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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 속도에서 깊이로 이끄는 슬로 리딩의 힘
이토 우지다카 지음, 이수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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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 시절 내 친구 L은 시인으로 등단하여 모 출판사에서 시집을 출간했었다.

그러나 친구의 시집은 거의 팔리지 않았고, 모르긴 몰라도 전국의 서점에서 반품된 책들이 출판사의 창고를 가득 채웠을 것이다.  친구는 책이 나온 지 얼마 후에 내게 와서 자신의 시를 몰라주는 독자들을 원망하며 넋두리 삼아 푸념을 했었다.  사실 친구의 시는 친구인 내가 읽어도 난해하기 짝이 없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친구에게 앞으로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면 안되겠냐고 했더니 도리어 친구는 내게 불같이 화를 냈었다.  친구의 주장인즉슨 이랬다.  시인마다 추구하는 시의 경향이 있고, 자신이 쓰는 시도 짧은 시간에 쉽게 쓰여진 시가 아니므로 독자도 그 시를 이해하려면 적어도 작가의 노력에 버금가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딴은 맞는 말이었지만 일반적인 독자에게 자신의 독서 스타일을 바꾸라고 말할 권리는 작가에게도 없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친구는 문학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라고 길길이 날뛰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눈치였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독서법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부분에서는 편협한 책읽기를 고집하고 있다.  가령 맘에 들지 않는 책은 몇 쪽 읽지도 않고 던져버린다든가 오탈자가 많으면 책의 내용까지 의심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무튼 한번 길들여진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오래 전 법정스님의 추천도서 목록에 올랐던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읽고는 '왜 스님은 이런 책을 추천도서에 올렸을까?'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나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을 읽었을 때는 꽤나 만족했었다.

 

그 외에도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독서의 방법론이 아닌 책의 선택과 독서의 관점에 어떤 주관을 갖지 못했던 내게 도움을 준 책이었다.  글을 쓰는 것으로 업을 삼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처럼 수동적인 독서를 경험할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도움이 될 만한 많은 책을 통하여 자신의 독서법을 다듬고 보완하여 나름의 틀을 형서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리 큰 도서관이 아니더라도 독서에 관련된 책은 줄잡아 수십 권은 족히 될 것이다.  나같은 얼치기 독서가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수동적 독서법에 관한 책은 넘치도록 많은 반면 아이들이나 부족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독서에 대한 강의(실천적 독서 또는 적극적 독서)를 목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에게 필요한 방법론을 제시해 주는 책은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논술이나 독서 교육을 전담하는 분들이야 많지만 어떤 소신이나 사명감을 갖고 그 방법론을 고민하는 분들은 찾기 어렵다.  물론 공교육의 제도권에서 국어를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그 틀을 깨기가 쉽지 않지만 사설 교육기관이나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조금 다르지 않을까?  그럼에도 교수법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는 듯하다.

 

주말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내가 갖고 있는 책도 빌려주고 읽어볼 만한 책도 소개하는 일을 두어 달 해본 경험에 의하면 그런 구태의연한 방법으로는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지도, 글쓰기에 흥미를 붙이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봉사의 차원에서 시작한 일이니 읽고 싶은 책만 빌려주고 내 할 일 다했노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장래와 희망에 대해 한번쯤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독서보다 더 좋은 것이 없겠다 싶어 내가 고집하던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그 방법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못쓰는 글이지만 내가 소설의 발단 부분만 쓰고 아이들로 하여금 그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여 말하도록 하고 그 중 가장 재밌는 내용을 그 다음 이야기로 채택하여 소설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물론 아이들은 스토리 라인만 내게 들려주고 쓰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담당한다.  이 수업에서 내가 의도하는 것은 몇 가지 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작가의 입장에서 글을 쓰다 보면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점과, 글쓰기에 대한 흥미 진작과 더불어 자신들이 쓴 것은 아니지만 한 편의 단편소설을 완성하면 그것에서 얻게 될 성취감 등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이니 그 결과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이들의 참여도나 열의, 또는 흥미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나는 주중에도 아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느라 여가 시간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 책은 어쩌면 독서법을 찾는 수동적 독서가가 아닌 국어를 가르치는 능동적 독서가에게 필요한 책인지도 모른다.    일본 고베의 사립학교인 '나다'에 근무하던 하시모토 다케시 선생의 독특한 수업 방식을 집중 조명한 책으로 문고본 분량의 책 한 권을 무려 3년에 걸쳐 읽는 방식이다.  나카 간스케의 자전적 소설 <은수저>를 교과서 삼아 천천히, 그리고 깊이 음미하면서, 때로는 연괸된 내용을 찾아 '옆길로 새기'도 하면서 소설 한 권을 철저히 독파하는 것이다.

