를 모두 다 알고 이 책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책에서 자신의 책들을 정말 많이 언급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맛만 보는 수준으로 끝나고 말지요. 그러고는 그 내용을 적용한 사회 현상을 언급합니다. 지적 여력을 되돌아보는 책으로는 맛만 보는 수준에서 책 내용을 언급하는 것이 옳지만, 그 바로 뒤에 그 내용을 적용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적어도 독자가 그 내용을 따라갈 정도로는 설명을 했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저자 피터 버거는 사회학으로의 초대, 성스러운 천개, 신앙의 문제, 자본주의 혁명, 의심에 대한 옹호 등 수많은 책을 썼지만, 그 책들을 다 읽어본 독자는 사회학을 깊이 전공하거나,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드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막스 베버의 이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모습을 책 전반적으로 보여주는데, 정작 그 막스 베버의 이론과 개념들, ‘카리스마의 일상화’ 등과 같은 개념이 어떤 의미인지 적절하게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단점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자의 이념에의 편향,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에 대한 주장도 문제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책 중반부부터 나오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옹호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따라 읽어가는 입장에서는 충분한 설명이 없이 제시되어 갑작스럽지요.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비행기를 타는데 조종사가 아프리카의 시간 개념으로 비행기를 조종한다면 비행기가 추락할 것이다.’ 이 말은 아프리카의 시간개념과 서구의 시간개념을 비교하면서, 아프리카의 시간개념이 훨씬 느슨하고 덜 정밀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도출된 말인데, 책에서는 여기에 대해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제시되어있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는 저런 형태의 주장을 바탕으로 근대화 논리를 이끌어내고, 그 근대화 논리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끌어내지만, 이는 근본 명제가 엄밀하지 않다는 약점을 가집니다. 실제로 저자가 자본주의에 대한 편향을 가지게 된 원인은 다르게 존재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책만으로 볼 때에는 그 이상 다른 원인을 이끌어내기는 힘들지요.

 

하지만 이런 문제점들을 제쳐두고라도, 그의 ‘지적’ 편력들에 대하여 한 쪽 눈을 감고 읽는다면, 그의 발자취를 훑어가는 일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인문학의 경계 안에 있는 어느 학문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사회과학은 인간을 살피는 학문이라고 무방할 테고, 사회현상을 살피고 분석하는 것에 앞서서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학문일 테니 말입니다. 조사를 하던 연구를 하던 그 기저에는 이 집단의 이 사람의 삶의 환경과 여정을 살피는 것이 깔려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절대 항구적이지 않고, 도리어 변덕스러우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것들이지요. 저자는 그런 ‘인간 세상에 대한 매혹’을 느꼈고 우리에게 그 매혹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기에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책 자체도 저자 자신의 사회학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내려진 결과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미국 뉴욕으로 건너와 낯설음을 뒤로 하고 연구에 뛰어든 이래 아직도 ‘팔팔한’ 그의 학문적 여정이,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한 시민으로서의 그의 삶이 어디로 향하여 어디에서 끝을 맺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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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7-24 21:48   좋아요 0 | URL
저 세개의 원이 이 책을 너무나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연 2012-07-24 22:13   좋아요 0 | URL
어이쿠..ㅠ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죠. 일개님의 리뷰도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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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야기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세상의 모든 비의와 지식을 깨달은 파우스트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남은 것은 영적인 존재에 다다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영적인 존재와의 접촉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다가오는 죽음에 비참해하며 슬픔에 빠져있는데, 그런 파우스트 앞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다가온다. 그들은 바로 계약을 맺게 되는데, 계약의 조건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다음과 같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모든 조력을 아끼지 않는 대신, 파우스트가 세상에 대한 갈구를 멈추게 되면, 단 한 번이라도 현실에 만족하게 된다면 ‘시간아 멈추어라.’ 라고 외치게 되며, 동시에 그의 영혼을 받아가는 것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으로 다시 나이를 되돌리게 된 파우스트는 그레트헨과의 사랑을 거쳐서 헬레네와 결혼을 하는 등 향락에 젖어 살지만, 결국에는 어느 황제의 궁전에서 자신이 할 일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지식을 사용하여 자신의 토지를 개척하여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고, 결국 그 계획을 성취시키게 된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하고 만다.

 

멈추어라 순간아, 너는 진실로 아름답구나.

 

악마는 계약대로 파우스트가 현실의 삶에 만족했다고 생각하고는 그의 영혼을 뽑아가려고 하지만, 신은 그가 ‘현실의 삶’ 에 만족한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자신의 행동에 함축하며 그의 영혼을 승천시킨다.

 

 

 

***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어야 할 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아니면 독서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부터 정의를 하고 이야기를 이끌어내어야 할 지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항상 내가 독서를 시작할 때 느끼는 감정은 ‘광기’와 ‘죽음’ 에 대한 감정이다. 밤에 어떤 책이든, 그것이 문학이든 인문학 서적이든 그 어떤 서적이든, 펴놓고 읽고 있을 때 나는 과장 같지만 진실로 ‘광기’를 먼저 떠올리게 되고, 책을 다 읽은 순간 나는 ‘죽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하이데거처럼 필멸자로서의 나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고, 책 깊숙한 곳에서 인식의 한계와 무의식을 살펴보기 때문이다. 한계 너머는 오직 깜깜할 뿐이고, 인간 존재에 있어서 깜깜함은 오직 죽음뿐이다. 우리가 눈을 영원히 감고 있을 때 그 어떤 색채의 빛도 우리의 뇌에 도달하지 못한다. 죽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광기를 느낄 뿐이다. 어떠한 빛도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의 뇌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망막에 투사한다. 당장 어떠한 언어도 입에 품지 말고 자신의 머릿속을 살펴보라.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미지들, 혹은 이미지조차도 되지 못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 그 ‘무엇’ 들이 과연 제대로 된 형상을 안고 있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형상들은 수많은 감정과, 그 감정을 근원으로 하는 욕망으로 투사되어 광기에 일그러져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리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크든 작든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 아무 감정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애초에 아무런 욕심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직 ‘죽음’ 뿐이다. 독서를 통해서 이런 양 극단, 욕망의 극단인 광기와 그 대척점으로서의 죽음을 항상 느끼는 나로서는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다시금 책 읽기에 빠져들게 된다. 아무래도 죽음보다는 삶이 낫지 않겠는가. 적어도 책을 읽을 때에는 욕망의 극의로서의 광기를 느낄지라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 말이다. 여기서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 빛을 발한다.

