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의 시 104
박정대 지음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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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의 시를 읽으면 아련한 슬픔이 묻어나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나만이 느끼는 주관적 감정일 수 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  그것은 시인과 내가 겪었던 추억의 공유, 적어도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느꼈던 막막함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정선에서, 나는 고한에서, 산들로 둘러싸인 육지 속의 섬과 같은 곳에서 자랐다.  석탄 트럭이 굉음을 울리며 도로를 질주하고, 인생의 막장과 같은 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악다구니를 쏟아내는 곳.  삶은 생각만큼 아름답지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부모의 한숨 소리에 설핏 잠이 깬 그 순간에 배웠다.  생존본능의 포로였던 아이들은 전혀 아이답지 않았고,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슬픈 매질이 내 영혼에 문신처럼 남았다.

 

4 만항재

아무리 달려도 이정표가 나타나지 않아 뒤돌아 보면 좁은 산길 아래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나무들의 물결, 허공의 바다를 털털거리며 지난다.  갈매기 한 마리 날지 않는 이곳은 전생에 무슨 바다였나.  길이 좁아질수록 생각은 날아가고, 길이 험해질수록 더욱 깊어지는 그리움의 계곡, 엄나무들은 엄숙하게 머리를 길렀지만 식솔들 이끌고 산 중턱까지 와서 정착한 낙엽송, 참나무 이주민들.  아무리 달려도 너에게 가는 길은 보이지 않아 어느새 다다른 하늘 밑, 침묵은 끝나지 않고 바람 끝에 매달려 와서 끝내 만항재, 해발1,330m라고 씌어진 곳에서 불어가는 음악, 페루, 나비, 바람. 

 

5. 음악, 페루, 나비의 경계를 지나서

오래도록 꿈꾸던 것, 그것을 나는 만항재에서 본다.
만항재는 음악과 페루와 나비의 경계선. 이 경계선을 지나면
음악만이 남을 것. 그때부터 나는 눈을 버리고 음악을 얻을 것.
그리고 당신이 어느 날 참 많이 어두워져서 그때부터 음악소리 들린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이름이다.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中에서)

 

그랬다.  만항재를 넘으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전나무 숲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정암사와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수마노탑. 

황동규 시인은 태백에서 만항재를 넘어 몰운대로 차를 몰며 이렇게 읊었다. 

고개가 가파르다./자장율사가 진신사리 봉안했다는 정암사 가는 길/그도 헐떡이며 넘었으리라./앵앵대는 소형차를 길가에 그냥 내버리고 싶다./가만, 자장이며 의상 같은 쟁쟁한 거물들이/경주, 황룡사, 부석사를 버리고/ 왜 강원도 산 속을 방황했을까?//왜 자장은 강원도 산골에서 세상을 떴을까?/입적지 미상의 의상도 행려병자가 아니었을까,/이곳 어디쯤에서?/가파른 언덕을 왈칵 오르자/해발 1280m의 만항재./태백시 영월군 정선군이 서로 머리 맞댄 곳./자글자글대는 엔진을 끄고 차를 내려 내려다보면/소나무와 전나무의 물결/가문비나무의 물결/사이사이로 비포장도로의 순살결/저 날것,/도는 군침/

 

태백시에서 만항재를 넘으면 바로 고한이다.  석탄산업의 부흥기였던 7,80년대에  고한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넘쳐났었다.  그 주변 지역은 다 그랬다.  전국의 사투리가 모두 모여 새로운 사투리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그 억센 사투리를 시나브로 닮아갔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마스크와 헬멧을 쓰고 막장에서 꼬박 8시간을 일했다.  요새와 같았던 유배지에서 돈 벌어 도시로 나갈 꿈을 꾸었던 사람들, 그러나 천형과 같은 광산일은 대를 물려 이어지고, 지친 사람들은 '잊혀진 곳에서 잊혀질 곳으로의 비상'을 기다렸다.  도로도, 집도, 심지어 냇물까지 검었던 그곳에서 오직 산과 하늘만 푸르렀다.  봄이면 태백산맥을 넘은 높새바람이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날리고, 겨울이면 방 안의 물도 꽁꽁 얼었던 그 혹독한 지역에서 철마다 아이들은 태어나고 또 그렇게 질긴 목숨을 지켜갔다.

