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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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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요즘 세상은 정말 어려운 세상입니다. 여러 가치가 뒤섞이고 하나의 의견과 그에 반대되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명확한 기준도 설정되어있지 않지요. 사실 무엇이 옳은지를 따지는 기준 따위는 없을 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명확하게 적용되는 전가의 보도와 같은 기준이 있을 것 같다는 기대 자체가 어쩌면 오만일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것은 사회가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어려워집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어떤 상황이 눈 앞에 닥쳤을 때 주의 깊게 생각을 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불가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하는데, 그 팔정도에는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넘어서, 바르게 보다, 바르게 생각하다, 와 같은 말들은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근본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와 같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이 바르게 본다, 바르게 생각한다, 와 같은 말에서 ‘바르다’ 라는 의미는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사실 생각해보면 바르다, 와 같은 말이 상당히 애매모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 종교들에서는 자신들의 교리를 따르고 계율을 지키는 것, 혹은 신에게 귀의하는 것이 바른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이런 종교를 믿지 않는, 그리고 설령 믿더라도 그런 종교의 역할이 아무래도 직장생활등과 같은 세속적 삶들 때문에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기가 어려워진 현대 사회인들에게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만 들릴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을 조금 진행시켜보면, 우리는 하나의 의미가 확실히 저 ‘바르다’ 라는 말의 기저에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면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지는 말자, 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잡한 시기에 이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 출간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전작인 ‘정의란 무엇인가’ 에서 이미 그의 현대 사회의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및 문제 제기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었지요. 하지만 그의 전작에서는 이런 저런 질문만 던져두고는 제대로 된 결론을 맺지 않았다, 라는 비판도 분명 있었지요. 이번에 나온 이 책에서도 여전히 확답은 내리고 있지 않지만, 이번 책은 전작과는 다르게 충분히 저자 본인의 의견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그 무게를 어디에 더 두고 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자는 비시장적인 영역이었던 새치기나 불임시술, 대리 사과 서비스와 같은 문제들, 그리고 생과 사의 문제에까지 자본주의가 침투한 현상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저런 문제들이 정말 팔 수 있는 물건들인가? 라고 말입니다. 저자 본인은 아무래도 전체적인 맥락으로는 팔 수 있는 물건이라고 보기 어렵다, 라는 입장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합니다만, 이는 그저 자신의 의견만이 옳다, 와 같은 그런 고집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견에 대하여 합리적인 반박과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충분히 상대편 의견을 받아들이겠다는, 그런 의지를 여러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표명하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 제기는 마이클 샌델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경제학자인 칼 폴라니가 그의 저저 ‘거대한 전환’ 에서 팔 수 없는 물건, 그 중에서도 가장 존귀하게 대접받아야 할 인간이 팔 수 있는 물건으로 전락해버린 그런 상황에 대해서 개탄한 적이 있지요. 이미 예전부터 팔 수 없는 물건과 팔 수 있는 물건에 대한 논의는 경제학계에서 있어왔던 것입니다. 이전에 출간된 ‘인지자본주의’와 같은 책들도 큰 틀은 그에 대한 논의였지요. 인간의 정동마저도 종속되어 자본의 지배하에 놓은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이 그와 같은 논의들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쉽게 어디서나 생각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가져왔다는 점이겠지요. 인간의 정동의 종속에 관한 문제나 팔 수 없는 물건인 인간이 상품이 되버렸다, 등의 논의는 좀 더 다듬어질 필요가 있으며, 단편적인 몇 부분의 예(스튜디어스가 미소를 ‘파는’ 등의 예)를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이 다가가기에는 좀 추상적이다, 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 다루고 있는 영역은 새치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인센티브, 결혼식 축사를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등의 영역이며, 매우 구체적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지요. 당신이 이제 결혼을 하는데, 당신의 친구에게 축사를 부탁했다. 당신의 친구는 매우 열심히 준비 하려고 했는데, 시간에 쫓기거나, 혹은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들만 생각이 나서 결국 인터넷으로 감동적인 축사를 구매했다. 축사를 받은 당일 당신은 너무 멋진 축사에 감격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친구가 인터넷으로 축사를 구매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의 기분은 어떨 것인가? 좋다면 왜 좋은가? 나쁘다면 왜 나쁜가? 이런 일이 허용되어져야 할까?

이제 와서 대부분의 것들이 사고 팔 수 있는 물품으로 변해가는 경향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현대사회는 어쩌면 이런 경향이 가속화되면 가속화될 것이지, 절대 줄어들지는 않겠지요. 앞서 현대사회는 서로의 가치관과 생각이 팽팽히 대립한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돈을 잘 버는 것이 자신의 가치관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서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고, 심지어 그동안 팔 것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것 마저 팔 것으로 만들어 파는 현상에 대해서 감히 옳다, 그르다, 라고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생각이 다른 것이 ‘틀린 것’ 은 아닐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저대로 놓아두어야 할까요? 여기서 마이클 샌델은 두 가지의 반박 기준 틀을 제시합니다. ‘공정성의 문제’ 와 ‘부패의 문제’ 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자신이 가져온 다양한 예시에 대하여 저 두 가지 기준틀을 날카롭게 들이댑니다. 공정성의 문제는 과연 각 상황들이 정말로 공정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 선택이 내려진 것인가? 그 선택이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일종의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흔히 겪는 줄서기와 새치기에 대한 문제를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과연 돈을 주고 먼저 목적지에 가는 것이, 즉 새치기가 얼마나 공정할 수 있을까요? 혹은 마약에 중독된 여자들의 불임시술에 대해서 돈을 지불하는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마약을 찾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돈을 줄 테니 불임시술을 받으라, 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강요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부패의 문제는 공정성의 문제보다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정의하는 부패의 의미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부패는 ‘뇌물이나 불법 거래 그 이상의 것으로 사회적 관행이나 재화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가치를 합당한 수준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것에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것의 가치가 저평가되는 현상을 뜻하는 것이지요. 앞서 친구의 축사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구가 인터넷에서 축사를 구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분명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축사를 돈을 주고 구매한 행위가 그 축사의 가치를 저평가시키게 되었기 때문에, 즉, 부패시켰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예로 드는 교황 집전 미사에 몇 배나 가격이 오른 암표를 주고 참가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과연 교황 집전 미사가 가지는 그 신성한 의미가 전혀 부패되지 않았다, 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앞서 바르다, 라는 말을 이야기하면서, 그 기저에 인간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라는 이야기를 꺼낸 바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가치, 라는 단어도 그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이 몇 번이고 앞의 두 문제들, 공정성의 문제와 부패의 문제를 끈질기게 제기하는 것은 어쩌면 저 인간의 가치, 라는 개념을 어떻게든 구체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사고 파는 순간 (생명보험이나 책에서 언급한 말기환금보험과 같은 경우) 과연 스스로가 존엄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자신의 친구나 가족들과 맺어진 유대관계를 판매하는 순간 (결혼식 축사나 사과를 대신 해주는 서비스, 선물이 현금으로 건네어지는 경우) 과연 인간은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가 존엄하지도 않고, 사회로부터도 유리된 삶을 살아간다면 과연 그 사람은 자신이 가치가 높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저로서는 아마 아닐 것이라고 여기지만, 또 다르게 생각을 가지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금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다. 과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 라고 말이지요. 그동안 경제학계에서는 도덕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부분이 점차 곪아서 드러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도덕과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경제학 부분에서도, 단순히 철학의 영역이라고만 단정 짓지 말고, 깊은 논의가 필요할 때가 다가온 것이겠지요.

 

  이 책의 제목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입니다. 원제인 What money can't buy를 그대로 옮긴 제목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번역을 하였을 때 우리나라 말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중의성이 생겼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은 말 그대로 돈으로 구매할 수 없는 것들, 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돈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들, 이라는 의미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돈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으로 친구나 가족의 유대관계를 구매했다고 해서 과연 그 유대관계가 오래갈까요? 부패시킨다고 앞서 말했지요. 부패의 끝은 결국 삭아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돈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제가 이전에 읽은 ‘부채 그 첫 오천년’ 이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경제학자가 아닌, 인류학자가 인류학적 접근으로 경제사를 조명한 책인데, 이 책의 결론은 원래 부채는 인간 저마다가 가진 고유한 특질에 따라 맺어진 자유로운 약속이었으니, 이제 그 의미를 회복할 때가 찾아왔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가지는 부채를 ‘인정하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채가 인간성의 회복에 기여한다는 주장은 일견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서로 서로 상대방에게 감정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부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상대방의 감정이나 유대관계, 그리고 심지어 그 생명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팔 것으로 취급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각 개개인의 가치를 보존함과 동시에 상대방과의 (현대의 타락한 의미로의 부채가 아닌, 자유로운 약속이었던) 부채, 라는 이름의 유대관계까지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면 갈수록 복잡해지는 이 현대 사회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상대방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만큼,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스스로의 존엄성도 (동일한 인간이기에) 증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끝내 현대의 상품화의 가속화되는 경향에 휩쓸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외면한다면, 우리 자신도 이윽고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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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6-03 01:11   좋아요 0 | URL
이 책도 전작인 [정의란 무엇인가]만큼 재미있어 보여요. 일전에 경향신문에서 이 책의 리뷰를 보았었는데 그때도 그 리뷰 읽고 꼭 봐야지 꼭 봐야지 했었거든요. 가연님의 리뷰를 보니 또 불끈불끈 이 책을 읽고 싶어지네요.
게다가 좀전에 경향신문에 무려 마이클 샌델 인터뷰가 실린게 아니겠습니까. 어제 연세대에서 있었던 그의 강연이 아주 좋았다는, 그런 기사와 함께 말이죠. 아..그러나 저는 이 밤, 몽실언니를 마저 읽고 자야겠어요. 그런데 몽실언니 슬퍼요. ㅜㅜ

