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기출문제집 2 - 대한민국 이십대는 답하라 인생기출문제집 2
박웅현 외 15인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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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획일화, 코드화에 반대한다는 데 있다.  합리적인 원리, 규칙, 질서, 코드 등에 강하게 반발함은 물론 때로는 비틀거나 부숴버린다.  이른바 '해체(deconstruction)'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비단 예술이나 철학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다.  기존의 모든 질서로 인해, 그것에 비판없이 순응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우리 사회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나아가서는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가고 있지나 않은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나는 중,고생들의 공부를 돌봐주면서 그런 의문을 강하게 품을 때가 있다.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경쟁과 줄세우기의 학습방식은 분명 아이들을 기존의 틀에 순응하고 반항하지 못하도록 길들이는 데에는 무척이나 효과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10대는 한 해에 446명이 자살해 10만 명당 6.5명'에 달하고(2009년) 같은 해 15∼19세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10.7명에 이르는데 과연 우리나라를 정상적인 나라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의 기성세대는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런 현실이 화가 나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병들면 젊은이들이 제일 먼저 열을 내게 되어 있다.  3ㆍ1만세운동에서도, 4ㆍ19혁명에서도 그랬고, 5 ㆍ18민중항쟁에서도 그랬다.  만일 젊은이들이 정의감을 잃고 화를 낼 줄 모르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병든 몸이요 희망이 없는 공동체일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화를 잘 내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해열제와 얼음찜질에 익숙해서 그럴까?"    (P.155)

 

『인생기출문제집』제2권은 연예인, 예술가, 언론인, 종교인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인정받는 명사들이 우리시대 청춘들에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질문을 던진다.  정답은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배우 김여진, 광고인 박웅현, 방송인 노홍철, 만화가 최규석, 종교인 김인국, 영화인 양익준, 기자 이진숙, 그리고 빈민운동가 마쓰모토 하지메, 인디고 서원을 운영하는 허아람 등은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과 초조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 책을 읽는  젊은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하다.  그것이 우리 기성세대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행했던 모든 폭력과 착취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글을 쓴 모든 이들의 속죄의 표현일 수는 있겠다.

 

"우리, 그러니까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된다.  충고, 조언도 우리가 할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고통을 짐 지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때만 해도 나같이 머리가 별로 좋지 못한 사람도 운 좋게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보다 훨씬 머리가 좋고 능력이 있는 친구들도 먹고사는 게 녹록지 않다."    (P.229)

 

나는 중학교 무렵부터 '학교를 그만 다니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6남매의 다섯째였던 나는 어려운 가정형편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학교만큼은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악착같이 공부하여 장학금으로 대학까지 마쳤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다.  이제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내 인생을 되돌아 보며 하나 결심한 게 있다.  "배가 불러서 그렇다."는 말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은 아이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우리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 중에 그 말보다 더 폭력적인 말을 알지 못한다.  육체적으로 배가 부르다고 없던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재미와 소명의식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아이에게 그 말을 할 때는 '나도 배고팠으니 너도 배고파야 한다'는 기괴한 논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불안을 증폭시키면 시킬수록 비례하여 체제 순응도는 높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 기성세대는 현실의 냉혹함을 과장하여 말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에게 없는 재능을 쥐어짜는 느낌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은 아이가 다 성장하여 웬만큼 밥벌이를 할 때 쓰게 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는 잔혹할 정도로 냉정하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감히 모험을 시도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올가미에 걸린 셈이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것은 예술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종, 국적을 막론하고 전세계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한계에 속수무책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여러분 중에도 혹시 먼저 포기하고 물러서는 분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한계는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인정하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나의 이야기를 읽었다면 차별, 한계, 제약 등이 얼마나 볼품없는 껍데기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껍데기들에게 순순히 당신의 알맹이를 내어주지 마십시오.  과감히 그것들을 제치고 나와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직 나만이 듣고 말할 수 있는 언어라면 당신을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P.328)

 

