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말하자면 나는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이 글에는 분명 엄밀하지 않은 부분이 많을 것이다. 물론 기초적인 역학이나 일반물리학, 미적분(Calculus라 불리는 바로 그것)은 수강했었다. 하지만 모든 대학의 강좌가 그렇듯 나중에는 자신이 쓰게 될 분야만 중점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고, 그 외의 것들은 기억의 저편 어딘가에 묻어두게 된다. 그리고 특히나 물리학에서 역학이나 전자기학, 파동 등 일반물리학에서 다루는 영역은 고등학교때 이과를 택한 학생이라면 겹치는 부분도 분명 있기도 있기에 현대물리학의 성과를 상상하며 물리학을 수강한 사람들에게는 분명 실망감을 안겨줄 것이다. 물리학과가 아니었던 나도 실망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끝의 맛보기처럼 실린 입자물리학과 상대성이론 약간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물리학의 성과들, 양자역학과 같은, 을 이해하거나,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고전역학 부분을 알아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물리의 언어라고 불리는 수학에 대한 이해 및 공부도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야만 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양자역학만 공부하겠다는 말은 사실은 어폐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마치 허공에 구조물을 짓겠다는 말과 동일하다. 실제로 물리학과에서는 양자역학을 학부에서는 3, 4학년에 걸쳐서 배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더 심화된 학문은 대학원을 거쳐서 본인이 스스로 공부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양자역학을 알기 위해서 고등학교때 배웠던 역학과, 심화된 전자기학, 미적분 방정식을 다시 공부하라는 것은 그냥 상대방보고 물리학과를 가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중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이제 더이상 뉴턴의 사과와 같은 것이 아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정도는 되어야 우리가 특이함과 매혹, 이해함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음과 같은 양가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그러니깐 나를 포함한, 양자역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어하는 대중들은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저런 수학적인 기초와 역학이나 전자기학적인 기초가 없으면 양자역학은 공부를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인가?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학문인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사실 그렇지 않다, 일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역학에 대한 기초가 있어야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학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물리적인 상상력과 직관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직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없다.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책에 최대한 비유를 많이 들게 된다. 물론 그들 자신도 그 비유가 엄밀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수학을 피해서 직관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물리학적인 개념을 사회학적이나 인문학적인 개념에 적용시키는 것에 대한 문제점이 나타난다. 물리학자들이 책에서 드는 비유는 옳은 것이 아니다. 물론 아예 그르다고도 할 수 없겠지만,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기에 쓰는 비유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그런 비유는 실제 과학자들이라면 당황스러워할 그런 개념의 연결을 가져오게 된다. 레닌의 경우가 그럴 것이다. 레닌이 그의 저서에서 '전자는 무진장' 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사실 그 표현은 옳지 않은 표현이다. 입자물리학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보고 레닌 당시의 어느 물리학자가 말하기를, 레닌과 자신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이념뿐만이 아니군요,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불확정성 원리를 인간의 지적 능력에 지워진 한계다, 와 같은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잘못된 관점이다. 불확정성 원리가 나타나는 이유가 빛, 광자가 전자에 부딪혀서 경로가 바뀐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된 관점이다. 여러 비유는 이런 식의 문제점을 낳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유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저렇게 엄밀한 공부를 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물리학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호기심을 접을 수 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물리학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여담이지만 사실 순수과학으로 먹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물리학자가 아니면 물리학을 하지마! 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일테니 말이다. (이 말이 얼마나 횡포인지는 잘 알리라 믿는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우리 생명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닐 테니, 충분히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순수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을 굳이 수식들을 휘갈기며 내쫓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런 호기심, 그리고 의문이 축적되어 과학이 발달하는 토양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유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그 열정을 잃게 하지 않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양자역학에 관련된 몇 권의 책들을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한 번 소개해 본다. 물론 여기 있는 책들을 내가 모두 읽은 것은 아니다. 사실 후반부에 소개하는 책들은 전문 서적들이기 때문에 내가 공부했다면 그 사실이 더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1. 대중적 영역.

 

 

 

한 권으로 충분한 양자론.

 야심 만만하게 한 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만, 사실 한 권으로 충분할 리가 없다. 사실 이 책 한 권만 읽는다고 할지라도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흐름을 따라가는데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수식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다른 서술 방식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데, 역사적인 사건으로 따라가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충실하게 어떻게 막스 플랑크에서부터 양자론이 태동했는가, 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만한 부분은 데이비드 봄의 해석을 크게 중요시하여 책에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는 것인데, 사실 봄의 해석보다는 좀 더 입문서에 걸맞게 코펜하겐 해석을 따라서 서술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다시피 봄의 해석과 코펜하겐 해석 둘 모두 세계를 그리는데 문제가 없다면 한 쪽의 해석만 무시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다.

 

 

 

양자역학의 법칙.

이 책은 매우 추천할만한 책이다. 저자 그룹인 히포패밀리, 는 사실 잘 모르는 그룹이다. 이 책 앞부분에서는 자신들이 어떤 그룹인지 조금 소개하고 있기는 한데, 그들 말에 따르면 언어를 연구하는 그룹이라고 한다. 원래 일본에서 시작된 그룹인긴 하지만 한국에도 지부가 있다고 하던가. 대략 그들의 교육 방법은 다음과 같다. (많이 축약하자면) 테이프를 많이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교육 방법은 그들이 다른 영역을 연구할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그 결과물이 파동의 법칙, 이라는 책과 이 양자역학의 법칙, 이라는 책이다. 책은 사실 가볍게 편집된 부분이 있다. 군데 군데 만화캐릭터를 그려넣고, 글씨 크기도 매우 큼직큼직하다. 물론 반드시 조그만 글씨에 여백없이 종이를 가득 채워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런 여백없이 종이를 가득 채운 문자의 향연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왜 이렇게 가볍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경우도 분명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편집과는 달리 결코 다루고 있는 내용은 가볍지 않다. 흑체 복사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막스 플랑크,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이끌어내고, 그 후에 드브로이를 거쳐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를 소개한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수식을 이끌어내었는지 우리가 직접 펜을 들고 유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여기에 있는 내용을 유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나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안다, 등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여기서 유도하도록 되어있는 파동방정식은 가장 간단한 경우를 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문교양서와 대중의 눈높이, 라는 두 면을 고려했을 때 어쩔 수 없는 타협이라고 본다.) 그들의 말대로, 물리는 그 영역의 언어인 수학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명료할 것이다. 어설픈 비유가 아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특히나 고교 학력이 매우 높은 편인 우리나라라면 이과를 졸업했다면 무리없이 따라갈 것이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수학을 가지고 말이다.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

이 책은 권하는 책이다. 아래에 소개하겠지만,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라는 속칭 '빨간 책' 이라는 것이 있다. 그 책은 물리학의 전반적인 영역을 강의한 책인데, 그 책에서 그나마 쉬운 부분을 골라내에 이렇게 추려낸 것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이다. 파인만은 말하기를, 우리 문명이 만약에 멸망해서, 다른 모든 지식을 잃게 되는 상황을 맞이 했을 때, 단 하나만 알고 있다면 모든 지식을 유추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단 하나, 에 해당하는 것은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라는 명제이다. 얼핏 보면 과연 그럴까, 그런 생각이 들지만, 파인만은 자신의 강의록과 그 강의록에서 쉬운 내용을 추린 이 책을 통해서 그에 대한 설명을 펼쳐나간다. 물론 파인만의 기행들, 그리고 그의 생각의 자유로움만을 즐기고 싶다면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양자역학으로, 더 나아가 물리 세계로 한 발자국 딛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숨겨진 우주.

개인적으로 호평하는 책이다. 입자물리학의 입장에서 최신물리학의 성과들을 설명하고 있는 책인데, 물론 '최신' 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번역된 것이 2008년으로 알고 있으니. 그러나 기존의 물리학에서 크게 바뀐 부분은 2012년 현재 아직은 없다. (힉스 보존의 발견을 들 수 있겠지만, 기존의 입자모형들이 힉스 보존의 존재를 가정 하에 이루어진 부분들이라 크게 개변은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은 큰 효용을 가진다. 수많은 이론들을 좋은 비유를 통해서 잘 설명하고 있으며, 이 책의 내용만 어느 정도 이해하더라도 입자물리학을 다룬 기사를 읽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특히 최근 연구 성과, 힉스 보존의 발견에 대해서 2008년 정도의 시기에서는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잘 알아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뒤의 저자 본인의 연구 결과를 설명하는 페이지들은 거의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겠지.

 

 

 

현대물리학.

이 책도 괜찮은 책이다. 아인슈타인 이래로 시공간의 곡률을 결정하는 것이 중력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중력이라는 녀석은 실제로는 입자물리학에서는 좀 소외되는 녀석이다. 표준모형에서 다루는 힘은 사실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전자기력의 세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중력, 을 다루는 이 책은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닌가,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태초의 우주는 빅뱅 가설에 따르면 매우 크기가 작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크기가 작은 (플랑크 길이 이하의) 시점에서 네 힘은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진정한 모든 것의 이론은 플랑크 길이의 크기 이하에서 융합되었으리라고 짐작되는 네 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이론이다.) 다시 따져본다면, 우주의 비밀을 탐구한다는 이 책에사 중력을 살핀다는 이유로 다른 힘들을 살피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입자들에 대한 설명도 매우 충실하다.

 

 

 

얽힘의 시대.

양자 역학을 대중이 접하는 방식으로, 위의 책들을 통해 과학적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접하는 길도 있겠지만, 이 얽힘의 시대, 처럼 역사적인 측면을 따라가는 방법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양자물리학사를 인물을 따라서 조명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물론 흐름 자체는 앞에 소개한 책들과 동일하다. 막스 플랑크에서 아인슈타인 등으로 흐르는 그 흐름 말이다. 굳이 이 책에서 특기할만하게 다루고 있는 분야가 있다면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을 비판한 데이비드 봄을 다룬 분야일텐데, 사실 제일 처음 소개한 책에서도 봄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의 책들을 읽는다면 굳이 우리는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대화' 에 있다. 우리는 한 문단으로 길게 쓰인 글보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대화에 더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더 이해가 빨라질 수 있다. 이 책을 함께 읽는다면 양자역학에 있어서 분명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의 최전선.