 

 

이 책은 상당히 특이한 책이다. 사상가가 쓴 책 치고는 상당히 쉬운 언어로 구성되어있다는 점도 눈여겨볼만한 점이지만, 그 쉬운 언어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상당히 깊은 생각을 요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책은 닷새 동안의 밤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세라자드의 천일야화를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다. 물론 차이점이 더 많다.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동일한데, 그것은 천일야화든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든 하나의 주제를 몇 번이고 변주한다는 점이다. 천일야화가 알라는 위대하시다, 라는 내용을 기본적으로 모든 이야기에서 그 바탕에 연원으로 두고 있다면, 이 책은 기본적으로 ‘책을 읽는 것은 혁명을 한다는 것이다.’ 가 그 기원이다. 여기에서부터 수많은 논리들이 파생되어 나온다. 혁명은 쉽게 이루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혁명은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가 밝혔다시피, 그리고 내가 느끼다시피 책을,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의 무의식에 접속한다는 것이고, 이는 그 무의식의 광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 이기 때문이다. 혁명을 이루기 전에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곤란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모든 책들은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읽을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그 읽을 수 없는 것을 ‘읽어나감으로써’ 혁명을 진행시킨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그 예로 루터와 무함마드를 들어서 설명을 진행하고 있다. 루터는 성서라는 텍스트를 그대로 읽어나감으로써 가톨릭에서 벗어나 하나의 종파를 설립하였고 (그 이면에 사회학적인 다른 이해관계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무함마드는 문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문맹이었기에 신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고 이슬람교를 창시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루터와 무함마드는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았다’ 라는 점이리라. 앞서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신이 이상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를 해놓고 이들은 정신 이상의 증후를 보이지 않는다니. 여기서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자면 이들이 읽은 책, 그러니깐 성서나 (초기의 신의 언어로서의) 코란은 그 텍스트를 그대로 접해도 광기에 집어삼켜지지 않는다, 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거나, 이들은 광기에 집어삼켜지기 전에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거나 취해졌었다, 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다. 혹은 대담한 이야기이지만 둘 다 사실 광기에 이미 휩싸여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종교를 세운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신념을 공유하는 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이고, 이는 니체가 말했다시피 ‘이미 광기에 젖어있는’ 행위이기에 말이다. 꿈에 취해있지 않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현실이 아닌 꿈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광기에 잡혀있지 않다면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꿈속에서 살아간다고 여긴다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행동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 어떻게 종교를 만들어 세상을 변혁하려고 하겠는가. 셋 중 어떤 가설이 옳을지는 당장 알 수 없다. 어쩌면 셋 다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수도 있고, 어느 것도 해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 책에서는 루터의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루터가 이야기한 부분을 인용한다. 당시 루터가 살았던 현실은 교회서 배척당하면 수도사로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었는데, 루터는 당당하게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이단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결국 현실에서 배척당하고 만 것이다. 현실에서 배척당한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바로 꿈으로 향할 뿐이다. 세상이 미친 것일까, 내가 미친 것일까? 내가 진정으로 꿈 속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루터는 이야기한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책을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는 것 외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책은 광기의 유산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생의 광기의 유산이며, 이 독서의 끝남은 광기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의 붕괴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금 깜깜함으로 돌아간다는 것이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며 삶에서 죽음으로의 전환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도중에, 이 책이, 하나의 광기가 얼마나 남았는가, 를 몇 장 남았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헤아리며 몇 번이고 앞서 말한 파우스트처럼 되뇌는 것이다. ‘멈추어라 순간아, 너는 진실로 아름답구나.’ 라고. 파우스트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이 몇 번이고 중첩되어 생을 붙잡고 있기에 외친 것이지만, 나로서는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조력자도 없을뿐더러, 파우스트처럼 모든 학문의 극의에 달하지도 못했고, 그처럼 모든 향락도 누리지 못했기에 결국에는 나 자신의 생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외치는 것이다. 서로 다를 것 같지만 둘 다 생을 붙잡는 의미에서는 나와 파우스트 모두 동일하다. 무엇보다도 '현실의 삶' 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리라. 그가 높은 이상을 추구하였다면, 나 또한 책읽기를 통해 추구하는 이상은 그에 뒤지지않는다. 하지만 그 붙잡는 행위는 나에게는 이윽고 덧없이 끝나게 되고 (나에게는 파우스트의 ‘신’ 이 없다.) 결국 깜깜함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삶은 나에게 하나의 의문점을 던져준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살아가는 여기,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책 안에서 무의식과 욕망을, 그리고 더 나아가 생의 광기를 느낀다면, 책 밖의 현실은 나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

 

 

 

  그리고 이야기는 카우보이 비밥으로 마무리된다. 카우보이 비밥, 이라는 유명한 애니메이션이 있다. 들어본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큼이나 숱한 화제를 낳은 애니메이션인데, 우리 나라에서 유명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박완규, 그렇다 나가수의 그 박완규, 가 자신의 대표곡이라면 대표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천년의 사랑을 부를 때, 그 뮤직비디오로 이 애니메이션을 편집해 사용한 것 때문이다. 정말 오래 전에 나왔지만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중이다. 간단히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상금 사냥꾼인 스파이크 슈피겔은 비밥호라는 우주선을 타고 제트나 페이와 같은 동료와 함께 현상범을 사냥한다. 하지만 그의 과거는 어두웠는데, 원래 어느 조직에 속해 있던 그는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같은 조직원인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원래 도망치기로 했었다. 하지만 조직은 배신하려는 그를 순순히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고, 도리어 조직원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를 죽일 것을 청부한다. 결국 그들은 엇갈리게 되고 후에 다시금 만나게 되지만, 결국 그들은 달아나지 못하고 여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고 현상금 사냥꾼으로 사는 동안 스파이크는 자신의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한다. 꿈이라면 죽어도 좋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의 목숨을 내던지려고 든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죽는 것을 보고는 현실과 꿈을 구분하게 된다. 이윽고 꿈에서 깨는 것이다. 그때 주인공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깨지 않는 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샌가 깨버렸다.’

 

나에게 있어서 당장의 독서는 이와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을 때 삶을 느끼는 나는, 그 세계에 침잠하면 침잠할수록 현실에서는 한편으로는 유리되는 기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두가 달리고 있는데 나는, 그렇다,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혼자서 멈춰서 주저앉아있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도리어 책읽기를 중단한 현실은 나에게 깜깜한 이미지만을 비추고, 이는 항상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인간은 죽음과 언제나 가까이 있지만, 그 죽음을 도리어 외면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항상 직면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 상황을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고, 꿈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될 것이며 이윽고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도, 혹은 위험한 행동도 쉽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꿈으로 여겨지니까.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에서는 독서를 일종의 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혁명은 왜 일어나는가? 꿈을 꾸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꿈을 꾸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꿈은 언제 나타나는가? 잠을 자고 있을 때 꿈을 꾸는 것이다. 하지만 꿈만 꿀 수는 없는 것이다. 꿈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꿈에서 깨어야만 하고, 꿈의 단초를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진행시키고 싶을 때 책을 읽는다. 잠에서 깨어 책을 읽고 혁명의 단초를 붙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금 책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문학이든 사상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금 잠에 들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로 깨지 않는 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치는 않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꿈처럼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신의 생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회피하고 회피하다가 결국에는 현실을 꿈처럼 바꾸기 위해서 들고 일어나는 ‘혁명’ 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다. 앞서 루터나 무함마드 정도가 그런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책에서는 이야기한다. ‘아니, 380만년이나 남았는데 혁명은 그 긴 시간 동안 언제든지 일어나지 않겠느냐’ 라고. 그렇다, 분명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루터나 무함마드, 니체 등 그들과 비등한, 그리고 그들보다 더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태어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의 저 말은 동시에 380만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함의한다. 독서는 광기와 함께 이런 것을 깨달을 만큼의 지혜를 동시에 나에게 부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샌가 깨버렸다, 라고 혼잣말을 할 것이다, 380만년의 영원의 그 언젠가.

 

 

 

 

 

 

 

 

 

p. s. 아주 아방가르드한 글이 되어버렸네요,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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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7-15 04:0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첫째날, 읽고 잠시 덮어두었는데, 아주 생각할 것들이 많아요. 가연님의 리뷰는 책 다 보고 보려고 일단 서두만 읽고 스킵해뒀는데, 이 리뷰를 읽기 위해서라도 얼른 책을 마저 읽어야겠네요.