가연 2012-06-03 13:23   좋아요 0 | URL
오늘 한 시, 지금 하고 있겠네요, 우리 마이클형이[..] 강남교보문고에서 선착순 백명의 싸인회를 하고 있을 것 같은데ㅎㅎ 저는 사람 많은 것은 별로 안좋아해서 가지는 않았습니다만ㅎㅎㅎ 연세대에서 강연을 했었죠. 인터넷으로 몇 몇 부분만 잘라서 봤는데, 음,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ㅎㅎ 마이클형이 우리 나라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것이 아니라서.. 학생들과 엇나가는 부분도 있는 것 같더군요.
어쨌든 이 책은 괜찮은 책입니다. 사실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 를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는 않았는데.. 이 책은 좋게 읽었습니다ㅎㅎ 지금은 몽실언니를 벌써 다 읽으셨을테구.. 음.. 저는 슬픈 책을 읽고 나면, 혹은 애잔한 결말이 나는 책을 읽고 나면 마음이 찡해서 걍 누워서 잠만 자면서 상상력을 발휘.. 하는 경우가 많은데ㅎㅎ

희선 2013-09-30 00:45   좋아요 0 | URL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마음...^^
어떤 사람은 그것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부채 그 첫 오천년’ 본 적 있는데, 저는 말 그대로 더울 때 부치는 부채로 생각했습니다
빚이군요 그것을 읽어봤다면 벌써 알았을 텐데... 언젠가 읽어봐야겠군요
다른 것도 천천히...^^

정말 지금 시대는 많은 것들에 값을 매깁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연 님이 말한 것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희선

가연 2013-10-03 21:11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에 저도 이 리뷰를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1년 후에 읽으니 기분이 뭐랄까, 내가 이런 글도 썼구나, 싶은 기분이 드네요.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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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수영을 위하여.

 

 

 

 

1.

 

 

  이 책의 첫 부분, 프롤로그의 첫 장을 넘기며 저는 솔직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하지요. 2011년에 어느 대학에 강의를 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시를 낭송합니다. ‘김일성 만세’. 그 후 강연장을 훑어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얼굴이 불쾌한 표정이 역력하다고 느끼고는 다음과 같이 사유를 펼칩니다. 김수영이 시를 쓴 지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은 곧 50년 전의 화장만 바꾼 체제 논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들 내면에 ‘모종의 검열 체계가 작동’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아직도 ‘정권을 공격하면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여기고 있다고 저자 강신주는 단언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렇게 주장하기에는 그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굴이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라는 말은 일단 저자 본인이 느낀 주관적인 감정이고 실제로 설문조사를 익명으로 진행하지 않는 이상 객관적인 근거는 될 수 없겠지요. 여기서 저자는 상당한 비약을 저지릅니다. 백번 양보해서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듣고 불쾌하게 느꼈다고 합시다. 그럼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이 불쾌하게 들렸다. 체제 논리가 여전히 청중들 속에 숨어있다. 청중들은 내면의 검열을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와 같은 흐름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듣고 실제로 내면의 검열 체계가 작동했는가, 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김일성이 실제로 싫어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내면의 검열 체계의 문제다, 라고 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만들어진 이미지를 보고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면 검열 체계의 문제로 볼 수 있겠지만 실제 나쁘게 볼 만한 상황을 겪고 난 뒤에 느끼는 감정은 내면의 검열과는 상관없는 부분이 분명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처음부터 당황스러웠던 감정은 글을 읽는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저자가 김수영을 좋아하는, 아니 ‘사랑’ 하는 것은 잘 알겠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이 굳이 다른 시인들과의 비교로 이루어져야 할까요? 저자에게 있어서 다른 시인들, 서정주나 노천명은 ‘인문정신의 차원에서는 구원될 수 없’ 으며 반면에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자유를 깨달은’ 성자와 같은 시인입니다. (물론 서정주가 권력의 편에 서서 안위를 도모한 것이 잘했다, 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김수영과 동시대에 글을 썼던 모더니즘의 기수들, 김춘수나 박인환도 강신주의 화살을 비켜가지 못합니다. 강신주에게 있어서 그들은 ‘내용 없이 이미지의 시만 남발하는 테크니션’에 지나지 않으며 김수영은 ‘혼자서 도는 힘을 획득한’ 존재입니다. ‘시의 모더니티가 시적 테크닉이 된 것이’ 과오로 여기는 사람이지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날 선 비판을 하면서 김수영에게는 따뜻한 시선을 감추지 않습니다. 김수영의 트라우마로 아내 김현경을 지목하면서, 김현경이 김수영을 ‘배반’ 한 뒤(김수영이 죽은 줄 알고 김수영의 친구와 살림을 꾸린 일, 그리고 다시 합치자는 김수영의 말을 거절한 것 등)에는 더 이상 김수영은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김수영의 ‘아내에 대한 폭행’ 이나 ‘건강한 연애를 못’ 하는 것에 대한 제대로 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앞의 김춘수나 박인환을 비판한 것은 그들의 시를 비판한 것이지, 그들의 삶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반론을 들을 수 있겠습니다만, 시인에게 트라우마는 그의 시작(詩作)에 있어서 큰 사건입니다. 그 트라우마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데 어찌 제대로 된 시의 평가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그저 옹호글만 남을 뿐이지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언어의 위상, 이라는 말이 중간에 나옵니다. 모든 저작이 동일한 위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엄마를 부탁해, 와 같은 가벼운 소설, 무소유, 와 같은 수필 등이 바로 읽히는 작품이며, 카프카와 같은 소설가의 작품이나 진정한 시인의 대부분 시와 같은 작품이 바로 읽히지 않는 작품들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폐가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소유, 의 저자인 법정 스님이나 엄마를 부탁해, 의 저자 신경숙은 진정한 수필가나 소설가가 아니란 말일까요? 위상이라는 말은 본디 높낮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사실은 격, 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지요. 보통은 한 사물이 다른 사물간의 관계에서 가지는 위치나 상태를 뜻하는 경우가 많으며 좀 더 확장된 의미를 살펴보아도 수학적으로는 어떤 국면에서의 상태라는 의미를 가지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책에서 쓴 ‘이런 작품들은(앞서의 카프카의 작품이나 진정한 시인들의 시) 이해는 힘들지만 내면을 뒤흔든다’ 와 같은 서술은 마치 그 이전에 언급된 무소유, 와 같은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상, 낮은 격을 가지는 것처럼 읽히게 만듭니다. 엄마를 부탁해, 나 무소유, 에 실린 수필을 읽고 분명 내면이 뒤흔들린 사람들도 있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이 책은 이런 연유로 감히 말하건대, 그동안 강신주가 그의 저작들(철학 대 철학,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에서 보여 왔던 많은 오류들의 집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하지만 이런 당황스러움이 극적으로 반전하게 된 것은 부록으로 나누어준 시의 김수영의 사진을 본 뒤였습니다. 보통 글을 쓰면서 사진이나 다른 매체를 함께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김수영의 이 사진만은 이 글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의 저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먼저 눈부터 살펴볼까요. 어딘가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눈길입니다. 그러나 저 눈빛은 망상에 빠진 사람의 눈빛이 아닙니다. 의지를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쳐다보고 있는 무엇인가를 지상으로 끌어내리겠다는 결의가 담긴 눈빛이지요.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온 코는 저 코의 소유자가 고집이 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듭니다. 한 쪽 귀는 열려있지만 다른 쪽 귀 부분에는 손을 괴고 있지요. 손을 괸 부분과 얼굴이 만나 이루는 주름은 복합적인 감정, 짜증이 될 수도 있겠고, 고난을 뜻할 수도 있는, 혹은 타협하지 않는 성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아래의 팔자주름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깎지 않은 사자수염은 그 소유자가 자신의 외모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그리고 어쩌면 사납기까지 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듯 한 느낌을 줍니다. 전체적으로 저 사진에서 볼 때 이렇게 말하는 듯 합니다. '너는 한 번 그렇게 살아봐라, 내가 지금 널 지켜보고 있다.' 라고 말이지요. 남자는 40을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된다는 말이 있던가요, 실제로 저 사진을 찍을 때 김수영이 40이었든 아니든, 자신의 외모에는 자신의 삶이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 사진에서 드러나듯이 김수영은 진실로 다른 사람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굳건히 살아간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먼 곳을 쳐다본 것 처럼 자유라는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동시에 그 자유를 거짓된 자유가 만연하는 이 지상에 끌어내리겠다고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김수영은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주위의 다른 시인들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완성해나갈 때, 김수영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온몸으로 밀고 나갑' 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코처럼,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생각은 끊임없이 실천적 전망을 찾아나서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 문인들에게 때로는 사나워 보이는 표정 그대로 비판도 가하며 정권과도 끝끝내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런 그에게는 그의 시 폭포, 에서 볼 수 있는 부정적인 시어인 '나타와 안정' 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저 사진의 입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웃음을 짓는 듯 합니다. 비웃는 웃음과는 다른 건강한 웃음이 입가에 걸려있지요. 이는 자신처럼 스스로의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격려가 아닐까요. 그리고 여기에 김수영을 닮아 그 자신의 힘으로 돌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발버둥을 쳐왔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 책의 저자인 강신주이지요.

