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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나는 상실의 시대를 고등학교때 읽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대부분의 다른 고등학교들처럼 야간자습이 있었고, 어느 야간자습처럼 야간자습시간에는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약간은 모범생이었으나, 모범생이라고 해서 딴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니, 도리어 모범생처럼 보이는 학생일수록 감독 교사의 눈초리를 쉽게 벗어나서 딴 짓을 하기가 편하다. 나도 일종의 그런 학생이었고, 몰래 판타지 소설을 책상 서랍에 숨겨서 읽거나 혹은 일본 소설책들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각종 소설을 섭렵하던 어느 날, 어느 학생이 쉬는 시간에 이 상실의 시대, 를 꺼내놓고 읽는 거지. 주워들은 지식으로 저 책의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 와 그리고 책에 대해서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면서 그 학생에게 다가가서는 말했다. 너도 하루키를 아냐고. 그 학생은 당연히 안다는 듯 자신의 책을 들어보이고는 말했다. 이 책 완전 야설이라고 말이지. 그때만 해도 그저 이야기만 들었을 뿐 제대로 읽지는 않았던 나는 야설이라는 말에 애매하게 동의를 표하면서 이 책을 혹시 빌릴 수 없냐고 물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책을 빌리게 되었고 그로부터 하루 동안 나는 이 상실의 시대, 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고야 말았다.
그날 새벽을 기억한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무래도 좋은 대학교에 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다른 고등학생들처럼 야간 자습이 끝나도 집에 와서 조금은 공부를 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었다. 물론 반은 일종의 강제성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렇게 앉아있는다고 해서 내가 공부를 그리 많이 하는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의 시간은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 보내다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었지만 그날 새벽에는 달랐다. 나에게는 그날의 야간자습시간을 지겹지 않게 보낼 수 있었던 책, 상실의 시대, 가 있었고 아직 뒷 부분은 덜 읽은 상태였다. 그래서 밤에 몰래 책가방에서 이 책을 몰래 꺼냈고, 뒷부분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결국 끝까지 다 읽고나서는 이상한 허무함에 사로잡혀서 잠이 들었고, 그리고 그 다음날 원 주인에게 가져다 주었다. 어때, 정말 야하지? 라고 묻는 그 학생에게 나는 와, 정말 야하더라, 라는 말로 대신하고 다시금 자리에 와서 앉았다. 확실히 성적인 묘사가 많기는 많은데.. 그리고 주인공의 여성편력이 부러운 수준을 넘어서 무슨 종마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마음 어디선가는 그날 새벽에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느꼈던 허무함이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와서 생물 수업을 들을 때, 조별로 모여서 모형을 만들 일이 있었다. 그 모형을 만들기 위하여 모인 자리에서 어느 순간 하루키의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하루키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했다. 그때 나는 계속 처음 나에게 책을 빌려주었던 학생의 야설이다, 라는 평가에 신경쓰고 있었는지, 정작 하루키라면 별로 신경도 안 쓸 부분에 도리어 내가 변명을 하면서 하루키의 작품의 대단한 것은 분명 성애 묘사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그 부분들이 어느 하나도 빠질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다. 앞 뒤 문맥과 흐름을 따져보면 그 성에 관련된 부분이야말로 진실로 20대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그런 부분이라고 말이지. 그런데 사실 말하는 나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그 당시에는 몰랐다. 갓 대학교에 들어온 내가 20대의 상처와 방황이 무엇인지 알게 뭔가. 게다가 그 방황의 끝에 어떤 성적인 것이 있을 거라니. 내가 말해놓고도 참 뻔뻔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했던 말은 완전히 그르지는 않았다. 대학교에 진학하면 그 전까지의 자신을 쇄신하겠다는 듯이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게 노는 부류가 있는가하면, 진학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부류도 있는 법이다. 대부분은 도리어 후자쪽에 더 가까웠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수업을 듣고 밥을 먹으며 지내게 된다. 그저 탐색해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몇 몇 그룹도 생기게 되고 동아리에도 들게 되고 그렇게 되지만 끝내 그룹이나 동아리에도 들지 않는 학생은 그야말로 뿌리 뽑힌 풀처럼 휘적 휘적 캠퍼스를 걸어다니게 되는 것이다. 전자라고 해서 딱히 스스로가 쇄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최인훈의 광장, 을 읽으면 주인공인 이명준은 마지막에 자살을 택하게 되는데,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다른 세계, 그러니깐 남한도 북한도 아닌 곳에 간다고 해서 내가 나 아닌 그 무엇인가로 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대학교에 들어가서 새로운 환경에 처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 전에 살아갔던 것 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비록 어느 정도의 변주가 있더라도.
나는 후자였고, 그렇다고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하지만 결국에는 동아리든 뭐든 아무것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멍하니 도서관 정문 계단에 앉아서 캠퍼스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도서관에 있지 않으면 보통은 외국인들을 위한 공간이랍시고 만들어 둔 공간에서 드러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이런 나의 활동은 일종의 '어쩔 수 없음' 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한편으로는 외로움에 시달려야했다. 사실 손만 뻗으면 바보취급을 받든 똑똑한 사람취급을 받든 어떻게든 다른 학생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일들이 나에게 이르게 되면 모두 무의미한 것 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아무런 시도를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인간관계에 이르면 그랬다. 하지만 무의미하다고 해서 그 사실이 나에게 어떤 위안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외로웠다.