우리 주변의 젊은이들 중에는 가상현실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서서히 파괴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소위 '게임폐인'이 그렇고, '은둔형 외톨이'가 그렇고, 공부만 하는 지독한 '공부벌레'가 그렇다.  우리 기성세대가 그들을 탈출구 없는 화마 속에 그들을 가두고 한발짝도 나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는 척한다.  한 국가의 미래는 반항하는자의 열정에 의존하며, 각기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에 의존하며, 꿈꾸는 자의 자유에 의존한다.  우리는 그것을 철저히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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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드 라이프 - 손으로 만드는 기쁨, 자연에서 누리는 평화
윌리엄 코퍼스웨이트 지음, 이한중 옮김, 피터 포브스 사진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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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 개발에 많은 돈을 쓰면서도 스스로를 문명화되었다고 한다.  일종의 자기기만인 이 위선은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위선'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숙에 이르는 첫 단계인, 우리 스스로를 진정으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런 점에서 끊임없이 경계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한 대가이기도 하다."    (P.170)

 

둘째형은 손재주가 많은 편이었다.  언젠가(확실하지는 않지만 내가 초등학교 6학년쯤이었을 것이다) 겨울에 형은 내게 나무로 스키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형과는 다르게 손재주라고는 전혀 없었던 나는 형이 하자는 대로 지켜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가 살던 강원도에는 11월이면 눈이 오기 시작하여 3월까지 녹지 않았는데 활동적이었던 형은 긴 겨울 동안 집 안에서만 지내는 것이 못내 갑갑했던 모양이다.  형과 나는 톱과 낫을 들고 눈밭을 헤맨 끝에 어른 팔뚝보다 굵은 물푸레나무 두 그루를 잘라 산을 내려왔다.  눈 쌓인 산을 헤매느라 신발과 양말은 속까지 다 젖었고, 허술한 목장갑도 매한가지였다.

 

꽁꽁 언 두 손과 발을 녹이는 동안 우리는 엄마와 누나의 잔소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베어 온 나무를 어떻게 다듬을 지 궁리하느라 건성으로 대답만 '응,응'하였다.  그렇게 손을 녹인 후, 앞집에서 대패를 빌려 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다.  젖은 나무를 다듬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더구나 켜지도 않은 원형의 나무를 송판처럼 얇게, 그리고 면과 두께를 고르고 일정하게 하기란 대패질에 서툰 우리에게는 무리다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우리는 쉬지도 않고 온 종일 매달려 앞이 둥근 판재를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하였다.  다음은 이제 나무가 뒤틀리지 않도록 말려서 앞부분을 둥글게 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깎은 나무를 빛이 들지 않는 광에 며칠을 두어 제법 말랐다 싶었을 때 장작불 위에서 나무를 구으면서 앞을 휘느라 진땀을 흘렸다.

 

생각보다 모양새는 제법 그럴 듯하게 보였다.  우리가 만든 나무 스키에 신발을 묶을 끈을 고정하는 것으로 모든 공정이 마무리되었다.  형과 나는 그렇게 만든 스키와 함께 폴대로 쓸 바지랑대를 몰래 들고 집을 나와 뒷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스키는 잘 미끄러지지 않았다.  박닥면을 제대로 다듬지 않은 까닭이었다.  우리는 맥없이 산을 내려와 사포로 면을 다듬고 그 위에 양초를 수차례 발라 면에 광택을 냈다.  우리는 그 해 겨우내 바지랑대가 다 닳도록 스키를 타며 놀았다.

 

형은 그 후에도 외발 썰매며, 쇠구슬을 박은 팽이며 갖가지 놀잇감을 직접 만들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떤 일에 그때처럼 집중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워했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형과 나는 벌써 아이들을 키우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야 했던 그 때에 비하면 세상은 분명 살기 좋아지고 편리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전보다 더 공허해졌고 뭔가 근본에서 멀어진 것 같고, 우리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때에 기계문명의 시스템을 거부하고 실험적이고 새로운 삶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핸드메이드 라이프>(A Handmade Life)를 쓴 윌리엄 코퍼스웨이트(William Coperthwaite)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그는 메인 주 북부 해안에 있는 농가에서 소박한 삶을 추구해 온 교사이자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이자 작가다. 소로, 간디, 디킨슨, 니어링 부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거의 아무것도 사지 않고 필요한 것은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자연 속에서 땅에 사는 모든 생명과 건강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하나에 역사와 땀과 애정이 깃든 물건을 사용하고, 동력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땔감을 만들고 풀을 베고, 배를 저어가서 장을 보아 오고, 자신이 살 집은 손수 짓는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삶을 통해 실천하고 있다. 코퍼스웨이트는 한 개인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기계문명의 편의와 편리만 좇아 근원적인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 교육의 의미와 직업, 검소함과 배려 등 우리가 인간으로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가치있는 방식에서 너무나 멀리 와버렸는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그런 방식을 까맣게 잊은 채, 자식들에게, 그리고 그 자식의 자식들에게 삶의 고통과 폭력적 자기 착취의 방식만 전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저자가 원시적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손으로 직접 삶을 디자인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디자인하며, 바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생명에 대한 존경과 배려를 잊지 않는 삶, 그것은 꿈도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우리는 그것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졌다.  그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온 탓일까?