 

 

4.

 

 

  이 저작을 김수영에 대한 평전과 같은 종류의 책으로 본다면 분명 저자로서의 강신주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저작이 김수영에 대한 저자 강신주의 일종의 고백, 자신의 삶을 맡겨왔던 존재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고뇌의 결과로 나온 것이라면 앞서 보였던 많은 오류들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그 수많은 오류를 이제 털어버리겠다, 라는 지향점의 표명이라고 말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김수영 혼자가 아닙니다. 시인 김수영과 그를 멘토로 생각해왔던 저자 강신주 모두가 이 책의 주인공이 되는 셈이지요. 강신주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삶에 김수영을 그동안 투영해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철학과 대학원 생활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담은 글이 좋은 평가를' 받는 생활이었고 자신이 생각을 말하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실제로 강신주의 삶이 그랬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단순한 자기 위안으로 그치기 전에 강신주는 자신과 김수영의 공통점을 가져옵니다. 문단에서 벗어나 꼿꼿히 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주었던 김수영을 말이지요. 이 때 김수영은 강신주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지금 너는 스스로 도는 힘을 기르는 기로에 서' 있다고. 거기에 용기를 받은 강신주는 이 책의 끝마무리,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김수영을 만나지 못했다면 철학도, 글쓰기도 접었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강신주의 김수영에 대한 일견 지나칠 정도로 보이는 사랑은 그 자신의 삶에 대한 끌어안음이며, 김수영의 트라우마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그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를 지금에 이르러서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증명입니다. 이미 고인이 된 김수영이 막상 지금의 강신주의 이 책을 본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신주가 스스로 생각한 것 처럼 그를 보고 자신의 길을 잘 따르고 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거릴지는 모를 일이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마치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 과 같이, 꿈을 오랫동안 쫓아온 사람이 얼마나 그 꿈에 가까워 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겠지요. 큰 바위 얼굴, 의 어니스트가 이윽고 큰 바위 얼굴에 가까워졌듯이, 강신주도 이윽고 스스로의 발로 딛고 서게 된 것이지요. 그렇기에 강신주가 지금에 이르러 김수영를 떠나보내기로 한 것은 그야말로 올바른 선택으로 보여집니다. 자신의 멘토였고, 스승이었고, 닮은 꼴이었던 그를 떠나보냄으로서 이제야말로 저자 강신주는 온전하게 자신의 힘만으로 몇 번이고 이 책에서 그 스스로가 강조했던 단독성을 획득하게 된 것일테니 말입니다. 앞으로 혼자서 자전하게 된, 그리고 이윽고 혼자가 됨으로써 대가에 이르게 된 강신주의 다른 책들이 어떤 씨앗을 품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그래서 강신주가 에필로그에서 굿바이, 라고 말할 때 저도 함께 같이 나직히 발음해보았습니다. 강신주에게는 굿바이 김수영이었으며, 저에게는 제가 의지하는, 그리고 스스로를 투영해보는 존재에게 언젠가 굿바이라고 말할 날이 올 테니.

 

굿바이, 굿바이.

 

 

 

 

 

 

 

 

 

 

 

 

 

 

 

 

p. s. 김수영 사진의 출처는 로쟈님 블로그.

       구글에서 검색했는데 마침 로쟈님 알라딘 서재가 보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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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5-29 18:40   좋아요 0 | URL
와- 정말 근사한 리뷰에요.

가연 2012-05-29 19:2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꾸벅. 사실 방금전까지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고 있던 터라, 아하하.. 부끄럽네요, 풋.

웽스북스 2012-05-29 21:07   좋아요 0 | URL
정말 멋진 리뷰네요. 잘 읽었습니다.

가연 2012-05-31 08:44   좋아요 0 | URL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괜찮게 쓸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일개미 2012-06-03 04:00   좋아요 0 | URL
많은면에서 공감합니다. 굿굿!

가연 2012-06-03 13:18   좋아요 0 | URL
ㅎㅎ 아하하.. 부끄럽습니다. 일개미님께서는 어떤 리뷰를 쓰실지 궁금하네요.

꽃도둑 2012-06-18 13:50   좋아요 0 | URL
가연님. 아니 대장님!
저 리뷰 연장신청합니다~~ 무기한은 안되겠죠?...ㅋㅋ
이번 주는 도저히 시간 내기가 힘들 것 같고요 다음 주중에 올릴게요.
수욜이나 목요일 까지는 꼬~오~옥!(혹시 메일을 써야하는 건가?....)

아 그리고 리뷰 정말 디테일합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6월 선정도서 어쩌다가....가 되었네요....ㅎㅎㅎㅎ

가연 2012-06-18 18:22   좋아요 0 | URL
ㅎㅎ 메일쓰셔도 좋지만 여기다가 달아주셔도 괜찮죠. 그냥 가연이라고 불러주셔도 되는데ㅋㅋ 대장님이라니깐 기분이 묘하구먼요, 푸하하.

꽃도둑 2012-06-26 23:13   좋아요 0 | URL
대장님,ㅎㅎㅎ 리뷰 올렸어요..
늦어도 목요일 까지는 올리려고 했는데 오늘 필 받는 바람에...
대장, 수고가 많삼~ ^^

가연 2012-06-28 10:57   좋아요 0 | URL
확인했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ㅎ
 
