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아직 새였을 때 시공 청소년 문학 10
마르야레나 렘브케 지음, 김영진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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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에 앉아 읽을 만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소란스럽지 않아 귀를 기울이면 마치 꽃이 피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이다.  마르야레나 렘브케!  발음하기 쉽지 않은 작가의 이름이다.  1945년 핀란드에서 태어난 작가는 연극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 가 뮌스터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고 한다.  핀란드 작가의 책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울창한 숲과 크고 작은 호수를 떠올리게 하는 나라.  어쩌면 핀란드식 사우나와 잘 갖춰진 교육제도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야기는 "내게는 '돌이 새였다.'고 생각하는 동생이 한 명 있었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과거형의 문장이다.  읽기도 전에 짠한 슬픔이 밀려온다.  동생의 이름은 페카.  제왕 절개로 태어난 동생은 합지증과 사시가 있었고 머리는 비딱했다.  보통 사람과는 조금 특이하게 태어난 아이.  동생은 헬싱키의 어린이 병원 '라스텐린나'로 보내졌다.  라스텐린나는 핀란드 말로 '어린이 궁전'이라는 뜻이다.

 

"'제왕'이니 '어린이 궁전'이니 하는 말은 우리에게 굉장히 신비스럽게 다가왔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아이들만 사는 궁전을 그려 보았다.  그 궁전에는 딸기처럼 빨간 실크 드레스를 입은 어린 공주들과 이끼처럼 푸른 벨벳 바지에 진짜 진주알이 반짝이는 하얀 조끼를 받쳐 입은 어린 왕자들이 살고 있을 것 같았다."    (p.8)

 

페카는 2년 동안 어린이 궁전에 살면서 여러 번 수술을 받았고, 걷기 시작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페카는 걷지 않고 언제나 바닥을 기어만 다녔다.  어느 날 바닥에 떨어진 고기 조각을 삼킨 페카는 다시 병원에 가야 했고, 그 이후 페카는 다시 두 발로 걸었으며 말도 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페카. 페카는 가족뿐만 아니라 자기가 앉는 의자와 자기 침대, 양말과 양탄자, 할머니의 앞치마와 엄마의 냄새, 그리고 아빠의 수염도 사랑했다.

 

"난 숲을 사랑해.  난 자작나무를 사랑해.  전나무랑 소나무도 사랑해.  그 나무들은 향이 좋으니까.  그리고 나는 꽃도 사랑해.  꽃은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알록달록하니까.  풀은 초록이라서 사랑하고, 버섯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사랑해.  나는 다람쥐랑 개구리랑 애벌레도 사랑해.  하지만 내가 진짜 사랑하는 것은 새랑 돌이야.  왜냐하면 돌도 옛날엔 새였거든."  (p.14 - 15)

 

특별했던 페카도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페카의 친구들은 페카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 학교 뒤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던 도중에 누군가가 페카를 밀어 우물에 빠기도 하였고, 손목시계가 탐나서 주인 몰래 집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다음 날 페카는 시계 주인에게 시계를 돌려주었으며,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미안하단 말은 걔 듣기 좋으라고 했을 뿐이야.  그래야 누나가 좋아할 테니까.  하지만 난 사람들 기분 좋으라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러면서 페카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p.42-p.43)

 

바다에서 수영을 배우다 잔뜩 물을 먹은 페카가 내뱉은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페카는 '물고기가 울어서 바다에 소금이 녹아 있다'고 했다.  가난했던 페카의 부모님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페카뿐만 아니라 페카의 누나와 형들 그리고 페카의 동생들은 모두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날 날만 기다리던 중 페카가 아팠고 의사는 백혈병이라고 진단했다.  부모님은 이민을 포기했고 떠날 준비를 하느라 이미 살던 집도 팔았던 부모님은 결국 시골로 이사를 했다.  학교도 그만두게 된 페카는 그곳에서 부모님이 기르는 닭과 돼지와 놀았고, 나와 산책도 하거나, 동생 시오나를 돌보기도 했다.  웃지 않는 시오나를 웃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페카 뿐이었다.  부모님은 페카를 치료하기 위해 신선한 간과 간유, 그리고 철분 약을 먹였고 페카도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는 듯 보였다.  가족들은 페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번 아날리사가 페카에게 물었다.  "넌 언제 죽니?"  페카는 이마를 찡그리면서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했다.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그때나 죽을 것 같아."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고, 페카의 엉뚱함과 특이함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선사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p.95)