가연 2012-07-16 15:00   좋아요 0 | URL
ㅎㅎ 이 책은 자신의 독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그 결과물이 이런 요상한 글이 되어버렸지만 읽을때부터 하고 싶었던, 할말은 다 했으니 마음은 편하네요. 사실 엄밀하지 않다고 스스로 여겨지던 부분이 눈에 좀 걸리긴 했지만..ㅎㅎ 특히 넷째날, 풋. 다음에 다시 읽어볼 만한 책인 것 같네요.

꽃도둑 2012-07-21 11:00   좋아요 0 | URL
가연 대장님! 며칠 동안 심하게 아팠습니다.(쿨럭쿨럭~)
아직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요..리뷰를 늦어도 월요일까지는 올릴게요,,,,^^

가연 2012-07-23 17:04   좋아요 0 | URL
지금은 좀 나으세요? 네, 혹시 힘드실 것 같으면 연장 메일이나 댓글 남겨주세요.

꽃도둑 2012-07-25 23:43   좋아요 0 | URL
낮자마자 여름휴가 여행다녀왔어요. 서재도 오늘에서야 들어왔네요.
리뷰가 늦었네요,,,,암튼 짧게라도 써서 올려놨습니다...고맙습니다^^

가연 2012-07-28 06:18   좋아요 0 | URL
네,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 2013-08-10 01:41   좋아요 0 | URL
이 책 제목 조금 무섭기도 하네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책을 읽고 나면 뭔가 덧없음을 느낍니다 그게 무엇인가 했더니 '죽음'이었나 보네요 가끔은 그 말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책 속에 나오는 사람이 그렇게 되겠구나 한 거죠(어쩌면 꼭 그런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군요) 광기는...

혁명은 꿈을 꾸기에 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이 낱말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거의 저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무엇을 바꿔야 한다고 여긴 적이 없어서...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고 할까

뭔가 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는군요^^


희선

가연 2013-08-11 20:40   좋아요 0 | URL
제목이 참 특이합니다. 저도 덧없다, 라는 감정을 정말 많이 느끼는데, 사실 죽음, 이라는 것이 항상 근처에 있다, 라고 책이 알려주는 것 같다, 라는 생각도 가끔씩 해봅니다만.. 그야말로 우스개소리같네요, 풋.
 

 

 

 

책 읽고 서평쓰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으니..

한마디 안끄적거릴 수가 없는게, 엊그제 힉스 보존으로 추정되는 소립자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실 페르미랩에서는 힉스 보존에 대한 데이터를 상당히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알고 있었기에 나로서는 왜 에너지 수준이 더 높은 CERN에서 아직 발견을 못했을까, 의아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발표를 해주니 한편으로는 괜스레 기분이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 뭐랄까, 초대칭이론이 너무 딱 맞아들어가는 기분이다. 특별한 근거는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올해 연말에 힉스 보존의 존재가 확인된다면 우주 공간을 채우는 다크 매터들의 정체는 아무래도 보존과 페르미온의 초대칭성에 의거한 입자일 가능성들이 높을 것이다.. 특히나 뉴트랄리노, 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파인만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수학이 어떻게 자연을 이렇게 잘 설명할 수 있는가, 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야 된다고.. 힉스 보존이 확인된다면 우리는 한 번 정도는 돌이켜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건 여담인데 힉스 보존의 이명은 신의 입자, 인데, 실제로는 God's particle이 아니라 원래는 Godamm particle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발표할 때 아무래도 어감이 좋지 않으니 편집자가 저렇게 바꾸었다던가. 정작 힉스 자신은 무신론자인데 저런 신의 입자, 라는 이름이 붙어서 당혹스럽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빌어먹을 입자라니. 하나만 더, 과학계에서의 객관성은 동료들의 인정을 바탕을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럴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나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이휘소 박사는 다양한 업적을 남겼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리 주목받지 못하던 스티븐 와인버그의 자발적 대칭성 깨짐 이론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그이기도 하였고, 전약력 통합 과정에서 압두스 살람의 공헌을 인정한 사람이기도 그이기도 했다. 이번에 힉스 보존이라고 명명한 사람도 이휘소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힉스 메커니즘은 독립적으로 세 그룹에서 동시에 개발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만약 힉스의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면? 여기서 과학계에서의 동료 인정에 기반한 객관성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물론.. 이휘소 박사가 저렇게 명명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로서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연말까지는 기다려봐야겠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새로운 소립자였으면 하는 마음과 힉스 보존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반반이다. 하지만 힉스 보존으로 확정된다면 분명 매우 기쁠 것이고, 집에서 혼자서 축하라도 하지 않을까.

 

 

 

동서고전 해제.

총 네 권 중 2권을 읽었는데, 이른바 해제류, 라고 부를 수 있는 책들 중 거의 시초에 가까운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여러 책들을 엮어서 그 핵심을 묶은 책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물론 이런 류의 책들이 가지는 단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런 류의 책들은 편집자의 시각이 담겨 편향될 수 있는 위험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방대한 내용을 몇 장에 축약하다보니 문제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들을 읽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실제로 여러 책들을 모두 읽기 힘들때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을 쌓게 해주는 책들이 이런 책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책들 중 예를 들어보자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이 있는데,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한 달이 걸려도 아마 힘들 것이리라. 거기에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까지 읽으려고 한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은 동양 고전, 소설, 근대 소설과 서양 고전, 소설, 근대 소설들인데, 상당히 다양하고 그 내용도 알찬 편이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위의 책의 띠지에서 보듯 '대입 논술 비중 확대' 라는 광고인데, 이 말이 붙어 있으니 왠지 고등학생들이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버거운 부분이 많다. 만약에 일반적인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논술에 사용하겠다고 읽는다면.. 어쩔 수 없이 그저 이런 해제에서 나오는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해서 시험을 볼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도리어 생각을 깊게 하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마찬가지 맥락에서 최근 수능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의 일부분을 잘라서 언어 지문으로 출제하였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리 옳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어려운 책이라서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충분하게 이해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재촉하듯 등을 떠미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다. 논리철학논고, 는... 지금의 내가 다시 읽어도 좀 버거운 책이다..

 

 

 

절대지식 세계고전, 중국고전.

 이 책들도 위에서 언급한 책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해제류 책인데, 최근 반값행사를 하고 있기에 구매해서 읽고 있는, 그리고 읽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왼쪽의 세계고전을 다룬 책은 평점에 비하여 가독성이 그리 좋지 않으며 위의 책에서 언급한 단점을 그대로 답습한다. 특히 더 부정적인 요소로 들 수 있는 것이 상당히 축약적인 문장인데, 이는 중국고전을 다룬 책보다 세계고전을 다룬 책에서 더 그런 경향이 심하다. 하지만 이 책들에서 다루고 있는 목록은 마찬가지로 풍부하다. 그런데 위의 동서고전 해제와 함께 읽다보면 특이한 부분이 보이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서 동서고전 해제에서 다룬 사서 삼경 중의 대학, 부분과 절대지식 중국고전, 에서 다룬 대학, 부분의 내용은 마치 짜고 쓴 것 처럼 비슷한 부분이 눈에 보인다. 이는 책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생각해보라, 전혀 다른 책, 전혀 다른 저자가 쓴 책들에서 한 권의 책을 이야기하는데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일종의 교차검정이 되지 않겠는가. 적어도 그 책에 대하여 다룬 부분은 직접 원본을 읽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요약되었기 때문에 흥미가 어느 정도 반감되는 부분은 피할 수 없다. 위의 동서 고전 해제가 있다면 아래의 책을 구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이 책이 있다면 다른 책을 굳이 더 구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멋진 신세계.

