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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다정한 사람
은희경 외 지음 / 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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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허깨비처럼 느껴질 때, 지나온 길에서 내 흔적이라곤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을 때, 삶이 두렵고 막막하기만할 때, 또는 뜬금없이 외롭다고 느껴질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이란 마치 일상의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힘겹게 걷는 나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내 기억의 인화지에 피사체로 남기는 일일 것이다.  다음 생에서가 아니라 이 생에서, 다른 생을 살아보는 일이 여행이라고 했더 어느 여행작가의 말처럼.

 

옴니버스 형식의 독립영화와 같은 이런 종류의 책에서 깊이와 몰입을 경험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법이다.  열 명의 사람이 시간을 달리 하여 저마다의 장소로 여행을 떠나다니...  각각의 인물이 갖는 명성의 친밀감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이런 책을 읽지 않는다.  편집이 어설픈 영화를 감상할 때 느끼는 것처럼 화면이 툭툭 잘리는 듯한 단절감을 책을 읽으면서까지 느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각각의 여행자에게서 느꼈던 오래된 기억을 미끼로 삼아 이 책에 기꺼이 낚이기로 한다.

 

열 명의 여행자는 이랬다.  은희경, 이명세, 이병률, 백영옥, 김훈, 박칼린, 박찬일, 장기하, 신경숙, 이적.  각각의 여행에는 우리에게 <끌림>이라는 작품으로 친숙한 사진작가 이병률이 동행한다.  처음부터 끝으로, 페이지의 순서를 따라 읽을 필요는 없다.  나는 신경숙 작가의 여행기를 먼저 읽었다.  다음은 김훈.  이것은 순전히 내 취향과 기호에 따른 순서일 뿐이다.

 

1. 여행은 친숙한 나와 낯선 세계가 합해져서 넓어지는 일---신경숙 

뉴욕은 내 여동생이 사는 곳이다.  벌써 십 년도 더 지났으니 이제 동생은 두 아이와 종일 씨름하는 아줌마가 다 되었을 것이다.  나는 신경숙 작가의 여행 스케치를 읽으며 여동생을 생각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녀의 글은 생경했다.  그녀가 지금껏 쓴 책은 언제나 책을 꾹하고 누르면 소금기 짙은 눈물이 꿀럭꿀럭 배어나올 것만 같았었다.  그러나 그녀의 짧은 여행기는 스치듯 지나는 풍경을 자를 대고 잘라 놓은 듯 모래알의 서걱거림만 들릴 뿐이었다.  뉴욕은 원래 그런 곳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2. 여행은 세계의 내용과 표정을 관찰하는 노동---김훈 

남태평양의 넓은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미크로네시아.  그곳에 김훈 작가가 있다.  그의 글에서는 언제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있으나 찾을 수 없다.  언제나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교묘한 말솜씨 때문일까?  대상에 대한 지독한 몰입은 작가의 존재를 언제나 잊게 한다.  작가는 붓을 놓는 순간까지 광기에 쌓인 탐구자이며, 관찰자이고, 몽상가이다.

 

"열대 바다의 저녁은 저무는 해의 잔광이 오랫동안 하늘에 머물러서, 색들은 늦도록 수면 위에서 흔들리고 별들은 더디게 돋는다.  어둠으로 차단된 수억 년의 시공 저편을 별들은 건너온다.  별은 보이지 않고 빛만이 보이는 것인데, 사람의 말로는 별이 보인다고 한다.  크고 뚜렷한 별 몇 개가 당도하면 무수한 잔별들이 쏟아져나와 하늘을 가득 메운다.  별이 없는 어둠 속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눈이 어둠에 젖고 그 어둠 속에서 별들은 무수히 돋아난다.별이 가득찬 하늘에서는 내 어린 날의 개구리 울음 소리가 들린다."    (P.170)

 

3. 여행은 바람, '지금'이라는 애인을 두고 슬쩍 바람피우기---이병률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낯선 지명이다.  수억 광년의 거리를 가로질러 비로소 찾아낸 어느 작은 별이름처럼.  이병률은 그곳에 있다.