 

그러나 페카가 백혈병에 걸렸다고 진단했던 의사는 나중에 오진이었음을 시인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 페카를 위해 소를 한 마리 선물했다.  그 소가 송아지를 낳았고, 얼마 후 페카의 동생 '야코'도 태어났다.  어느 날 내가 핀란드 일주를 계획하고 여행을 떠날 때 페카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볼 거니까 또 만나자고 인사하는 거야.  내가 죽을까봐 겁낼 필요 없어.  누나, 내 생각에 난 절대 안 죽을 것 같거든.  난 돌이 됐다가 새로 변할 거야.  밤이 돼서 달이 뜨고 그래서 슬픈 생각이 들면 지금 내가 한 말을 기억해.  그리고 혹시 돌에 맞더라도 겁먹지 마.  그건 막 새가 되려는 돌일지도 모르니까."    (p.127)

 

페카는 그 뒤로 여러 해를 더 살았고 곂국 가족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가족들은 작은 돌을 찾아서 '네케민'이라고 쓰고 페카의 무덤 위에 올려 놓았다.  네케민은 핀란드어로 '또 만나.' 라는 뜻이다.  

       

마르야레나 렘브케는 장애를 결코 불행하다고 쓰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짠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큰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쓴 작가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쓴 또 다른 작품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었다.

 

행복은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는 외롭고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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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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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미리 밝혀둬야 할 게 있다.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이 책의 저자이면서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썼던 밀란 쿤데라를 좋아한다.  나는 그의 작품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반긴다.  그 정도로 좋아한다면 어떻게 서평을 쓸 수 있느냐고?  아니다.  쓸 수 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믿어도 좋다.  그러나 단 한가지, 내 서평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는 없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대상에 대한 맹목적이고 노골적인 찬사와 미화가 없다면 진정한 팬이 될 수 없을 테니까.  아무튼 나는 밀란 쿤데라의 팬으로서 이 글을 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가수 싸이를 좋아하는 열혈팬이 있다고 치자.  그(또는 그녀)는 그가 알고 있는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싸이에 대해 세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것임에 틀림없다.  설령 상대방이 노래에 관심도 없고, 더구나 싸이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또는 그녀)는 그런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싸이가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 음악 장르, 요즘 나온 신곡 등과 함께 강남 스타일의 작곡가와 안무, 반주 등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하려 들 것이다.  듣는 상대방은 어찌 되느냐구?  글쎄, 때에 따라서는 많은 지식을 얻게 될 수도, 또는 지루한 대화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등을 돌릴 수도 있겠다.

 

<소설의 기술>은 독자에 따라 그 평이 천차만별일 것이라 짐작한다.  소설을 쓰는 실무자로서(게다가 그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가 아닌가!) 그가 밝히는 소설에 대한 여러 담론들과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의 기법들이 그의 작품에서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그리고 유럽의 문화적 배경(또는 문학의 역사) 속에서 현대의 소설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그의 어시스턴트인 살몽과의 대담 형식으로 또는 에세이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이 생각이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자면 많은 사전지식이 필요하다.(그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밀란 쿤데라는 거장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고, 그의 지식은 끝이 없어 보이는 반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의 지식이 형편없음을 그를 통해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은 소설에 대한 설명서나 이론서가 아니기에 일반 독자의 얄팍한 지식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

 

"제 소설에서 자아를 포착한다는 것은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포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실존적 약호(code existentiel)를 포착한다는 거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쓰면서 이런저런 인물의 약호가 몇 가지 열쇠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테레자에게 그것은 육체, 영혼, 현기증, 허약함, 목가, 낙원 같은 것들이죠."    (p.48)  

 

이 책의 3부에 등장하는 "<몽유병자들>에 관한 단상들"은 소설가로서의 쿤데라가 얼마나 치밀하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통하여 지금의 위치에 올랐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 ,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손꼽히는 3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철학 소설이 아닌가.  그럼에도 작가는 일반 독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해력과 분석을 통하여 현대 소설의 개괄을 곁들여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소설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을 법한 이러한 분석들을 읽으면서 그의 능력에 또 다시 감탄해 마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대충 넘기려했던 장면들을 곰곰이 되새기게 된다. 