 

'단정하게 넘겨 빗은 올백 머리가 썩 잘 어울리는 그 국어선생님'은 아이들이 소설에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해 소설 속 주인공이 먹었던 막과자를 나눠주고, '축(丑)'이라는 글자에서 10간 12지를 이용한 육십갑자의 유래와 의미를 이끌어내고, 미술 수업과 연계하여 연을 직접 만들어 날려 보기도 한다.

 

"설령 빨리 읽어 나간다고 합시다.  여러분에게 뭐가 남을 것 같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내 수업은 속도를 다투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속독을 가르칠 생각도 없습니다.  그보다 다들 조금이라도 어렵다고 느낀 곳, 흥미로운 곳에서 스스로 옆길로 빠졌으면 좋겠습니다.  자꾸만 파고들어서 자신의 세계를 깊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천천히 갈 작정입니다."   (P.131)

 

한 학교에서 50년을 근무하고 지금은 은퇴하여 또 다른 교재를 준비하고 있다는 하시모토 다케시 선생의 열정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올해 7월에 100세가 되었다는 선생의 삶처럼 독서는 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인생의 지렛대가 되어야 한다.  설렁설렁 읽어 그 권수를 자랑할 일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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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의 시간 -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
아베 나오미.아베 사토루 지음, 이은정 옮김 / 인디고(글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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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락'하고 나즉이 읊조리면 빈 양은 도시락을 경쾌하게 울리던 젓가락의 달그락거리는 울림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듯하다.  생각해 보면 아주 오래전도 아닌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낯선 이름이 되어버린 도시락.  기술과 제도의 변화는 이렇듯 문화의 단절을 야기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이랴.  문화의 단절은 세대 간의 단절로 이어진다.  세월이 흘러도, 제도와 기술이 변해도, 조금쯤 불편하고 투박해도 변하지 않고 이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들이 있다.

 

도시락에 얽힌 추억이야 많지만 모두가 즐겁고 유쾌한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 내내 거의 모든 날들을 도시락과 함께 했으니 자긋지긋하기도 하련만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 오히려 그리움의 대상이 된 것을 보면 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국민학교 시절, 노란 양은 도시락을 켜켜이 난로 위에 올려 놓고 혹시나 타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기도 했고, 부잣집 아이가 들고 온 보온 도시락에 시선을 빼앗기기도 했었다.  내가 부모님을 떠나 객지 생활을 시작한 것이 중학교 2학년부터이니 본격적인 도시락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나는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도시락을 싸는 일까지 도맡았다.  형과 함께 자취를 했지만 형보다 먼저 일어나곤 했던 내가 아침을, 형은 저녁을 책임지는 것으로 자연스레 배분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도시락을 두 개나 싸서 들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반찬통에서 김칫국물이 흘러 가방에는 언제나 퀴퀴한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날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가끔 눈비가 오는 날에 버스를 타면 가방을 받아준 여학생의 치마에 붉은 김칫국물 흔적을 남기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내 얼굴도 김칫국물처럼 붉게 물들었었다.  당연하게도 가방 속의 교과서며 공책도 귀퉁이는 온통 김칫국물에 젖어 시큼한 냄새를 하루 종일 맡아야 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도시락 쌀 일은 없어졌고 학교 대동제나 과 MT 자리에서는 가끔 학교앞 분식점에서 구매한 김밥 도시락을 맛도 모른 채 먹곤 했었다.  그렇게 도시락과는 차츰 멀어졌다.  도시락을 싸지 않는 그 순간부터 도시락을 들던 내 손아귀의 힘은 차츰 사위어 갔고 시나브로 세월이 마른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흩어져 갔다. 