 

"오랜 세월 동안 비폭력의 삶을 살고자 한 사람들은 분노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주의자'나 '순수주의자' 혹은 '완벽주의자'나 '이상주의자'라는 딱지가 붙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 두려워서 더 큰 포부를 품지 못하고 있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비폭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해주거나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한번 얹어주는 일이다.  온전한 삶이란 것이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다 하더라도 붙잡으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P.162)

 

이 책은 저자의 삶과 철학을 담고 있지만,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작가의 주장이 명확해진다.  1.삶을 디자인하다, 2.아름다움, 새로운 시선, 3.일과 밥벌이의 즐거움, 4.배움과 가르침, 5.비폭력, 정중한 혁명, 6.자발적인 가난함, 7.자연을 닮은 소박한 삶, 8.평생 작업을 찾아서.  작가가 말하는 '디자인'은 물건의 형태가 가지는 기능성과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소박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 행위도 포함하고 있다.  즉 디자인은 사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 태도 및 삶의 방식을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디자인에 우리의 노력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핸드메이드'는 단순히 물건을 직접 만든다는 뜻을 넘어 내 손으로 만드는 인생, 내 손으로 만드는 새로운 세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온전히 경험하는 모든 행위는 내 가족과 이웃과 전 인류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나아가서는 우리가 사는 지구 전체의 모든 생명을 착취하거나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어야 한다.  그렇게만 살 수만 있다면 삶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도 그런 삶을 배우고 자신의 삶을 즐길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 형과 함께 나누었던 경험을 중년이 된 지금까지 잊지 못하듯 아름다운 기억은 오래도록 그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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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의 경제학 - 부의 파괴시대에 생존대책을 제시하는 세일러의 경제 전망서
세일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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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과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분야를 접할 때 잘못 생각하는 점은 모든 과학이 자연과학처럼 엄정한 질서와 필연에 의해 이루어지고, 어떠한 인위적인 요소도 개입할 수 없는 것처럼 맹신하는 데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 분야의 학문적 이론과 토대는 통계에 의존한 추정일 뿐이지 자연과학처럼 진리에 가까운 이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어떤 이론을 인용함에 있어 자신의 논리 전개에 유리한 특정분야만 발췌하여 설득력을 얻는 경우도 허다하다.  왜냐하면 어떤 이론의 총합은 학자들의 영역이지 개인적으로 그 이론을 충분히 숙지하고 반론을 제기할 만한 역량을 습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컨대 같은 이론으로 무장한 두 명의 학자가 토론을 하고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둘의 결론은 극과 극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일반인들은 그저 황당할 뿐이다.  그리고 답답한 일이지만 누구의 논리가 맞고, 다른 한 사람의 논리는 틀렸다고 평가를 내리고 바로잡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둘은 부분적으로 서로 옳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과학은 자신과 견해를 같이 하는, 또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이론만을 취사선택하여 사회과학을 잘 모르는 대중에게 얼마나 많은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이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명확히 선을 그을 수 있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까닭에 어떤 토론의 장이나, 학문 서적에서 대중을 혼란에 빠트릴 수 있는 개연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보수당이 집권하면 보수쪽 논리가, 진보당이 집권하면 진보쪽 논리가 유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보수나 진보 어느 한 편이 집권하면 상대 진영의 이론은 철저히 무시된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진보보다는 보수당의 집권이 오래되었으므로 일반 대중에게 보수쪽의 경제 이론이 더 친숙하거나, 더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들리고 진보쪽 이론은 해괴한 괴변쯤으로 들릴 뿐이다.  그러므로 이 분야에 이론적 배경이 없는(학문적 지식이 미약하거나 아주 없는) 사람들은 진보쪽 이론을 들고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좌빨'이니 '빨갱이'니 하고 매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쩌겠는가.  무식하면 용감한 것을.