현대물리학, 시간과 우주의 비밀에 답하다
션 캐럴 지음, 김영태 옮김 / 다른세상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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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에 만난 여학생은 일종의 심해공포증과 우주공포증이 있더랬다. 깊은 심해나 우주 공간을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고 혼자가 된 듯한 감정을 느끼는 그런 공포증이란다. 나는 사실 심해나 우주 공간을 보면 항상 공간에서 내가 자유롭게 움직여가는.. (실제로 그렇게 움직였다가는 당장 이승을 하직하겠지만) 그런 상상을 자주 품었기에 바로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왜 우주가 두렵지? 왜 심해가 두렵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분명, 우주나 심해와 같은 공간을 두려워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공포증에는 여려가지 종류가 있잖는가. 뱀 등의 특정 사물을 무서워 할 수도 있고, 광장을 두려워할 수도 있으며 외국인에게 알 수 없는 공포를 품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고소공포증이 없는 사람이 나를 보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인 이야기이다. 우주나 심해도 분명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리고 저 소개팅은 결국 잘 안풀렸다. 저 여학생이 저런 공포증이 있다는 말에 괜스레 호감이 안 간 것은 아니고, 내가 그저 너무 서투른 탓이다. 잘 될 수도 있었는데.. 라는 말은 항상 후회만 남긴다. 사실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한 구석의 알 수 없는 망설임이 나를 성급하게 떠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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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책을 거의 안읽다가 요즘 들어서 다시금 책을 집어서 읽고 있는데, 사실 최근에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다큐멘터리 시청이 바로 그것이다. 칼 세이건의 유명한 다큐멘터리인 코스모스, 에서부터 우주의 끝을 향한 여행, 블랙홀의 수수께끼.. 뭐 대략 이런 제목이 붙은 다큐멘터리들을 섭렵하고 있다. 우주의 비밀을 찾아서, 라던가, 대충 저런 제목이 붙은 다큐멘터리들도 보고 말이지. 제목들만 봐도 알겠지만.. 그렇다, 나는 우주가 너무 좋다. 왜 학과를 물리학과나 천문학과를 택하지 않았을까, 주변 사람들이 의심을 품을 정도로 우주와 법칙을 좋아하지만 아쉽게도 수능을 칠 당시에는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던 상황이었고, 무엇보다도 진짜 경황이 없던 상태였기도 했다. 그리고 물리학과나 천문학과를 택한다고 해서 별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천문학과의 경우 그래프를 더 많이 본다. 천문관측을 절대 더 많이 하지 않는다, 던가)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현재 물리학과나 천문학과를 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부모님의 가슴에 말뚝을 박는.. 그리고 본인의 미래에도 여간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한, 그리고 정말 유명한 대학을 가지 않는 한.. (설령 그런 유명한 S라던가 K라던가 Y 등을 간다고 하더라도) 쫌 흐린 구름이 드리워지는 상황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기에 아예 학과를 고를 때 생각에서 벗어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쩌면 내가 현재 우주나 물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저 내가 지금 속한 상황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만약 물리학과나 천문학과를 진학했다면 도리어 내가 지금 전공하고 있는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난 O이 제일 좋아'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어쨌든, 설령 위에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분석한 것이 다 맞다고 하더라도 내가 지금 물리학과 우주를 좋아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항상 나를 환상에 젖게 만드는 것은 일종의 꿈이다. 그러니깐 정말로 네 가지 힘이 통합된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쿼크에 관련된 이론을 초기에 정립했던 머리 겔만은 이 말보다 Basic Theory라는 말이 어울린다고 주장했고 나도 그의 말에 동감하지만..)이 만들어질까, 라는 그런 꿈말이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들도 우주에 관련된 것들을 쳐다보고, 시간이 나면 넷에서 양자론에 관련된 글들을 읽거나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수식을 살펴본다. 살펴본다고 해서 당장 내가 뭔가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책들도 이런 류의 책들을 읽게 된다. 당장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책인 현대 물리학, 시간과 우주의 비밀에 답하다, 도 마찬가지의 책이고 말이지. 그러고보면 사실 이 책의 저자인 숀 캐럴은 정말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들, 스티븐 호킹이나 브라이언 그린, 미치오 카쿠의 대중적인 인기에 미치지 못하는 면이 있다. 나도 사실 이 책을 집어들고 저자의 소개글을 보면서 이 사람을 내가 어디서 본 적이라도 있던가, 라고 심각하게 고민을 했었으니 말이다. 최근에야 이 사람이 미국의 대학교에서 강의한 동영상을 조금 훑어보고는 유명한 사람이구나, 라고 깨달았으니 말 다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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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 있어서 몇 가지 난제가 있다면 위의 통일장 이론이 그 첫번째 난제에 해당하겠고, 그 다음으로 시간의 화살, 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왜 시간은 미래로만 흐르는가? 한 번이라도 그것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있는가? 왜 우리는 레너드 서스킨드의 블랙홀 전쟁, 이나 지금 끄적거리고 있는 이 책에서 말하듯 '미래를 기억할 수 없는가?' 물론 인간의 의식을 이론의 중심에 놓는다면, 문제들이 좀 풀려나갈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이미 종교나 철학을 통해서 찾아나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그리고 나같은 얼치기 과학자들까지 포함해서 우리는, 인간의 의식이 문제의 중심에 놓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물론 불가지론자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주장하고, 도저히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의 말이 그르다는 말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한계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철학적인 견지에서야 자기 자신마저 부정되는 그런 회의주의의 극한에 이른다면 분명 이성의 한계가 찾아올 수 있겠지만 과학적인 견지에서의 한계는? 그야말로 블랙홀의 내부를 상상하는 것 정도가 한계가 될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부분은 그저 한계로 내버려둘 것인가? 만약에 그렇게 한계로 내버려두었다면 스티븐 호킹이 그 유명한 호킹 복사, 블랙홀도 결국에는 증발할 것이다, 라는 발견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시간의 화살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의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현대 물리학의 여러 이론들을 집대성하여 대중들에게 접하기 좋게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여겨진다. 저자는 그야말로 종횡무진으로 고전역학에서부터 초끈이론에 이르는 길들을 달려나간다. 물론 결론은 없다. 가설은 있지만 그 가설을 뒷받침할 수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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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중간 부분에 우주의 팽창에 대하여 다룬 부분이 있다. 앞서 언급한 블랙홀 전쟁, 이라는 책과 함께 읽는다면 많은 이해가 될 테지만.. 여기서 끄적거리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아니구.. 우주의 팽창이나 생명체를 생각할때면 나는 동시에 항상 먼 곳에서, 정말 먼 곳.. 우주의 끝에서부터 막 생성된 천체가 내뿜는 빛이 달려오는 것을 상상한다. 지금 허블망원경으로 최대 100억광년 전에서부터 달려온 빛들을 찾아내었다던가. 원시성단들과 원시은하계에서 달려온 빛들 말이다. 우주배경복사를 요리조리 잘 해석하면 현재 우주의 끝은 137억광년 정도 된다고 하던데, 아직까지 우주 초기에서 달려온 빛을 잡아내지는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은 어떤 연구결과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100억광년이나 137억광년이나, 그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빛들이 달려오는 것이다. 그래,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그 과거로부터 빛들이 달려오는 것은 아닐까? 지금 바로 여기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 그 옛날에서부터 빛들이 달려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생각들을 (엄밀히 말하면 더 복잡하지만) 더 체계화시켜서 (강한, 약한) 인간원리, 라는 이론이 있기도 하지만.. 솔직히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이런 이론에는 좀 회의적이긴 하다. 의식이, 자각하는 의식이 물리계에서의 중심축을 담당하다니. 우리 인간 존재가 자연을 설명한다는 이야기는 정말 낭만적이지만, 동시에 석연찮다. 하지만 말야, 그렇게 내심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생각의 낭만성에 한껏 빠져보는 것이다. 그 유인원에서부터 진화한 우리 인간이 지금에 이르러 비로소 우주를 향해 관심을 가지고  지금 저 과거로부터 온 빛을 느끼고 손을 뻗어 잡고 있다. 우리가, 바로 그 빛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괜스레 가슴 한 구석이 찡하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의 기념비적인 작품의 도입부에서 유인원이 던진 뼈다귀가 마치 우주선이 된 것 처럼. 비록 나 자신은 인간원리를 그다지 믿지도 않지만 (초끈이론으로 예측한 10^500개의 상태 중 우리 인간이 이 상태에 존재하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니..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말이다. 설령 나를, 우리를 위해서 그 먼 곳에서 달려온 것이 아니라도 좋다. 하지만 그저 스쳐지나가는 빛에 불과할지라도 그 먼 곳을 여행한 빛들에게 묘한 감정을 품지 않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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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실로 별의 아이들Starchildren이다. 미치오 카쿠가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에서 몇 번이고 강조했듯이 우리는 진실로 별의 아이들이다. 별은 마치 인간처럼, 혹은 인간이 별을 닮은 것이든, 나이를 먹고 자라서 노쇠해지고 이윽고 죽음을 맞이한다. 누구나 죽음은 공평하지만, 그 죽음의 순간은 공평하지 않은 것 처럼 수많은 별들도 마찬가지로 어떤 별들은 곱게 식어서 죽기도 하고, 몇 몇 별들은 초신성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폭발을 한 후, 중성자별이나 이윽고 블랙홀과 같은 모습으로 남기도 한다. 별들이 초신성 폭발을 할 때 수많은 원소가 생성되고, 그 수많은 원소들은 무한한 시간의 순환을 거치고 수많은 여행을 거친 끝에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니 나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은 한때 저 넓은 우주에서 빛을 발하던 초신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몸에는, 혈관에는 별의 심장이었던 것이 아직도 뛰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의 집합이 곧 나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그랬다면 중세의 연금술은 벌써 성공하고도 남았을 것이겠지. 그러나 하나의 죽음으로 하나의 생명이 탄생한다. 저 빛나는 별의 죽음으로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별의 생명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한 때 별이었고, 지금은 '나'이다.

 

모든 별들이 쌍성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몇 몇 별들은 (몇 몇 별들이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지구상의 인류의 수보다는 많을 것이다.) 쌍성계를 이루기도 한다. 아까 말한 초신성은 타입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타입이 Type Ia이다. 이 Type Ia는 백색왜성을 포함한 쌍성계에서 일어나는데, 백색왜성이 상대편 별의 물질을 흡수하다가 찬드라세카 한계에 도달하는, 태양 질량의 1.4배에 이르게 되면 이윽고 폭발이 일어나는 그런 초신성이다. 자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 때 나는 별이었다. 그리고 별의 죽음으로 나는 태어났다. 그렇다면 나를 마주보는 내 쌍성은, 내 상대편 별은 어디에 있는 걸까? 하늘에서 나는 그녀와 함께 살았고, 이윽고 그녀와 함께 종말을 맞이했다. 내가 이윽고 다시 태어났다면, 이 세상 어딘가 나의 상대편 별이 분명 태어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에 태어났었을지도 모르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에 그녀의 생명이 안겨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주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시간선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강하게 느낀다. 분명 지금, 현재 어딘가에 내 맞은 편 별이었던 사람이 지금 나처럼 헤메고 방황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내 쌍성을 만나기 전까지는 계속 마음 한 구석에 망설임을 품게 되는 것이다. 계속 운명적인 예감을 찾아서 다시금 헤메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면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대는 내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고.

지금 이렇게 만난 것은 수많은 기적의 중첩 속에 이루어진 운명이라고.

너는 나와 함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시공간을 보내왔던 별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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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5-25 08:40   좋아요 0 | URL
우와- 일단 추천 하고, 이렇게 이과적인 책에서 이토록 감상적인 글이 나올수가 있다니. 완전 반했어요, 가연님.

그런데요, 가연님, 그 운명이란거요.
가연님은 상대를 보고 운명이라고 확신하는데, 상대는 가연님에게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질 않는다면, 그렇다면 상대를 설득시키거나 확신시킬 자신이 있나요?

영화 [스틸 브리딩]에 보면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보고 자신의 운명의 상대임을 확신해요. 그런데 여자에겐 갑자기 이 남자가 이러는 것이 미친(?)것처럼 보이는거죠. 그래서 쌀쌀맞게 대하기도 하고 화도 내고 그러거든요. 결국 영화는 해피한 엔딩을 맞이하긴 하지만요,
'나'는 상대로부터 어떤 운명의 느낌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데 '상대'는 내게 너는 나의 운명이야 난 그걸 강하게 느껴, 라고 한다면 그도 참 난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사랑을 믿지 않는건지 혹은 세상일에 너무 많이 찌들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누군가 제게 나타나서 갑자기 '너는 나의 운명이야' 라고 한다면 갸웃, 할 것 같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라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마지막 세 줄을 자꾸 읽게 되네요. 만약,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면, 하고 말이지요. 어쩌면 내가 세워놓은 기준은 흔들릴 수도 있고 내 중심축도 이동할 수 있고 나를 둘러싼 공기도 달라질 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들 것도 같아요, 저 세 줄이라면 말이죠.