디스토피아 소설 중에 쌍벽을 이루는 책들이 있는데, 한 권은 1984, 이고 다른 한 권은 멋진 신세계, 이다. 1984야 워낙 많이 알려져 있으니 더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 멋진 신세계, 는 위상에 비하여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하다. 1984를 인용한 글들은 많은데 멋진 신세계를 인용한 글들을 그리 많이 보지 못한 듯 하니 말이다. 물론 두 권의 내용은 확실히 다르지만 이 책도 현재에 대하여 만만치 않은 시사점들을 던져 준다. 하지만 밖에서 읽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디스토피아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멋진 신세계, 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세계를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일단 알파, 베타, 입실론 등으로 나뉘는 철저한 계급사회로 서로가 할 일이 엄격하게 분담되어있으며, 성은 일종의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되었기에 쾌락만을 누리고 쾌락에 수반되는 의무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신경 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이할만한 점은 가족은 이 세계에서는 일종의 모든 악의 근원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점인데 모든 사람들은 시험관에서 태어나며, 모든 감정적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는 소마, 라는 마약을 매일 지급받아 지고의 향락을 누리고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엄격하게 통제가 되고 가족이 붕괴된 까닭은 구세계는 '세상은 아버지들로 가득 차 있어 불행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며, 어머니들로 가득 차 있어 성도착증에 가득 차 있었고, 형제와 자매로 가득 차 있어 광기와 자살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렇게 계급이 나누어져 있는데 아래의 계급이 반발 하지 않겠는가, 라는 의문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자체는 태어날때부터 유전적 조작 및 수면최면교육으로 인하여 엄격하게 통제되고, 자신의 계급이 가장 좋은 계급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입실론과 같은 아래계층은 자신들의 일이 가장 쉽고 편하며 만약 다른 계급의 일을 하면 머리가 터져 죽을 것이라고 여긴다. 알파의 경우는 최상위 계급이면서 세계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아래 계층의 일을 천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조화가 되게 살아가고 있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으리라. 그런데 의문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사회의 조화 및 발전을 위해서는 각 계층은 항상 세뇌당해야만 하는가? 그 대답의 단초는 책의 말미에 나오는 새비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젊은이가 제공할 것이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보리스 비앙의 책인데, 사실 이 책은 뭐랄까, 그다지 권하고 싶지는 않은 책이다. 재미가 없냐면 그런 것은 또 아니다. 폭력과 살인에 대한 묘사는 강렬하게 그려져 있으면서 성에 대한 묘사는 정말 담백하게 그려져 있는 책이다. 저자는 폭력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래서 누아르 소설이라고 불리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누아르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드보일드 소설이라고 부르는 편이 맞지 않을까, 싶다. 일인칭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주인공은 살인과 폭력에 대하여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말은 즉, 이 책에서 일어나는 살인과 폭력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저 죽이고 싶기에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다. 비록 책에서는 일종의 복선처럼, 주인공의 동생이 백인 여자와 놀아났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흑인인 주인공은 동생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다른 백인 여자를 찾아서 죽이는 것이다, 라는 것 처럼 이야기를 맞추려고 여러 부분에 그런 이야기들을 언급하지만 주인공의 복수가 백인 사회 전체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동생을 죽임에 이르게 한 백인들에 대한 것인지조차도 애매모호하고, 비록 백인들이 책 내부에서 전반적으로 흑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거기에 대하여 주인공이 고뇌하는 모습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 결과 그저 살인만 남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읽는 재미는 있는 소설이다. 당신에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것을 좋아한다면. 아니, 그러고보니 이제 이 정도는 자극 수준에도 들지 못하려나?

 

 

 

말테의 수기.

'스물 여덟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스물 여덟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무언가 이룬 것이 없다, 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여하튼 괜한 동질감에 사로잡혀 읽고 있는 책인데, 이 책은 제목의 수기, 라는 말에 걸맞게 일종의 일기다. 도시로 상경한 말테의 사회관찰기 정도로 요약이 가능한 책인데, 처음에는 정말 읽기가 어렵고 자신의 생각이 엮인 책에 지나지 않지만 읽어가면서 이 책의 주인공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해진다. 우리가 왜 남의 일기나, 몰래 꼭꼭 숨겨둔 블로그의 글을 읽을때 흥미를 느끼는가? 적어도 나는 다른 사람이 몰래 꼭꼭 숨겨둔 글을 읽을때 흥미를 느끼는 편인데, 악취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그 글들의 진솔함때문일 것이다. 음.. 사실 블로그 글은 예외이려나? 블로그는 그 특성상 인터넷에 올렸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가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게 될 것이니 자기 검열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끄적일 기회가 있을 것이고 어쨌든, 진솔함이 이런 류의 글들의 생명인데, 이 말테의 수기에서는 어느 정도 그런 진솔함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의 손을 빌려 우리에게 일기를 보여주고 있는 말테가 스스로 검열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말테는 이야기한다, 시는 감정이 아닌 경험의 표출이라고. 그런데 그 말은 자신의 일기에도 똑같이 들려줄 수 있는 말이다. 일기야 말로 자신의 경험의 표출이 아니겠는가. 일기의 한 줄이야말로 내가 겪은 직접, 그리고 간접적인 경험 모두를 포괄하지 않을까.

 

 

 

새는 좌 우의 날개로 난다.

리영희 선생의 저작인데, 앞부분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으로 시작하고, 뒷부분으로 가면 갈수록 리영희 선생의 생각들을 많이 읽을 수 있다. 당시의 상황과 지금을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인데, 상투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때의 경색된 남북관계나 지금의 경색된 남북관계나 그다지 차이가 없어보인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며, 좌와 우는 당연히 함께 진행해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이 책을 검색하다가 약간 흥미로운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당연히 날개는 두 장 필요하지만 동종의 날개로 두 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 라는 이야기를 하는 글이었다. 음.. 그른 말은 아닐 것이다. 분명 비둘기의 날개와 제비의 날개는 함께 양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비판보다도 좌와 우의 건전한 성숙이 필요하다, 라는 것이 요지가 아니겠는가. 제비의 날개와 비둘기의 날개가 맞지 않다면, 큰 쪽은 스스로를 잘라 상대방에 맞추고, 작은 쪽은 뼈라도 덧붙여서 상대방만큼 자라는.. 그런 날개를 깎는 고련을 거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리고 그 어딘가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 위치할 것이다. 쓰다보니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떠오르기도 하며, 나 개인적으로도 하나를 다른 것에 맞춘다, 라는 생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지만, 넓게 보면 하나의 목표를 이룬다는 점에서, 사회의 진보를 원한다는 점에서 좌와 우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고, 하나의 목표의 두 가지 방법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맞춘다, 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 덜해질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글을 끄적거리고 있을만큼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니.. 다시 빨리 할 거 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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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7 19:46   좋아요 0 | URL
말테의 수기, 읽었던 적이 도대체 몇년전일까요.ㅠㅠ
민음사 시리즈는 정말 전집을 사고 싶을 정도에요.
시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의 표출! 와닿습니다. 일기는 물론, 모든 이야기가
모든 글이 그런 거라 생각되네요. 오늘 일흔 여선생님의 이야기를 오래 들으며
맛난 밥을 먹었는데 삶은 드라마,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을 새삼 했어요.