"나는 탈린에서 얻은 여백을 내 위에다 '덮어쓰기'한다.  나는 이 여백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으려 하면서 조금 더 추운 북쪽으로 마음의 방향을 잡는다."    (P.107)

그렇게 찾아간 속은 핀란드의 로바니에미.  여전히 낯선 지명이다.  크리스마스가 한참이나 지난 지금.  내일이라도 당장 산타 모자를 쓴 여행객이 짠하고 내 앞에 나설 것만 같다.

 

4. 여행은 낯선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탄력의 게임---은희경

호주를 생각하면 내 대학생활의 전부가 담겨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단지 그곳에서 일 년을 보냈을 뿐인데.  땅이 넓어서인지 추억도 많아진 듯한 느낌은 나만의 착각이다.  은희경 작가는 그곳에 있다.  8월의 와이너리 여행,  겨울의 끝자락에서 싱그런 포도 알갱이들이 달콤한 와인으로 익어갈 것이다.  나는 와인 한 모금을 목구멍 속으로 천천히 흘려 넣으며 짙은 추억에 취한다.

 

"여행이란 멀어지기 위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올 거리를 만드는 일이다.  멀어진 거리만큼 되돌아오는 일에서 나는 탄성( 彈性)을 얻는다.  그 탄성은 날이 갈수록 딱딱해지는 나라는 존재를 조금 유연하게 만들어준다.  함부로 혹은 지속적으로 잡아당겨지더라도 조금쯤은 다시 나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P.17 - 18) 

 

5. 여행은 좋은 친구와 여행을 떠나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것---박찬일

여행지에서 자신의 오래 전 모습을 떠올릴 때면 조금은 아릿하고 먹먹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그것은 일상에서 만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어쩌면 단단히 감싸였던 외로움이 먼 이국의 땅에서 주책없이 터져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슬며시 외로운, 그러나 때로는 정다운.  박찬일 셰프는 일본에서 도시락 문화를 만났다.  그는 에키벤에서 일본의 작은 우주를 본다.  추억과 함께.

 

6. 여행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도돌이표---백영옥

소설가 백영옥에게 홍콩은 한때 왕가위의 도시였고, 한때는 어둠의 도시였단다.  내가 사는 이곳이 아닌, 잠깐 머물렀던 여행지를 '이것이다'하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은 그곳에서 발품을 많이 팔았다는 증거다.  생각은 자신이 걸었던 거리만큼 굳어지고 물화되면서 어느 순간 마음에 투명한 고드름으로 맺힌다.

 

7. 여행은 물이고, 시원한 생수고, 수도꼭지---박칼린

바람에 실려오는 내음과 피부에 닿는 질감 때문에 바다와 산과 사막을 좋아한다는 박칼린.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그녀가 찾은 곳은 섬나라 뉴칼레도니아였다.  이국적인 외모처럼 감정의 표현도 거침없고 이국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언젠가 그녀의 작품『그냥 Just Stories』을 읽었을 때 작품 속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 눈을 더 크게 뜨고 꼼꼼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제노포비아의 감정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여행가에게 어울리는 솔직함이 살아있다.  마치 뉴칼레도니아의 햇빛이 그녀의 몸을 유리창처럼 통과하여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8. 그 외의 사람들---이명세, 장기하, 이적 