가연 2012-05-25 09:46   좋아요 0 | URL
ㅋㅋ그래서 어제 쓰면서 고민한 것이, 밑에다가 '이 책은 절대 여기다가 쓴 것 처럼 낭만적이지도 않고 감상적이지도 않습니다아'라고 쓸까, 하는 것이었지요. 사실 이 글이 거의 리뷰를 빙자한 잡담이라서.. 책 자체는 사실 좀ㅎㅎ 내용이 축약된 부분도 많고 그래서 쫌 다가가기 힘들 수 있는 책이죠.

그리고 다락방님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하자면, 사실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나만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거라면..ㅋㅋ 그러니깐 저런 대사는 완전히 사귀게 된 상태에서 상대방 손을 감싸서 쥐고는 눈을 바라보면서..ㅎㅎㅎㅎㅎㅎ 이는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고, 그런 거라면 불가능한데, 이 글을 끄적거릴때 아예 생각한 것이, 양 쪽이 모두 서로를 운명으로 여기는..ㅋㅋ 그런 관계였으니깐.. 이러다 저 결혼 영영 못하는 거 아닌가요??ㅠㅠ 풋, 그리고.. 설령 운명이라고 해서 궤도가 어긋나지 말라는 법은 없고.. 별을 들어서 이야기하자면 쌍성계가 붕괴할 가능성도 분명 있을 수 있는 거니깐..ㅎ 그런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절대적으로, 내 반대편 별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에 나오는 것 처럼, 백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였던가요?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서 서로를 영영 못알아볼 수도 있을테고..ㅋㅋ 그런 것 까지 모두 포함해서 저는 운명이라고 일컫고 싶네요.

이건 여담인데, 갑자기 '너는 나의 운명이야' 라고 말을 들어도 갸웃, 거리지 못하는 때가 분명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저만 그런걸까요? 저는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상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혹은 갸웃거렸다가도.. 말씀처럼 무언가 축이 바뀌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새벽에 끄적거린 글이라ㅎㅎ 지금 보니깐 쫌 부끄럽구먼요. 글이니깐 운명이라고 끄적거리지..ㅋㅋ 만약에 누군가를 만났다고 가정했을때, 그 사람 앞에서 저런 말을 정말 할 수 있을까요?ㅠㅠㅠㅠㅠ 아니, 나라면 가능할지도?ㅎㅎ

희선 2013-08-27 01:20   좋아요 0 | URL

별들의 신호는 몇 만 광년 걸린다죠?
우리 삶은 그리 길지 않으니,
언젠가 당신에게 가 닿겠죠


다는 아니고 한 부분입니다 언젠가 끄적거린... 유치한...
다르지만, 그냥 떠올랐습니다

반대편이라고 하니 저는 평행선이 생각나는군요 만날 수 없는 게 평행선이지만, 바로 옆에 있으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 않을지... '...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는 말도 있잖아요

어쩐지 운명은 나중에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로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렵지 않을까요 시대가 다른 때 태어난다면... 그러고 보니 어떤 책에서는 자신이 운명이라 여긴 사람이 태어나면 늘 찾기도 했군요 그리고 어떤 만화에서는 언제나 한 사람을 찾아다니기도, 알아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천년의 사랑>(양귀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군요^^


희선

가연 2013-08-28 00:24   좋아요 0 | URL
ㅎㅎㅎ 바로 옆에 있으면 더 평행선 같지 않나요? 저 글을 쓸 때 계속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친구라면 같은 곳을 바라보는게 좋을지 모르겠지만 연인은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그런... 생각이겠죠 아하하하하하

희선 2013-08-29 00:09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생각했어요 서로 바라보는 것, 반대쪽에 있으면 바라볼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데 바라보기만 하면?(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알겠지만, 같은 곳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라기보다 생각(이상)이죠 친구 같은 사이도 좋지 않나요(이것은 시간이 좀 흘러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렇게 말하지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도 있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쩐지 운명에서 멀어진 듯합니다 만난 뒤의 일을 말한 것인지도...

본래 제목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인데 '운명의 사람'(시라이시 가즈후미)으로 바뀌어서 나온 책 있어요 또 생각난 책, 운명의 사람은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운명이라 여겼지만 벌써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엇갈린 사람도 나온답니다 그럴 때는 참 마음이 아프겠습니다 서로가 운명이라 여길 수 있는 게 가장 좋을 텐데...


희선
 

 

 

 

  예전의 나를 쳐다보면, 지금은 운영하고 있는 이 서재만 해도 대부분의 글이 인문이나 과학 분야의 책을 리뷰하고 있지만, 실제로 내가 리뷰를 쓰기 시작하게 된 것은 소설 쪽이 먼저였다. 글쎄, 지금의 글들만 읽어본다면 분명 상상하기 쉽지 않으리라. 어쨌든 소설 쪽의 글을 쓰다가 어느 순간 인문 분야나 과학 분야의 이야기도 끄적거리게 되었다. 뭐, 사실 나는 다양한 쪽을 알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인문이나 과학 계통의 책들을 더 찾아보게 된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서 예전에 쓰던 컴퓨터를 뒤져보다가 예전에 쓴 글들을 발견하고 한참 상념에 젖어있었다. 팬픽에서부터, 소설에 이르기까지 말이지. 나름대로 쓰려고 노력은 엿보였지만, 끝끝내 완결을 지은 글은 거의 없었고, 소위 말하는 오리지날 설정이라고 불러야 할까, 나 스스로 배경을 만들어 글을 써서 완결지은 글은 그 중에서도 특히나 없었다. 그런데 말야, 정말 웃긴 것은.. 지금 와서 읽어보니깐, 의외로 내가 쓴 글이 재미있었다는 점이었다. 완결까지 별로 없다는 것이 이렇게 슬플 줄이야, 풋. 물론 식상한 점도 많고,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상투적인 표현도 많지만 그래도 그때의 나는 이렇게 무언가 소설이랍시고 적을 줄은 알았구나, 싶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글이든 너무 거창하게 배경을 잡고, 설정을 짜면 힘들다. 왠만한 의지력이 없는 이상 그렇게 설정을 짜다가는 결국에는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한다. 나도 그랬다. 그랬기에 도저히 완결까지 써내려갈 수가 없었다.

 

 

내가 가장 처음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팬픽이었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소설, 그것도 판타지 소설인 룬의 아이들, 윈터러에 한참 빠져있었을때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이었다. 그러고보면 그때가 일종의 판타지 붐이 불때였고, 소위 말하는 양판소, 양산형 판타지 소설들이 범람하고 있던 때였는데, 그 선두에 서서 양산형 판타지 소설들을 뒤따르게 하는 대장 역할을 하는 소설 들 중 하나가 바로 저 윈터러였다. 알음알음 인터넷을 통해서 룬의 아이들의 팬카페에 가입하기도 하고, 룬의 아이들이 발행되었던 곳, 그러니깐 제우미디어 홈페이지에서의 행사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글들도 읽기도 하였다. 지금은 제우미디어의 홈페이지가 리뉴얼되었지만, 리뉴얼되기 전에는 정말 황량하고 파란색 바탕에 무슨 텍스트 게시판처럼 되어있었지만, 그래도 소설게시판과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정말 활발한 활동이 일어났었다. 뭐, 대부분의 커뮤니티가 그렇듯 결국에는 이런 저런 다툼도 있었고.. 여하튼 나는 거의 유령회원이었는데, 정말 가끔씩 소설만 몇 자 올리기도 했다. 물론 그냥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고 대충 저런 식으로 적으면.. 하는 식으로 올린 것이라 작품성이라고 따질 것도 없지만 대부분 그런 글을 썼었던 사람들처럼 나도 내 글을 어딘가 올린다, 라는 그런 것이 좋았던 것 같다.

 

처음에 썼던 것은 윈터러의 두 주인공인 보리스와 이솔렛의 후일담 비슷한 이야기였는데, 본의아니게 스포일러가 되어버릴지 모르겠지만, 윈터러에서 결국 서로는 이어지지 못하게 된다. 작품성을 위해서는 사실 좀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택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읽고 나면 너무 가슴이 아픈걸. 그래서 내 상상속에서는 어떻게든 상대를 이어주려고 한다. 그래, 몇 번이고 이야기했듯이 나는 해피앤딩을 좋아한다. 물론 작가야 독자들의 상상속에서 '둘은 다시 행복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라고 결말을 맞이하게 두는 것이 좋겠지만, 독자들의 상상은 상상에 지나지 않는 걸. 공식적으로 두 명이 행복해지지 못하는걸.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글을 쓴 것이었다. 원작에서 이솔렛은 섬에 남는데, 그곳에서 보리스를 만나러 탈출하는, 풋, 그런 글을 시작으로 몇 편의 글을 썼었다. 도저히 길게 쓸 힘이 당시에는 없어서, 그러니깐 길게 쓸 수는 있기는 한데 그렇게 쓰다보면 엉망이 되어버리니 정제되게 길게 쓰기는 힘들어서 단편에 좀 발을 들여놓았는데, 그 중에서 특히 심혈을 기울였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대충 내용은 윈터러 세계에 괴물이 하나 소환되는데, 그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 보리스와 이솔렛이 힘을 합쳐 싸우다가.. 결국 이솔렛이 희생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윈터러의 저자인 전민희 작가가 자신의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던가, 어느 작품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그 작품의 주인공 X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고, 꿈에서조차 그 주인공에 대한 생각만 하게 된다고. 작가들이 종종 자신의 힘으로 소설을 쓴 게 아니다, 등장인물이 자신의 몸을 빌려서 쓴 거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모리스 르블랑, 괴도 뤼팽의 저자인 르블랑이 특히 대표적으로 그런 말들을 했었지. 그런데 말야, 그런 작가들에 비할 바는 분명 못되지만.. 나도 저 심혈을 기울였던 이야기를 쓸 때 약간이나마 그런 일을 겪었다. 심지어 내가 창조한 주인공들도 아닌데 말이지. 자나깨나 두 주인공에 대한 생각이었고, 학교에 가도, 집에 와도 계속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까, 그것만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생각이 멈춰졌고, 보리스 그리고 이솔렛이 내 앞에서 검과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는데 화면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나는 위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못했다. 대충은 마무리를 짓긴 했지만, 내가 지은 엔딩이 진짜 엔딩은 아니다. 그냥 급하게 완결시키려다보니 대강 지은 마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 다시 읽어보니깐 분명 그런 느낌이 확 들더라. 그렇다고 지금와서 다시 글을 써내려갈 수는 없다. 지금은 더이상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주지 않는걸.