 

오래 전 가고시마 현의 야쿠 섬을 방문했을 때 민박집 주인이 아침 일찍 산을 오르는 내게 들려주었던 도시락은 원시림에 낀 이끼처럼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했었다.  아베 나오미가 쓴 <도시락의 시간>을 읽으며 나는 그 순간을 생각했다.  월급쟁이, 해녀, 역무원 등 특별하지 않은 39명의 도시락 사진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신기하다.  도시락을 통해서 느림의 관계가 시작됐다.  자신의 도시락의 시간을 흔쾌히 또는 수줍게 공개해 주신 분들과 보이지 않는 끈이 생겨났다.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이것은 어쩌면 '도시락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닫는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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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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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좋았지.'하는 미련과 아쉬움이 잔디처럼 쑥쑥 자라나는 나이가 되면 웬만한 기억들은 아름다운 빛깔로 채색되기 마련이다.  조금은 생략되고 뒤틀릴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잘 꾸며진 추억들이 남겨진 삶을 지탱하는 자양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누구나 가슴 한가득 추억의 꾸러미들을 끌어 안고 사는가 보다.  그러나 생살을 찢는 듯한 아픈 기억은 저 무의식의 심연에 묻혀 정처없이 떠돌 수밖에 없음을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일부러 피한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음식이나 요리와 관련된 책을 읽었던 경험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유년 시절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곤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잊혀질 만도 하건만 그때의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남아 시간을 부표처럼 떠돌다가 가끔씩 마음을 훑고 지나갈 때면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은 내가 요즘의 어린 학생들에게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면 '설마'하면서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아이들은 내 얘기가 아주 오래 전, 조선시대의 어느 산골에서나 있을 듯한 이야기쯤으로 들리는 모양이다.  아니면 어느 책에서 읽었음직한 잔뜩 부풀려지고 과장된 시대적 상황으로 인식하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현 시대와는 동떨어진 고립된 삶을 살았던 듯하다.  그랬음에도 나는 내 또래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려니 하는 착각 속에서 살아왔고, 여러 책들을 읽고나서야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조차 대개는 나보다 나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사실이 나를 몹시 당혹케 했고, 내 기억 속의 어린 내가 한없이 측은하고 안타깝기만했다.   

 