이 책은 실험물리학자들에 대한 책인데, 꼭 실험물리에만 국한되지 않고 물리학에 대한 흥미를 계속 북돋아주는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일종의 모험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양자역학에 관련된 부분, 입자물리에 대한 부분만을 살펴보고 싶다면 뒤의 부록부분만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실험물리학자들이 우주의 비밀들을 풀어나가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할까? 이 책의 주인공들은 바이칼 호수든, 남극 대륙이든 겁없이 뛰어들어간다. 현대물리의 최전선에 서 있는 LHC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사실 실험물리분야는 쉬운 분야가 아니다. 이론물리 또한 쉬운 분야는 아니지만 실험물리의 어려움은 그것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예산' 과도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강의에서 우주 탐사에 대한 비용을 늘려달라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막상 돈을 들인다고 해서 바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니 답답할 뿐이다. 

 

 

 

2. 대중적 영역과 전문적 영역의 사이.

 

 

 

파인만의 QED.

 사실 이 책은 어려운 편이다. 파인만의 이름이 있다고 해서 모든 책들이 쉽지는 않다. 앞의 책들을 읽었다고 해서 이 책을 쉽게 이해할 수 는 없다. 파인만은 일반인도 양자전기동역학, 을 이해할 수 있어 라는 마음을 가지고 강의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파인만 본인이 자인했다시피, 강의를 하면 할 수록 사람들이 빠져나갔었다. 이 책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앞부분은 겨우 읽을 수 있겠지만 더 읽다가는 머리가 아파질 것이다. 물론 다 읽는다면 결론적으로 도움은 될테지만, 아무래도 일반인들을 상대로 자신이 이뤄낸 재규격화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파인만의 양자전기동역학, 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한다고 해도 이 책은 그리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하지만 전문적인 영역과 대중적인 영역의 사이에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구매해서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그런 독자라면 차라리 아래에 소개할 파인만의 물리학, 을 구입할테지만.


 

 

양자역학의 역사와 철학.

감히 말하건데 이 책은 분명 어느 정도 읽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솔직히 당장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목은 매우 흥미를 유발할만한 책이지만, 책 중간중간에 나오는 별다른 설명이 없는 수식들은 그야말로 의욕을 꺾게 만든다. 원래 수식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나조차 이런 생각을 들게 만들 정도니 수식에 거부감까지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은 양자역학에의 길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책 내용은 앞서 소개한 '얽힘의 시대' 를 크게 심화시켰다고 여겨진다. 그러니깐 일반 독자 수준에서는 앞서 소개한 얽힘의 시대, 만 읽어도 충분할 것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어떻게 물리학과 철학을 합쳐보는가, 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책들이 철학의 입장에서 물리학을 합쳐보려고 했다면, 이는 물리학의 입장에서 철학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하는 시도이다. 그렇기에 사실 물리학쪽에서 공부를 해온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실체에 이르는 길.

이 책은 매우 뛰어난 책이다. 단순히 양자역학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 전반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구입하는 것이 좋다. (단순히 읽기 위해서라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 것이 좋겠지만, 책을 완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구입하는 수 밖에 없다.)  물론 내용은 쉽지 않은 수준이다. 저자는 로저 펜로즈인데, 책을 읽어보면 정말 저자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 가 군데군데 잘 드러난다. 앞서 이 책을 구입해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이 책을 완전히 즐기기 위해서, 라고 말했는데, 분명 그 말대로이다. 이 책은 연습장이 필요하다. 한 페이지에 많게는 서너개, 적게는 한개 정도 우리가 직접 증명해보아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물론 꼭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뒤의 로저 펜로즈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깊은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펜을 들고 직접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앞서 소개한 양자역학의 모험, 의 레벨업 수준의 책이랄까. 그렇게 읽으면 언제 다 읽게 될 지 모르겠다고? 그렇다. 사실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 모두 제대로 읽으면 언제 다 읽게 될지 모르는 책들 뿐이다.

 

 

 

3. 전문적 영역.

 

 

 

들어가기 전에 먼저 변명을 하자면, 여기서 소개하는 책들은 내가 직접 조금이라도 본 책들도 있지만, 내가 이야기만 들은 책들도 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은 결과적으로 '물리학과에서는 양자역학을 배울 때 무엇으로 배우나요?' 에 대한 답이 되어버릴 것 같지만, (심지어 나는 물리학 전공도 아니다.) 그럼에도 혹시나 위의 전문적 영역과 대중적 영역의 사이를 돌파해온 독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급해둔다. 물론 수학적 부분은 독자적으로 공부해야 할 것이다.

 

 

 

양자역학.

그리피스의 양자역학이다. 앞부분에는(솔직히 앞부분밖에 읽지 않았다.) 오타가 군데군데 보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학부 수준에서는 상당히 좋은 책으로 알고 있고, 부교재로도 쓰고 있다. 물론 물리학과 전공자가 아닌 이상 제일 앞부분과 제일 뒷부분만 읽어도 충분할 것이다. 거기서 양자역학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리피스,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는 이야기한다. 실제적인 수식을 다루지 않는 이상 그런 이야기들은 사실 크게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말이다. 실제로 그의 말이 그르지는 않다고 본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수학은 물리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라고 말이다.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이 책에서는 바로 어떻게 이 수학을 가지고 물리를 이해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여기서 늘어놓는다, 라는 말은 연습문제, 그리고 풀이, 라는 의미와 비슷하다.)

 

 

 

양자역학.

 대부분의 대학 교재들은 모두 외국인들이 쓴 교재들이 많다. 그리고 번역도 안된 원서를 직접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를 우리나라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도리어 번역을 하니 더 이해가 안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 같은 주제에 대해서 쓴 책이 있다면 전체적인 학문의 흐름 전개나 문맥 이해에 매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고백하자면 이 책이 그런 측면에서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사실 수식을 전개하는데 무슨 언어의 장벽이 있겠는가. 내용에 대해서 내가 무엇이라고 평할 처지는 못되지만,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양자 역학이 더 쉬워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겠다. 이 책에는 정말 많은 수식이 나온다.. 그 수식의 정교함은 분명 감탄할 부분이겠지만, 아무래도 한숨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3.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파인만은 자신의 업적 중 이 물리학 강의, 1~3권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이 책은 파인만이 강의한 녹취록을 가지고 책으로 편집한 것인데, 칼텍 1, 2학년 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로 알고 있다. 하지만 1, 2학년 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라고 해서 책 내용이 쉬운 것이 아니다. 책머리에도 나오지만 처음에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가면 갈수록 학생들이 아닌 교수들이 강의를 들으러 왔다고 하던가. 1권은 고전역학, 2권은 전자기학이고 남은 한 권이 바로 양자역학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이 책은 그나마 별로 수식도 없고, 글씨도 시원시원한 것이 읽기도 편한데, 분명 읽는 재미도 있고 글에서 저자가 느껴지지만 (번역을 신경써서 했는지 유머스러움이 살아있다.) 읽다보면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한 두 부분이 아닐 것이다. 마치 파인만이 진짜 칠판 앞에 서서 '후훗, 어때? 나의 멋진 물리학 솜씨가?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어서 답답해질 지경이다. 애초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되니 말이다. 그럴때에는 다시 처음부터 막혔던 부분까지 읽어나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당장은 할 이야기가 없다.

 

 

 

 

 

 

 

 

 

 

 

 

 

 

 

 

 

 

 

 

 

 

 

 

 

 

 

 

 

 

 

 

 

 

시계방향으로부터 Liboff, shankar, dirac, gasiorowicz인데, dirac의 양자물리학 교재는 장난 아니게 어렵다, 는 말을 들었고, 마지막의 Gasiorowicz는 대학 학부에서 주교재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shankar를 대학원에서 사용한다던가..

 

 

 

이제 이 글을 맺을 때가 되었다. 먼저 밝혀두자면, 굳이 양자역학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 아래쪽의 전문적인 교재들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양자역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개념을 가지고 싶다면, 내가 제일 처음 소개한 한 권으로 충분한 양자론, 양자역학의 모험,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정도만 읽으면 된다. 그리고 과학교양서 아무 책이나 하나를 택해서 양자역학 부분만 읽으면 된다. 대부분이 거의 흡사한 말을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숨겨진 우주, 저 책을 추천하지만 사람마다 맞는 책이 따로 있으니 거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물론 효율을 따지자면 차라리 물리학과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더 효율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좀 잔인한 말이기도 하다. 사람은 효율만 따지며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할 수도 없을테고 말이다. 각자 삶이라는 것이 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호기심을 누를 수 없다면, 효율을 무시하고서라도 혼자서 무엇이든 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그야말로 양자역학으로의 초대, 이다. 여기에 소개한 책들을, 그리고 소개하지 않은 책들과 더불어 읽어나간다면 그 특이한 세계에서 우리는 흥미와 이상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읽어나가면서 점차 부딪히게 되는 것은 재능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내가 이해한 것이 정말로 이해한 것인가? 그야말로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다, 처럼 느껴지는 문장들이나 수식들을 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폴 디랙이 오펜하이머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시와 물리학이 함께 설 수 있는가? 시는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고, 물리학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와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물리학이 아니라 수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폴 디랙의 저 말은 우리가 듣기에는 사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수도 있다. 차라리 시가 더 이해가 되지 않는가? 어떻게 길게 늘어진 수식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양 옆으로 눈을 돌리면 그런 생각이 더욱 심해진다. 특히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한 번에 이해하는 사람이라도 만날 경우에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굳이 자신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모든 물리학적인 발전을 그런 사람들에게 떠맡기는게 좋지 않을까?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나 또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굳이 물리학이 아니라 어떤 철학적 개념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남은 일생동안 그들의 사상과 그들의 철학만 졸졸 따라다니며 공부할 거라면,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내세운 것이 실제로는 그들의 사상을 곡해한 거라면, 그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의 사상을 모두 접한 뒤 자신만의 이론을 세울 거라고? 애초에 그들의 사상을 다 이해할 수는 있을까? 설령 다 이해한다고 할 지라도, 그런 경우에는 제 2의 비트겐슈타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나는, 나는 무엇때문에 이런 것을 하는 것일까? 흥미 때문에? 재미있으니까? 그것 또한 답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런 흥미와 재미 뿐이라면 영영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거기서 만족하겠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고 싶다면 자신을 죽일 듯 괴롭혀야만 한다.