 

 어쨌든 당시에는 저 글을 어설프게 마무리 짓고는 이번에는 장편에 도전을 했었다. 물론 어디에 연재한 것은 아니고 혼자서 만족하려고 글을 쓴 것이었는데.. 앞서 심혈을 기울여 쓴 단편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세계의, 푸하하, 이야기를 쓰려고 하다보니깐 별 수 없이 당시는 공개되지 않았던 설정들까지 내가 설정을 해야만 했고, 세계관도 적당히 조절할 수 밖에 없었다. 룬의 아이들에는 학원이 나오는데, 그 이름이 네냐플이다. 룬의 아이들 세계의 주인공들이 다니는, 혹은 다니게 되는 학원인데, 룬의 아이들 연작 시리즈에서 첫 편인 윈터러, 편에서는 아직 네냐플에 대한 설정이 거의 공개되어있지 않았다. 후속작인 데모닉에서는 바로 옆에 보이는 8권, 마지막권에서 많이 공개되었지만, 윈터러편에서는 그때가 벌써 10여년 전이니 아무런 설정이 나오지 않았을 수 밖에. 어쨌든 그렇게 자료가 마땅찮아서 스스로 창작을 시도했다. 최대한 원저자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않게.. 벗어나버리면 내가 쓰는 팬픽의 주인공들이 주인공들이 아니게 되어버리니깐.. 거기서 상상이 끝이 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내 상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글을 써내려간 것인걸. 하지만 상상이 끼어들 부분이 너무 많았고, 최대한 무거운 분위기로 글을 쓰다보니 결국에는 채 스무 장도 못쓰고 설정만 잔뜩 세워두고 놓아버렸다. 

 

그 당시에 나는 수많은 판타지 커뮤니티들을 돌아다녔다. 최근까지 운영되고 있는 판타지 연재 커뮤니티 중에는 내가 커뮤니티가 생성될 초창기때부터 지켜보았던 곳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판타지 커뮤니티에서 수많이 연재되는 판타지들을 지켜보았는데, 끝까지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완결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저 글을 내팽겨두고는 도저히 더 글을 못쓸 것 같았거든. 게다가 사람이, 은근히 그런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 댓글이 많이 달리기를 기대하는 심리가 생기기에 아무런 댓글도 달리지 않으면 그야말로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판타지면서, 혹은 나이도 어린 애들이, 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런 부분이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저렇게 글을 미완으로 남기고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정말 뜬금없이 '천사소녀 네티'가 떠올랐다. 정말 어릴 때 맘졸이며 봤던 애니메이션이었는데, 갑자기 보고 싶어서 애니메이션도 다시금 시청하고 원작 만화까지도 보았다. 원제는 괴도 세인트 테일, 이고, 더빙판이 원판보다 뛰어나게 들리는, 속된 말로 초월더빙이라고 불리는 작품 중 하나인데, 갑자기 너무 보고 싶었다. 다 읽고 나니깐 이번에는 샐리와 셜록스의 사랑이 어떻게든 잘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버린거야. 물론 결말은 둘이 결혼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그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괜스레 끄적거려보고 싶었던 거지. 하지만 이번에는 별로 오래 흥미가 지속되지 않았다. 두 편의 단편을 끄적거렸는데, 한 편은 완결짓고 한 편은 천사소녀 네티의 재림, 이라는 주제로.. 원작에서는 네티가 천사소녀를 그만두거든, 그렇게 적어내려갔는데, 결국 끝까지 못썼다. 게다가 완결이랍시고 적은 단편도 사실 플롯 자체는 원작 만화의 뒤에 보너스 편으로 나오는 만화에서 많이 영향을 받아서 적은 것이라 그다지 독창적이지도 않았다. 거의 글쓰기 연습이었던 셈이지. 결국 이 글들은 어디에도 올리지 않고, 물론 지금까지 썼던 글 중에 올렸던 글들은 거의 없지만, 그냥 컴퓨터 하드에다가 간직하였다.

 

갑자기 일반 문학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나도 뜻밖이었다. 그동안 어설픈 과학지식과 마법, 의례, 주술, 검으로 점철된 글을 쓰다가 어느 순간 임형주의 노래를 들었는데, 정말 바보같았지만, 나도

내가 왜 바보같은지 알 수 없었지만 너무나 글이 쓰고 싶어졌었다. 처음 쓴 글은 사실 완전히 주술적 색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 쓴 글의 내용은 경주에 답사를 간 고고학자가 휴일을 맞아 경주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어느 남자를 만나서 경주를 안내받는데, 경주의 고탑을 안내받으며, 엄밀히 말하면 분황사의 모전석탑을 안내받으며, 전생을 그러니깐 신라의 여자로 살았던, 풋, 그런 것들을 조금 기억해낸다, 라는 이야기였고, 저 남자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전생의 남편이었다, 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전생의 남편이 현생의 남편이 되라는 법은 없는 법. 그냥 열린 결말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가버린 것이다. 임형주의 풍운애가와 하월가를 들으면서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생에서는 함께였지만 이번 생에서는 각자 따로 살아가게 되어버리는.. 그런 결말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신라를 배경으로 택한 것은 다정, 이라는 소설 탓이 컸고, 저런 분위기의 글을 쓰게 된 것은 임형주의 노래 뿐만이 아니라, 윤대녕의 천지간을 읽은 탓이 컸었다. 윤대녕의 천지간, 은 너무 유명한 책이니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 다정, 이라는 소설은 엄밀하게 자료도 수집을 한 소설이기도 하고, 글도 당시 읽을때에는 나에게 감동을 주기에는 충분한 소설이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특히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드라마도 그렇지만 고증이 쉽지 않은데. 그런데 또 고증을 너무 철저하게 하다 보면 감성적인 면이 어긋나기 쉬운데 그런 부분을 잘 잡은 소설이라고 느꼈다. 여하튼 그렇게 신라에 관한 단편 소설을 하나 쓰고 읽어보니, 뭐랄까, 약간 스스로가 부끄러워졌었다. 계속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따라서 쓰는 꼴이 아닌가. 게다가, 게다가.. 현실에서는 마법따위는 쓸 수 없다. 전생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으며, 주술같은 것은 할 수 없는 법이다, 알잖는가. 물론 실제로 주술이나 마법을 하는 방법들이야 인터넷에서도 검색만 하면 오컬트 관련 물품에 마법에 관련된 책들, 알레이스터의 법의 서 혹은 솔로몬의 작은 열쇠, 큰 열쇠 등의 주술책을 한 무더기 구할 수 있지만, 실제로 있는 책들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제는 그런 부분을 제외한.. 그나마 현실적인 이야기를 써보자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끄적거리기 시작한 것이,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다. 그 마을에서는 매년 축제가 있었고, 그 축제는 살아있는 새를 날려보내는 일종의 방생제와 같은 축제였는데, 그 방생제에 얽힌 뒷이야기들이랄까, 어두운 면을 어린 소녀의 눈으로 그려낸 이야기였다. 이렇게 쓰니깐 굉장히 멋진 글인 것 같지만 절대 아니다, 풋, 집에 내려가서 읽으면서 실소를 머금었는걸. 다만 내가 생각해도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너무나 상투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리겠지만.. 어쨌든 이 글은 겨우 완결을 지었고, 한동안 나는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게 되었다.

 

나의 소설 쓰기는 신춘문예 도전으로 끝이 났다. 아니, 도전이라고 말하는 것도 너무 웃긴다, 그저 신춘문예에 작품을 내는 것을 목표한 것으로 끝이 났다, 가 더 옳은 말이 되겠다. 나는 끝끝내 소설을 완성시키지 못했고.. 신춘문예에 응모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데, 신문에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게재가 되는 거야. 하나씩 읽어가면서 이 부분은 괜찮고, 여기는 독창적이다, 이렇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보고 있었다가 갑자기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그런 욕망이 속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이때쯤의 나는 판타지 소설만 읽은 것이 아니었으니깐.. 많은 소설을 읽었고, 동인 문학상 작품집도 찾아서 읽었던 때였으니깐.. 나도 할 수 있어,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고, 이번에도 그 마음의 소리를 따라서 글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소재를 찾는 것은 사실 간단했다. 당시는 거의 막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있던 시기였기에 인터넷을 주제로 삼고, 인터넷에서의 인간관계를 주제로 삼겠다고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인터넷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 때이기도 했고 말이지. 왠지 그때는, 이렇게 글을 써내려가면 잘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신춘문예에 뽑힌 자신의 모습이 막 그려지는 것 있지, 푸하하, 지금 보면 웃음이 지어지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래, 그때는 그랬다.

