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고 서평쓰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으니..

한마디 안끄적거릴 수가 없는게, 엊그제 힉스 보존으로 추정되는 소립자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실 페르미랩에서는 힉스 보존에 대한 데이터를 상당히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알고 있었기에 나로서는 왜 에너지 수준이 더 높은 CERN에서 아직 발견을 못했을까, 의아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발표를 해주니 한편으로는 괜스레 기분이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 뭐랄까, 초대칭이론이 너무 딱 맞아들어가는 기분이다. 특별한 근거는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올해 연말에 힉스 보존의 존재가 확인된다면 우주 공간을 채우는 다크 매터들의 정체는 아무래도 보존과 페르미온의 초대칭성에 의거한 입자일 가능성들이 높을 것이다.. 특히나 뉴트랄리노, 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파인만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수학이 어떻게 자연을 이렇게 잘 설명할 수 있는가, 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야 된다고.. 힉스 보존이 확인된다면 우리는 한 번 정도는 돌이켜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건 여담인데 힉스 보존의 이명은 신의 입자, 인데, 실제로는 God's particle이 아니라 원래는 Godamm particle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발표할 때 아무래도 어감이 좋지 않으니 편집자가 저렇게 바꾸었다던가. 정작 힉스 자신은 무신론자인데 저런 신의 입자, 라는 이름이 붙어서 당혹스럽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빌어먹을 입자라니. 하나만 더, 과학계에서의 객관성은 동료들의 인정을 바탕을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럴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나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이휘소 박사는 다양한 업적을 남겼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리 주목받지 못하던 스티븐 와인버그의 자발적 대칭성 깨짐 이론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그이기도 하였고, 전약력 통합 과정에서 압두스 살람의 공헌을 인정한 사람이기도 그이기도 했다. 이번에 힉스 보존이라고 명명한 사람도 이휘소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힉스 메커니즘은 독립적으로 세 그룹에서 동시에 개발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만약 힉스의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면? 여기서 과학계에서의 동료 인정에 기반한 객관성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물론.. 이휘소 박사가 저렇게 명명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로서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연말까지는 기다려봐야겠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새로운 소립자였으면 하는 마음과 힉스 보존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반반이다. 하지만 힉스 보존으로 확정된다면 분명 매우 기쁠 것이고, 집에서 혼자서 축하라도 하지 않을까.

 

 

 

동서고전 해제.

총 네 권 중 2권을 읽었는데, 이른바 해제류, 라고 부를 수 있는 책들 중 거의 시초에 가까운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여러 책들을 엮어서 그 핵심을 묶은 책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물론 이런 류의 책들이 가지는 단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런 류의 책들은 편집자의 시각이 담겨 편향될 수 있는 위험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방대한 내용을 몇 장에 축약하다보니 문제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들을 읽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실제로 여러 책들을 모두 읽기 힘들때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을 쌓게 해주는 책들이 이런 책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책들 중 예를 들어보자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이 있는데,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한 달이 걸려도 아마 힘들 것이리라. 거기에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까지 읽으려고 한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은 동양 고전, 소설, 근대 소설과 서양 고전, 소설, 근대 소설들인데, 상당히 다양하고 그 내용도 알찬 편이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위의 책의 띠지에서 보듯 '대입 논술 비중 확대' 라는 광고인데, 이 말이 붙어 있으니 왠지 고등학생들이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버거운 부분이 많다. 만약에 일반적인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논술에 사용하겠다고 읽는다면.. 어쩔 수 없이 그저 이런 해제에서 나오는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해서 시험을 볼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도리어 생각을 깊게 하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마찬가지 맥락에서 최근 수능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의 일부분을 잘라서 언어 지문으로 출제하였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리 옳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어려운 책이라서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충분하게 이해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재촉하듯 등을 떠미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다. 논리철학논고, 는... 지금의 내가 다시 읽어도 좀 버거운 책이다..

 

 

 

절대지식 세계고전, 중국고전.

 이 책들도 위에서 언급한 책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해제류 책인데, 최근 반값행사를 하고 있기에 구매해서 읽고 있는, 그리고 읽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왼쪽의 세계고전을 다룬 책은 평점에 비하여 가독성이 그리 좋지 않으며 위의 책에서 언급한 단점을 그대로 답습한다. 특히 더 부정적인 요소로 들 수 있는 것이 상당히 축약적인 문장인데, 이는 중국고전을 다룬 책보다 세계고전을 다룬 책에서 더 그런 경향이 심하다. 하지만 이 책들에서 다루고 있는 목록은 마찬가지로 풍부하다. 그런데 위의 동서고전 해제와 함께 읽다보면 특이한 부분이 보이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서 동서고전 해제에서 다룬 사서 삼경 중의 대학, 부분과 절대지식 중국고전, 에서 다룬 대학, 부분의 내용은 마치 짜고 쓴 것 처럼 비슷한 부분이 눈에 보인다. 이는 책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생각해보라, 전혀 다른 책, 전혀 다른 저자가 쓴 책들에서 한 권의 책을 이야기하는데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일종의 교차검정이 되지 않겠는가. 적어도 그 책에 대하여 다룬 부분은 직접 원본을 읽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요약되었기 때문에 흥미가 어느 정도 반감되는 부분은 피할 수 없다. 위의 동서 고전 해제가 있다면 아래의 책을 구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이 책이 있다면 다른 책을 굳이 더 구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멋진 신세계.