 

쿤데라는 “소설은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탐색”하는 것이며 소설가란 역사가도 예언자도 아닌, 단지 “실존의 탐구자”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소설은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는 실제를 통하여 소설 속에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쿤데라가 보여준 놀라운 면은 4부 "예술의 구성에 대한 대담"에 있다.  소설의 구성이 그저 작가의 우연적이고도, 선험적인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쯤으로 알았던 독자라면 그가 밝히는 구성의 체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 더 소설과 음악을 비교해도 괜찮겠죠.  한 부는 박자예요.  각 장은 하나의 소절이고요.  이 소절들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또는 길이가 아주 불규칙하지요.  이것은 우리를 템포 문제로 이끌어 갑니다.  제 소설들이 각 부분에는 모데라토, 프레스토, 아다지오 등과 같은 음악적 지시가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p.128) 

 

이 책의 6부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에서는 작가가 좋아하는 단어들에 대해 사전식으로 배열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자신의 소설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오류(이를테면 작가가 생각하는 의미와 번역가가 생각하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오류)를 줄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된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셈이다.

 

마지막 7부에서는 "예루살렘 연설:소설과 유럽"이 실려있다.  연설문에서도 소설가로서의 그의 자부심과 소명의식은 잘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 유럽 문화가 위협받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가장 소중한 것, 즉 개인에 대한 존중, 개인의 독창적 사고와 침해할 수 없는 사생활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안팎으로 위협받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유럽 정신의 소중한 진수는 마치 금고에 보관된 것처럼 소설 역사 속에, 소설 지혜 속에 보관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224)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작품으로만 만나는 일반 독자에게 있어 한 작가의 생각과 자신이 쓴 작품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그럼으로써 우리는 소설가로서의 쿤데라와 한 인간으로서의 쿤데라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셈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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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3-03-24 22:10   좋아요 0 | URL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꼼쥐 2013-03-28 13:46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이응준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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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처럼 흐리고 간간이 비가 내리는 날엔 무력한 갈증이 비둘기처럼 내려앉는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때론 터질듯 부풀어오른 기억의 풍선들이 약한 빗방울에도 '펑펑' 소리를 내며 의식의 빈 그릇에 소나기처럼 쏟아지기도 한다.  그리곤 금세 걸쭉한 수프처럼 엉긴 기억의 잔해들은 의식이 스쳐갈 때마다 펄펄 끓는다.  뒤죽박죽의 기억들이 몽글몽글 끓어 넘칠 때면 기포와 함께 원추형으로 봉긋 솟았다가 '폭'소리와 함께 터져서는 이내 공기중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꽃샘 바람과 함께 흩뿌리던 봄비 속에서 의식의 밑바닥에 눌어 붙은 기억의 알갱이들을 한움큼 건져 올렸다.  그리고 이응준의 소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을 읽었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날씨와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작가가 있다.  나는 쌀쌀하게 굳은 하늘을 보며 아침부터 이응준을 생각했었다.  얼마 전에도 그의 작품<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을 읽었으면서도 말이다.  그의 뿌리 깊은 우수와 텍스트를 관통하는 죽음에 대한 집착은 오늘 같은 날씨에는 더할 수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이야기의 출발은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다.  과장된 슬픔이 언뜻언뜻 스칠 때마다 거식증 환자의 토사물처럼 움찔움찔 뒤로 물러나게 했다.  이틀 후면 처음 갖게 된 '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나는 이삿짐을 싸고 있다.  책장을 들어내자 실먼지에 휘감긴 채 발견된 묵직한 노트 한 권.  나는 먼지를 쓰다듬듯 털어내고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읽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그들과 내가 있었고, 그들과 내가 나눈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들과 나를 슬프게 만든 청춘과 운명이 있었고, 우리의 배경에서 끝없이 내리던 함박눈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색 바랜 일기는 자신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 더 먼 기억까지 기어코 불러와 기묘한 악몽의 만다라를 완성하고 있었다."    (p.14-15)

 