 

박정대 시인은 그 매섭던 바람의 끝자락을 닮았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그의 시는 때로는 긴 호흡으로, 때로는 순간에 정지한 채로 자연을 모방한다.  그 시뮬아크르의 세계는 현실의 벽을 자유자재로 넘어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태백준령에서 자란 소년이 간절히 바라던 그 상상의 세계로.  높은 산맥을 따라 점점이 흩어진 가난한 마을들, 그 육지 속의 격렬비열도엔 음악 같은 눈이 내리고 눈처럼 고운 꽃가루가 흩날리기를...  중년의 시인은 아린 손마디처럼 절절한 꿈을 꿈 속에서도 바라나 보다.

 

나는 삶이 봄바람처럼 느슨하다 느낄 때 박정대의 시집을 읽는다.  그의 슬픔과, 꿈과, 음악과, 나비로 사라지고픈 불멸의 잔상과 먼 이국의 어느 섬과, 사람들.  시인의 눈에 촛불처럼 흔들리는 삶.

 

10 밤의 여행자들

........

허공에다 당신은 매일 간절한 키스를 한다. 그 입맞춤이
대지의 가슴에 닿아 그곳에서 아름다운 나무들이 태어나기를,
그 나무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느 날 당신은 창밖에 환하게 핀 앵두꽃을 보고
밤이 어디론가 사라진 줄 알았다.
당신은 그 꽃을 보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때로는 음악이 된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매일 밤마다 촛불을 켜 들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中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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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개정판
한강 지음 / 열림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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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백지처럼 하얘진다'는 표현은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종종, 솔직히 말하면 자주 쓰게 된다.  오늘도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떠오르지 않는 생각을 쥐어짜며 이 말을 했었다.  이렇듯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둘러보아도 우리가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내가 진부하다고 놀리면서도 '백지처럼 하얗다'는 말을 자주 쓰는 것과는 달리, 독서 과정에서는 가끔, 아주 가끔은 맘에 쏙 드는 작가를 우연처럼 만날 때가 있다.  진부하지만 전혀 진부하지 않게 느껴질만큼 세련된, 일상에서 흔하디 흔한 말인데도 전혀 새로운 말을 쓰는 그런 작가를 만나면 괜히 긴 손편지라도 써야할 것만 같다.  '한강'은 내게 그런 작가 중 한사람이다.  가볍고 일상적인 글들이 낙엽처럼 깊게 쌓이면 나도 그녀처럼 오래된 토담벽처럼 허물없이 자연스러운 글줄이나 쓸 수 있으려니 하는 헛된 꿈을 심어 준 작가도 그녀였으니 따지고 보면 나는 그녀의 팬이라고 자처하기도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말이다.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그리고 <노랑무늬 영원>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줄곧 소설쓰기에만 매달렸었다.  마치 그녀에게 소설은 그녀의 삶이자, 생명인 것처럼.  이 책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그녀가 쓴 두번째 산문집이다.  그녀가 쓴 첫번째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그에 얽힌 추억들을 다룬, 그리고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하여 음반으로 만들기까지 한, 어찌 보면 소설가의 취미생활과 같은 책인 반면에 이 책은 그녀가 아이오와 대학이 주최한 국제창작 프로그램(IWP)에 참가함으로써 만나게 된 사람들의 스케치이다.  즉 미국 아이오와시티에서 체류했던  석 달 반 동안 그녀가 만났던 세계 각국의(주로 제3세계의) 작가들과 그녀가 겪었던 경험들을 다룬 일종의 소품과 같은 책이다.