어느 새 나는 저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와타나베를 닮아갔다. 적당히 냉소적이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그리고 귀찮음을 못이겨 아무 책이나 펴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그런 학생 말이다. 성적인 부분만 제외하면 제법 많이 닮았을 것이다. 이상한 말투를 쓰는 것도 그렇고. 아, 그렇다. 이상한 말투는 책을 읽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문어체를 괜히 쓰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와타나베가 마의 산, 위대한 개츠비, 를 들고 읽을 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선, 을 펼쳐놓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점차 이런 생각이 든거야. 이런 게 20대의 방황인가, 하고. 음.. 20대의 상처나 방황이라고 하면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 것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는데 점장에게 돈을 제대로 못받았다거나, 돈이 없어서 휴학을 한다거나, 여자친구랑 사귀다가 결국에는 헤어지거나. 그런데 사실 이런 구체적인 것들만 20대의 상처는 아닐 것이다. 도리어 좀 더 포괄적으로, 그 어떤 상황이든지 외부의 어떤 상황과 본인의 생각의 엇갈림이 가장 주요한 상처로 작용할 것이다. 혹은 자신의 내재적인 성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근원적인 고독감.. 그 언저리를 엿보는 것도 상처로 작용할 수 있겠고. 이런 상처들이 실제로 상실의 시대, 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알 수 없는 조급함과 방황의 근원이 될 것이며 그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어떤 자기 파괴적인 성애에 몰두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며 나의 상처의 근원이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될 때 적어도 순간적으로는 고독과 허무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테니까. 그때서야 왜 와타나베가 그렇게 성애에 몰두했을까, 이해가 갔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와타나베의 방식을 따른 것은 아니다. 애초에 와타나베와 같은 학생은 실제론 인기가 별로 없다, 풋. 설령 내가 인기가 좋았더라도 저런 방식을 따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의외로 순정파거든, 하하. 어쨌든, 와타나베의 옆에는 나오코와 미도리가 등장하지만 내 옆에는 그녀들 중 어느 누구도 등장하지 않았고.. 그 후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대학교로 떠나게 된 후에도 별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그러다가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잃으며 살아갔다. 여전히 나는 허무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가끔 카페에서 다리 꼬고 책을 펴고 읽으면서. 그런 공허감에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이끌리기도 하지만, 알잖는가, 아무리 빛나는 별이라도 가까이 가서 보면 가스덩어리거나 혹은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 나는 내 허무함을 가슴 한 구석에 안으며, 하지만 지나치게 의식하지는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런 삶을 살아가기에 잃어버린 것들을 추억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통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니 젊은 애가 벌써부터 이런 허무주의에 빠져서야 쓰겠냐, 라는 말을 할 지도 모르겠다. 외롭다고? 그럼 밖에 나가서 친구를 사귀어라. 술도 마시고 어울려 놀면 되지 않느냐. 너만 바뀌면 되는 거잖아. 애인을 사귀고 싶다고? 소개팅, 아니 헌팅이라도 하고 그런 말을 하는게 어때, 등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삶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다. 가끔은 사무치는 근원적인 고독에 몸부림치지만, 그런 고독이야말로 내 삶을 단련시켜주는, 그리고 마음 속 비원에 끊임없이 연료를 제공하는 불과 같은 것이기에. 너무 현실에 매몰되지 않게 나를 잡아주는 방향틀이기에 말이다. 사람들은 쉽게 너만 바뀌면 된다, 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를 바꾸는 게 무엇보다도 어려운, 그리고 내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릴케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그의 말테의 수기, 에 적은 바에 따르면 지금의 내가 이전의 나와 다르다면 이전의 내가 알았던 사람들은 지금의 나와는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이미 바뀐 사람일테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굳이 말을 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앞으로도 내가 바뀔 거라면,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르는 사람이 될 터인데, 뭐하러 수고스럽게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들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미도리나 나오코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사회나 학교에서 만난 인간관계 모두를 포기할 정도로
소중한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너무 늦지는 않게.
덧.
실은 10000명 방문 기념으로 만 명이 모이면 마왕이 소환되지, 라는 제목의 페이퍼로 질의응답이나..[...] 해볼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아무런 질문도 안달리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 그냥 포기해버렸다. 게다가 내가 무슨 질문이든 다 답할 수 있을 거라는 장담도 못하겠으니. 언제나 넷에서 글을 쓸때는 현실에서 내가 뭘하며 살고 있는지는 가리게 된다. 신비주의라면 신비주의겠지만 그렇다고 현실의 나와 여기 서재에서 끄적거리는 내가 다른 사람은 아니다. 어쨌든 만 명이다. 얼마나 오래 서재에 글을 올릴 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많이 찾아와주는 것은 썩 기분이 나쁘진 않다. 그래서 이 글로 이기적인 고마움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