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아무 목적도 없이 목을 길게 늘인 채 TV 화면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프로건 상관없이 켜진 대로 무작정 보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뉴스는 잘 보지 않습니다.  세상의 끔찍한 사건이란 사건은 죄다 모아 놓고 말하면서도 무심한 듯 아무런 표정도 없는 아나운서를 볼 때마다 세상 공포영화 중에 그렇게 무서운 공포영화도 없겠다 싶어서입니다.

 

그렇다고 예능 프로를 즐겨 보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웃긴지, 어느 시점에서 웃어야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입니다.  게다가 코맹맹이 소리로 세살배기 애기 흉내를 내는 어느 코미디언의 나이를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저는 놀람보다는 공포를 느끼곤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이 스물이 넘어도 성인으로서의 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늙어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철이 드는 것인지...

 

이렇게 쓰고 보니 제가 마치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네가 된 기분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취향이 다를 뿐이죠.  저는 자연 다큐멘터리나 인문학 강의 등을 즐겨 봅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그 생생한 화면이나 놀라운 촬영 기술에 감탄하곤 합니다.   '세상 좋아졌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터지고 기술의 발달에 새삼 감사하게 되지요.

 

그럼에도 어쩌다 예능 프로를 우연히 보게 되는데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구나 느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까무룩 잠드는 낮잠처럼 들었던 생각입니다.  젊은이들이 장악한 모든 프로그램에서 출연자의 엣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자주 비교하여 보여주는 것에서 저는 '아, 이제 물질문명의 정점에 도달했구나'하고 느꼈던 것입니다.  딱히 재미있지도 않고, 앞뒤의 연계성에서 그닥 필요한 장면도 아니었는데 출연자의 옛모습을 보여주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왜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과거는 무조건 나쁜 것, 과거는 무조건 촌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기업 광고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과거를 부정하고 폄훼함으로써 현재의 수요를 창출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힘겨워 보였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자주 보게 되었다는 것, 뉴스와 비슷한 아침 프로그램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광고로도 수요를 늘릴 수 없는 기업의 다급함이요, 정부의 아우성처럼 들렸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물질이 넘쳐나는 시공간에 도달한 것입니다.  경제지표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ISM 제조업지수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지요.  미국은 그동안 수요를 늘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시장에 쏟아부었던 것일까요.  그럼에도 수요는 예전처럼 늘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했던 그런 생각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암울한 경제 전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문명의 종말과 함께 사람 냄새 나는, 사람다운 세상이 오려나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내가 쓰지 않는 물건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푸근한 미소를 덤으로 줄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제 꿈이 너무 야무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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