 

나는 흥미와 재미에 만족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이상 더 나아가지도 못한 채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마음속으로의 스승을 아리스토텔레스, 로 생각했을때부터 늘 스스로를 괴롭혀온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사람이다. 나 또한 그의 뒤를 쫓아 많은 분야들을 보고 있지만, 각 분야들에서 더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앞서 말한 물음들이 나를 붙잡는다. 내가 이해한 것이 정말로 이해가 된건가? 나는 한 발자국 더 딛을 수 있을까?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할 때마다 스스로의 자신감은 꺾여만 간다. 어느 분야에서든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혹은 나보다 더 잘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굳이 내가 그런 분야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설령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분야가 내가 좋아하는 부분과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내가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 잘 할 수 있기는 한 것인가? 나는 굳이 파고들자면, '흥미로우니까.' 정도의 이야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열등감으로 괴롭히게 된다.

 

이번에 노벨 생리학상에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존 거든, 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70이 훌쩍 넘은 나이의 그가 아직도 소중하게 가지고 있는 종이가 있다. 그 종이는 상장이나 표창장과 같은 것이 아닌 성적표이다. 성적표도 그냥 성적표가 아닌, 250명 중에 250등을 했다는, 꼴찌를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성적표라고 한다. 그를 가르친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적어도 과학자가 현재로서는 되기가 어렵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 성적표는 그 자체로 어쩌면 존 거든, 의 마음에 어느 누구의 말보다도, 그의 선생의 말보다도 더 깊게 상처를 새긴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꼴찌를 했다는 성적표는  '너는 과학자가 될 수 없어'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는 아마 스스로에게 오랫동안 물었을 것이다. '나는 과연 재능이 없을까?' 존 거든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 내 가슴을 찌른다. 그가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때 그는 저 성적표를 꺼내보며, 자신을 가르쳤던 선생의 말이 얼마나 옳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자신은 정말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이윽고 저 성적표는 오랜 시간이 지나 누렇게 빛이 바래었지만, 그 열등감, 그리고 재능에 대한 한탄은 그의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있을 것이다. 노벨상을 받은 지금은 조금이나마 풀렸을까? 그는 '흥미로 시작했던' 분야를 '잘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을까. 그 또한 내가 저렇게 번민하는 것 처럼, '나보다 더 동물생식분야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국에 그는 보여준 거다. 자기 자신만의 가치를. 내가 아니면 이 분야에서 '이 시간대의'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는 자신의 필요성을.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어느 과학고 학생이 질문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의 IQ가 낮다며, 같은 급우의 IQ가 160이 넘는데, 그러면 그런 급우를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그럴바에야 지금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그런 질문을 보았다. 사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많이 해왔고, 아무리 이런 저런 변명들, IQ는 두뇌의 일면적인 부분만 측정할 수 있을 뿐이다, 파인만의 IQ가 표준편차 16으로 125다, IQ높다고 다 노벨상 타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두뇌는 유동지능과.. 등등의 이야기를 한다고 할지라도, 내심으로는 스스로의 재능이 정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많이 가졌다. IQ테스트는 어떤 패턴Pattern을 측정하는 테스트이다. 그렇기에 뇌의 능력의 일부분만 측정한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겠지만, 주위를 살펴보라, 학문 중에 패턴이 쓰이지 않는 곳이 있기는 한가? 적어도 과학 분야에서는 이 패턴이 어떤 지식을 밝혀내는데 있어 큰 무기가 된다. 가장 단순한 도구인 대칭성을 보라, 대칭성 또한 사실은 패턴이 아닌가. 그래서 혹자는 이해한다는 말 자체가 어떤 패턴을 인지한다, 라는 말이다, 라고 말하기조차 한다. 그렇기에 아직도 나는 번민할 뿐이다.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세계' 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저 우주의 성간을 채우는 미지의 물질들의 후보 입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진실로 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저 기계처럼 받아들이고 그대로 출력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 없다. 나는 새로운 패턴을 인지할 수 있는가? 하지만 번민을 하면서도 저 존 거든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는, 그리고 그런 번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명감, 을 가져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내가 아니면 안될 거라고. 어쩌면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어떤 사상의 진보에 1mm라도 보탬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 사명감은, 어쩌면 명예욕으로도 드러날 것이고, 흥미 수준에도 그칠 것이겠지만, 끝끝내 마음 속에 품는다면, 이윽고 진주처럼 순수한 의지가 될 것이고, 이윽고 성과와 동시에 그대를 광기로 몰아갈 것이고, 나중에는 그대를 태워 재 하나 남지 않게 할 것이다. 혹은 그 성과가 오랜 시간이 지나 나타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대가, 내가 바란 것이기에 주저함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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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10-15 14:23   좋아요 0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가연 2012-10-18 00:31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2012-10-16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8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2-10-19 21:02   좋아요 0 | URL
소개했었던 양자 불가사의, 라는 책도 좋은 책..입니다..

테레사 2012-10-30 10:11   좋아요 0 | URL
와우!!! 놀랍네요...저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냥 물리학이 좋아서 이런 저런 책을 사 읽는 편인데...사실 읽고 나면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모르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맞는 듯. 읽어도 참 어려운 분야에요.추천하신 책은 제가 읽거나 읽으려고 사 둔 책이라,더욱 기분이 좋네요.. ..소개의 글도 감사합니다^^

가연 2012-11-04 16:39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답이 많이 늦었네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 요즘 흔히 말하는 SNS는 하나도 하지 않는 셈이다. 사실 이런 SNS에는 일종의 유행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서 SNS 유형의 서비스들을 살펴보아도 내가 어느 SNS도 하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는 듯하다. 이전에는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유행이었고, 그 이전에는 세이클럽이나 버디버디가 유행이었다고 여겨지는데, 나는 이 SNS의 세계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싸이월드를 제외하고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한 것을 지켜봤을 뿐이니 정말 좁은 부분을 견식 해봤구나,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SNS의 범위를 좀 넓혀서 이야기하자면, 인터넷 상으로 사교를 하는 대부분의 서비스를 이 범주에 포함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카페나 블로그도 어쩌면 SNS에 포함될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넓힌다면 나 또한 이 서재를 포함해서, 블로그 정도 (비록 이제는 거의 관리하지는 않지만) 로 SNS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사람들이 주로 SNS라는 말을 할 때 떠올리는 것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이다. 그렇기에 SNS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하려면 이 둘을 중심으로 진행시켜야 할 것이고, 이 글에서도 범위를 그 둘로 한정한다. 물론 앞서 밝혔다시피 트위터 계정도 없고, 페이스북 계정은 가지고 있지만 조금도 업데이트 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 둘에 대해서 자세히 논할 여력도 없고, 경험도 일천하다. 그러나 몇 가지 듣고, 본 내용으로 판단하자면, 이들 서비스들은 일단 블로그에 비하면 좀 더 즉각적이고, 무엇보다도 좀 더 짧은 내용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좀 더 부연하자면, 알라딘 서재나 기타 블로그에 글을 올려본 사람들은 아마 어느 정도는 느낄 것이다. 블로그 창을 열어 큰 공백을 마주하다보면, 왠지 모르게 그 공백을 어느 정도는 채워야 될 것 같은 기분을 말이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서, 짧게 글을 쓰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대개의 경우 블로그의 글은 적어도 트위터의 140자를 훨씬 상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트위터는 본디부터 짧은 글을 위해서 생긴 서비스이니 그 '트윗' 들을 살펴보면 모두 한 트윗, 길어도 서너 트윗 내로 문장이나 내용이 완결되는 경우가 많다. 내용 또한 트위터의 내용들이 더 개인적인 느낌이나 감정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여겨진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위에서 이 SNS 세계를 내려다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된 망일 것이다. A에서 시작하여 B로 향하고, C로도 뻗어나가는 그런 연결망 말이다. 그 망은 너무나 복잡해서, 순차적이지 않고, C로 향했던 것이 방향을 바꾸어 다시 A에게 되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B자신이 자신의 트윗을 돌려받기도 한다. 이 SNS 세계에서 우리는 (적어도 같은 서비스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결의 놀라운 면모는 연결된 사람들끼리의 유대를 제공한다는 측면이 아니다. 이 연결은 사람들의 양가감정,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만 동시에 자신을 숨기고 싶어하는, 또한 자신을 최대한 진솔하게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최대한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하는 그 이중성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트위터의 거친 글은 감정을 여과하지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처럼 보여주는 작용을 한다. 그 글을 다른 트위터 이용자가 보면서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트위터와 같은 도구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경우, 마치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비언어적인 표현이 중요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 내용만큼이나 그 글의 어조나 분위기가 다른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대화와 트위터가 다른 점은 우리는 대화와 달리 트위터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과장되거나, 좀 더 축소하는 등으로 변경시킬 여지가 훨씬 많아졌다는 점이다. 바로 이 부분에 이중성의 충족이 작용한다. 비언어적인 표현(트위터 어구의 어조나 분위기)은 자신의 진솔함을, 언어적인 표현(글 내용)은 자신이 숨기고 싶어하는 부분을 담당하는 식으로 말이다. SNS는 인터넷이라는 환경 아래에서 이런 방식으로 발달해왔고, 우리는 이런 SNS를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는 없을까?