 

글은 인터넷에서만 활발히 활동하는 어느 블로거를 주인공으로 삼고, 현실과 인터넷의 극에 달한 괴리감을 보여준 뒤, 그 절정으로 그 블로거와 현실에서 접점을 맺고 있는 사람, 나는 담임 교사를 택했다, 을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그런 내용으로 쓰여졌었다. 하지만 끝내 나는 글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도저히 결말을 어떻게 하여야 할 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 블로거는 나 자신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현실에서 접점을 맺고 있는 사람을 인터넷에서 만난 적도 없으며, 인터넷에서 만나자, 라고 해서 현실에서 만났던 사람이 알고 보니 실제로 접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언제 어디서든 힘든 법이다. 한 번 나를 주인공으로 동일시하다보니 글이 진행되지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며 어쩔 수 없이 글을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현실에서 접점을 맺고 있던 사람이 온라인에서는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온라인에서 그렇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었던 사람이 현실에서는 나에게 무심하고 아무렇게나 대했던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위선인가? 어디까지가 진실된 인간관계인 것인가?

 

그래서 저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지금도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인간관계란 어떤 것인가, 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실용서를 위시하여 소설책들까지.. 파편화되어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어떤 사람은 현실에서는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온라인 친구만 수백명을 거느리기도 하고, 현실에서 찾지 못하는 것을 온라인에서 찾기도 한다. 혹은 인간 관계를 일종의 계약적이고 이해타산적으로 맺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정이 그리워 넷 커뮤니티에 가입하기도 한다. 아무도 이해못하는 또다른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나는 끝내 저 물음에 대해서 답을 내리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보관하고야 말았다. 어쩌면 저 물음에 내가 답할 수 있었다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 내 삶에 있어서 어느 한 방향으로 내가 확정지어서 살아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감정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래서 감정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지금의 삶보다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내 현실을 설계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망설이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지금도 나는 저런 물음에 대해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지금이 그때와 다른 것은 더이상 저런 것들에, 어떤 관계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 무관심한 것이다. 여기서 좀 뜬금없지만 철학자로서의 샤르트르의 이야기를 써야겠다. 샤르트르는 인간이 타자와 맺는 관계를 세 가지로 나뉘었는데, 피학적, 가학적, 그리고 무관심한 그런 관계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것 있지. 저 문구를 읽으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거렸는지도 모른다. 과연 저런 고찰을 할 수 있는 철학자라면 월급을 꼬박꼬박 주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이지. 그런데 그렇게 우스개소리를 하는 동시에 나는 저 문구에 샤르트르가 덧붙여 예언해놓은 부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 세 가지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실패할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글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기도 한다. 위의 마지막 글, 신춘문예에 공모하려고 했던 글이 어쩌면 내 자신을 비추는 글이었나보다. 그 이후에는 나는 더이상 소설을 쓰고 싶지 않았고, 주인공들이 밤마다 귓속에서 재잘거리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그대로 나는 나 자신에게 침잠해버리고 말았고, 그 내부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데미안, 을 보면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대략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남들처럼 삼각함수와 같은 어려운 부분도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딱 하나 남들처럼 못하는 것이 있는데, 내가 무엇이 되어야겠다, 라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의 원을 끄집어 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이야. 남들이 의사가 되고 싶어하거나 정치가가 되고 싶다고들 자신의 비원을 속에서 끄집어내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게 정작 나 자신의 문제가 되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있지. 그 문구를 몇 번이고 반복해가며 읽으면서 나는 동시에 싱클레어처럼 데미안이 내 곁에 있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아야만 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진실로 운명과 감정은, 동일한 개념에 붙여진 두 개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살아가게 되는 법이다.

 

만약에 무한한 시간을 내가 살아간다면 이런 생각들은 모두 무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죽기 때문에 그만큼이나 짧은 인생을 감정에 가득차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을때가 되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때,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강렬한 감정에 이끌려 새겨진 기억을 돌이키며 웃음짓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삶은 그런 강렬한 기억들보다는 수수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서 구성되며, 그런 수수한 이야기들과 더불어 살아갈때 더욱더 자신과 타인들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든 강렬한 기억을 남기고 싶어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런 요동의 반복이다. 슈렉 4를 기억하는가? 환상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 슈렉과 피오나의 모습을 가감없이 현실적으로 그려낸 이야기말이다. 현실은 언제나 그렇게 지속되며, 우리는 그런 현실을 계속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삶이기에 끝나지 않는 이야기란 없다. 아니, 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부분을 기억하고 또 남기며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도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인상적인 부분만 하이라이트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금 감정에 휩싸여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해피 앤딩으로 끝, 하며 편해질 수 있는 것은 소설로만 족하다. 우리의 삶에는 그런식의 앤딩은 찾아오지 않으며 그렇기에 항상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토록 끝이 난 이야기들을 붙잡고 글을 써내려갔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끝끝내 내 이야기의 완결을 짓지 못했던 것 같다. 모양이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형태의, 문자적인 형태의 해피, 라는 개념을 어떻게든 내 손이 닿는 곳에 끌어내려 내가 느낄 수 있게.. 내가 강렬하게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글을 써내려간 것 같다.

 

지금은 글을 쓰지 않지만, 그래도 한 때는 내가 글을 썼었다. 오랜만에 내가 썼었던 글들을 읽으면서 감정에 젖는 것도 좋은 일인 것 같다. 이로서 나도 내 수수한 삶에 한 가닥 기억을 다시금 새긴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언젠가 내 이야기가 마무리지어졌을때, 눈을 감으며 기억을 되새길 때 고개를 끄덕거리는 거지, 그래, 나도 소설가 흉내를 내보았다고, 나름 이야기들을 붙잡고 고민을 했었다고, 비록 완결을 짓지 못해서 아쉽지만 이제는 괜찮다고.

 

 

 

p. s. jk김동욱의 미련한 사랑를 들으며..

p. s. 2. 이 글 자체도 그다지 안쓰고 싶던 글이긴 한데.. 그래도 책이 있으니..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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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0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2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2-05-10 18:00   좋아요 0 | URL
<룬의아이들> 표지 보고 급반가워서 댓글 남깁니다. 안녕하세요. 가연님. 룬의아이들, 윈터러의 왕팬의 한 명으로서 너무 반가워요. ^^ 저는 어정쩡하게 한 사오년 전에 이 책을 알게 되어 (안타깝게도!!) 일찍부터 열광해온 사람들 속에 끼일 수가 없었어요. 그저 조카녀석과 둘이서만 보리스 멋있다는 둥, 보리스 나오는 게임에서 보리스 입은 옷이 어떻다는 둥 이야기하는 정도였어요. 근데 가연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팬픽에서부터 소설까지..와. 멋져요.

한때는 글을 썼었다..라는 부분에서 살짝 감동이. ^^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인데요. 오에 겐자부로 라는 일본사람인데요. 이 사람도 역시 다른 사람들 소설 읽다가 혹은 번역 훑어보다가 멋진 한 문장을 발견하고선 이를 실마리로 자신만의 소설을 쓰는 경우가 많았더라구요. 끄덕끄덕, 하면서 읽었는데 오늘 가연님 포스팅 보고 또 끄덕끄덕.

가연 2012-05-12 01:50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매우 급반갑습니다ㅎㅎ 윈터러의 광팬이시군요. 저도 광팬이라서.. 언제 룬의 아이들에 대하여 심도있는 대화를.. ㅋㅋ 보리솔렛파인지 보리스핀파인지 등등[......] 사오년ㅎㅎ 도 충분히 긴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흘러서 십년도 되고.. 그렇지요, 하하. 보리스 나오는 게임이라면 분명 테일즈위버군요. 그래픽이 좀ㅎㅎㅎㅎ 초창기 테일즈위버는 보리스만 대부분 선택해서 마치 바퀴벌레같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었지만..ㅋㅋ

지금 저 부분을 읽어보니깐 괜스레 저도 찡해지네요. 그래요, 분명 한때 글을 썼었지요..

이진 2012-05-10 18:32   좋아요 0 | URL
아, 가연님 글 읽으면서 내내 킥킥댔어요.
저도 가연님하고 상황이 너무 비슷한걸요.
제 최대 목표를 일단 제 나이대에서는 청소년문학상에 작품을 내는 것이고, 더 커서는 신춘문예에 글을 내는 것인데 지금부터라도 글을 써가야할텐데 안 쓰고있어요. 안쓰기보다는 저도 도저히 결말을 쓰는 걸 못 봤답니다. 가연님하고는 다르게 하도 게으른지라, 엔딩까지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어요.

<룬의 아이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군요... 중학교 1학년 때 친했던 친구가 판타지, 특히 룬아를 정말 좋아했는데요.

가연 2012-05-12 01:46   좋아요 0 | URL
ㅋㅋ 그런가요, 제 경험, 이라면 경험으로는 많이 읽다보면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질 때 분명 있을테니 그때부터 글을 쓰셔도 될 듯 하네요.

ㅎㅎ 저야말로 매우 게으름의 대명사인데..ㅎㅎㅎㅎㅎ 엔딩을 저도 많이 생각 못했었답니다. 그나저나 룬의 아이들은 좋은 책이랍니다, 하하.