부끄럽지만 나는 한번이라도 책으로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책을 읽는 이유는 어쩌면 익숙한 것에서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것에 대해 느끼는 호기심.  이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가수이거나 영화감독이라는 그들의 직업은 알고 있지만 마음 속의 거리감은 그들이 방문했던 여행지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여행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 조금도 닮지 않은 누군가의 생각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은 여행기가 제격이 아닐까 싶다.  여행은 그 사람의 가면을 반쯤 벗겨내는 묘한 힘을 지녔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습이 아니다.  내가 여행기를 읽는 까닭은 내가 가보지 못한 어느 곳에 대한 간접경험을 얻고자 함도 아니요, 그곳에 다녀온 여행가를 부러워하기 때문도 더더욱 아니다.  다만 여행지에서 그들의 생각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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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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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이 지속될 때에는 이런저런 생각도 없이 지내다가도 조금 여유가 있다 싶으면 종종 생각나는 것이 시간이다.  특히 요즘처럼 해(年)가 바뀌는 시기에는 더더구나.  우스개 소리로 시간은 20대에는 시속 20km로, 30대에는 30km로, 40대에는 40km로 흐른다던가.  일견 맞는 말인 듯도 싶다.  내가 책을 읽고 시간에 대해 곰곰 생각했던 적은 많지 않지만 무사 앗사리드의 <사막별 여행자>를 읽었을 때, 익숙했던 시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몇 구절을 옮겨보자.

  

"문명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시간을 잃어버린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 투아레그인들은 다르다.

우리에게 있어 시간은 잃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살아가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삶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모두가 시간에 쫓겨, 일에 쫓겨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부족에게 이런 말이 있다. "서두르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관조할 시간도 없이 소멸을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내심은 시간과 짝이 되어 여유있는 행동을 하게 해줌으로써 자신에게 충실하도록 도와준다."

 

"나는 오랫동안 궁금했다.  어떻게 사람들이 예기치 않은 일에 아무런 여지도 남겨 두지 않고 일을 미리 빈틈없이 짜려고들 하는지.  삶을 앞서 계획하면서, 어떻게 삶을 창조하려 하는 것일까?  나는 내 수첩 속에 우연을 위한 빈자리를 남겨 둔다.  예기치 않은 것을 위해 숨 쉴 자리를.  우리가 눈을 떴을 때 우리를 도울 줄 아는 삶의 무한한 다양성에 나 자신을 내맡기고 싶다."

                         <무사 앗사리드의 "사막별 여행자" 中에서>

 

그리고 지난해 말쯤 지금은 고인이 된 위지안의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를 읽었을 때 시간 좌표에서의 내 위치를 생각하며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골똘히 궁리했었다.

 

나는 그동안 불투명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오늘'을 희생하며 살았다.  저당 잡혔던 그 무수한 '오늘'들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위지안의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中에서>

 

김선영 작가의 <시간을 파는 상점>을 읽었다.  제목은 그럴듯해도 청소년을 근간으로 하는 성장소설은 다 그렇고 그럴 것이라는, 조금은 얕잡아 보는 심정으로 책을 잡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되면 될수록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그런 시시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인공 온조는 인터넷 카페에 '시간을 파는 상점'을 열고 장사(?)를 시작한다.  소방대원으로서 젊은 나이에 죽은 아빠를 대신해 자신의 카페를 방문하는 손님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자는 의도였다.  그에 걸맞게 그녀의 닉네임도 '크로노스'(시간의 신)다.  이야기는 훔친 PMP를 도난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의 장소로 옮겨달라는 의뢰로 시작된다작년에 온조네 학교에서는 MP3 도난사건이 있었고 범인으로 지목된 아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었다.  이 사건을 경험한 의뢰인은 또 다른 희생을 막고자 온조에게 부탁한 것이다.

 

두번째 의뢰인인 강토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맛있게' 식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강토네.  한국에 남은 강토의 할머니가 자식을 기다리며 외롭게 죽었음에도 강토의 아버지는 바쁘다는 핑계로 오지 않는다.  아들의 행동에 분노한 할아버지는 자신이 주었던 돈을 돌려달라고 한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던 강토는 자신을 대신해 할아버지와 맛있는 식사를 해달라고 한 것이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그 외에도 천국의 우편배달부가 되어달라는 의뢰, 친구가 되어달라는 의뢰가 이어지고 중간중간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온조의 어머니와 온조의 담임인 불곰 선생님과의 로맨스도 책의 재미를 더한다.  그러나 PMP를 훔쳤던 아이가 자살을 하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위기가 찾아온다.  결국에는 그 아이도 자살을 포기하고 온조는 친구들과의 우정, 삶의 무게, 시간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온조는 지금 맞이할 이 순간을 먼 미래의 어느 시간에 맡겨두려 한다.  시간이라는 것이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궁금하다.  시간은 '지금'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순간을 또 다른 어딘가로 안내해준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 시간을 놓지 않는다면."    (P.219) 