 

이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은 사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이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대두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저자가 유동하는 근대, 라고 규정한 세계에서 어떻게 우리의 가치와 삶의 방향이 바뀌고 흔들리는가를 다루고 있다. 저자의 개념을 받아들여 논의를 지속시켜보면, 어떤 사람이 어느 행성에 서 있다고 하자. 예를 들어 지구에 이렇게 두 발을 딛고 서 있다고 가정할 때, 갑자기 지구의 지반이 목성이나, 토성처럼 가스 등으로 바뀌어버리거나 혹은 액체 처럼 유동성을 가진 물질로 바뀌어버린다면, 우리의 걸음은 그 전까지 걷던 걸음과는 매우 달라질 것이다. 때로는 그 물질에 먹혀버리기도 할 것이고,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하여 헤엄도 칠 것이다. 바로 그런 부분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생각을 진전시켜보자. 우리가 단독자로서 행성을 딛는다면, 그러니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 행성을 딛고 있지 않다면 다른 논의는 무의미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유동하는 물질로 덮힌 행성을 나 혼자만 딛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주위의 많은 사람이 똑같이 유동하는 물질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다. 그렇게 서로 버둥거리다가 어느 순간 손이 맞닿기도 할 것이고, 어느 순간 눈짓이 오가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가장 먼저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협동일 것이다. 이 무른 지각 위에서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서기 위해서 말이다. 협동이라고 규정짓고 보면,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저 흔들리는 유체 위의 사람들을 우리 현대 사회의 모형이라고 본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도 물론 존재한다. 유체 위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발을 딛기 위해서 겨우 상대적으로 좀 단단해 보이는 지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 그 사람을 밟고 올라가는 등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이는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도 그 이전에 협동이 먼저 일어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먼저 손이라도 맞잡아야 상대방과 함께 올라가거나, 혹은 밟고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협동이 저런 상황에서 먼저 일어날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초기 조건이 조금 변함으로써 거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카오스 이론이라고 부른다던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적용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 양식은 비선형적으로 복잡한 양식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복잡한 양식을 영위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초기에 가졌던 관계, 협동을 잊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다시 그 협동을 부활시키기에 이르는데, 그 양상은 이제 일종의 SNS 형식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렇게 단정짓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의문에 답을 해야만 한다. 어떤 점에서 현대의 SNS가 초기의 협동 관계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가? 계승했다면 어떻게 변했는가? 그리고 왜 SNS 형식이어야 하는가? 이는 이런 예를 들면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 여중생의 납치 사건과 같은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하자. 그럴 때에는 트위터의 활동들, 리트윗 등을 통하여 어떻게든 범인을 찾고 여중생을 찾으려는 노력이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초기의 협동관계가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초기의 협동관계보다 그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140자로 리트윗만 하면 우리는 정의를 구현했다는 마음과 동시에 사회에 무언가 도움을 주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사회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초기에는 협동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협동 방식의 간략화로 인하여 누구나 간단하게 협동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초기에서 변한 방식이며 동시에 SNS 형식이어야 할 이유이다.

 

하지만 저런 의문에 답을 했다고 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 지금 와서 이런 형식을 빌려 협동이 재발견되었는가? 이는 현재의 SNS의 태생과도 연결되는 문제이다. 현재의 협동은 유동하는 근대의 초기와는 그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초기에는 그 태생이 사람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기원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원을 기업과 기술에 두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운영하는 기업, 그리고 물질적으로 그 체제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서버들, 그리고 그런 서비스에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스마트폰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직접적으로 저 근본적인 문제에 답하자면 기업과 기술의 이권과 협약이 협동을 부활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이 그렇기 때문에 저런 서비스들의 활동은 모두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아까 트위터의 활동들, 리트윗 등을 통하여 사회를 바꾸려는 기획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조정환이 지은 인지자본주의, 에서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를 점거한 상태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기업이 지원하는 이 서비스는 근본적으로는 사람-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기계-사람의 형식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공장을 점거했다고 하더라도 가내 수공업이 아닌 이상은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서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더 편리해졌다. 하지만 잃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책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야기한다. 이런 트위터나 페이스북 세계가 있는 온라인 세계는 '사람들 간의 접속이 지속 되는 시간을 축소시킴으로써 접속이 무한하게 증대되고' 동시에 '인간들 간의 유대관계를 약화시킨다' 라고 말이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자. 어, 나는 트위터 팔로워가 몇 백명인데, 나는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이 정말 많은데, 그렇게 의아해할 수 있지만 그들과 나의 관계는 앞서도 지적했다시피 다른 사람보다는 나 자신의 양가감정의 충족을 위한 것이다. 이런 양가감정의 충족은 사람-사람의 관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사람이 마주보고 있을 때에는 초면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좀 관계가 진척되면 새로운 의심이 생긴다. 과연 이 사람이 어디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라고.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이나 비언어적인 표현을 잘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손해 보는 기분이 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어디까지 상대방에게 맞추어야 할 지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사람-기계-사람의 관계에서는 기존에 자신의 감정과 비언어적인 표현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상대방과 맺어지기는 쉬워졌지만 깊이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워졌다. 부연하면 더욱더 진솔함은 많아졌지만, 동시에 더욱더 숨김도 많아졌다. 이는 자연스럽게 유대관계의 약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람은 고독에 빠지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이기에 사실 이런 결론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반대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독의 속성을 잘 분석해보면 그렇게까지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SNS의 활용 때문에 고독을 누릴 시간이 없어진 것 처럼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피상적인 고독이다. 고독을 누리고 싶다면 사실 컴퓨터를 안하면 되고, SNS를 안하면 된다. 이 책에서 진정으로 고독을 언급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 보다는 어떻게 사람이 사람-기계-사람의 구성'물'이 되어 기계에 동화되어 가는가, 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기계가 될 수도 없다. 거기에서 사람은 진정한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그 진정한 고독은, 사람-사람 관계 사이의 유대관계를 갈구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변모한다. 초기의 협동관계로 정말 먼 길을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초기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동안 쌓인 경험이 더욱 사람-사람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저렇게 진정한 고독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면 온라인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잃은 유대관계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한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대답하도록 하겠다. 일전에 대학로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혜화역에 내렸을 때 왠 외국인이 돈을 조금만 빌려달라고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었고 빨리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약속 때문에 혜화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홀끔홀끔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외국인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자신이 지갑을 잃어버렸고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결과적으로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였다. 사실 나도 고개를 저으면서 그냥 지나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대사관에는 연락을 했나, 경찰에는 말을 했나 등등과 같은 질문을 하면서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른 사람들처럼 고개를 돌리고 떠나간다면 이 사람은 좋지 못한 상황에 놓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어설프게 그 사람에게 영어로 말을 하고 조금 돈을 주었다. 끝까지 갚겠다고 이메일이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 그였지만 그냥 괜찮다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그때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사실 나로서는 상대방이 거짓을 이야기하는지, 진실을 이야기하는지 당시에 주어진 정보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가 거짓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를 믿는다면, 객관적인 사실은 몰라도, 적어도 내 마음 안에서는 그는 정직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내 도움도 진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피상적인 고독을 잃어버린, 이 유동하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의 말이 의심스럽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한 알 수 없다. 근거를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가진 근거로는 상대방을 판단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를 믿는 것뿐이다. 계속 그를 의심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의 진솔함보다 그의 숨김에 더 집중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 사이의 유대를 갈구하는 그런 진정한 고독에 빠질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 발 앞서 나가서 먼저 그를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때로는 거짓말로 신음할 것이고, 때로는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신음하고 손해를 본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는 회복될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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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05 08:46   좋아요 0 | URL
가연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

가연 2012-10-05 22: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랜만이네요ㅎㅎ

2012-10-06 09:11   좋아요 0 | URL
흠, 믿어야겠군요. (믿어야 할 이유를 이보다 더 잘 쓰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가연 2012-10-06 18:34   좋아요 0 | URL
ㅎㅎ 마지막 말은 ㅎㅎ 유대관계가 회복될 거라고 믿는 수 밖에 없다/상대방을 믿는 방법으로 유대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 이렇게 좀.. 이중적으로 써놓긴 했는데, 본문에도 언급했다시피 안믿을 이유가 '없으면' 믿는 수 밖에요, 풋.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2-11-17 18:20   좋아요 0 | URL
전, 페북,트윗은 안 합니다.
한때 싸이에 한껏 열올리면서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소중함에 확실히 눈떴거든요.
그때도 그렇고 끊임없는 의심에 빠질 때마다 지옥이 따로 없더군요.
믿는 만큼 손해보는 기분도 들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 안 찍힐 만큼 조금씩 믿다보면
진실은 어느새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다는 생각으로 균형감각을 회복했습니다.

가연 2012-12-29 01:4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그렇죠.. 저도 한때 싸이를.. 답이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1.

 

 

 

 

  사람의 정신은 정말 복잡하고 미묘하기에 어떤 요인을 겪으면 당시에는 별로 이상이 없는 것 같다고 느꼈더라도 시간이 지나서 이런 저런 문제의 단초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정신에는 여러 장애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장애가 있다고 해서 꼭 정상인이 아니다, 장애인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정신의학적인 병리상태로 장애인, 이라고 불릴 만큼 장애가 있으려면 일상 및 사회생활을 하는데 정말 크나큰 지장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문제가 있어도 우리가 사회생활이나 일상을 살아가는데 큰 문제는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부연하자면, 좀 약한 정도의 정신과적인 장애는 많이들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라는 것이지요. 그 중에 특히나 우리가 많이 가지고 있는 정신과적인 질환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강박장애입니다. 보통 우리가 정신과 질환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사회적으로 좌절을 겪은 사람들에게 많을 것 같고 왠지 모르게 가난한 사람들이나 교육을 적게 받은 사람들에게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듭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정신분열병의 경우에는 사회경제적인 상태가 낮을 때 호발합니다.(물론 이는 사실 애매한 말입니다. 낮을 때 정신과적인 질환이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적인 질환이 있기에 계층이 낮아졌을 수 있습니다.) 외인적으로는 스트레스나 좌절을 많이 받게 되면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요. 물론 유전적 소인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강박증은 좀 특이한 질환인 것이, 이 강박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학력이 높거나 고지능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다른 질환과 마찬가지로 유전적 소인도 강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뇌 속의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부족 등의 요인들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학력이 높거나 고지능인 경우가 많다, 라는 내용에서 착안해보면, 거칠게 말하면 현대 사회일수록 이런 강박증이 많이 등장한다, 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로 접어들면 접어들수록 각종 교육이 의무화되어가고, 누구나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고 말이지요. 학력과잉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일수록 강박장애는 그 밝음 뒤에서 한편으로 숨어서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지요.