 

굳이 평하자면 <착각의 경제학>은 진보쪽 논리에 충실한 책이다.  다음 아고라에서 경제 논객으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의 작품은 대개 보통의 이론서와는 거리가 멀다.  경제이론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전문 용어를 나열할 수도 없고, 수학적 모델을 제시하여 설명할 수도 없다.  다만 도표와 사례를 위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다 보니 자연히 책의 지면은 늘어나고 비례하여 책의 두께는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는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용을 들춰보면 책은 의외로 술술 읽힌다.  가끔 이론적 설명에서는 주춤거릴 수도 있겠지만, 실증적 사례를 보면서 읽는다면 '그땐 그랬지.'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지난 해 연말에 있었던 19대 대선의 후보자들은 하나 같이 경제 민주화와 가계 부채 문제, 고용 문제와 일자리 창출을 역설하며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했었다.  박근혜 당선인도 예외는 아니어서 중산층 비율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공약을 했다.  그것이 지켜질 수 있을지는 더 두고 지켜볼 일이다.  지금의 대통령도 747공약을 제시했으나 하나도 지켜진 것은 없지만 말이다.  오히려 서민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고, 지니계수는 2010년 국세청 자료에 의하면 0.446에 이른다고 한다.  더구나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여파로 중산층 규모는 계속 축소돼 왔고,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1990년 75.4%였던 중산층이 2000년에는 71.7%로, 2011년에는 67.7%로 추락했다. 그러나 이 수치는 기계적 통계일 뿐이고 실제 중산층은 이보다 훨씬 못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지난해 4분기 우리나라의 성장률은 건설·설비투자 감소, 내수부진 등의 영향으로 0.4%로 기존 전망치(0.8%)의 절반에 그치는 등 2012년도 국내총생산(GDP)이 3년래 가장 낮은 2% 성장을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저성장 기조에 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으며, 이러한 경기 침체는 부동산 시장의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 및 엔화 대비 원화 환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2013년에도 우리나라 수출 기업의 전망은 밝지 않다는 얘기다.  미국의 재정절벽 위기와 일본 아베 정권의 재정 확장 정책도 우리에게는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렌탈 푸어' 및 '하우스 푸어' 문제로 중산층의 위기는 이미 도를 넘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과연 대책은 없는 것인가?  저자는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의 중산층으로서는 외화예금에 가입했다가 환율이 폭등하고 그에 따라 한국채 가격이 폭락했을 때 한국채로 갈아 타는 것이 최선의 생존대책이다.  외화예금 투자를 통해 이자수익 + 외환투자수익을 얻을 수 있고, 이후 폭락한 한국채로 갈아탐으로써 이자수익 + 큰 자본이익을 얻을 수 있다.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현금자산인 외화예금과 한국채의 실질가치가 폭등하는 것은 물론이다."    (P.431) 

 

요즘 같아선 '경제는 심리다'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워낙 암울한 소식만 전해지니 흥이 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돈이 있어도 마땅히 투자할 데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양극화는 날로 심해지고 그 한계를 뛰어넘을 마땅한 방법도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게다가 정글과도 같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젊은이들이 취업문 통과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이 책에서는 자산 투자에 성공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대공황 및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분석 및 금융 음모론 등 경제 현실의 다양한 면을 다루고 있다.  대한민국은 분명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경제 관련 서적을 두루 읽어서 현명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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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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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가장 솔직하지 못했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나를 기만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고, 그런 행위에 대해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순간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지난 일에 대해 우리가 하는 후회는 결국 우리 자신을 기만했던 모든 행위와 생각과 어리석음에 대한 자책과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모든 외부 환경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진실로 솔직해지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구의 비난도, 다가올 미래도, 어쩌면 죽음까지도 잊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외부 조건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혁명과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적 관습이나 통념에 비추어 그들을 단죄하고 비난한다.  우리에게는 과연 그런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진심으로 축하할 용기는 과연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인 한스 에리히 노삭은 우리를 향해 진지하게 묻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우리가 대답해야 할 차례이다.