 

"그날 저녁 마흐무드와 나는 부슬비를 맞으며 헌책방 순례를 했다.  몇 권의 책을 서로에게 사주었고, '초원의 빛'이라는 이름의 단골 책방 2층에서 옷을 말리며 케이크를 들었다.  "사랑이 아니면"하고 마흐무드는 중얼거렸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네 살 때 이스라엘군에게 고향을 잃은 뒤 청년 시절에 두 번 투옥되어 4년간의 옥살이를 했던, 그 뒤로 10여 년간 망명생활을 했던 그는 덧붙여 말했다.  "사랑 없이는 고통뿐이라구."  "하지만 때로는"하고 나는 반문했다.  "사랑 그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나요?"  마흐무드는 생각에 잠겼다.  "아니지.  그렇지 않아."  그의 음성은 숙연했다.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지.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  사랑 그 자체는 그렇지 않아."  그 말을 꺼내기까지 마흐무드의 눈앞을 스쳐간 여인들의 얼굴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그녀들과 보냈던 시간, 나누었던 밀어, 무수한 입맞춤과 어루만짐을 모른다.  다만 그가 그 여인들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 그때마다 순정을 다했으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다시, 마흐무드 中에서)

 

작가는 자신이 보았던 그들의 몸짓, 표정, 그들의 말과 표정 하나하나를 담담하게 쓰고 있다.  사랑은 그렇게 호들갑스럽거나 유난을 떨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임을 믿는 듯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주장할지라도 작가만큼은 마음 속으로 조용히 '사랑은 그만큼 은근한 것'이라며 입술을 깨무는 듯하다.  두꺼운 유리창을 통하여 바라보는 무음의 세상, 세월이 거둬간 습기만큼 파삭파삭해진 그때의 추억을, 그저 스쳐지나간 사람들일 수도 있었던 그들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오늘처럼 겨울비가 내리는 날에 낙엽처럼 부스러지는 그녀의 추억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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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 사소한 아이의 소소한 행복
최강희 지음 / 북노마드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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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답다'는 말은 2인칭의 평가인 동시에 1인칭의 결심이다.  그렇게 구분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결속과 연대를 강화하는 쪽으로 발전한다.  현대인이 점점 더 외롭다고 느끼는 것은 피상적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구분할 수 없는 '하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쌍둥이처럼 닮은 사람들이 강남대로를 어깨를 부딪히며 걷고 있을 때,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어쩌면 그림자가 사람들을 끌고 가는지도 모르겠다.  내 곁에 나와 다른 어떤 사람이 존재한다는 느낌, 분명 다른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의 푸근함, 내가 아니면 그가(또는 그녀가) 내가 지닌 불안감을 날려줄 것이라는 믿음, 동시대의 잔혹함과 아직 닥치지 않은 위기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은 거울 속의 나에게서는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가 아닌 나이고자 하는 노력은 너를 위한 작은 배려요, 오직 '나'들만 가득한 망망대해를 향해 내가 보내는 구조신호다.  그러므로 나는 '너'라고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그를(또는 그녀를) 만나면 반갑다.  이 책의 저자인 배우 최강희는 그런 의미에서 누구 스럽지 않은 몇 안 되는 배우 중의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인기를 등에 업고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책을 발간하는 연예인들을 보면 사실 좀 구질구질하고 구차스럽지 않은가.  맘에 안 들면 안 읽으면 된다고?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연예인이 쓴 책은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러나 최강희의 책은 다르다.  그녀는 나와 다른, 또는 당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확실히 '너'라고 인정할 수 있는 배우라는 것을 그녀가 낸 이 책(포토 에세이)을 읽고 알았다.