가연 2012-07-08 00:31   좋아요 0 | URL
ㅎㅎ 정말 옛날에 나왔던 책이니.. 어느 누구의 삶이든 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이겠지요, 다만 그 언어로 정제해내는 작업이 힘들어 시인이 힘들게 밤을 새는 것이 아닐까요.

라로 2012-07-07 23:06   좋아요 0 | URL
스물 여덟이 아니면 몇 이실까???ㅎㅎㅎㅎ
그래도 아직 30 전이시죠???
아무튼 시간이 그렇게 없으시면서도 이렇게 정성스러운 책소개라니!!
근데 뭐하러 가시는 거에요???왜 늘 궁금하게 뭐 하러 가야한다고 남기시는 건데욥???ㅎㅎㅎㅎㅎ

가연 2012-07-08 00:34   좋아요 0 | URL
ㅎㅎ 제 나이는 비밀로 남겨두지요, 푸하하. 늘 뭘 하러 가야겠다고 끄적거리는 것은.. 저렇게라도 안적어두면 다시금 들어와서 끄적거릴까봐.. 제 자신 스스로 좀 보고 뜨끔하라고 적어둔 글귀랍니다. 사실 정말 바쁘면 아무것도 안적고 글도 안올라오겠지요. 적당히 바쁘답니다, 흐.

다락방 2012-07-09 08:55   좋아요 0 | URL
우왕...가연님 엄청 똑똑하다....난 신문에서 힉스 어쩌고 하는 기사보고 대체 뭔소리야..했는데.....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올라고해요. 히히. 똑똑한 젊은 남자라니...(읭?).....진작에 즐찾해두어 뿌듯합니다! ♡.♡

가연 2012-07-10 00:02   좋아요 0 | URL
ㅎㅎ 주변에 다락방님 같은 여자분들이 있으면 저도 인기남일텐데 참 아쉽네요, 풋. 지성과 젊음을 갖추었으니.. 그러나 외모는...[...] 푸하하, 어쨌든 고맙습니다. 사실 별로 많이 아는 것도 아닌걸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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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진화심리학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 지 모르겠네요

현재는 여유가 없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구먼요

 

 

 

진화심리학.

진화심리학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왔습니다. 근간을 예로 들자면 인간은 야하다, 와 같은 채도 진화심리학과 관련된 책이었지요. 이렇게 진화심리학에 대한 열기가 뜨거운 이유는 아마도 이 학문에 접근하기가 쉬운 점도 크게 작용한다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접근성은 학문적으로 어렵다, 쉽다를 떠나서, 우리 생활에 얼마나 연관이 있는가, 그래서 얼마나 흥미를 유발하는가, 와 같은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이 책의 소개글에서도 나왔듯, 인간은 왜 배가 부른데도 후식을 먹고, 왜 여자는 목소리가 낮은 남자를 좋아할까요?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생물학과 심리학의 결합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는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주의점이 있습니다. 정말 여자는 목소리가 낮은 남자를 좋아할까요? 정말 배가 부른데도 후식을 먹게 될까요? 진화심리학은 그럴 경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럴 경향이 있다는 것이 그럴 것이다, 라는 것은 아니지요. 이 점만 주의한다면 이 책을 읽어내려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 어려움이 아니라 도리어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으로 즐겁게 지적유희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행복한 물리학 특강.

교육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꽤 오래전에 공개된 MIT open course ware, OCW를 기억하실것입니다. 저는 신문을 통해서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뒤에 종종 들어갔었지요. MIT의 강의를 안방에서 들을 수 있다니 하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강의를 계속 듣기에는 쉽지가 않아서, 혼자서 강의를, 그것도 인터넷 강의를 계속 듣는다는 것은 강력한 의지가 없으면 힘들기에 그만두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긴 강의가 있었습니다. 왼쪽의 책의 저자, 월터 르윈의 물리학 강의였습니다. 어쩌면 MIT라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딱딱하게 여겨질 수 있는 물리학을 어떻게든 친근하게 대할 수 있도록 월터 르윈은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정말 진자처럼 천장에 매달리거나, 공기총을 가져와서 속도를 재는 등 말이지요. 그런 그의 책이기에 더욱 더 기대가 됩니다.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뱀파이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드라큘라, 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사실 드라큘라와 뱀파이어는 똑같지는 않습니다. 드라큘라의 이야기가 있기 전에 피를 빨아먹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늘 있어왔으며 이 책은 그 흡혈하는 존재들에 대한 총체적인 보고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신화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아서 현대 대중문화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으니 말이지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나 뱀파이어 영화의 걸작인 노스페라투, 에 이르기까지 현대문화가 어떻게 뱀파이어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다양한 사진과 그림으로 뒷받침합니다. 시각적 자료가 눈을 즐겁게 해주는 책입니다.

 

 

 

 

제국의 지배.

제국은 왜 항상 몰락할까요? 왼쪽 책의 부제이기도 한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우리가 제국을 떠올릴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가 바로 로마제국입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쇠망에 대해서는 에드워드 기번이 오현제시대부터 이미 그 싹이 틔워져있었다고 고찰했었지요. 그렇다면 그 고찰은 과연 다른 제국들에게도 통용되는 일일까요? 이 책의 저자는 7개의 제국을 선정하여 과연 제국이 어떻게 지배를 해왔고 어떻게 멸망을 했는지 연구를 진행합니다. 그 7개의 제국은 사실 서양쪽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고대와 근현대를 넘나들며 선정되어있습니다. 저자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일종의 아래에서부터의 역사이며, 이 시각으로 인하여 이 책이 도출할 결론은 어쩌면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아래에서의 불만과 반란때문에 제국이 어쩔 수 없이 몰락하고야 말았다, 겠지만, 과연 그럴까요?

 

 

 

니체 극장.

니체라는 철학자만큼 극장, 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듯 합니다. 어떤 극장 무대에 니체가 올라가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아서 니체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다른 철학자들이 이렇게 한다면 어떤 강연을 듣는 기분이겠습니다만 니체에게는 왠지 이렇게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니체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들때문이겠지요. 루 살로메와의 사랑때문에 자신을 불사르고 괴로워하는 그의 면모들은 그의 철학을 훼손시키지 않고 도리어 강화하지요. 인간적인 면모만 그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에서 빼놓지 않습니다. 청년기의 니체에서부터 어떻게 차라투스트라를 탄생시켰는가, 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니체를 둘러싼 몇 몇 의혹도 그냥 넘어가지 않지요. 책 목차 중 보충6을 보면 니체와 나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로서 우리는 한 편의 극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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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7-03 11:50   좋아요 0 | URL
항상 제가 흥미있어하는 책과는 거리가 먼 추천리스트인데(그럴수밖에요 ㅎㅎ), 저기 저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좀 끌리네요. 저는 뱀파이어를 완전 좋아해서요. 늑대인간도 좋아하고. 뱀파이어랑 사귀고 싶어요. 아니면 늑대인간이나..