 

 

 

 

2.

 

 

 

 

  물론 위와 같은 주장은 엄밀하지 않습니다. 강박증이 있는 사람들이 학력이 높은 경우가 많다, 라는 것과 학력이 높은 경우 많이 생긴다, 라는 주장은 선후관계가 언제나 뒤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한 것이지요. 하지만 일단 그 부분을 접어두고 학력이 높을수록 강박증이 많이 보인다, 라는 주장을 보면, 생각보다 개인과 사회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강박장애의 진단 기준을 봅시다. 먼저, 강박사고와 강박행동이 있고, 다음으로 이것이 과도하거나 비현실적인 것을 인정하고, 생활에 장애를 줄 때 우리는 강박증이라고 부릅니다. 강박사고란 무엇일까요? 부적절하고 반복적이고 고통을 주는, 일상생활과는 관계없는 사고입니다. 그리고 불합리한 사고가 환자에게 주입당하지요. 강박행동은 무엇일까요? 강박사고를 해소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숫자를 세고 기도하고 손 씻는 등의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몇 몇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숫자를 세고, 손을 씻는다, 와 같은 부분 말이지요. 우리는 사회에서 손을 몇 번이고 씻는 사람을 보기도 하고, 남이 만진 문고리를 만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손을 씻는다거나 숫자를 센다거나 하는 행동이 정말 무의미하다는 것을 마음 깊숙이 인지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된다면 (심각한 장애라고 부를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본인 스스로가 그런 행동이 거슬리고, 심하면 좌절감까지 겪게 되는 것이지요. 그건 정말로 ‘어쩔 수 없음’ 입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의 주인공이 강박장애를 앓고 있지요. 남들이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자신 스스로는 괴로운 것이 바로 이 강박장애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갑자기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서 문이 잠겼다는 것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는 것 등은 이런 강박장애의 가벼운 증세와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측면에서는 어떤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으로 볼 때, 실제로는 별로 대단치 않고, 구성원들에게 크게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왠지 무언가 더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지 않을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지 않을까, 와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합리적이지 않은 사고로 사람들을 몰아갑니다. 사회적으로 더 높은 지위에 올라야지, 명문대에 진학해야지, 이런 사고를 주입받은 자녀는 강박적으로 명문대에 가야지, 더 높은 위치에 올라야지, 라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자각하게 됩니다. 이런 강박적인 사고가 제대로 행동으로 (결과로) 해소되지 않는다면 앞서 개인적인 강박증과 마찬가지로 심한 좌절감까지 겪게 되며 때로는 강박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고, 결국 지나친 스트레스에 못 이겨 극단적인 행위를 하기도 하지요. 이는 음식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가 강박장애와 만나게 됩니다.

 

 

 

 

3.

 

 

 

 

  우리는 수많은 음식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일부는 물론 선정적인 언론 보도 때문이겠지만, 그 중 일부는 근거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근거는 특정 음식에 대한 공포를 더욱 부추기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에서는 어떻게 그런 근거들이 특정 음식을 사람들이 찬양하게 만들고, 혹은 혐오하게 만들었는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예가 요구르트, 소고기, 우유, 비타민, 콜레스테롤입니다. 우리는 요구르트와 우유를 건강식품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어떻게 요구르트와 우유가 오늘날과 같이 건강식품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후에 어떻게 몰락하였다가 어떤 계기로 다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소고기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특히 미국산 소고기, 광우병에 대한 문제가 크게 사회에서 논란이 된 때가 있었지요. 이 책에서도 직접적으로 광우병을 다루고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부분을 할애하여 비위생적인 소고기 도축 시설과 사료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비타민을 섭취하지 않으면 몸이 허약해진다, 라는 말에 대해서도 이 책은 비판을 가하는데, 물론 비타민을 섭취하지 않으면 허약해지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비타민이 발견 당시에 그렇게 이슈가 된 것은 자본의 입김이 뒤에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콜레스테롤을 많이 섭취하면 심혈관계 질환이 많이 증가한다, 와 같은 주장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결과적으로 이 책은 어떤 음식을 먹어야 된다, 먹지 말아야 된다, 라는 것을 음식에 대한 ‘공포’ 라고 규정하면서 이런 공포는 사회 자본과 의사, 영양사 집단, 전문가들에 의하여 조장되어왔다고 주장합니다. 근거없고 막연한 공포에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런 근거 없고 막연한 공포는 앞서 말한 강박장애와 연관됩니다. 사회적으로 볼때 사람들은 일상생활과 관계가 없고, 실제로 그 본인도 불합리할 것 같다, 라고 여기면서도 남들이 따르고,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니 그런 이야기들에 사고를 주입당하여 각종 음식을 피하거나 선호합니다. 버터를 피하고 요구르트를 피하고, 혹은 그 둘을 먹고 말이지요. 저자가 말하는 근거를 보면 확실히 그럴 듯 합니다. 어떻게 영양 회사나 가공 회사가 특정 음식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그 공포로 돈을 벌었는지, 객관적인 연구를 해야 할 과학자들마저도 그 열풍에 휩쓸려 그 공포에 한 축이 되었는지를 여러 자료를 들어서 제시하고 있지요. 결과적으로 이 책은 다른 연구자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슨 음식이든지 자유롭게 먹어라, 무슨 음식을 먹어야 되고, 먹지 말아야 되는가, 그런 것은 없다. 그저 적당히 먹는 것이 당신의 건강에 가장 좋은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4.

 

 

 

 

  하지만 이 책은 방향을 잘못 잡았습니다. 방금 이 책은 특정 음식을 먹어야 된다, 먹지 말아야 된다, 라는 것을 음식에 대한 공포라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포는 실체가 없는 신기루 같은, 막연한 공포지요. 이걸 먹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에 암으로 죽은 누구누구씨 말인데, 저번에 콜레스테롤이 든 우유를 마셨대, 등과 같이 말입니다. 이 책은 시종일관 우리는 음식에 대해 어떤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은 그저 그 뒤에 그런 관념을 가지게 만든 세력이 있다, 라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그야말로 앞서 말한 강박의 정의와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각종 뜬구름 잡는 소리에 의하여 주입당한 사고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만약에 그 공포가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더 이상 그 공포는 막연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형상을 띄니 말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책은 엄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콜레스테롤의 경우, 이 책에서는 그렇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된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현대 연구 결과로는 저밀도 콜레스테롤의 섭취가 증가되면 증가될수록 실제로 관상동맥질환들의 위험률이 높아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책에서도 저밀도 콜레스테롤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짧은 부분을 할애하고 넘어갑니다. 이 책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콜레스테롤에 대한 위험이 과장되어있다, 라는 주장) 희생되어버린 것이지요.

 

게다가 이 책은 이런 입장, 음식에 대한 공포는 과장되어있다, 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한편에 오류가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고기가 도축되어 시장에 나오기까지의 그 과정이 비위생적이다, 라고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낸 도축 과정의 실체를 그려낸 책을 보고 사람들이 소고기에 대하여 반발심을 가지는 것과 대비해서 정부나 육가공 업체의 반발이 거세다, 등의 사례를 그려놓았습니다. 결국 미국 내 소고기 소비는 별로 줄지 않았다, 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사람들이 음식에 대한 ‘공포’ 를 느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도축 과정의 실체를 그려낸 책들을 보고 사람들이, ‘아, 이제 소고기 먹지 말아야지’ 라고 느낀다면 공포를 느낀 걸까요? 그렇다면 비위생적이고 세균이 가득 찬 도축 과정의 실체를 보고도, 에이 저건 과장된 거야, 책 쓴 사람이 과장을 한 거야, 라고 말하면서 소고기를 사먹는다면 음식에 대한 공포를 이겨낸 걸까요? 그러니깐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막연한 공포, 를 이겨낸 거라고 보아도 될까요? 아닙니다. 그건 어리석은 짓이겠지요. 이 책은 음식에 대한 공포를 큰 주제로 하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례를 가져와서 억지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려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그야말로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점은 책 전반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5.

 

 

 

 