 

"기분이나 감정엔/유통기한이 있는 것 같아.//감정을 끊임없이 되새겨내야 하는 게/내 일이긴 하지만.//웃음엔,감정엔,기분엔 분명히/유효기간이 있는 것 같아.//그러니까,모두./행복할 수 있을 때 행복하기로...//     (P.185)

 

4차원 소녀, 최강동안, 강짱, 골수천사 등 참으로 다양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지만 그 무엇도 그녀 자신을 오롯이 설명해주지는 못하는 배우.  언제부턴가 '아, 이거 너무 좋아!'라는 게 없어져서 무엇을 듣고 보아도 감동이 없고 무감각해졌단다.  그때 김C가 준 시규어 로스(Siguar Ros)의 DVD를 보고 아이슬란드에 흠뻑 빠졌었단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입은 아이슬란드의 전통 스웨터부터 색이며 자연이며, 모든 게 그녀를 매료시켰단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슬란드로 떠났고 꿈만 같은 5일 동안 책 한 권 분량의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이 책에는 아이슬란드에서 찍은 사진과 그녀의 생각을 담은 짧은 글들이 빼곡하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글과 사진들이 마치 살아서 떼구르르 구를 것만 같다.

 

"매일 매일/어떠한 결심을 만들고,/지우고,/또 결심을 하고.//미워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또 눈물을 닦고,/애써 웃는 모습을 지어보이고...//또 다른 결심을 하고.//그치만 언제나 휘청이는 쪽은/대단한 결심을 해대는 쪽인 걸.//어쩌면/무엇도 결심하지 않는 쪽이//어쩌면/ 무엇도 포기하지 않는 쪽이//어쩌면/마음을 수없이 열고 닫아/삐거덕거릴 바에야/그대로 방치하는 쪽이...//    (P.198 "놓아주기")

 

때론 잡으려 하면 무너지는 것들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다고, 우리는 서로의 그것들을 바라봐줄 차례라고 그녀는 말했다.   지난 2007년 백혈병 환자를 위해 골수를 기증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기부천사'라고 불리는 그녀, 이 책의 수익금 전액도 미혼모 시설과 환경보호 단체에 기부했다고 한다.

 

"내가 지구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너를 약속한 시간에 만나고 싶어서야."    (P.190)

 

그녀에게선 삶에 있어서는 누구나 초보인 숙명적인 아픔이 전해진다.  우리는 그것을 '화~'라고 부르자.  다시 한 번 "화~"라고 외치면 화한 박하향이 나지?  가벼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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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양철지붕 아래서
오병욱 지음 / 뜨인돌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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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글은 어차피 좋은 삶에서 비롯되는가 보다.  이 단순한 진리를 오늘 또 다시 깨닫는다.  그러나 단순한 진리일수록 지키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일상의 번잡함은 삶의 영롱한 진리들을 금세 물리치곤 한다.  너무나 맑고 단순하기 때문일까?

 

이 책의 저자인 화가 오병욱은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미술이론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강남의 잘나가는 갤러리에서 3년간 큐레이터로 일하던 1990년 어느 날, 할머니 혼자 살던 시골의 빨간 양철지붕 집으로 내려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대문 밖 골목길에는 가로등 하나 없고, 시골로 내려온 지 8년 넘게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고, 한겨울에도 찬물에 설거지를 했으며, 재래식 변소를 가려면 큰맘을 먹어야 했단다.  북향마을에 북향집이라 겨울엔 춥고, 양철지붕이라 여름엔 한없이 덥고, 차를 사기 전까지 두 시간에 한 번씩 오는 버스를 타고 장을 보러 다녔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잠깐 소풍을 나온 듯 가볍게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15년을 살았다.  사람들은 우리 부부가 수많은 갈등과 인내와 눈물의 바다를 건너온 걸로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렇게 힘든 줄 모르고 살았다.  어떻게?  잠깐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다.  어렵고 불편하고 괴로운 생활을 15년씩이나 억지로 참고 견딜 수 있을까?  우리가 무슨 대단한 수행을 한다고, 내가 무슨 불굴의 투사라고 그 세월을 참아내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단점을 뜻밖에도 쉽게 받아들였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우린 그저 '잠깐 소풍을 나온 것처럼 가볍게' 살았던 것이다.  아내는 그걸 '소꿉장난'이라고 표현했다."    (P.122)

 