가연 2012-07-03 12:25   좋아요 0 | URL
ㅎㅎ 시공사 디스커버리 시리즈 중에 뱀파이어에 관한 책이 있을거에요. 한 번 읽어보셔요. 맘에 드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음, 저 책이 없었다면 다락방님의 댓글도 안달렸으려나요, 푸하하. 심각하게.. 저 책을 빼고 고전강의 책을 넣으려고 했는데..ㅎㅎ

뱀파이어좋아하시면 트와일라잇도 좋아하시겠다. 아니면 언더월드시리즈나..ㅎㅎ

다락방 2012-07-03 12:31   좋아요 0 | URL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향한 짝사랑에 열병을 앓은적이 물론 있구요 ㅎㅎ 그보다는 사실 [달콤한 죄악]의 장 끌로드쪽을 더 선호하죠. 그쪽이 훨씬 더 남자어른 뱀파이어.....랄까. 성인 여자는 성인 남자에게 끌리는 법이니까요. ( ")

언더월드는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결합이 나와서 완전 흥분해서 봤었어요. 완벽한 결합체..랄까. 그렇지만 제가 그렇게 뒤섞인 어떤 종족이 되고싶진 않구요. ㅋㅋ

가연 2012-07-05 15:22   좋아요 0 | URL
ㅋㅋ 저는 언더월드보고는 저도 저렇게 장점만 취할 수 있다면 늑인과 흡혈귀의 혼종이 되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현실에는 저런 혼종은 없겠죠, 쳇.

라로 2012-07-03 12:31   좋아요 0 | URL
저 지금 나가야 해서 나중에 읽을께요~~~가연님의 신간추천 좋아라~~~ㅎㅎㅎ

가연 2012-07-05 15:22   좋아요 0 | URL
ㅎㅎ 언제든 읽어주시면 저야 고맙죠, 하하, 항상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2-07-03 20:22   좋아요 0 | URL
가연님의 신간추천!!
제목에 '심리학'을 달고 나오는 책이 많지만 '진화심리학' 저 책이 끌리네요.^^
'니체 극장'도요.

가연 2012-07-05 15:24   좋아요 0 | URL
ㅎㅎ 책들은 잘 고른 것 같은데.. 지금와서 보면 고전역사강의, 를 넣었으면 더 괜찮은 리스트가 되었으려나, 싶기도 하네요. 하지만 이번 소개글은 좀 시원찮구먼요..ㅎㅎ 너무 바빠서 예전에 미리 저장해둔 내용을 쓸 수 밖에 없었네요, 하하.

koopuha 2012-07-09 16:29   좋아요 0 | URL
가연님, 제가 메일도 보냈는데, 수신확인이 안 되어 있더라고요.
늦었지만, 페이퍼 어제 밤에 올렸습니다. 저도 진화심리학이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가연 2012-07-10 00:05   좋아요 0 | URL
메일은 안 온듯 합니다.. 사실 올리셨을때 제가 확인했습니다, 제가 생각보다 자주 들어가는 편이라..ㅎㅎ 다만 여간하면 기간에 맞춰서 올려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이제 담당자님의 손에 달리긴 했지만 진화심리학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하하.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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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상실의 시대를 고등학교때 읽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대부분의 다른 고등학교들처럼 야간자습이 있었고, 어느 야간자습처럼 야간자습시간에는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약간은 모범생이었으나, 모범생이라고 해서 딴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니, 도리어 모범생처럼 보이는 학생일수록 감독 교사의 눈초리를 쉽게 벗어나서 딴 짓을 하기가 편하다. 나도 일종의 그런 학생이었고, 몰래 판타지 소설을 책상 서랍에 숨겨서 읽거나 혹은 일본 소설책들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각종 소설을 섭렵하던 어느 날, 어느 학생이 쉬는 시간에 이 상실의 시대, 를 꺼내놓고 읽는 거지. 주워들은 지식으로 저 책의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 와 그리고 책에 대해서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면서 그 학생에게 다가가서는 말했다. 너도 하루키를 아냐고. 그 학생은 당연히 안다는 듯 자신의 책을 들어보이고는 말했다. 이 책 완전 야설이라고 말이지. 그때만 해도 그저 이야기만 들었을 뿐 제대로 읽지는 않았던 나는 야설이라는 말에 애매하게 동의를 표하면서 이 책을 혹시 빌릴 수 없냐고 물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책을 빌리게 되었고 그로부터 하루 동안 나는 이 상실의 시대, 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고야 말았다.

 

그날 새벽을 기억한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무래도 좋은 대학교에 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다른 고등학생들처럼 야간 자습이 끝나도 집에 와서 조금은 공부를 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었다. 물론 반은 일종의 강제성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렇게 앉아있는다고 해서 내가 공부를 그리 많이 하는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의 시간은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 보내다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었지만 그날 새벽에는 달랐다. 나에게는 그날의 야간자습시간을 지겹지 않게 보낼 수 있었던 책, 상실의 시대, 가 있었고 아직 뒷 부분은 덜 읽은 상태였다. 그래서 밤에 몰래 책가방에서 이 책을 몰래 꺼냈고, 뒷부분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결국 끝까지 다 읽고나서는 이상한 허무함에 사로잡혀서 잠이 들었고, 그리고 그 다음날 원 주인에게 가져다 주었다. 어때, 정말 야하지? 라고 묻는 그 학생에게 나는 와, 정말 야하더라, 라는 말로 대신하고 다시금 자리에 와서 앉았다. 확실히 성적인 묘사가 많기는 많은데.. 그리고 주인공의 여성편력이 부러운 수준을 넘어서 무슨 종마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마음 어디선가는 그날 새벽에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느꼈던 허무함이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와서 생물 수업을 들을 때, 조별로 모여서 모형을 만들 일이 있었다. 그 모형을 만들기 위하여 모인 자리에서 어느 순간 하루키의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하루키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했다. 그때 나는 계속 처음 나에게 책을 빌려주었던 학생의 야설이다, 라는 평가에 신경쓰고 있었는지, 정작 하루키라면 별로 신경도 안 쓸 부분에 도리어 내가 변명을 하면서 하루키의 작품의 대단한 것은 분명 성애 묘사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그 부분들이 어느 하나도 빠질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다. 앞 뒤 문맥과 흐름을 따져보면 그 성에 관련된 부분이야말로 진실로 20대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그런 부분이라고 말이지. 그런데 사실 말하는 나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그 당시에는 몰랐다. 갓 대학교에 들어온 내가 20대의 상처와 방황이 무엇인지 알게 뭔가. 게다가 그 방황의 끝에 어떤 성적인 것이 있을 거라니. 내가 말해놓고도 참 뻔뻔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했던 말은 완전히 그르지는 않았다. 대학교에 진학하면 그 전까지의 자신을 쇄신하겠다는 듯이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게 노는 부류가 있는가하면, 진학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부류도 있는 법이다. 대부분은 도리어 후자쪽에 더 가까웠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수업을 듣고 밥을 먹으며 지내게 된다. 그저 탐색해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몇 몇 그룹도 생기게 되고 동아리에도 들게 되고 그렇게 되지만 끝내 그룹이나 동아리에도 들지 않는 학생은 그야말로 뿌리 뽑힌 풀처럼 휘적 휘적 캠퍼스를 걸어다니게 되는 것이다. 전자라고 해서 딱히 스스로가 쇄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최인훈의 광장, 을 읽으면 주인공인 이명준은 마지막에 자살을 택하게 되는데,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다른 세계, 그러니깐 남한도 북한도 아닌 곳에 간다고 해서 내가 나 아닌 그 무엇인가로 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대학교에 들어가서 새로운 환경에 처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 전에 살아갔던 것 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비록 어느 정도의 변주가 있더라도.