  그럼에도 이 책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겠습니다. 바로 정당한 과학적 근거를 공포에 대항하여 따져보라, 라는 부분 말입니다. 일전에 우리는 광우병 사태를 겪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광우병 사태에 대해서는 사실 정부의 대처가 미흡했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그렇게 반대를 한다면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아야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그 당시 뉴스 보도를 보면서 계속 품었었습니다. 물론 어쩌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계약이 제한이 걸려있다거나 등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그 사태에서의 정부의 모습은 국민들의 불안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뒤에 이어진 여러 촛불시위들을 보면서, 그리고 인터넷을 잠식한 광우병 관련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촛불시위들은 어쩌면 일종의 광풍과도 마찬가지였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시위 자체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또한 어쩌면 바람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귀를 막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 귀를 막은 손을 내리거나, 아니면 귀를 막더라도 들리게 크게 소리를 지를 수 밖에요. 하지만 본래 시위는 ‘현 FTA로는 도저히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지 안걸릴지 과학적으로 안정성을 검증할 수 없다, 그러니 수정을 해야 한다.’ 등과 같은 주제를 가지고 진행되었어야 옳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인터넷에서는 ‘광우병은 소의 변형 프리온을 0.0001g만 섭취해도 걸리고 젤리를 먹어도 걸리고 조미료를 먹어도 걸린다, 라면 스프를 먹어도 걸린다’ 라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의식은 조금씩 격렬해져 갔었습니다. 물론 변형 프리온은 정말 끔찍한 존재이긴 합니다, 하지만 정말 저렇게 젤리, 조미료를 통해서 전파된다면 지금쯤 미국의 인구는 큰 수로 줄어들었겠지요. 떠도는 말들 중에는 생리대에 관한 말도 있었습니다. 생리대를 사용하면 광우병에 걸린다던가요. 하지만 이런 공포는 사람들을 잠식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어느 순간 정부는 저런 극독을 들여온 악의 무리가 되었습니다. 국민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사실 비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 비판을 받는 것은 억울한 일이지요. 물론 광우병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연구가 진행중이지요. 하지만 적어도 당시의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 처럼 집단적으로 인간 광우병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는 아무래도 지나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먼저 발병할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인간과 소 사이에는 종족 간 장벽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섭취를 한다고 해서 쉽게 걸리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국에서는 왜 그렇게 인간광우병이 발병했는가? 그것은 종족 간 장벽을 뛰어넘기에 충분한 독성을 프리온이 획득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독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독성은 일종의 순환 때문에 강해집니다. 처음 광우병에 걸린 소가 있습니다. 그 소는 죽어 다시 사료가 됩니다. 그러면 다시 그 사료를 양이 먹고, 사료가 되어 소에게 먹히지요. 만약에 이 소가 다시 사료가 되었다면 그때까지 남아있는 프리온은 몇 번이고 다른 동물들을 이동해가며 독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순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규모로 사육이 되어야겠지요. 당시 영국의 경우에는 양의 군집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충분히 독성을 키울만큼 순환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그 정도로 대규모 사육을 하는 반추동물군이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반추동물을 사료로 쓰는 것은 엄격히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오염된 육골분은 엄격히 규제하겠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미 발병한 것을 들여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옳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각종 안전장치와 규제가 집중해야 할 부분입니다. 다우너, 그러니깐 광우병이 발발한 소를 도축하는 것을 금지하고, SRM, 광우병 위험물질인 뇌와 두개골 등을 엄격히 규제하는 한, 오염된 육골분 사료를 없애는 한 광우병이 일어날 확률은 희박합니다. 논문들에서 언급하는 0.0001g과 같은 수치는 뇌와 척수 부분을 가지고 실험한 결과입니다. 살을 먹는다면 더욱 더 가능성은 낮아집니다. 혈액전파는 변형프리온이 존재할 수 있는 림프구를 성분 수혈을 통해 제외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대처방법들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시위는 이런 부분, 안전장치가 미국에서 제대로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검역이 제대로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광우병 시위는 이런 부분에 처음에는 집중했을지 몰라도, 어느 순간 정말 극소량으로도 걸린다고 하던데, 조미료로도 걸린다고 하던데, 와 같은 부분에 집중하기 시작해서 전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이성적으로 따져보려는 사람들을 정부의 앞잡이다, 와 같은 말로 매도하는 경우도 생겼었습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바로 이런 부분이리라 짐작됩니다. 공포는 사실 이성적이지 못합니다. 물론 두렵지만, (당시에 인간광우병에 걸리면 이렇게 된다 등의 말이 많았었지요, 대부분의 주장이 과장된 부분이 있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공포를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우리는 치매와 인간광우병의 증상을 유의하게 가려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록 이성을 찾고 근거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소고기를 계속 먹겠다면, 육식을 계속 하겠다면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선을 정할 수 밖에 없고, 우리는 그 선을 최대한 엄격하고 엄밀하게 이성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정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변형 프리온이 정말로 걱정된다면 별 수 없이 채식으로 식성을 전환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과학에서는 절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변형 프리온은 정말 소 살코기만 먹었는데 섭취될지도 모르고, 조류에게도 퍼질 가능성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닭도 먹지 못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설령 그런 것들이 사실로 다가오더라도 나중에 일어날 일, 이라는 것은 여러 연구결과를 통하여 아직 판단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장 무엇을 해야 할까요? 검역체계에 대한 감시 등과 같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겠지요. 모두가 광우병의 병태 생리에 대해서 전문가는 될 수 없지만 이성적으로 무엇이 지금 현 상황에서 가장 바람직한 일인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공포에 대항하는 이성, 그것이 이 책,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의 궁극적인 결론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부과되는 사회적인 강박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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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10월에 쓰여져야 할 글이지만 10월은 너무나 바쁜 달이기에 미리 이렇게 글을 남긴다.

 

 

 

얽힘의 시대.

이 책은 9월 신간 중 정말 최고의 책이다. 서점에서 어떤 신간이 나왔나, 그 내용은 무엇인가, 얼핏 살펴보고 지나가려던 나의 발을 붙잡아 한 구석에 주저앉히고, 끝내 마지막장까지 읽게 만든 책이다. 다시 말하지만 9월에 출간 된 책들 중 가장 뛰어나리라고 본다. 물론 이런 표현은 주관적이다. 또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정을 다른 사람이 그대로 느끼리라고는 생각못하겠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어렵기로만 따진다면 아마 레너드 서스킨드의 블랙홀, 과 같은 책이 더 어려울 것이고, 동일한 주제를 다룬 책들 중에서는 일전에 출간된 양자역학의 철학과 역사, 라는 책이 훨씬 심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과학에 관심이 있는가, 양자역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가, 와 같은. 하지만 이 책은 한 가지 지점에서 다른 양자역학을 다룬 책들과 차별점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대화의 재구성' 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사이의, 보어와 파울리 등 양자 역학의 기초를 다지며 초창기를 빛냈던 물리학자들의 서간과 실제 있었던 대화를 생생하게 살려낸다. 저자는 이 책이 첫 책으로 보여지는데, 첫 책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재구성 능력을 보인다. 책을 읽고 나면 물리학자들이 서로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라서 울려올 정도로 말이다. 특히나 고독한 방랑자 아인슈타인, 교황 보어 등과 같이, 실제 사실에 근거하여 물리학자들의 이미지를 잘 그려내며 그들 사이의 치열한 논쟁을 그려내고 있다. 너무 전문적인 내용만 다루면 독자들의 흥미를 잃는다. 이 책은 사적인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그려낸다. 이단의 물리학자, 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는 데이비드 봄에 대하여 한 장을 할애하였다는 것도 특기할만 하다. 다만 단점이라면 너무 보어를 악당처럼 그려낸 점인데, 음.. 보어가 정말 그런지는 나로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제목인 얽힘Entanglement은 한 싱글렛Siglet상태, 스핀이 반대를 향하는 두 양자쌍, 에 있는 두 양자를 따로 떼어놓았을때 한 양자에 가해지는 조작에 따라 다른 양자의 상태가 정해지는 양상을 뜻하는 용어이다. 마치 빛보다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 논란이 되어왔고, 논란이 되는 문제이다. 물론 해석에 따라 빛보다 빠르게 '의미있는' 정보가 전달되지는 않는다, 라고 되어 상대성의 원리를 위배하지는 않는다.

 

 

 

양자 불가사의

 위 책과 더불어 이 책도 함께 읽으면 매우 좋은 책이다. 양자역학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차지하는 위상은 좀 특이하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막스 플랑크의 뒤를 이어 광양자론으로 양자를 처음으로 그 통찰력으로 떠올린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문을 활짝 연 사람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반대했다, 라는 말이 많이 알려져있다. 유명한 말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라고 했던가, 이는 보어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이 한 말로 양자역학에 대한 그의 반감을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사람들에게는 알려져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도대체 그는 왜 양자역학에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썼을까? 보통 반감이 있다면 그냥 무시하는 쪽을 택하지 않을까? 왜 EPR역설과 같은 논문을 쓰면서 그토록 양자역학을 신경썼을까? 아인슈타인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정작 상대성 이론에 신경 쓴 것 보다 양자역학에 관심을 더 많이 기울였었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그렇다.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역학이라는 말을 떠올릴때 가장 먼저 드는 것은 뉴턴의 운동의 법칙들이다. 뉴턴은 자신의 이론이 현실을 가장 잘 그려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지우지 않았다. 이를 두고 우리가 역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역학은 현실을 잘 그려내고 설명해낸다. 하지만 당시 아인슈타인이 반감을 드러내고 역설을 찾아내려고 했던 양자역학은 '역학' 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너머의 진리를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현실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를. 이 책은 그런 그와 함께 양자역학에 대한 탐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천재의 탄생.

천재들은 어떤 창조력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 어떤 창조력을 가지고 있으면 천재가 될 수 있을까? 후자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동안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그렇기에 천재, 라는 인물들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왔었기도 하다. 이 책도 그런 류의 책 들 중 하나이다. 먼저 천재들의 창조성의 요소를 밝히고 각 인물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보이고 있는데,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는 그의 업적과 자라온 환경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의 창조성의 요인을 토론과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성격에서 가져온다. 아마 다른 인물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윈의 경우에는 토론과 끈기가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진화론을 성숙시킬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끈기가 말이다. 하지만 본문에서 다루는 인물들이 과연 이렇게 다루어질 만큼 천재성을 지니고 있는가, 라는 의문에 이르게 되면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예술과 과학의 도약, 이라는 부제가 붙은 2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야 정말 뛰어난 천재성을 보여주었지만..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보자. 그 또한 뛰어난 천재이지만 인류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라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그는 말하자면, 찰스 벤 도렌의 지식의 역사, 에서 잠깐 표현을 빌리자면, 실패한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정말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싶어했지만, 끝끝내 미완으로 남긴. 예술사가 최후의 만찬 이전과 최후의 만찬 이후로 나눌 수 있는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혹시 미리 만들어둔 틀에 맞추기 위해서 인물들을 고른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에 이 책은 답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를 매혹시킬 것이다.

 

 

 

칸트 미학.

 위에서 말한 책처럼 인간의 의식에 어떤 도약이 있다면, 그 도약을 소개하는데 칸트를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칸트는 그의 철학에 대한 지대한 영향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리고 그의 세 권의 책으로도 유명하지만, 미학이론에서도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미학에 대한 그의 관점을 잘 풀이해주는 책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쉬운 책은 아닐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은 쉽지 않았기에 많은 오해를 낳았고, 결국 칸트 그 자신으로 하여금 형이상학 서설, 을 쓰게 만들었다. 실천이성비판, 과 판단력비판 또한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그런데 칸트의 미학이 시작하는 지점은 바로 판단력비판, 이다. 무엇때문에 어떤 대상이 추하고 아름다운 것을 알 수 있을까, 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 이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판단에 의식을 모으면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생각은 넓게 뻗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지점에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하바라따.

