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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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맞는 맑은 하늘을 보니 기분도 덩달아 좋아집니다.  그동안 미세먼지 때문에 목도 칼칼하고 눈도 따끔거렸는데 말입니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셔 봅니다.  소중한 것은 언제나 한 뼘 곁에 있다는 어느 책의 제목처럼 무심히 지나치던 것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하루입니다.  밝아진 기분으로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었습니다.

 

몇 장도 채 읽지 않았을 때 살그머니 떠오른 책이 있었습니다.  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입니다.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  제 딴에는 좋은 책이라는 평가를 내렸던 듯한데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다시 떠오르는 걸 보면 제 평가가 과히 틀리지는 않았나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보다는 김소연의 <마음사전>이 더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강신주의 감정수업>이 별볼일 없는 그저 그런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책의 성격상 그렇다는 것이죠.  아무튼 두 책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감정은 세세하기 때문에 명명될 수 있지만, 기분과 느낌은 명명이 불가능하다.  감정이 한 칸의 방이라면, 기분은 한 채의 집이며, 느낌은 한 도시 전체라 할 수 있다.  감정은 반응이며, 기분은 그 반응들을 결합하며, 느낌은 그 기분들을 부감한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중에서)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17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인 스피노자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철학사를 이끌어 온 주류 철학자들의 관심은 대개 인간 이성에 관한 문제였기에 스피노자는 어쩌면 주류에서 벗어난 '변방의 철학자' 내지는 '철학의 이단아'라고 해야겠습니다.  저자도 스피노자의 그런 점에 끌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스피노자는 자신의 책 <에티카> 3부에서 인간의 감정을 크게 48가지로 분류하였고, 그와 유사한 감정들을 비교하였는데,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 시대에 감정을 중요시 하여 자신만의 철학적 논지를 주장하였던 걸 보면 그의 용기가 대단했었나 봅니다.

 

아무튼 저자는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 만한 문학 작품을 통하여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정의를 내렸던 여러 감정들을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철학적 명제는 설명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저와 같은 일반인이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참 친절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못내 아쉬웠던 점은 제 독서력이 일천하여 소개된 책 중에 미처 읽어보지 못했던 것이 많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하여 이 책에서 짧게 소개하고 있는 문학 작품의 줄거리에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책의 소개가 너무 빈약하여 감질이 났다는 것이죠.

 

"특히 내게 고마웠던 것은 위대한 작품이란 어떤 특정한 감정의 아우라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가르쳐 준 48명의 위대한 문학자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배웠다.  위대한 문학은 하나의 감정을 깊게 파고들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반대로 말해 위대한 작품은 하나의 감정이라는 자장에 모든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포섭시킨다는 사실을."    (p.516 '에필로그'중에서)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처럼 현대인들은 자신의 감정마저 누군가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주입된 것임에도 자신의 것인 양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연민’이나 ‘동정'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여자들, ‘질투'를 사랑의 증거라고 오해하는 남자들, ‘경멸'과 ‘멸시' 속에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들…   자신의 감정을 세밀히 관찰하여 그 기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밝혀내지 못한다면 자신의 삶을 어찌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논리는 있으되 감정이 없는 현실, 소통은 있으되 공감하지 못하는 현실, 친밀감은 있으되 마음으로는 가까워지지 않는 현실, 예의는 있으되 존경하지 않는 현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삭막하다'고 평하는 이유는 간단해 보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억압하는 환경에서 성장하여 어른이 된 후에는 감정의 실체마저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첫 단계는 다른 무엇보다도 공감하는 능력의 배양일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문학 작품보다는 자기계발서에 탐닉하는 이유도 공감하는 능력의 저하로 보아야 하겠지요.  '소통은 없고 불통만 있다'고 꼬집는 어느 정치인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것인 양 느낄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그런 논평은 더 이상 듣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없이 맑은 날입니다.  이 충만한 기쁨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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