 

우리는 모두 동시대를 사는 시간 여행자일 뿐이다.  시간 여행자는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차창 밖으로 흐르는 시간과 순간순간 주어지는 풍광을 감상하며 느낄 뿐.  혹시 아는가.  어느 순간 18세의 온조와 같은 당찬 소녀가 '우연'이라는 빛나는 보석을 건네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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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고백
김려령 지음 / 비룡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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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저만의 색깔이 있다.

나는 김려령 작가의 소설 『가시고백』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 어린 시절의 마음은 어떤 색이었을까?  아마 윤기 없는 회색에 가까웠지 싶다.  그 시절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그랬을 듯도 싶고.  유난히 튀는 색도 없고, 기세에 눌려 숨겨진 색도 없는, 그 시절 아이들의 마음은 비슷비슷하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온통 무채색 일색이었구나 싶다.  하기에 콩나물 시루처럼 복작거리는 아이들을 부모님도, 선생님도 그리 쉽게 길러낼 수 있었으리라.

 

요즘 아이들의 마음은 누구 한 사람도 서로를 닮지 않은 원색에 가깝다.

그러므로 같은 나이의 아이들도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한 상대방의 마음을 알 도리가 없다.  내가 어렸을 적과는 너무나 다르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색깔의 마음을 가졌으므로 속내를 감추어도 눈빛이나 행동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각자의 마음을 스스로 밝히지 않는다면 알아채기는커녕 감도 잡을 수 없다.  그림을 그려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다양한 색깔이 존재한다는 것은 더 다채롭고 화려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만 자신의 색깔만 고집한다면 한 폭의 좋은 그림이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작가는 원색의 마음을 가진 네 명의 주인공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 한켠을 내어 줌으로써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밀도있게 그리고 있다.  타고난 손놀림으로 자기도 모르게 도둑질을 하는 주인공 '해일'은 고등학교 2학년이다.  일곱 살 이후로 줄곧 도둑질을 해 온 해일은 습관적으로 굳어진 도벽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 기회를 좀체 얻지 못한 것에 늘 아쉬워 한다.  도둑질을 할 때마다 독백과 같은 일기를 쓰며 자신이 도둑임을 시인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해일은 어머니에게 변명삼아 내뱉었던 '유정란에서 병아리 부화시키기'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관심을 받게 된다.

 

해일이 제주도 농장에서 야생 토종닭 유정란을 구해 생선가게에서 얻은 스티로폼 상자에서 부화시킨 병아리들은 작품 속에서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사는 인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새아빠와 사는 지란, 감성과 이성이 조화롭지만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진오, 초등학교부터 줄곧 반장을 했다는 다영, 졸업식 날 조폭을 동원한 제자에게 맞고 마음의 문을 닫은 담임 선생님.

 