사실 마하바라타(여기서는 마하바라따라고 번역되었지만 나 스스로는 마하바라타, 가 더 익숙하기에 이렇게 쓴다)를 추천하려면 바가바드 기타가 있는 6장을 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을 테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지금껏 번역된 5권까지에는 6장이 실려있지 않다. 내 기억으로는 3장까지만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던데.. 아마 차분히 나오리라 여기진다. 마하바라타, 는 이 서재에서도 두 세번 언급했지만 라마야나와 함께 인도의 2대 서사시 중 하나이다. 내부에는 사상의 정수, 라고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가 실려있는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물론 후대의 연구를 통해서 바가바드 기타는 아마 덧붙혀진 장이 아닐까, 생각되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인도인들의 상상력과 의식, 그리고 우리가 인도에서 볼 수 있었던 카스트같은 부조리의 그 근원적 뿌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이 좋다. 물론 이 책은 인도인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신화들이 그렇든 인간 본성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시간동안 갈고 벼려온 성찰이 담겨져있다. 여기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마하바라타의 악당 세력에 대한 이야기인데, 판다바 형제와 카우라바 형제의 싸움을 다루는 마하바라타에서 악역은 카우라바 형제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야말로 주인공들보다 더 주인공다운 모습들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말하는 선악의 구분은 신에게 바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마하바라타를 읽던 사람들이 주인공들을 따라서 읽어내려갔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리어 악역에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이 되리라 생각된다.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스스로가 생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 아무래도 하는 일이 과학계통이다보니 훨씬 익숙하다. 사실 내가 있는 분야는 생물학 계통이지만.. 솔직히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맨날 바쁘고 바쁜 일이다.

이제 신간평가단도 끝나가는 것 같다. 아마 나로서는 이번이 마지막 신간평가단 활동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좀 묘해진다. 딱 잘라서 이야기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번 이후에 연속해서 바로 또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쯤해서 과학책이 하나쯤 선정되면 좋겠지만.. 뭐, 언제나 그렇듯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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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29 22:06   좋아요 0 | URL
가연님의 신간소개에서 과학책을 보고 놀랐던게 생각나네요. 나는 존재유무조차 알지 못했던 책을 이사람은 어떻게 읽고싶어하기까지 할까? 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되게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을 쓸거란 편견을 가졌는데 글이 꽤 유려해서 또 감성적인 글도 보여서 감탄했었어요. 우와- 이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지? 하고 말이지요. 지금도 초속 5센티미터, 그 페이퍼가 생각나요.

가연 2012-10-01 23:43   좋아요 0 | URL
ㅎㅎ 부끄럽네요. 사실 초속 5센티미터 리뷰는 비밀의 리뷰라..ㅎㅎ 여기서 이렇게 언급하시면 부끄럽습니다?ㅎㅎ 사실 옛날에는.. 여기서 활동하기 전엔 감성적인 글을 많이 썼는데.. 요즘은 왠만하면 그런 글들을 피하려고..ㅎ 감정을 어디까지 드러내야 할까, 그런 생각도 들고.. 뭐, 곧 다가올 20000명 기념글은 좀 감정적인 글로 해볼까요, 풋.

2012-10-06 09:10   좋아요 0 | URL
초속 5쎈티미터 리뷰 숨기셨군요. 담에 한 번 더 읽어야지. 했었는데... 20000명 기념글은 숨기지 마세요~^^

가연 2012-10-06 18:37   좋아요 0 | URL
안숨겼어요ㅎㅎ 원래 제가 글은 잘 안숨깁니다, 풋. 아예 삭제를.... 선호하는 편이라...ㅋㅋ 아, 그렇다고 그 리뷰를 삭제했다는 이야기는 아니구.. ㅎㅎ 그 글을 보셨군요, 아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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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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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친애하는 마르크스 동지에게

 

 

  언젠가 동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지만,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보니 쓸 시간이 없더군요. 이제야 겨우 틈이 나서 이렇게 몇 자 씁니다. 먼저 자신을 밝히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고요? 사실 우리 공산주의를 따르는 동지들에게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저는 이름 없는 공산주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공산주의자라는 그 이름에 걸린 무게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르크스 동지가 그랬듯 말이에요. 나이야 조금 어리지만, 그런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실 처음에 동지가 쓴 책자들, 자본론, 과 공산당 선언, 을 읽었을 때는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어구가 생각나는데,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라니요. 비록 멋있게 보이는 문구라고는 생각했지만, 노동자들의 단결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는 믿지 못했고, 제 주변에서도 마르크스 동지의 이름을 이야기하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으니깐요. 게다가 마르크스 동지를 개인적으로 잘 안다고 하는 어느 사람이 하는 말에 의하면 마르크스 동지는 정작 부르주아처럼 살았다면서요? 그래서 더욱 반감이 생겼었지요. 하지만 제 눈으로 위대한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달리 먹었습니다. 아, 마르크스주의는 정말 실현이 가능하구나, 라고 말입니다. 물론 위대한 레닌 동지의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마르크스 동지가 이론적인 배경을 쌓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물론 아직까지 마르크스 동지의 심오한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이 책은 과연 저 성질 더러운 자본가놈들의 배를 걷어차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성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항상 돈이 있는 놈들은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해왔습니다. 제 옆집에 살던 이웃은 피혁 공장에 다녔었는데, 처음에는 9시간만 일한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밤낮없이 일하고 집에 오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더러운 공장주놈의 배만 채워주었던 거지요. 여하튼 어려운 것은 다 모르겠고, 우리 노동자들은 옳고, 공산주의는 옳고, 우리를 억압해온 자본가놈들은 나쁘다, 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마르크스 동지들이 저의 눈을 확실히 뜨게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2월에 혁명이 안일어났으면 저는 아마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너무 비인간적인 처사에 반발해서 파업을 일으켰거든요. 다니던 공장에서 말입니다. 그 후에 10월에 위대한 레닌 동지의 지도아래에 혁명을 제대로 일으켰지요. 우리를 본받아 이제 전세계에서 혁명이 일어나겠지요. 저 더러운 부르주아놈들이 깜짝 놀랐을겁니다. 이제 그들은 대가를 치를 시기를 맞이한 거에요. 모두가 레닌 동지와 마르크스 동지 덕분입니다. 다만 딱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는데, 마르크스 동지는 자본주의가 극에 달하면 결과적으로 자연스레 공산주의 체계로 변할 거라고 했는데, 우리가 혁명을 성공한 것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아니면.. 혹시 우리가 뭔가 잘못한 걸까요?

 

 

 

 

1917년 10월 25일

이름 없는 공산주의자가

 

 

 

 

 

 

  친애하는 마르크스 동지에게

 

 

  안녕하세요, 마르크스 동지. 아니, 안녕이라는 말이 어색하군요. 그곳 날씨는 어떤가요, 라고 물으려고 해도 마르크스 동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생전에 종교를 별로 안 좋아했던 마르크스 동지였으니 천국에도 지옥에도 있지 않겠지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사실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심지어 신학교까지 다녔었지요. 하지만 마르크스 동지의 이론을 접하고, 물론 지난번 편지에서 말했듯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가톨릭 같은 종교를 버렸습니다. 종교 같은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구원을 약속하지만, 저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지금 현재의 구원이 더 소중하거든요. 이런, 서두만 꺼냈는데도 벌써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어버렸군요. 뭐,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이 편지가 전해지면 답장 좀 해주세요. 뭐, 마르크스 동지가 있는 그곳에도 자본주의의 독이 퍼져있다면, 그 체제의 우편배달부들이 다 그렇듯 제대로 편지가 가지 않겠지만요. 하여튼 자본주의는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최근 제 주변에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답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할까, 음 가장 먼저 이것부터 말해야겠네요. 일단 레닌 동지가 죽고 스탈린 동지가 우리를 지도하게 되었어요. 저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 동지 같은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레닌 동지 이후에 우리를 이끌 사람은 군사 영웅인 스탈린 동지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탈린 동지를 위해서 엔카베데에서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지요. 아, 엔카베데는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기구입니다. 반체제 인물들을 색출해내는 기구인데, 아무래도 대놓고 활동하면 그대로 들키니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기구이지요. 제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엔카베데에 속한 이후로 수많은 불순분자들을 잡았답니다. 감히 외국 부르주아의 문화, 에스페란토어를 쓴다거나 우표를 수집한다거나 등을 향유하는 그런 녀석들에서부터 반체제 주제를 담은 시를 쓴 녀석들까지 말입니다. 특히 짜릿했던 순간은 오시프 만델시탐이라는 녀석을 잡은 순간이었는데, 아니 글쎄, 이 녀석은 우리 위대한 스탈린 동지를 비난하는 시를 썼더군요. 당장에 잡아서 굴라크로 보내려고 했는데 우리 스탈린 동지는 관대하게도 석방시켰답니다. 뭐, 결국 다른 일로 시베리아로 보내졌지만 말입니다. 그러고보면 스탈린 동지는 정말 힘들 때 지도자 역할을 맡은 것 같아요. 독일에 히틀러라는 놈이 있는데, 그 놈이 정권을 잡고는 공공연히 우리를 비난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유대인과 볼셰비키는 때려죽여야 된다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원. 주변이 이런 놈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내부의 적들을 모조리 소탕해야 되는데.. 소탕해도 소탕해도 그 끝이 보이지가 않네요. 언제쯤 스탈린 동지의 위대한 뜻을 알아줄지.. 아, 물론 레닌 동지와 마르크스 동지도 정말 위대하지요. 그럼 다음에 또 편지를 쓸 기회가 있다면, 또 쓰도록 하지요. 부디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 어디든 공산주의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고 계시길 바랍니다. 마르크스 동지 만세! 공산주의 만세! 스탈린 동지에게 영광있으라!