그해 겨울, 모든 것을 잃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원했던 해군에도 신체검사에서 입대면제 판정을 받았던 내가 직행버스를 타고 무작정 떠나 다다른 곳은 서울 근교의 대학가인 가합동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카페 '하늘밥도둑'의 주인 '산타 페'를 만난다.  유명 미술대학 조소과 출신인 그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저는 인물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를 가진 그와 보이지 않는 상처를 지닌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가까워진다.  미친 이모의 벗은 알몸을 보고 황혼의 극단적인 아름다움을 목격했다는 '싼타 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같은 과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무튼, 나는 녀석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어쩌면 하나도 아는 게 없었을 수도 있지.  체질적으로 녀석은 쓸데없는 관념들에 정의 내리기를 좋아했어.  아까 말했듯이 사랑이란 뭐다, 죽음이란 어쩌고 저쩌고다, 라는 식으로.  나는 그런 녀석을 볼 때마다 내심 감탄하곤 했지만, 마음 한편에선 뜻 모를 불안감이 소리 없이 고이곤 했어.  놈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 불안감이 무엇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지만 말이야.  나는 결심했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에 정의를 내리며 살진 않겠노라고.  너구린 너구리고 곰은 곰인 거지.  쥐는 쥐고, 비버는 비버인거야.  그러면 인생은 간단해지거든.  자살 같은 건 어리석은 일이지.  미친 짓이야.  없는 단어들에 관해 두툼한 사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불쌍한 법이야."    (p.108-109)

 

나는 '싼타 페'와 어울리며 '나그네들만 주인인' 그곳 가합동에 서서히 적응해간다.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대학의 명물인 '물귀신'을 만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미저리'도 만난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수인.  그녀는 야구를 좋아했던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그녀는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야구용품을 모두 불사르고 환상만 좇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털어낸다.  그리고 얼치기 대학생활을 청산하고 장사라도 해보겠다며 대학을 떠난다.

 

수인이 떠나고 나는 며칠을 앓아 눕는다.  내가 앓고 있던 사이 '미저리'도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배경처럼 그칠 줄 모르고 내리던 눈이 거짓말처럼 개인 어느 날 아침 '싼타 페'는 자신이 발견했다는 '아름다운 길'과 그 길에 있는 '이름 모를 나무'를 보여주겠다며 나를 잡아 끈다.  그곳에서 나는 그 '이름 모를 나무' 밑에 내 상처를 묻고 돌아선다.

 

첩의 자식이었던 나는 유난히 젊어 보였던 어머니 손에 이끌려 열 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다.  네 살 터울의 배 다른 형제 인하를 만났고, 밀교의 사제처럼 형을 존경했던 나는 형이 지녔던 아픔과 그로 인해 벌어진 모든 일들이 운명이었다고 수긍한다.  탐욕에 이끌려 모든 것을 잃고 허무하게 죽었던 아버지와 병으로 죽은 형의 여자 친구, 그리고 형과 자신의 어머니의 정사 장면을 목격한 이후 형의 자살.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처럼 흘러갔음을 인정한다.

 

"지난 일은 그냥 지난 일이다.  상처가 남았다고 하지 말자.  상처는 '우리'라는 거대한 대륙에 놓인 작은 늪이나 웅덩이 같은 것일 뿐이므로.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는 상처지만, 높고 푸른 하늘 위에서 자유로운 새처럼 내려다보면,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상의 한 풍경일 수도 있으려니.  나는 아프게 흘러갔던 지난날들이 내 마음의 하구에 얼마나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삼각주를 만들어놓았는지를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잃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그것이 내 불행의 전모였다."    (p.270)

 

이 작품은 작가의 나이 스물여섯에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앞부분에선 슬픔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 과도하게 표출되는 듯 싶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투의 관조적인 자세로 서둘러 끝을 맺는다.  그럼에도 소설 곳곳에서 읽을 수 있는 시적 표현과 무리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에서는 작가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건 다 슬프기 마련이라는 작가의 주장처럼 그도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나 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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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 - 그가 구한 것은 동물원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The Earth)’였다!
로렌스 앤서니 지음, 고상숙 옮김 / 뜨인돌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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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딱 십 년 전 오늘이었어.  TV 화면에선 밤하늘을 가르는 녹색 섬광이 마치 불꽃놀이를 하듯 번쩍였고, 스포츠 중계를 하듯 과한 아드레날린으로 새된 목소리의 기자는 밤하늘의 별이라도 떨어뜨릴 듯이 날카롭게 외치고 있었지.  화면 밖으로 기자의 더운 입김이 뿜어져 나올 듯한 밤에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먼 나라의 소식을 아무런 감흥도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전쟁은 허무맹랑한 이유와 함께 시작된다.  그것은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의사와는 무관한, 안락 의자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는 명령권자의 몫이었다.