내 추억의 일부로서 음식을 기억하는 것은 극히 적다.  의식적으로라도 지우고 싶어서였겠지만 내게 있어 음식은 생존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도 까닭을 알 수 없지만 나의 아버지는 식사시간마다 어머니와 다투셨고 급기야는 매번 폭력으로 이어졌었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가족들은 최대한 빨리,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하며 숨 죽인 채로 자신 앞에 놓인 음식을 어떠한 맛도 느끼지 못하고 식사를 마쳐야 했다.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일종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공포가 스며든 음식.  모든 감각은 오직 다가올 공포에만 집중되고 음식을 통하여 즐겨야 할 맛의 축제는 사라진다.  여유가 없는 팍팍한 삶이었지만 내가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가난이나 배고픔이 결코 아니었다.  맷돌에 간 옥수수에 감자를 섞어 약간의 찰기를 더한 밥이 우리 가족의 주식이었다.  내가 쌀밥을 처음 먹어 본 것은 국민학교 일 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반찬이 더 있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때 먹었던 흰 쌀밥은 왜간장만으로도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작가 박찬일은 행복한 사람이다.  이 책에서 그는 유년 시절에 자신이 맛보았던 추억의 음식과 시칠리아 유학시절의 다양한 음식들, 그리고 자신이 읽었던 문학 작품 속의 맛을 소개하고 있다.  제목에서 말하듯 '추억의 절반은 맛'일지 모른다.  그러나 맛의 절반은 사랑이다.  어쩌면 맛의 전부는 사랑일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책을 읽는 내내 동그마니 외로운 내 유년의 아이는 그 형체마저 아스라히 멀어져만 가고 그 가억의 작은 조각이라도 부여잡고 싶었던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은 페이지를 세어야만 했다.  사랑이 없는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는 오래도록 허방을 디딘 사람처럼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방황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추억하는 것은 즉물로서의 음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에 곁들여진 사랑의 분위기였다.  결국 맛의 절반은, 또는 전부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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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 시대를 뛰어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 Wisdom Classic 7
김경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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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30대 이전에는 꿈과 이상, 욕심과 가능성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다들 그렇지 않았을까?  그때의 나는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외쳤던 나폴레옹 황제의 패기로 넘쳐났었다.  그런 인식으로 세상을 보았으니 냉철한 현실인식으로 무장한 40대 이후의 중장년은 패기도 없고 용기도 없는 '퇴물'처럼 느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못 가진 자의 허세는 지나친 용기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을 읽었다.

학창시절에 뜻도 모른 채 읽었던 <군주론>.  마키아벨리는 내게 속물의 전형으로 각인되었다.  작은 것 보다는 큰 것이 먼저 눈에 띄었고, 세밀한 계획 보다는 커다란 꿈이 먼저였던 돈키호테의 시기에 마키아벨리의 냉철한 사고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젊은이의 이상과 현실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그 결과는 참담한 법이다.  내게는 절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참담한 결과를 몇 번 겪으면 그제사 어른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이론가이며 저술가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500여 년이라는 시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읽혀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마키아벨리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떤 정치가나 평론가 혹은 리더십 이론가의 견해와는 사뭇 다르다.   <군주론>은 나약한 소국의 힘없는 외교관으로서, 또는 선량하고 고결한 시민이자 좋은 아버지로서 그가 살았던 삶에 대한 자기성찰이자, 자신의 영혼보다 사랑했던 모국 피렌체의 부국강병에 대한 염원을 담은 기도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을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의 나는 나와 타인의 구별에만 집착했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선량한 양심의 소유자이고, 법과 규칙을 준수하는 신의와 성실의 표본이며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라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에 누구나가 선망하는 이상적인 인간형.  그것이 '나'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환상에 사로잡힌 삶에서 타인은 오직 나와 구별되는(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비열함과 권모술수로 무장한) 악의 화신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내 양심의 이면에 존재하는(일상을 지배하는) 보편적 인간의 공통분모를 생각하지 못할 때,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때, 공동체의 통합이나 조직의 목표를 향한 자기 희생은 기대하기 어렵다.  오직 갈등과 분열 속에서 각자의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아마 젊은 시절의 마키아벨리도 그러했으리라.  기본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통분모(일상적인 탐욕과 이기심, 권력에 대한 집착과 공포)를 스스로 밝히고 반성하는 것은 나이가 든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은 나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부끄러운 면모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남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비열한 속성을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에서 보듯 '선민의식'에 가득찬 호전적 인간군상으로 남게 마련이다.