 

 

 

 

1938년 7월 21일

이름 없는 공산주의자가

 

 

 

 

 

 

  마르크스 동지에게

 

 

  어제 당신에게 부쳤던 두 통의 편지를 서랍에서 발견하고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흘렀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당신에게 부친다고 말만 했을 뿐, 실제로는 우체통에다가 집어넣지도 못했지요. 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죽은 사람에게 편지를 쓸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벌써 제 나이는 90살이 넘었고, 기력은 노쇠해지고 젊은 날의 열정은 시들해졌습니다. 손자 녀석이 제 서랍을 뒤지다가 엎어놓는 바람에 하게 된 책상 정리에서 스스로가 썼던 편지를 발견하고는 한참 동안 쳐다보았지요. 만약 아들 내외가 손자를 데리고 찾아오지 않았다면 영영 그 편지들은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읽어보니깐 젊은 날, 이십 대 때는 정말 열정 하나만으로 살아갔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내가 하는 이 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었지요. 아니, 이 일 덕분에 세상이 좀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음.. 좀 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지금 내가 있는 곳부터 이야기해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사실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의외라구요? 네, 저도 제가 이렇게 자본주의의 심장부에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꿈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로 사람들을 괴롭히지요. 소련을 빠져나오게 된 계기는 별로 대단치 않습니다. 뭐, 다들 그렇듯이 갑자기 소련의 현실에 눈을 떴다, 정도겠지요. 저는, 지난번 편지에서 썼다시피, 스탈린 밑에서 엔카베데 활동을 했었는데, 베리야나 예조프같은 사람이 누구를 색출하라, 라고 지시하면 탐문 수사 및 표적 수사를 하고, 그대로 수용소에 집어넣으며 그대로 따라왔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처음에는 그들의 말을 따르면 좀 더 내가 사는 삶,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삶이 나아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기계적으로 타성에 젖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를 잡아라, 라고 지시하면 그대로 따르는 삶..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제 목적마저도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처음의 진실했던 열정, 더 나은 삶을 위한 열정.. 그래서 저는 소련을 떠났습니다. 떠난 방법을 구차하게 여기서 일일이 늘어놓는 것은 웃긴 일이니 줄이고, 음.. 누군가는 이렇게 되물을 지도 모릅니다. 네가 초기에는 열정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때 그 열정을 가지고 흘린 피는 정당화될 수 있겠냐고, 부농이라는 명목으로 네 손에 수용소에 보내지고 처형당한 수많은 사람들, 별 것 아닌 것으로 꼬투리 잡혔던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는 정당화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사실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마르크스 동지는 사실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었지요, 그렇죠? 레닌 동지가 혁명을 일으킨 것은 자본주의의 끝에 다다르지 못한 러시아를 억지로 공산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어렸을 때의 나는 공산화가 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지만, 내 삶도, 다른 사람의 삶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내 손에 묻은 피만 늘어나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정당화되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말입니다. 비록 맹목적인 믿음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런 피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새기면서도, 만약 저 때 저 시기를 다시 반복하게 된다면 그래도 공산주의 혁명에 내 모든 것을 걸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습게도 자본주의의 심장이라고 할 만한 이 미국에 와서 살아보니까 더욱 더 커져가더군요. 어렸을 때는 잘 짐작가지 않던 마르크스 동지의 분석이 어느 정도 적용되는 모습을 바라보니 말입니다. 스탈린과 그 아래에 있던 베리야 같은 사람의 폭력은 눈에 보이는 폭력이지만 여기서 가해지는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폭력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다시 시간을 되돌려 공산주의 혁명에 뛰어들 일이 있다면, 아마 다시 손에 피를 묻히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여기 미국에서는 늘 이야기합니다. 소련은 오래 못갈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날고 기어도 결국 자본주의 체제를 조금이라도 흡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독이 퍼져서 결국 죽게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지금 소련은 스탈린도 죽고, 흐루쇼프도 죽고,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았는데, 그가 지금 개방정책을 펴고 있답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혼자서 자급자족하는 나라라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지 그도 깨달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렇게 개방정책을 펼치면 소련은 끝나고 말겠지요.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자본주의자들이 하는 말이 다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나는 스탈린이 이끌었던 공산주의, 스탈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니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변질시켰다, 라고 말이지요. 프롤레타리아를 가장한 부르주아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자신의 몸만 편하면 모든 게 달리 보였었으니깐요. 나도 그랬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진정한 공산주의,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분배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있는 만큼 일하는 그런 이념이 실천된다면 그런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그 옛날처럼 뛰어들고 싶네요. 하지만 지금은 늙고 병들었고, 젊었을 때의 나는 내가 따르던 공산주의가 정말 순수한 공산주의인지 아니면 변질된 것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히틀러와의 전쟁.. 미국과의 냉전.. 스탈린의 죽음. 내가 도망칠 때는 베리야가 물리학자들을 윽박지르는데 정신이 팔렸고, 스탈린도 신변정리가 어수선했기에 운이 따라주었지요. 하지만 나 이외의 탈주자들은 그런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도망쳐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트로츠키는 결국 얼음 송곳에 두개골이 파열되어 죽었지요. 나도 언제 그런 꼴이 될지 몰랐기에 숨죽여 사는 수 밖에요. 뭐, 결국 지나서 여기 미국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결혼도 하게 되고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 있네요. 여기서는 파업을 조직하지 않았냐구요? 설마요, 그랬다가는 공산당에게 눈에 띄여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지는 못하겠지요. 여기 미국에도 공산당이 있고, 크렘린이랑 연결되어있었으니 말입니다. 쓰다 보니 늙은이의 신세한탄이 되어버리네요. 젊었을 때는 두려울 것이 없었는데. 끝까지 소련이 어떻게 될 지, 살펴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내가 먼저 떠날 것 같네요.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그래도 내가 그래도 몸담았던, 그리고 이상을 위해서 노력했던 곳인데, 붕괴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분명 슬플 테니, 도리어 내가 먼저 죽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래도 설령 소련이 무너지고, 지구상에 모든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더라도.. 사람이 꿈을 꾸는 한, 다른 사람과 내가 평등해질 수 있다는 이상을 가지는 한, 다시금 나타날 거라는 예감이 드네요. 어떤 모습으로든, 돌연변이처럼이라도, 기형적으로라도. 그때가 되면 다시 동지의 이름을 찾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겠지요?

 

 

 

 

 

 

1986년 2월 12일

주세프 살리야노브

 

 

 

 

 

 

 

 

 

 

 

 

 

p.s. 주석을 좀 달까, 생각했다가.. 아무래도 자기가 쓴 글에 자기가 주석을 달자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못달겠네요. 하늘나라(혹은 지하?)의 마르크스의 답신을 쓰려다가ㅎㅎ 힘들어서.. 나중에 좀 더 이해가 깊어지면..

 

p.s. 2.  당연하게도 실제 인물이 아닙니다, 풋, 멋대로 만든 이름이긴 한데.. 괜스레 그럴 듯해 보이는 이 기분이란ㅎ  이름을 마지막에 밝힌 것과 날짜는 조금 의미가 있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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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9-20 13:55   좋아요 0 | URL
와우!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름은 혹시 아나그램? 아마도 주석을 달면 주석이 훨씬 긴 글이 될 것 같군요. 저도 어서 이처럼 좋은 리뷰를 써야 하는데, 사실 아직 1부만 겨우 읽었..

가연 2012-09-21 03:48   좋아요 0 | URL
헉, 고맙습니다. 아나그램은 생각못했어요, 풋. 그냥 책에 나오는 몇 명 인물들 이름 늘어놓고 적당히 조합해서 고쳤지요..ㅎㅎ 그루지야 인물같은 이름이 되었으면 하고 고쳤는데..(그루지야인은 100살 사는게 드물지 않다고 나오더군요, 그래서 편지에서 90살이 개연성이 있게..) 그냥 러시아인 이름 처럼 되어버렸네요, 풋. 조금 주석을 달아보려고 했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말씀하신대로 너무 길어져서 안썼답니다.

ㅎㅎ 총 5부까지 있던데.. 기한 더 필요하시면 연장 메일 써주세요. 맥거핀 님 글 잘 읽고 있으니깐요.

CYMCA 2012-09-24 10:19   좋아요 0 | URL
파트장님 11기 신간 평가단의 충용무쌍 입니다.

오늘 2권의 리뷰가운데 한권은 마감시한내로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코뮤니스트의 경우 독서할 시간이 부족해 아직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시한을 일주일만 연장해 주시면 추선연휴를 활용해 이달 말까지 리뷰를 완성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가연 2012-09-24 15:21   좋아요 0 | URL
네, 괜찮습니다. 시일 더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더불어숲 2012-09-25 19:39   좋아요 0 | URL
파트장님! <코뮤니스트> 리뷰 올렸습니다.
책은 진즉 읽었으나, 제 입장과 어긋난 관점인지라, 리뷰 마무리가 쉽지 않더이다.
평가단 하면서, 이보다 더 좋은(!!!) 경험은 없겠다 싶어요. ㅎㅎ
미리 연락 못드려 죄송해요. 봐주소서~! 즐 한가위 되시구요^^*

가연 2012-09-25 23:13   좋아요 0 | URL
괜찮습니다. 리뷰 잘 읽을께요.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ㅎㅎ

꽃도둑 2012-09-25 23:45   좋아요 0 | URL
대장님, 리뷰 급조 날조해서 급히 올렸습니다...^^

가연 2012-09-26 13:00   좋아요 0 | URL
네, 확인하겠습니다.

일개미 2012-09-28 00:47   좋아요 0 | URL
솔찍히 말씀드리면 이 서평 때문에 기가 팍 죽어서 며칠동안 아무것도 못썻어요ㅋㅋㅋ너무 좋네요. 제가 마르크스 역할 해서 답장이라도 써주고 싶은ㅋㅋ 그리고 저 방금 전에 두권 다 서평 올렸다는 것, 신고합니다.

가연 2012-09-28 18:06   좋아요 0 | URL
ㅎㅎ 고맙습니다. 부끄럽네요. 음.. 저야 사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을 읽어서 아무래도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기가 쉬웠던 것 같네요.. 좀 애매한 부분은 스탈린 평전에 더 자세히 나와있었던 경우도 있었던 것 같고..ㅎㅎ 형식은 랩퍼 에미넴의 명곡 'stan'에서 착안해서 쓴 거에요. 아마 주석을 달았다면.. 우편배달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에 '에미넴의 stan참조'라고 썼을.. 것 같은데ㅎㅎ 그 곡 가사에 우편배달부에 대한 말이 나와서ㅎㅎ 역시 이렇게 설명하는것은 좀 부끄럽네요. 이렇게 안달아도 읽는데 크게 지장도 없는 것 같고..

일개미님의 서평 잘 읽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