디스토피아 소설 중에 쌍벽을 이루는 책들이 있는데, 한 권은 1984, 이고 다른 한 권은 멋진 신세계, 이다. 1984야 워낙 많이 알려져 있으니 더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 멋진 신세계, 는 위상에 비하여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하다. 1984를 인용한 글들은 많은데 멋진 신세계를 인용한 글들을 그리 많이 보지 못한 듯 하니 말이다. 물론 두 권의 내용은 확실히 다르지만 이 책도 현재에 대하여 만만치 않은 시사점들을 던져 준다. 하지만 밖에서 읽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디스토피아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멋진 신세계, 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세계를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일단 알파, 베타, 입실론 등으로 나뉘는 철저한 계급사회로 서로가 할 일이 엄격하게 분담되어있으며, 성은 일종의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되었기에 쾌락만을 누리고 쾌락에 수반되는 의무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신경 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이할만한 점은 가족은 이 세계에서는 일종의 모든 악의 근원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점인데 모든 사람들은 시험관에서 태어나며, 모든 감정적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는 소마, 라는 마약을 매일 지급받아 지고의 향락을 누리고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엄격하게 통제가 되고 가족이 붕괴된 까닭은 구세계는 '세상은 아버지들로 가득 차 있어 불행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며, 어머니들로 가득 차 있어 성도착증에 가득 차 있었고, 형제와 자매로 가득 차 있어 광기와 자살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렇게 계급이 나누어져 있는데 아래의 계급이 반발 하지 않겠는가, 라는 의문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자체는 태어날때부터 유전적 조작 및 수면최면교육으로 인하여 엄격하게 통제되고, 자신의 계급이 가장 좋은 계급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입실론과 같은 아래계층은 자신들의 일이 가장 쉽고 편하며 만약 다른 계급의 일을 하면 머리가 터져 죽을 것이라고 여긴다. 알파의 경우는 최상위 계급이면서 세계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아래 계층의 일을 천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조화가 되게 살아가고 있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으리라. 그런데 의문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사회의 조화 및 발전을 위해서는 각 계층은 항상 세뇌당해야만 하는가? 그 대답의 단초는 책의 말미에 나오는 새비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젊은이가 제공할 것이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보리스 비앙의 책인데, 사실 이 책은 뭐랄까, 그다지 권하고 싶지는 않은 책이다. 재미가 없냐면 그런 것은 또 아니다. 폭력과 살인에 대한 묘사는 강렬하게 그려져 있으면서 성에 대한 묘사는 정말 담백하게 그려져 있는 책이다. 저자는 폭력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래서 누아르 소설이라고 불리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누아르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드보일드 소설이라고 부르는 편이 맞지 않을까, 싶다. 일인칭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주인공은 살인과 폭력에 대하여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말은 즉, 이 책에서 일어나는 살인과 폭력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저 죽이고 싶기에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다. 비록 책에서는 일종의 복선처럼, 주인공의 동생이 백인 여자와 놀아났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흑인인 주인공은 동생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다른 백인 여자를 찾아서 죽이는 것이다, 라는 것 처럼 이야기를 맞추려고 여러 부분에 그런 이야기들을 언급하지만 주인공의 복수가 백인 사회 전체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동생을 죽임에 이르게 한 백인들에 대한 것인지조차도 애매모호하고, 비록 백인들이 책 내부에서 전반적으로 흑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거기에 대하여 주인공이 고뇌하는 모습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 결과 그저 살인만 남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읽는 재미는 있는 소설이다. 당신에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것을 좋아한다면. 아니, 그러고보니 이제 이 정도는 자극 수준에도 들지 못하려나?

 

 

 

말테의 수기.