 

국가든 기업이든 조직원의 통합이 전제되지 않는 한, 조직의 목표를 위해 조직원이 헌신하지 않는 한 그 공동체의 미래는 없다.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은 다양한 인간 군상의 공통된 인성을 솔직하고 세밀하게 노정함으로써 리더의 통치를 돕고자 했을 뿐이다.  인간의 속성이 악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여 그 공통점을 추출하기 어려운데 반해 조직에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하지만 악의 모습은 그 양태가 비슷하여 분류하기 쉽고 이것이 성하였을 때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게 되므로 리더는 오직 인간의 악한 면을 어떻게 다스릴까?하는 문제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인간에게는 오직 '악'의 근원만 존재한다가 아니라 공동체의 단합과 발전을 위해 '악'의 속성을 다루는 리더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더불어 리더 자신 또한 한 명의 인간 개체로서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와 다를 바 없는 같은 속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이끄는 공동체의 구성원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현명한 군주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일만이 아니고 먼 장래에 있을 분쟁까지도 배려해야 하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에 대처해야 한다.  위험이란 미리 알면 쉽게 대책을 세울 수 있지만 코앞에 닥쳐올 때까지 그냥 보고만 있으면 그 병은 악화되어 불치병이 된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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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 미술비평은 어떻게 거장 화가들을 능욕했는가?
로저 킴볼 지음, 이일환 옮김 / 베가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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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미대에 다니던 친구 세 명과 함께 서울 방배동에서 겨울방학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단독주택의 차고를 개조하여 월세로 놓은 곳이니 난방이 될 리 없었고, 도로 쪽으로는 홑겹 유리 미닫이문이 셔터문 안쪽에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이면 문 틈새로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지만 우리는 하나뿐인 연탄난로 주변에 모여 기타를 치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들이키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곳이 마치 로마시대의 지하묘지처럼 음산하다며 '카타콤'이라고 불렀었다.

 

술도 못 마시고 전공도 전혀 달랐던 나는 물과 기름처럼 좀체 섞이지 못하였다.  그들로부터 가끔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안주감으로 라면을 끓여주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캔버스에서 살아나는 갖가지 형상들과 붓을 잡은 손의 유연한 움직임이 그저 신기한 듯 쳐다보는 재미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밤이 늦도록 이젤 앞에 앉아 골똘한 생각에 잠기곤 하던 그들과 달리 나는 밤이 깊었다 싶으면 으레 냉기가 도는 침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추위에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풀어준 후, 간신히 고양이 세수를 마치면 서둘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곤 했다. 

 

그때 같이 지내던 친구 중 한 명은 미술대학으로 유명한 H 대를 다니다가 1학년말 작품 전시회에 걸렸던 자신의 작품에 문제가 있어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고 이듬해 D 대학 천안 캠퍼스에 재입학 했었다.  당시 그는 전시회 작품으로 정부미 포대를 똑 같이 그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만 그리면 뭔가 밋밋한 느낌이 들어서 '정부미'를 '전부미'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전두환 정권이었던 당시의 사정은 예술이든, 언론이든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공안정국의 삼엄한 분위기는 예술작품이라고 해서 검열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친구는 그 바람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고, 교수님과 학교 당국에 호소도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고 했다.  그림에 재능이 많았던 친구는 D대학을 졸업하였고 지금은 미술 관련 모 사단법인의 이사장이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사의 평가는 언제나 평론가와 그 시대의 권력자의 몫이었다.  당사자인 작가의 목소리는 언제나 무시되기 일쑤였고, 의식 있는 평론가의 항변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21세기인 지금도 통치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작품은 법의 잣대로, 또는 평론가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처벌되거나 불이익을 받는다.

 

이 책은 예술사에서 평론가의 부당한 해석을 작품을 예로 들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쿠르베, 마크 로스코, 사전트, 루벤스, 윈슬로우 호머, 고갱, 반 고흐 등의 작품이 당시의 평론가에 의해 어떻게 평가받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일반 독자에게도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부당한 평론가는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는 언어 폭력범이 될 수도 있음이다.김태호 교수는 추천사에 이렇게 적고 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혹은 다른 예술의 영역이든, 당신이 에술을 '살기로'작정했다면 이 책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결의를 굳건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혹은 당신이 미학이나 예술사 혹은 예술평론에 뜻을 두고 있다면, 이 책에서 그 학문이나 활동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예술의 메인 이벤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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