담임 선생님은 해일의 미니홈피에 올린 병아리 사진을 보기 위해 일촌을 맺고, 지란과 진오는 병아리를 보기 위해 해일의 집을 방문한다.  그 이후 급격히 친해진 해일과 진오, 지란은 지란의 친아빠 집에 몰래 들러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지란의 복수를 함께 한 셈이다.  그 자리에서도 해일은 도벽을 참지 못하고 넷북을 훔친다.  그 모습을 거울을 통하여 모두 보았던 진오는 해일에게 낙담한다.  지란의 친아빠가 사는 아파트에서 관리소장을 맡고 있는 해일의 아빠가 어느 날 지란의 친아빠가 버린 가구를 집으로 가져오는데 거기에는 자신들이 했던 낙서가 적혀있다.  해일은 그 우연의 일치에 당황하며 진오와 지란에게 자신이 도둑임을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해일이 지란의 사물함에서 전자수첩을 훔치는 것을 보았음에도 입을 다물고 있던 다영을 포함하여 진오, 지란에게 해일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자신의 일기에 적는 일방적인 시인이 아니라, 조금은 두렵고 낯선 일이었지만 친구들에게 자신이 도둑임을 밝히고 잘못을 빈다.  마음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는 작업이다.  지란은 자신의 친아빠 집에서 해일이 훔친 넷북을 돌려 받고 그곳에 저장된 자신의 사진을 보며 친아빠에 대한 미움이 연민으로 바뀐다.  그리고 어색했던 새아빠와도 친해지려고 노력한다.

 

이들 주인공과 더불어 해일과는 열두 살 차이가 나는 해일의 형 해철과 해일의 담임 선생님은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하고 해일의 감정 변화에 개연성을 입힌다.  흔하디 흔한 성장 소설로 치부될 수도 있는 구성이지만 담임 선생님과 해철을 더함으로써 세대 간의 조화도 꾀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마음 색깔로 이 시대를 화폭으로 삼아 한 장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그림에 내 몫이 얼마나 되느냐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완성된 그림이 얼마나 조화로운가에 따라 삶은 완성되는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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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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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 사회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보편성을 추론할 수 있는 몇몇 클러스터(cluster), 예컨대 문화, 국가, 주권, 민족,가정 등 동질적이고 영속적이며 심원한 상호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러한 클러스터들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파괴되거나 해체되어 그 형체를 유지하기 힘든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 교수는 현대의 이러한 특성을 '액체성'(liquid)으로 규정하고 있다.  바우만 교수가 말하는 '액체성'이란 우리 삶의 기준이 소멸하고, 국가기능 약화로 인해 시장의 장악력이 강해지는 일련의 현상을 의미한다.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주던 국가 장치가 축소되고 개인의 삶이 파편화되는 결과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소비시장의 중심에서 언저리로 내몰리는 현대인들에 대한 자각과 그 대안을 모색하는 지표가 될 수 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우만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책에서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한번에 끝나는 일년 정도 걸리는 실험을 했고,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특별한 계획이나 기획 없이, 그리고 내가 무엇을 논의하겠다는 논제에 대한 일람표도 만들지 않고 실험을 시작했다.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을 기록하고자 했고, 사건들이 부각되었다가 사라지는 발전 과정을 지켜보고자 했다. 그 사건들을 요약하고, 의미를 이해하고자 했으며, 그것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읽고 흐르는 ‘사물의 질서’에서 장소들을 발견하고자 했다. 200년 전에 살았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처방이기도 한 ‘작은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라’는 말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 우리 시대의 본성을 연역하는 것은 일 년 동안 일어난 사건의 연대기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그 사소한 것에 남겨진 총체성의 성격이다. 때때로 참으로 사소하고 겉으로 보기에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파편들일지라도….”

난파선의 작은 파편처럼 유동하는 액체의 세상에서 부유하는 현대인에게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현대의 모습을 44편의 편지로 옮긴다.  의미없이 제각각 떠도는 작은 파편에서 세계의 질서를 읽어내려는 노력의 산물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다.  구체적 현실에서 보편적인 문제의식으로 확대하는 일반화의 작업은 사회학자로서의 저자가 취할 수 있는 추상적 사유의 직접적인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땅 위에 굳건히 선 농사꾼이 출렁이며 떠도는 뱃사람들을 바라보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나에게 또는 내가 너에게 전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액체성의 시대에 살면서도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조금은 낡은 사고방식의 틀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난 직후에야 비로소 변화를 감지하듯이.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농사꾼인 동시에 어부인 셈이다.