 

베르톨트 묀켄은 작가이다.  어느 날 그는 상공인협회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사실은 '헬데겐 사'가 주최한 시상식이었지만 헬데겐 사의 대표인 막스는 익명을 원했고, 수상식장에는 그의 부인 마리안네를 대신 보낸다.  베르톨트는 그곳에서 만난 마리안네에게 첫눈에 반한다.  "당신과 함께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베르톨트.  마리안네와 베르톨트는 그 순간이 자신들에게 가장 솔직한 순간임을 직감한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외부 환경이나 사회적 비난, 그들이 걱정해야 할 미래마저도 초월하는 순간이다.  그날 마리안네는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베르톨트와 함께 집을 나간다.

 

그러나 행복은 실로 순간적인 일이다.  사회적 관습과 통념에 비추어 좋은 사람으로, 남들에게 비난 받지 않을 정도로 착하게 산다는 것(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지만)은 그 순간을 만나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어떤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행복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처음의 그 순간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그 역시 행복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행복이 비록 오랫동안 계속될 수 없음을.  그것이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것과 같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행복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행복은 오직 현재일 뿐이다.  거기엔 과거도 미래도 없다.그때 우린 참다운 행복을 알았고, 그래서 그후 우린 불행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P.128)

 

      

한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베르톨트의 머릿속에는 오직 미래만 존재한다.  과거와 단절한 채, 자신의 엄마와 동생조차 만나지 않는다.  미래에 저당잡힌 베르톨트는 현재의 시간을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소비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오직 그에게는 잘 팔리는 희곡을 완성하여 좋은 집으로 이사도 하고, 폭스바겐도 한 대 사고, 마리안네와 마음껏 여행할 날만 기다린다.  늦어도 11월에는.

 

"너무나도 괴로운 시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탄식마저 입을 다무는, 아무리 빠져나오려 애를 써도 빠져나올 수 없는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울고 싶어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해야 비로소 숨이 좀 트였다."    (P.180)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마리안네에게 시아버지의 방문은 한줄기의 빛이요, 탈출구였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시아버지는 성공을 향해 오직 앞만 보며 살았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부인은 집을 나가 죽고, 아들 막스는 어머니도 없이 자랐다.  이제 자신이 세운 회사는 그에게 긍지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주의 대상이었다.  사회적 통념과 관습에 의해 전 인생을 바친 그는 이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 되었다.  원인은 서로 달랐지만 베르톨트와 마리엔느, 그리고 시아버지는 사회적 통념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무참히 짓밟혔음을 깨닫고 이에 저항하려 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그들은 타자(他者)인 동시에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한몸인 것이다.  시아버지에게 베르톨트와 마리안네는 자신을 대신하여 사회적 관습과 통념에 저항하는 대리인이다.

 

"나 역시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지.  내 나이에도 말이다.  부끄러운 일이지.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누구도 깊게 생각해보려 하지 않아.  그냥 대충 그런 식으로 넘기려는 거지.  하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야.  운수가 사나울 땐 흔히들 소리치지.  이따위 인생이 다 뭐야!  정말 지긋지긋해!  하지만 어쨌든 인생은,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거다..."    (P.227)  

 