이 책에서 작가는 화가의 예리한 관찰력과 자연에 동화된 순수한 감정으로 일상을 그리고 있다.  마치 마른 낙엽에 싸락눈이 톡톡 튀기듯 탱글탱글한 일상이 눈에 보일 것만 같다.  대문 앞에 달아 둔 우편함에 딱새가 둥지를 튼 이야기, 양철지붕 위로 감 떨어지는 소리, 비오는 저녁 강 건너편에 아른거리는 불빛, 구수하고 훈훈한 시골 이웃의 인심과 에피소드, 삶과 그림 사이에서 고뇌하며 한때 신비주의자로 살았던 젊은 시절 등 여러 이야기들이 감칠맛 나게 펼쳐진다.  한때 시인을 꿈꿨던 작가의 문장력이 전업 화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입에 착착 감긴다.

 

"살구꽃이 아직 채 피지도 않았는데 벌들은 벌써 급하다.  마구 날개를 휘저어 바쁘게 날아다니면서 빨리 꽃이 열리라고 주문을 외고 마술을 건다.  그래서인지 벌들이 날기 시작하면 살구꽃은 금방 핀다.  꽃잎이 열리면서 향기는 연한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간다.  향기는 다시 벌을 부르고 벌들은 채 피지도 않은 꽃잎을 마저 열어젖힌다.  그윽하고 푸른 봄밤일수록 맑은 향기는 더욱더 멀리 퍼져나간다.  햇살이 좋은 봄날 아침에는 꽃이 만발한 나무 아래에 서 있어 볼 만하다."    (P.163)

 

창의성을 요하는 예술가라면 도시보다는 오히려 시골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도시에서는 아무래도 시골에 비해 소재가 궁하다.  겉돌기만 하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그날이 그날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시골에서의 자연은 매일매일이 다르다.  그 속에서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할 수 있겠다.  다만 이것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교감일 때만 그렇다.  도시에 살다 귀촌한 작가의 책을 가끔 읽곤 하는데 다들 비슷비슷한 내용인지라 웬만큼 인내력을 발휘하지 않고는 다 읽어내기가 어려웠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몸과 마음으로 시골에 동화된 사람의 글과 머리와 눈으로만 스케치하듯 쓴 글의 차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문장력이 좋은 작가라고 할지라도 진심을 담아내지 못하면 독자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오병욱 작가는 프로 글쟁이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눈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눈의 성긴 입자가 소리를 흡수하는 까닭에 눈이 올 때는 오히려 평소보다 고요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눈 오는 소리란 결국, 눈이 내리는 고요, 눈이 쌓이는 침묵, 혹은 눈이 덮이는 적막 같은 게 아닌가.  남정네들은 천둥 간은 제 코고는 소리도 못 듣는데, 아낙네들은 눈 내리는 고요를 듣는다니..."    (P.204)

 

오병욱의 산문집을 읽은 덕분에 내 눈에 끼었던 백태가 사라진 듯하다.  오늘 낮의 하늘처럼 맑고 청명해진 느낌이다.  선연한 핏빛 노을과 서늘한 산그림자, 깔깔대는 아이들 웃음소리와 깊은 한숨소리, 청아하게 들리는 딱다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와 짙은 우울이 묻어나는 비둘기 울음소리, 그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고운 선율을 지어내는 그곳이 그립다.  그곳에 가면 흐릿했던 일상의 모습들이 벚꽃처럼 분분히 날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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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한빛비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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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나는 '십년병'에 걸렸다.  얼마나 생뚱맞은 병명인가?  그 '십년병'이란 게 증상이 어찌나 고약하던지 시도 때도 없이 울적해지고, 하릴없는 사람처럼 서성이게 하고, 넋 나간 사람처럼 시선을 모으지도 못한다.  서른에도 그랬고, 마흔에도 그랬다.  이건 순전히 내 탓이 아니다.  누군가 정해놓은 주기에 나 자신도 세뇌되다시피 물든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어려서부터 뼛속까지 깊게 병이 든 것을.