 

작전명 '이라크의 자유(Fredom of Iraq)'!  그것이 비록 2001년 9.11 테러에 대한 미국의 복수에서 비롯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무자비한 폭력은 전쟁광 부시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충분했다.  그는 이제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그 전쟁에서 사망한 13만 4000명의 민간인에 대한 사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그때의 기억을 회색빛의 어슴푸레한 실루엣으로만 남게 했다.  먼 나라의 얘기였고, 먼 과거의 기억일 뿐이라는 듯 이라크의 사막에도 지금쯤 작열하는 태양이 그때의 기억들을 거둬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의 희미한 기억을 되새기며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를 읽었다.  님이프리카공화국의 환경보호운동가 로렌스 앤서니도 나처럼 CNN의 뉴스를 보고 있었나 보다.  수류탄 파편에 맞아 두 눈을 거의 실명한 사자 마르잔을 보았다고 했다.  나라면 그저 무심히 지나쳤을 그 한 순간의 장면이 그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걸 이유가 되었나 보다.  사람의 목숨도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전쟁터를 향해, 그는 오직 동물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사지를 향해 달려갔다.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현장에서 버려진 물건처럼 나뒹굴던 동물들을 그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나 보다.

 

"나는 이라크에 온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단지 동물들을 구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우리 지구에 더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인 기준, 윤리적인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러한 깨달음과 더불어 나는 우리가 모범사례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류가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를 존중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누군가 책임감 있는,나아가 영향력 있는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천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는 곳이 바그다드라고 여겼다."    (p.156)

 

모두가 이라크를 빠져나가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쿠웨이트에서 빌린 렌터카를 타고 이라크로 들어가려는 백인 남자.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동물원의 모습은 처참했다.  벽의 일부는 폭격으로 무너져 있었고 남은 벽에는 수많은 총격의 흔적들이 있었다.  전기도, 식수도, 식량도 끊긴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파리 떼와 썩어가는 사체들로 시궁창이 된 바그다드의 동물원은 그야말로 지옥의 모습이었다. 우리에 갇힌 동물들은 오직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저자는 당시 광경을 보고 차라리 총을 하나 사서 동물들을 하늘나라로 고이 보내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앤서니는 자비를 털어 동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고, 오물과 사체를 치우고, 약탈자들을 막아내며 사막에서의 끔찍한 날들을 겪는다.  그의 진심이 통했는지 바그다드의 동물원 식구들이 목숨을 걸고 그를 도왔고, 안타까운 현실을 차마 지나칠 수 없었던 많은 군인들과 기자들의 도움으로 동물원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전 세계에 그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구호품과 구호자금이 속속 도착했고, 그는 사담 후세인의 아들 우다이가 기르던 사자들을 구출했고, 위험천만한 지역 아부그라이브에서 사담 후세인이 기르던 아라비아 종마들을 무사히 동물원으로 데려오는 등 6개월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동물원은 정상을 되찾았다.  그리고 2007년 7월 17일, 바그다드 동물원은 다시 문을 열었다.

 

바그다드에서의 노력과 공로를 인정받아 남아공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엔으로부터 '지구의 날 메달'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그때의 경험 이후 '지구 기구'라는 환경.동물보호단체를 운영하게 되었다.