 

"삶을 선택하는 일들에는 차근차근 읽고 하나하나 잘 따라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어떤 설명서도 부착되어 있지 않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아니면, 로마의 시인 루칸이 사랑에 관해 남긴 아주 기억할 만한 의견까지 동의하자면,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사랑하는 일처럼 운명에 인질로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삶이란 정말 불쾌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무서운 것일까?  그럴 것이다.  더구나 틀림없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정말 곤란한 문제는 살아가는 일에는 또 다른 인생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P.374)

 

나는 가끔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며 의문을 던질 때가 있다.  '나는 절대적이고도 확고하게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는가?  내 인생의 경로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을 실감하고 생생히 기억하며 미래의 변화를 대비하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나는 그 어떤 질문에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  스무 살 때에도 그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으며, 인생의 반을 허비한 지금의 시점에서도 그렇다.  바우만 교수는 이 책에서 사소하지만 중요한 사건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어쩌면 그 작은 사건들이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기에.  인간의 지식이란 이성에서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획득된다는 말은 이 책에서도 유용하다.

 

"즉 교육은 표면에 드러나는 각양각색의  인간 경험 밑바탕에는 분명 불변하는 세계의 질서가 놓여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분명 인간 본성을 지배하는 영원한 법칙들이 있다는 가정 또한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가정은 지식이란 분명 선생들로부터 학생들에게 전달될 필요가 있으며 또 이런 방식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정당화시켰다.  또한 두 번째 가정은 선생들이 다음과 같은 자기 확신에 물들게 만들었다.  선생인 자신들은 반드시 자기의 학생들이나 피보호자들이 따라하고 모방하기를 바라는 본보기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만큼 타당성을 갖는 그러한 본보기다운 태도를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는 확신 말이다."   (P.201)

 

 유동하는 액체성의 시대에 영원하다고 확신하는 어떤 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의 확신과 상반되는 어떤 실재를 현실에서 보게 될 때 그 고체성의 확신은 비수가 되어 나의 가슴에 꽂힌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학과 같은 미련함을 버리지 못한다.  현실을 수용하고 인정하기는커녕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외면하며 때로는 분노한다.  액체에 떠있는 고체는 쉽게 뒤집혀지고 떠밀리기 마련이다.  두 발을 뻗대고 힘을 쓸 수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힘만 낭비할 뿐이다.  사소하고 작은 변화라도 놓치지 않고 관찰할 것이며, 이 세계의 이상함과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인간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했던 카뮈의 확신을 믿기로 하자.

 

2012년에 우리는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선택을 했다.  어차피 선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좋든 싫든 공동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작은 변화의 일면에는 언제나 불만과 실망이 섞이게 마련이고 부지불식 간에 그렇게 쌓인 실망과 불만이 예고도 없이 새로운 변화를 몰고올 것이라는 점이다.  작은 사건의 면면을 살펴 미래의 또는 현재의 큰 변화를 감지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어 이 책은 그 바탕이 될 것이라고 본다.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상을 보고/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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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적 금융 사회 - 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제윤경.이헌욱 지음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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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 또 못 알아 듣는군. 묻는 내가 그르지, 마누라야 그런 말을 알 수 있겠소. 내가 설명해 드리지. 자세히 들어요.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홧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요,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 났더면 술이나 얻어 먹을 수 있나…….』

사회란 무엇인가? 아내는 또 알 수가 없었다. 어찌하였든 딴 나라에는 없고 조선에만 있는 요리집 이름이어니 한다.    -술 권하는 사회 中에서-

 