'스물 여덟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스물 여덟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무언가 이룬 것이 없다, 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여하튼 괜한 동질감에 사로잡혀 읽고 있는 책인데, 이 책은 제목의 수기, 라는 말에 걸맞게 일종의 일기다. 도시로 상경한 말테의 사회관찰기 정도로 요약이 가능한 책인데, 처음에는 정말 읽기가 어렵고 자신의 생각이 엮인 책에 지나지 않지만 읽어가면서 이 책의 주인공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해진다. 우리가 왜 남의 일기나, 몰래 꼭꼭 숨겨둔 블로그의 글을 읽을때 흥미를 느끼는가? 적어도 나는 다른 사람이 몰래 꼭꼭 숨겨둔 글을 읽을때 흥미를 느끼는 편인데, 악취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그 글들의 진솔함때문일 것이다. 음.. 사실 블로그 글은 예외이려나? 블로그는 그 특성상 인터넷에 올렸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가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게 될 것이니 자기 검열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끄적일 기회가 있을 것이고 어쨌든, 진솔함이 이런 류의 글들의 생명인데, 이 말테의 수기에서는 어느 정도 그런 진솔함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의 손을 빌려 우리에게 일기를 보여주고 있는 말테가 스스로 검열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말테는 이야기한다, 시는 감정이 아닌 경험의 표출이라고. 그런데 그 말은 자신의 일기에도 똑같이 들려줄 수 있는 말이다. 일기야 말로 자신의 경험의 표출이 아니겠는가. 일기의 한 줄이야말로 내가 겪은 직접, 그리고 간접적인 경험 모두를 포괄하지 않을까.

 

 

 

새는 좌 우의 날개로 난다.

리영희 선생의 저작인데, 앞부분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으로 시작하고, 뒷부분으로 가면 갈수록 리영희 선생의 생각들을 많이 읽을 수 있다. 당시의 상황과 지금을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인데, 상투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때의 경색된 남북관계나 지금의 경색된 남북관계나 그다지 차이가 없어보인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며, 좌와 우는 당연히 함께 진행해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이 책을 검색하다가 약간 흥미로운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당연히 날개는 두 장 필요하지만 동종의 날개로 두 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 라는 이야기를 하는 글이었다. 음.. 그른 말은 아닐 것이다. 분명 비둘기의 날개와 제비의 날개는 함께 양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비판보다도 좌와 우의 건전한 성숙이 필요하다, 라는 것이 요지가 아니겠는가. 제비의 날개와 비둘기의 날개가 맞지 않다면, 큰 쪽은 스스로를 잘라 상대방에 맞추고, 작은 쪽은 뼈라도 덧붙여서 상대방만큼 자라는.. 그런 날개를 깎는 고련을 거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리고 그 어딘가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 위치할 것이다. 쓰다보니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떠오르기도 하며, 나 개인적으로도 하나를 다른 것에 맞춘다, 라는 생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지만, 넓게 보면 하나의 목표를 이룬다는 점에서, 사회의 진보를 원한다는 점에서 좌와 우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고, 하나의 목표의 두 가지 방법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맞춘다, 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 덜해질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글을 끄적거리고 있을만큼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니.. 다시 빨리 할 거 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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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7 19:46   좋아요 0 | URL
말테의 수기, 읽었던 적이 도대체 몇년전일까요.ㅠㅠ
민음사 시리즈는 정말 전집을 사고 싶을 정도에요.
시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의 표출! 와닿습니다. 일기는 물론, 모든 이야기가
모든 글이 그런 거라 생각되네요. 오늘 일흔 여선생님의 이야기를 오래 들으며
맛난 밥을 먹었는데 삶은 드라마,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을 새삼 했어요.

가연 2012-07-08 00:31   좋아요 0 | URL
ㅎㅎ 정말 옛날에 나왔던 책이니.. 어느 누구의 삶이든 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이겠지요, 다만 그 언어로 정제해내는 작업이 힘들어 시인이 힘들게 밤을 새는 것이 아닐까요.

라로 2012-07-07 23:06   좋아요 0 | URL
스물 여덟이 아니면 몇 이실까???ㅎㅎㅎㅎ
그래도 아직 30 전이시죠???
아무튼 시간이 그렇게 없으시면서도 이렇게 정성스러운 책소개라니!!
근데 뭐하러 가시는 거에요???왜 늘 궁금하게 뭐 하러 가야한다고 남기시는 건데욥???ㅎㅎㅎㅎㅎ

가연 2012-07-08 00:34   좋아요 0 | URL
ㅎㅎ 제 나이는 비밀로 남겨두지요, 푸하하. 늘 뭘 하러 가야겠다고 끄적거리는 것은.. 저렇게라도 안적어두면 다시금 들어와서 끄적거릴까봐.. 제 자신 스스로 좀 보고 뜨끔하라고 적어둔 글귀랍니다. 사실 정말 바쁘면 아무것도 안적고 글도 안올라오겠지요. 적당히 바쁘답니다, 흐.

다락방 2012-07-09 08:55   좋아요 0 | URL
우왕...가연님 엄청 똑똑하다....난 신문에서 힉스 어쩌고 하는 기사보고 대체 뭔소리야..했는데.....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올라고해요. 히히. 똑똑한 젊은 남자라니...(읭?).....진작에 즐찾해두어 뿌듯합니다! ♡.♡

가연 2012-07-10 00:02   좋아요 0 | URL
ㅎㅎ 주변에 다락방님 같은 여자분들이 있으면 저도 인기남일텐데 참 아쉽네요, 풋. 지성과 젊음을 갖추었으니.. 그러나 외모는...[...] 푸하하, 어쨌든 고맙습니다. 사실 별로 많이 아는 것도 아닌걸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