 

"내가 바그다드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문명화된' 인간이 야생동물을 그렇게까지 끔찍하게 학대하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악행이 지구에 가해지고 있을까?  우리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종이 멸종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의 멸종은 곧 먹이사슬의 중요한 고리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중략)...자연이 지구, 그리고 그에 의존해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와 이렇게 역동적인 관계를 맺게 되기까지는 수십억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런데 단 100년 만에 그 균형이 깨질 위험에 봉착한 것이다.  지구의 생태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범인을 지목하는 손가락은 모두 한곳, 즉 인간을 가리키고 있다."    (p.334 - 335) 

 

바그다드의 작은 동물원을 구한 것처럼 지구라는 거대 동물원을 구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진심을 이해하는 많은 사람들의 연대만이 위기에 처한 지구 동물원을 구할 수 있다.  그 선택은 오직 인간의 몫이다.  전쟁과 탐욕으로부터 지구 동물원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종말을 행해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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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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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정호승 시인의 또 다른 작품인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를 읽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읽다 말았다.  나는 이런 종류의 책 - 전해 내려오는 명언이나 명구에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한 권의 책으로 엮은-에 약간의 거부반응이 있다.  어찌 보면 가장 편하고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 말이다.

 

여기에는 책에 대한 나의 편견이 한몫 하고 있다.  책이란 모름지기 기억에 오래 남아야 하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의 효용성 내지는 실용성 중심의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런 종류의 책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 머릿속에 남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몇몇 문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는 술술 읽히지만 읽고 난 후에 남는 것이 없거나 빈약하다면 도대체 뭐하러 책을 읽을 것이며, 흘려 보낸그 시간이 마냥 아깝다고 느껴지지 않겠는가.

 

독서의 효용을 지극히 중시했던 이러한 태도는 내 삶의 전반을 지배한 듯하다.  어떤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 하거나 그 사실만을 도드라지게 보이려 했던 나의 태도는 지금에 와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읽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강박은 그 시작이 지적 허세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결국에는 책의 내용이 내 몸에 체화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공부를 해도 공부한 바 없는 듯이, 우물 속에 내린 눈이 스스로 녹아 없어지듯이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는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럼으로써 인간이라는 나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p.85 - 86)

 

정호승 시인은 공부를 '담설전정(擔雪塡井)' 하듯이 하라고 하였다.  '무엇을 하더라도 눈을 짊어지고 우물을 메우는 것처럼 하라'는 뜻이다.  공부가 자신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공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내가 퍼다 날른 눈이 우물물에 스르르 녹듯이 드러내거나 많이 아는 듯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동안 나 스스로를 경쟁이라는 거대한 줄에 줄을 세운 격이었다.

 

며칠 전에도 대구의 한 고등학생이 투신 자살을 했다.  이제는 하도 만성이 되어 특별한 소식으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인터넷의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몇몇의 젊은이들이 동반 자살을 했다는 소식도 잊을 만하면 들려오곤 한다.  때로는 경제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달려오는 지하철에 몸을 던지는 중년의 가장이나 삶을 비관하여 아이들과 함께 투신하는 어머니도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자살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쁨과 위안을 안겨주는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자신의 삶을 그처럼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을까?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지 않는다. 봄날에 피는 꽃을 한번 보십시오.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지 않습니다. 꽃을 피우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그대로 방황하지 않고 열심히 삽니다. 누가 보든 말든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하늘을 향해 피어 있다가 때가 되면 시들어 열매를 맺습니다.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의 존재 또한 그가 만일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P183)

 

누구의 삶인들 고비가 없었을까?  그것이 작든 크든 우리는 그 고비를 만날 때마다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며 지나간다.  그리고 먼 훗날 그때의 추억을 거리낌 없이 말하곤 한다.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조차 되지 못하는 문학의 무용론, 그 가운데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자책이 아니었을까?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먹먹해집니다.  남의 일 같지 않고 마치 '오늘도 내가 자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그들의 자살을 통해 내 생명의 무게나 가치조차 가볍고 무가치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럴 리 없겠지만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지면 나도 그들처럼 자살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p.461)

 

시인은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아픈 이들을 향해, 벼랑 끝에 선 모든 위태로운 사람들을 향해 가슴을 열고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려는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가슴에는 촉촉히 비가 내리고 꽃샘 바람도 부드럽게 흐르는 듯 느꼈다.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고 외치는 시인의 목소리가 허망하게 들릴지라도 삶의 고통을 꿋꿋이 참으며 살아가는 생존의 현장을 보면 우리는 한번 더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 곁에서 등이라도 토닥이며 '다 괜찮아'라고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삶의 계절은 언제나 봄날일 것이다.  생명이 가득한.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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