위에서 인용한 글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의 일부이다.  일제 강점기의 부조리한 사회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와 절망을 그린 이 작품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은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데 뭔 얘기냐고?  맞는 말이다.  다들 건강 염려증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제 더이상 술을 권하지 않는다.  권하여도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어떤가?  빚 말이다.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요즘 사람들에게 빚을 권한다면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나는 주식투자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  지인의 권유로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야말로 주식의 주자도 모르는 주식 문외한이었다.  '적은 돈으로 그저 배워나 보자'하는 마음으로 투자했던 백오십만 원을 한달 반만에 모두 날렸다.  '경험삼아 한 일이니 그만 잊고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하자'는 마음도 있었으나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나 자신이 맥없이 당한 듯하여 그대로 물러나기에는 뭔가 개운치가 않았다.  나는 그 길로 서점에 들러 주식에 관한 책이라면 모조리 사서 읽었다.  새벽 2, 3시를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제발 잠 좀 자라'며 핀잔아닌 핀잔을 퍼부었다.

 

근 반 년 정도를 그렇게 책만 읽었다.  그때 읽었던 주식 관련 서적만 해도 줄잡아 200권은 넘지 싶다.  그 후 나는 아내에게 주식투자를 다시 해보겠다며 당당하게 500만 원을 요구했다.  아내는 혀를 끌끌 차며 못 미더워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결코 물러설 것 같지 않았던 나의 결심에 아내는 마지 못해 돈을 내어 주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주식투자의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원금을 돌려주고도 매달 일정액을 아내의 손에 쥐어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2001년에 있었던 미국의 9.11테러와 그 여파가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강타했을 때 나는 주식투자를 그만두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천재지변과 같은 사건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아주 작은 징조라도 감지했어야 주식투자자의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마음은 조금 씁쓸했지만 미련은 남지 않았다.

 

내가 주식투자에 매달렸던 그 기간 동안 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었다.  소위 '고수'라는 사람들도 만났고, 가진 돈을 몽땅 잃고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도 만났었다.  그 중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군산에 살던 한 아줌마인데 남편 몰래 주식을 하다가 큰 돈을 잃고, 그것을 회복하려고 사채를 빌려 투자했으나 그마저도 다 잃고 돈을 갚을 길이 막막해진 그 분은 유서를 써 놓고 가출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들을 남겨둔 채 차마 죽을 수도 없었다고 했다.

 

그 여인이 막다른 골목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두 배, 세 배의 미수금을 제 돈처럼 투자할 수 있도록 배려(?)한 증권사의 꼼수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신용 사업자인 금융기관은 신용 소비자인 개인을 한순간에 채무노예로 만들 수 있다.  금융기법이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금융기관은 대부분의 수익을 예대마진에서 취한다.  결국 어떠한 감언이설을 동원하여서라도 대출을 늘려야만 그들의 수익이 증가하는 구조인 셈이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과도한 돈을 대출하였다 한들 은행으로서는 손해볼 장사가 아니다.  채무 불이행의 책임은 고스란히 개인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빚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기보다는 빚을 권하는 사회.  그 중심에는 언론과 국가도 예외일 수 없다.  빚을 통한 레버리지(지렛대)효과를 강조하는 언론, 복지보다는 빚을 통하여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국가.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누구에게도 맘 놓고 기댈 수 없는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소비자신용의 증가는 금융회사와 기업에는 크게 이익이 되지만 소비자에게는 상처뿐인 영광이다.  소비자신용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소비자의 파산증가로 이어진다.  따라서 소비자신용의 증가를 통해서 금융회사와 기업이 수익을 얻고 국가 경제가 성장하였다면 그로 인한 부담도 소비자만이 아니라 금융회사, 기업, 사회 전체가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소비자신용의 증가에 따른 이익은 금융회사, 기업, 국가 모두가 누리면서 그에 따른 손해는 소비자들만 부담하라고 하는 매우 이상한 논리가 판치고 있다."    (P.123)

 

이 책에서는 가계부채 1000조 시대를 살고 있는 가난한 서민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모순을 저자는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미래의 소득을 담보로 대출을 권장하고 그 놀음에 속아 평생 빚만 갚으며 살게 만드는 사회가 과연 제대로 된 사회인가?  우리 모두가 곰곰이 되짚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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