 

마흔이 넘으면서부터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노후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도시에 사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깊은 수심에 빠져 한숨을 내쉬곤 했다.  딱히 대책도 없으면서(어쩌면 처음부터 대책은 숫제 없었거나 익히 알고있으면서도 모른체 했을 터였다) 일부러 지어낸 고민을 두고 두어 시간 술잔을 기울였다.  그럴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결론처럼 내놓는 말이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지 뭐'한다.  얼씨구나 '농사나'라니.  그들에게 농사는 태어날 때부터 뚝 떨어진 기술이거나 언젠가 책 속에서 읽었던 어줍잖은 낭만이렷다.  하기사 그런 낭만은 언제나 별보다 더 먼 거리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닿을 수 없는 먼 것이라도 한번쯤 욕심을 내는 일이야 뭐 어떨까.

 

그래서인지 이것저것 다 버리고 시골로 내려간 사람들을 보면 여간 부러운 게 아니다.  사실 우리네 같은 도시내기들은 '도시'라는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아니던가.  돈 때문에,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의료나 문화 때문에...  이유도 제각각이지만 죽을 때까지 도시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기에 넋두리 삼아 내뱉는 말 속의 시골은 어릴 적의 추억이나 닿을 수 없는 희망의 동의어 쯤으로 들린다.

 

장석주의 <마흔의 서재>는 나의 꿈처럼,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친구의 꿈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읽으면 읽을수록 부러움만 쌓인다.  호수와 버드나무 군락이 내려다보이고 고라니와 족제비가 수시로 출몰하는 산자락 아래 고추밭을 밀고 집을 짓고, 삽살개를 키우며 산다는 작가는 도시내기에게는 꿈이요, 로망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텃밭에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와 앵두나무를 심고, 뜰에는 모란과 작약과 영산홍을 심었으며, 해마다 대나무를 구해다 심고, 연못을 파고 물고기를 기르며 수련을 키웠다니...  그렇게 열세 번의 가을을 보내며 마음공부 삼아 노자와 장자를 읽고, 물을 바라보며 시를 쓰고, 오솔길도 걸으며 명상을 하고...

 

지천명의 작가는 마흔이 되는 후배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 보고 살아갈 날들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 책 속에서 지혜를 찾으라는 뜻이다. 3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매일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작가에게 독서는 삶이요, 더할 수 없는 기쁨이였을 터였다.  그러나 돈과 실용을 찾는 마흔의 현대인은 인생의 청맹과니요, 삶의 천둥벌거숭이가 아닐 수 없다.  작가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으리라.  그러나 삶은 이제 겨우 반을 지나쳤을 뿐이다.  남은 날들을 후회없이 살아가기 위해 마흔엔 그 어느 때보다도 서재가 필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그 지적 공간에서 라디오에 맞춰 춤을 추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친구에게 시를 쓰고, 무엇보다 더 열심히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책을 통하여 일생의 멘토를 찾고,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며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사색 속에 자신을 유배하라고 말한다.  삶의 의미를 찾고 목표에 집중하며 늘 깨어있는 삶.  누군가를 탓하지 말고 자연에 순응하며, 가진 것을 나누고, 자신의 삶을 예술적으로 가꾸는 노력.  작가의 당부는 끝이 없을 듯하다.

 

"예술가들은 고요와 고독을 좋아하는 족속들이다.  관습에 길들여진 '개'들의 세상에서 끝끝내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늑대'로서 살아가는 자들이 예술가이다.  그들은 무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단독자의 삶을 꾸리고, 그런 삶의 태도를 하나의 본질로 고착시키는 재능을 보인다.  그들은 무리에서 내쳐지는 것을 감사하고 불행을 지복으로 삼는다.  우리가 배워야 헐 것은 무리에 감염되지 않는 것, 오히려 단독자로서 무리를 감염시키는 바로 그 재능이다."    (P.309)

 

내가 매 십 년마다 '십년병'을 앓았듯, 나는 내가 속한 무리에게서 삶을 배우고 감염되었고, 내가 아닌 그 누구로서 평생을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 '앓이'에서 벗어나려 한다.  나를 비우고 그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 한다.  텅 빈 고요가 삶의 궁극으로 이어져 있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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