희선 2013-07-27 23:07   좋아요 0 | URL
글 속에 나오는 사람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셨다니 부럽군요 저도 한번 그런 일 겪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별로 안 해서... 그리고 그런 글을 써본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것만 생각해야 그런 일도 일어날 텐데 말입니다 저는 시작을 하면 끝까지 가기는 합니다 그렇게 길게 쓰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아주 긴 것은 아직 한번도 못 써봤습니다 한번 써보고 싶기는 한데...

신춘문예에 응모하려고 쓰다 만 소설, 다시 한번 보고 끝을 맺으면 어떨까요 읽어보고 싶네요^^ 다른 것도...

지금 소설은 쓰지 않는다 해도 글은 쓰고 있잖아요 그래서 '한때 글을 썼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중에 소설을 쓰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얼마전에 이런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글을 써서 그것을 모아서 언젠가 책 한권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그냥 저만의 책이죠 어쩌면 잠깐 하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재미로 글(이야기)을 쓰고 싶기는 해요 책 읽고 쓰는 것보다 그게 더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군요 많이 안 써봤는데 이런 말을 했군요 쓸 수 있어야 할 텐데... 사실 꼭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은 없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가서...


희선

가연 2013-07-31 18:04   좋아요 0 | URL
끝이 안나더군요, 몇 번 시도를 하였었지만... 결국 미완인채로 어딘가 던져두었습니다. 글의 사람이 움직여다니는 경험은 저도 그때 이후로 별로 겪지 않았었네요, 그러고보니. 희선님의 글을 모아서 책을 내면.. 저는 사인본 한 권 정도는 받을 수 있지요?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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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시작할께요.

 

 

비평 이론의 모든 것.

개인적으로 이번에 나온 책 중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비록 조금 두껍긴 하지만 비평 이론에 대하여 평소 어느 정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책이겠지요. 어떤 작품에 대해서 비평하는 방법에는 정말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는데, 정신분석 비평, 마르크스주의 비평, 여성주의 비평, 신비평, 퀴어 비평 등 다양합니다. 이 많은 방법들을 이 책에서는 모두 총괄하여 그 내용을 설명하고, 실제로 이런 비평을 적용하는 예를 들어주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뛰어난 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비평들의 예시를 들면서 오직 한 책 '위대한 개츠비'로만 철저하게 비평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점인데요, 사실 여러 비평법을 다루다 보면 그 예시도 그 비평에 잘 들어맞는 작품을 고르기 쉽상인데, 이 책은 오직 한 작품만 고수함으로써 각 비평간의 차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덤으로 개츠비 비평 이후에 나오는 일종의 예제 문제들, (책의 목차에서 심화학습, 기타문학작품에 대한 접근, 이라고 되어있는 부분)도 흥미롭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책의 뒷표지를 보면 저자의 말이 나오는데, 저자는 대략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데리다의 책을 읽고는 눈물이 흘렀다. 그 이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저자이기에 이 책을 지을 수 밖에 없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가자, 고전의 숲으로.

한길 그레이트 북스를 발간해왔던 한길사에서 그동안 나왔던 그레이트 북스들의 일종의 길잡이를 발간하였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 책이 나온 적이 있고, 이번에 출간된 것은 개정판인데, 현재 나온 그레이트 북스가 120권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그 내용들이 요약되고 축약되어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단점을 상쇄시키기 위해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구성을 취합니다. 먼저 책이 나오게 된 배경과 그 책을 쓴 저자에 대한 설명을 하고, 그 다음 책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하여 그대로 실어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각 그레이트 북스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 번역자 자신이 직접 내용에 대하여 정리를 합니다. 예를 들어,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책 '슬픈 열대' 라면, 이 가자, 고전의 숲으로, 에서는 먼저 슬픈 열대가 나오게 된 배경과 저자에 대하여 내용을 적어두고는 슬픈 열대, 의 핵심이 될 만한 부분인 원주민들의 생활사에 대하여 발췌를 하고는, 마지막으로 슬픈 열대, 의 번역가인 박옥줄 교수가 직접 정리를 해서 한 챕터를 마무리짓는 것이지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부족한 면이 있으리라 짐작되고, 무엇보다도 발췌를 했기에 독자가 직접 전문을 보고 판단하는 것과 거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다양한 방면에 걸친 고전들에 대한 길잡이 역할로는 손색이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일전에 로마제국 쇠망사, 데릭 손더스 판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책도 장점이 있었습니다만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면, 물론 예전 소개페이퍼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이야기했었지만 말입니다,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었지요. 이 책은 비록 방대한 분량이긴 합니다만 6권짜리 로마제국 쇠망사를 그야말로 핵심만 뽑아서 축약한 책입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얼마나 훌륭한 책인가, 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요. 하지만 그 많은 분량때문에 선뜻 읽으려 나서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충실하게 기번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도 동시에 부담되지 않게 한 권으로 제책하였기에 그 효용이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앞서 소개한 데릭 손더스 판의 로마제국 쇠망사 축약본과 함께 읽는다면 그 시너지가 대단하겠지요.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에서 지리나 민속대형, 군사작전과 같은 부분을 축약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얼핏 훑어본 바로는 정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좀 불친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런 부분, 그런 군사적이거나 지리적인 그리고 문화 풍습과 같은 세세한 부분이 로마 제국의 이미지를 그리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여기고 있기 때문에 과연 이 책의 평역자가 올바른 선택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중심되는 맥락을 그려내는 것에 있어서는 충분히 좋겠지요.

 

 

 

사물의 민낯.

추천하기가 좀 애매한 책입니다만, 일단 리스트에 넣어둡니다. 이 책이 애매한 이유는 그야말로 경계에 걸쳐있기때문입니다. 어떤 사물의 역사를 밝혀나가면서 인류에 대한 이해에 접근해보겠다, 라는 책의 의도는 좋지만 사실 책 내용 자체는 인류학적인 접근보다는 아무래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흥미 위주의 내용이 많기 때문이지요. 이런 류의 책이 지향해야 할 바는 헨리 페트로스키의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와 같은 책이어야 하겠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무래도 아쉽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사실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고 싶다면 폴 임의 책속의 책, 과 같은 책들을 읽는 것이 더 나은 방편일 수도 있겠고 말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로 거칠게라도 인류와 접하고 있는 사물을 분류하여 이야기를 펼쳐보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앞으로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드네요.

 

 

 

현실, 그 가슴뛰는 마법.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 미신에 대해서 그리 좋지 못한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지요. 그런 그의 성향으로 볼때, 그런 환상따위는 정말 멋진 현실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라는 내용을 설파할 만한 책이 이제야 출간되었다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놀라운 부분이 있다면, 이전의 리처드 도킨스의 책이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생물학적인 이야기를 다룬 책들이었다면, 이 책은 정말 다양한 과학적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놀랍기도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심화된 내용을 이야기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나 성인들에게 있어서 거의 사라져가는 과학적 관심을 멋진 일러스트와 그래픽 자료들과 함께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분명 좋은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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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 2012-05-06 23:20   좋아요 0 | URL
파트장님 존재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10기를 첨 진행하고 나니, 이제야 감이 잡히네요.ㅎㅎ
이번 기수는 좀 편안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첫 파트장님! 화이팅이요~!!

가연 2012-05-08 02:29   좋아요 0 | URL
으하하ㅠㅠ 정말 감사합니다만, 저의 존재를 가까이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 댓글을 한 분씩 적은 건 아니구ㅠㅠ 10기 초반에 신간평가단 담당자님이 잠깐.. 각 페이퍼마다 댓글을 다신 적이 있잖아요, 확인하셨다고.. 처음에는 그냥 저도 지나가려다가, 알라딘 자체를 새로 시작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구.. 그 분들께만 댓글 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래서, 풋, 이왕 확인하는 김에.. 그렇게 하는게 맞는 것 같아서..ㅎㅎ 물론 끝에 몇 분에게는 미처 댓글을 남기지 못했지만(한 번 지나가고 나니깐 남기기가 애매해지더라구요ㅠㅠ).. 그런 연유로 괜히 몇 자 남겼습니다. 더불어숲님과는 10기에서 함께 활동했었지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다락방 2012-05-07 09:24   좋아요 0 | URL
우앗. 파트장님..멋지다. ㅎㅎ

가연 2012-05-08 02:39   좋아요 0 | URL
훗, 제가 멋진 것은 사실이지만, 파트장이라서 멋진 것은 아니지요, 하하. 어쩌다보니 이런 작업을, 아니 이것도 일종의 알바군요..ㅎㅎ 별로 스스로도 의식하지도 않으려구.. 그리고 다른 분들이 괜히 의식하지 않게 해야겠다, 싶기도 싶지만, 랄까 벌써 괜히 한 분씩 들러서 확인하였다고 끄적거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항상 후회는 늦지만..ㅎㅎ 이게.. 다른 부분이 후회되는 것보다도 더 후회되는게, 생각보다 댓글 남기는 것이 힘드네요ㅠㅠ 원래 다른 분들한테 댓글을 잘 안남기던 사람이기도 했지만..ㅎㅎ 신간평가단 담당자님이 지난 때 비록 잠깐 댓글을 남기셨다지만 괜스레 대단해보이는데요, 하하.

꽃도둑 2012-05-10 14:39   좋아요 0 | URL
우리의 파트장님,,,^^
[비평 이론의 모든 것] 가연님도 추천하셨네요..
선정될 확률이 높아지고 있어요,점점..
11기 잘 부탁드려요~~^^

가연 2012-05-12 02:00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으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