 

나는 후자였고, 그렇다고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하지만 결국에는 동아리든 뭐든 아무것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멍하니 도서관 정문 계단에 앉아서 캠퍼스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도서관에 있지 않으면 보통은 외국인들을 위한 공간이랍시고 만들어 둔 공간에서 드러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이런 나의 활동은 일종의 '어쩔 수 없음' 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한편으로는 외로움에 시달려야했다. 사실 손만 뻗으면 바보취급을 받든 똑똑한 사람취급을 받든 어떻게든 다른 학생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일들이 나에게 이르게 되면 모두 무의미한 것 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아무런 시도를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인간관계에 이르면 그랬다. 하지만 무의미하다고 해서 그 사실이 나에게 어떤 위안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외로웠다.

 

어느 새 나는 저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와타나베를 닮아갔다. 적당히 냉소적이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그리고 귀찮음을 못이겨 아무 책이나 펴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그런 학생 말이다. 성적인 부분만 제외하면 제법 많이 닮았을 것이다. 이상한 말투를 쓰는 것도 그렇고. 아, 그렇다. 이상한 말투는 책을 읽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문어체를 괜히 쓰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와타나베가 마의 산, 위대한 개츠비, 를 들고 읽을 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선, 을 펼쳐놓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점차 이런 생각이 든거야. 이런 게 20대의 방황인가, 하고. 음.. 20대의 상처나 방황이라고 하면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 것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는데 점장에게 돈을 제대로 못받았다거나, 돈이 없어서 휴학을 한다거나, 여자친구랑 사귀다가 결국에는 헤어지거나. 그런데 사실 이런 구체적인 것들만 20대의 상처는 아닐 것이다. 도리어 좀 더 포괄적으로, 그 어떤 상황이든지 외부의 어떤 상황과 본인의 생각의 엇갈림이 가장 주요한 상처로 작용할 것이다. 혹은 자신의 내재적인 성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근원적인 고독감.. 그 언저리를 엿보는 것도 상처로 작용할 수 있겠고. 이런 상처들이 실제로 상실의 시대, 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알 수 없는 조급함과 방황의 근원이 될 것이며 그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어떤 자기 파괴적인 성애에 몰두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며 나의 상처의 근원이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될 때 적어도 순간적으로는 고독과 허무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테니까. 그때서야 왜 와타나베가 그렇게 성애에 몰두했을까, 이해가 갔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와타나베의 방식을 따른 것은 아니다. 애초에 와타나베와 같은 학생은 실제론 인기가 별로 없다, 풋. 설령 내가 인기가 좋았더라도 저런 방식을 따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의외로 순정파거든, 하하. 어쨌든, 와타나베의 옆에는 나오코와 미도리가 등장하지만 내 옆에는 그녀들 중 어느 누구도 등장하지 않았고.. 그 후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대학교로 떠나게 된 후에도 별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그러다가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잃으며 살아갔다. 여전히 나는 허무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가끔 카페에서 다리 꼬고 책을 펴고 읽으면서. 그런 공허감에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이끌리기도 하지만, 알잖는가, 아무리 빛나는 별이라도 가까이 가서 보면 가스덩어리거나 혹은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 나는 내 허무함을 가슴 한 구석에 안으며, 하지만 지나치게 의식하지는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런 삶을 살아가기에 잃어버린 것들을 추억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통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니 젊은 애가 벌써부터 이런 허무주의에 빠져서야 쓰겠냐, 라는 말을 할 지도 모르겠다. 외롭다고? 그럼 밖에 나가서 친구를 사귀어라. 술도 마시고 어울려 놀면 되지 않느냐. 너만 바뀌면 되는 거잖아. 애인을 사귀고 싶다고? 소개팅, 아니 헌팅이라도 하고 그런 말을 하는게 어때, 등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삶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다. 가끔은 사무치는 근원적인 고독에 몸부림치지만, 그런 고독이야말로 내 삶을 단련시켜주는, 그리고 마음 속 비원에 끊임없이 연료를 제공하는 불과 같은 것이기에. 너무 현실에 매몰되지 않게 나를 잡아주는 방향틀이기에 말이다. 사람들은 쉽게 너만 바뀌면 된다, 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를 바꾸는 게 무엇보다도 어려운, 그리고 내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릴케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그의 말테의 수기, 에 적은 바에 따르면 지금의 내가 이전의 나와 다르다면 이전의 내가 알았던 사람들은 지금의 나와는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이미 바뀐 사람일테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굳이 말을 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앞으로도 내가 바뀔 거라면,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르는 사람이 될 터인데, 뭐하러 수고스럽게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들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미도리나 나오코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사회나 학교에서 만난 인간관계 모두를 포기할 정도로

소중한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너무 늦지는 않게.

 

 

 

 

 

 

 

 

 

 

덧.

 

실은 10000명 방문 기념으로 만 명이 모이면 마왕이 소환되지, 라는 제목의 페이퍼로 질의응답이나..[...] 해볼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아무런 질문도 안달리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 그냥 포기해버렸다. 게다가 내가 무슨 질문이든 다 답할 수 있을 거라는 장담도 못하겠으니. 언제나 넷에서 글을 쓸때는 현실에서 내가 뭘하며 살고 있는지는 가리게 된다. 신비주의라면 신비주의겠지만 그렇다고 현실의 나와 여기 서재에서 끄적거리는 내가 다른 사람은 아니다. 어쨌든 만 명이다. 얼마나 오래 서재에 글을 올릴 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많이 찾아와주는 것은 썩 기분이 나쁘진 않다. 그래서 이 글로 이기적인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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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24 19:55   좋아요 0 | URL
가연님. 마침 책을 사려고,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한 편 읽어봐야겠다 마음 먹었지만 과연 나와 맞을까 생각하던 차에 가연님께서 <상실의 시대> 리뷰를 써주시니 저는 감사하며 장바구니에 이 책을 담겠습니다. 저는 야자 시간에 아주 당당하게 소설을 꺼내놓고 읽습니다.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는 수준은 아니지만 삐딱하게 읽고 있어도 아무 말도 안 하셔요. 감독 선생님께서 국어 선생님이어서 그런가. 야자를 많이 빼먹어서 그렇지, 야쟈시간에는 항상 책만 읽습니다. 심각합니다. 시험 한 주 전에도, 아니 하루 전에도 책만 읽습니다. 공부를 안하는 거예요. 이젠 <상실의 시대>를 대놓고 읽어야 겠네요.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표지가 좀 더 세련되게 재출판(?) 되었으면 좋겠어요. 신경숙의 옛 소설들과 하루키의 옛 소설들은 표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계속 미루고 미루네요.

그런데... 가연님 남자이십니까? 와타나베... 하면 남자 이름일텐데요. 음.

가연 2012-06-24 20:10   좋아요 0 | URL
ㅎㅎ 리뷰가 아니라 일종의 이기적인 잡담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책에 얽힌 저의 이야기랄까. 아무래도 그냥 잡담하는 것은 어색하니깐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네요. 음..ㅎㅎ 지금 나이때에 읽으시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네요. 저는 이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답니다.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작정하고 서평을 못쓰게 되는 그런 책이 되었네요. 하하, 시험 공부를 그렇게 안하시나요ㅎㅎ 음.. 어서 공부를 하세요, 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을 듯 합니다만.. 저는 그런 말씀을 드릴 입장이 못되는 편이라..ㅎㅎㅠㅠ 저 스스로가 딱히 공부를 별로 안하는데 다른분보고 공부를 하라고 할 수는 없네요, 아하하. 지금도 이렇게 놀고 있는데ㅠㅠ 그래서 소이진님께 조언을 하는 것은 다른 분들의 역할로 맡기고, 풋. 저는 개인적으로는 표지가 저 상태 그대로였으면 좋겠네요.