시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마리안네는 결국 베르톨트를 남겨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남편 막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해 11월, 베르톨트의 희곡이 마리안네가 사는 도시에서도 공연된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마리안네는 공연 입장권을 구입하였지만 정작 자신은 가지 않는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우박이 심하게 내리던 날 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의 집을 찾아온다.  베르톨트임을 직감한 마리안네는 베르톨트와 함께 다시 집을 나간다.  그러나 베르톨트가 약속한 폭스바겐을 타고 떠나던 두 사람은 철로 교각에 부딪쳐 영원한 여행을 떠난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했던 것처럼 "전후 독일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가장 탁월한 작가"인 한스 에리히 노삭은 연애 소설이라는 구조물 속에 또 다른 스토리를 깔고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삶의 수동성과 맹목적성에 저항하는 젊은 두 남녀와 이를 지켜보며 지지하는 한 명의 노인, 그리고 인습과 통념에 순응하며 사는 대다수의 주변인들.  성공, 의무, 도덕 등 우리에게 주어진 외부 환경에 의해 우리는 단 한 번도 저항하지 못한 채 우리의 삶을 마감한다.  이런 삶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찾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시아버지의 관점에서 그렇게 살았던 자신의 삶은 얼마나 허망했을까?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 자신은 감히 용기조차 낼 수 없었던 일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두 젊은이는 얼마나 부럽고 대견했을까?  관습과 통념에 따라 읽으면 이 책은 한낱 흔한 러브 스토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그 인습의 벽을 깨고자 시도했던 두 젊은이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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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셰리 터클 엮음, 정나리아.이은경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결혼하고 한 10년쯤 지나면 슬슬 버려야 할 것 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는는데 기억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개인적 편차가 있겠지만 자신이 쓰던 물건을 버리는 일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누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물건일 수도, 또는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물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이렇듯 다른 판단이 내려지는 것은 함께 한 세월의 무게가 한 몫 하는 듯하다.  어떤 사물에 있어 그 형태와 쓰임은 세월을 견뎌내지 못하고 스러진다 할지라도 세월에 깃든 사물의 영혼은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마치 육체가 쇠잔한 노인에게도 거대한 추억의 구조물이 영원히 살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의미 있는 사물'이라, 참으로 달콤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아련히 떠오르는 과거에 희열을 느끼고 어린 시절 즐거운 한때의 추억과 함께 진한 향수가 몰려올 때 우리는 그런 말을 쓴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참으로 아픈 말이다.  그렇다.  우리 가족은 앞으로 영원히 평범한 가족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 가족사는 동화 같은 해피엔딩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린 내 눈에 이상적이었던, 불행이 시작되기 전의 가족의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나는 쉽게 막내 여동생을 그림에서 제외해버렸다."   (P.127)

 

MIT대학에서 예술사학을 가르치는 캐롤라인 A 존스는 어린 시절 자신이 그렸던 한 장의 그림을 보며 서글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어떤 사물을 통하여 넘을 수 없는 시간의 벽을 단숨에 통과한다.  그리고 우리가 물리적 시간을 그렇게 거슬러 올라 닿게 되는 어느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감성의 언어를 배우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성의 언어에 종속되어 살았던 긴 시간 동안 우리 행위의 숱한 오류와, 삶의 은유와, 숨겨진 비밀들이 뒤늦게 배우는 감성의 언어를 통하여 제자리를 찾고 많은 비밀들이 조금씩 밝혀지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제사 철이 들고, 삶의 보폭이 얼마나 느려져야 하는지 깨닫는다.

 

이 책은 하버드, 코넬, MIT 등의 세계적인 석학 34인이 평범한 주변의 사물들에서 느꼈던 그들만의 특별한 에피소드를 들려줌으로써 그들의 인생철학과 삶의 가치를 전해주고 있다.  누구에게는 첼로가, 누구에게는 발레 슈즈가, 또는 할아버지의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또는 어린 시절 입었던 노란 우비가 어느 순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기억의 저편에서 펼쳐지는 황홀한 축제를 어찌 이성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그 많은 불꽃들을 어찌 식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까?

 

"하지만 여전히 지나가는 급행열차를 보면 저 반대편의 세상이 떠오른다.  열차는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린다.  길게 늘어선 향기로운 유향나무, 공을 주우러 기어올라갔다가 너무 뜨거워 손도 대지 못했던 녹슨 철제 지붕, 불현듯 코끝에 다가오는 흙먼지 속의 빗방울 냄새, 그리고 작고 호기심 많은 한 아이가 있다.  태양이 작열하는 고요한 시골길을, 놀랍도록 젊고 아름다웠던 부모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한 아이가."    (P.212)  

 

나는 지금 누렇게 변색되고 습기를 머금어 찌들 대로 찌든 나의 오래 전 일기장을 읽고 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눈길을 벙어리 장갑을 낀 한 소년이 걷고 있다.  버석버석 심하게 튼 손을 호호 불며 시린 어깨를 옹크린 채 홀로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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