저는 남자랍니다. 가연이라는 넷에서 쓰는 이름때문에 여자로 오해를 많이 받지만.. 몇 번이고 글들에서 밝혔던 것 같은데..ㅎㅎ 바로 아래에 썼었던 현대 물리학에 관한 책의 글에도 밝히기도 하였구.. 한 두번은 대놓고 밝히기도 하고... 혹시나 다른 분들이 오해하실까봐 성별은 꼭 밝히는 편이에요. 그런데 쓰다보니깐 본의아니게 소이진님께 낚시를 한 기분인데요, 풋. 죄송하네요.

이진 2012-06-24 20:16   좋아요 0 | URL
낚시까지는 아니고 말입니다.
글을 너무 잘 쓰셔서 남자라곤, 아 닉네임 때문이었나 ㅎㅎ
다락방님과도 스스럼 없이 대화하는 걸 보고는 여자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흠. 밑에 노란띠만 없으면 괜찮을 거 같긴 한데 말입니다.
요새는 리뷰가 써지는 책을 만나질 못하고 있네요.
확실히 신간평가단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니 아예 리뷰를 안 써버리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후후. 알라딘에 리뷰 기능이 있던가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2-06-24 22:06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저는 남자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곤 합니다. 그걸 더 좋아하기도 하고....쿨럭.....( ") 소이진님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잖아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

가연 2012-06-25 10:2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ㅋㅋㅋ 남자도 글잘쓰는데요, 뭐ㅎㅎ 소이진님도 남자 아니십니까, 풋. 닉네임때문에 아마 여자로 착각하셨을듯. 다락방님..은 아래에도 쓰셨듯 스스럼없이 대화많이하시는데요 뭐ㅎㅎ

노란띠는 벗겨낼 수 있을거에요ㅎ 즐겁게 읽으세요.


다락방님//ㅋㅋㅋ 왜요, 저는 제가 특별하여서 저랑 스스럼없이 대화한다고 은근히 좋아했는데, 풋. 전혀 특별한 게 아니었군요. 여, 역시 인기쟁이 다락방님[...] 아하하하하하하

프레이야 2012-06-25 10:24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책표지가 그런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한 명이에요^^
한참 세월지나 요즘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저도 제 자신이 궁금해지네요.
아무튼 가연님께 너무 늦지는 않게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랍니다^^

가연 2012-06-25 10:31   좋아요 0 | URL
ㅎㅎ언젠가 오겠죠? 풋.

저는 정말 많이 읽었는데.. 항상 같은 기분으로 마무리짓게 되더군요. 좀 더 지나서 읽으면 다른 기분일까요. 이건 여담인데 최근의 1Q84빼고는 가장 잘 쓴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다락방 2012-06-25 11:04   좋아요 0 | URL
1. 가연님 특별한거 맞아요.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2. 저도 아웃사이더 서재가 더 좋아요.

3. 배고프네요. ㅜㅡ

2012-06-26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티티카카 2012-06-25 13:55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닉네임이 아니라 문체 때문에 여성분이신 줄 알았어요..허허
제가 지금 안고 있는 고민과 비슷해서 덧글로 인사 남겨봅니다~
하루키 잡문집 보고 그의 작품이 궁금해졌는데 들어오길 잘했네요 후후

이진 2012-06-25 18:19   좋아요 0 | URL
티티카카님, 나두나두!
문체가 여성스럽잖아요.
왠지 이런 문체보면, 수다쟁이님도 그렇고, 여성스러워요.
뭐랄까 남성스런 투박함이 없는 세련된 문체랄까요. ㅎㅎㅎㅎㅎㅎ

가연 2012-06-26 00:49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아하하ㅋㅋ 사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로서는 어째 성차별적인 말씀이 아닌가, 하고 지적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네요, 푸하하. 아, 농담이에요. 하지만 저로서는 글을 쓸 때 정말 작정하고.. 필요할 때에 사용할 경우가 아니면 기교를 여간하면 빼고 쓰고 싶어서..ㅎㅎㅎ 굳이 문체에 대한 평을 듣자면 담백하다는 말을 듣고 싶긴 한데.. 세련된 문체라는 말씀에 감사드리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히 기뻐할 수가 없구만요, 쿡.



티티카카님//제 문체가 그런 경향이 있나요ㅎㅎ 사실 저도 애써 부정하지만 좀 여성스러운 문체같다는 생각을 가끔은 해보긴 하는데, 문체가 좀 본인의 성향과 약간 닮는 부분도 좀 있으니.. ㅎㅎ 아무래도 이십대나 삼십대초반에는 이런 저런 고민이 생기게 되지요.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키잡문집은 정말 빠심[..]을 모아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2012-06-29 21:55   좋아요 0 | URL
너무 늦지는 않게.. 란 말이 와 닿네요.^^

가연 2012-06-30 04:48   좋아요 0 | URL
요즘 쫌 외롭나봅니다, 푸하하하하. 쓰는 글마다 마지막에는 애인있었으면, 이런 식으로 끄적거려놓으니, 지금 와서 읽으니 매우 부끄럽네요.

風流男兒 2012-07-02 23:34   좋아요 0 | URL
아흐, 이 글 좋아요. 흐흐.
연애는 언제나 옳은 건데, 아흑. 뭘 생각해도 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찌릿하고 짜릿했던 감정들이 막 떠올라요.

어서 하세요 ㅋㅋㅋ 길던 짧던. 푸핫 ;;;;;;;;;(가관인 결론을 용서하세요 ㅎㅎ)

가연 2012-07-03 10:44   좋아요 0 | URL
하하, 연애는 언제나 정의인가요? 풋. 감사합니다, 곧 하겠죠 푸하하.

희선 2013-02-22 01:20   좋아요 0 | URL
아무리 빛나는 별이라도 가까이 가서 보면 가스덩어리거나 혹은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멀리서 보며 좋아하는 거 괜찮지 않을까요, 그 반짝임이 좋으니까


상실의 시대는 남자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와타나베는 남자니까^^
저도 이 책을 읽었지만, 겨우 한번밖에 안 봤습니다(여러 번 읽은 책이 그렇게 많지도 않군요) 그걸로 다 알지도 못했고...
그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작가 가운데 가장 처음 알았기 때문에
그냥 관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책도 여러 권 사기도 했고...

다른 말을 더 쓰고 싶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군요
좋은 말은 없지만 여기까지입니다


희선

가연 2013-02-22 01:38   좋아요 0 | URL
아하하.. 저 문맥에서 스스로를 별에 지칭한 것 같기는 한데... 생각해보면 저는 가스덩어리라기보다 블랙홀이라... 푸핫. (사실은 블랙홀이 더 마음에 든다는게 함정)

옳은 말이세요, 와타나베는 남자니까ㅎㅎㅎ 저는 이번에도 또 봤어요. 읽을 수록 중반까지는 막 가슴졸여가며 읽는데 그 이후에 그냥 화악... 가라앉아버리는 기분이에요

여자입장에서는 이런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책이 뭐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