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집 -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지음, 이세진 옮김, 에리카 레너드 사진 / 윌북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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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마다 집을 고르는 기준은 따로 있는 듯하다.

집이 위치한 장소에서도 어떤 이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장 근처를, 또 어떤 이는 사람들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고즈넉한 시골을, 그런가 하면 집의 구조나 형태에 있어서 어떤 이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집을, 또 어떤 이는 목가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집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취향이 저마다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니 집에 대한 취향도 제각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가끔 '집에도 다 인연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집이란 단순히 먹고 잠자기 위한 어떤 공간, 비바람으로부터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바쁜 현대인에게 있어 집이란 그저 그런 곳이며, 운이 좋으면 돈으로 한몫 쥘 수 있는 그런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과 영감을 필요로 하는 작가에게 있어 '집'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각별할 것이다.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로서의 집이 아닌, 문학적 열정이 살아 숨 쉬고 생동감 넘치는 글이 씌어지는 작가 내면의 외딴 곳, 친밀감과 더불어 자청한 고독이, 기시감(deja vu)과 낯섦이라는 상반된 감정들이 조심스런 균형을 이루는 곳으로서의 집 말이다.  예컨대 그것은 젊고 매혹적인 여성에게 느낄 수 있는 성욕과 성스러움의 상반된 감정,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으면서도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만 싶은 성스러운 느낌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집은 오브제로서의 사물인 동시에 작가의 생각과 함께 변화하고 나이들어가는 생명체로서의 대상일 터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살고, 창조하고, 고통받았다.  스스로 택한 고독과 글을 써야만 한다는 긴박감이 언제나 그곳에 도사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글쓰기의 열정으로 집을 채웠고, 바로 그만큼 집을 사랑했다."    (p.7 '서문')

 

이 책의 저자인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는 프랑스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저자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시기에 발자취를 남긴 20인의 작가들과 그들의 집을 취재한다.  저자가 이 시기의 작가를 택한 까닭은 이 시기가 현대문학의 태동기이자 건축과 라이프스타일이 급속도로 변화한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작가들은 지금은 모두 죽고 없지만 집에 깃든 작가들의 영감과 풍광에 섞인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도 호기심과 함께 여행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저자의 여정은 헤르만 헤세의 카사 카무치에서 시작된다.  스위스의 루가노 호수를 에워싼 언덕에 자리한 몬토뇰라 마을의 장엄하면서도 괴상하게 보이는 바로크식 사냥 성채가 바로 카사 카무치다.  <클라인과 바그너>, <클링소어의 마지막 여름>, <싯다르타>,<황야의 늑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나온 산실이기도 하다.

 

이어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머물렀던 '프티트 플레장스(Petite Plaisance : 작은 기쁨)'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키웨스트 저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비타 색빌웨스트의 '시싱허스트'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두 집 살림'이, 하트포드에 위치한 마크 트웨인의 집이 소개된다.  마크 트웨인은 작가로서는 성공했지만 무모한 투자로 결국 하트포드 저택을 잃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몇 년 후 하트포드를 방문하고 그 회한을 이렇게 썼다고 한다.

 

"그 집은 우리를 볼 줄 아는 눈과 마음과 혼이 있었다.  그 집에는 합의,  요청, 깊은 공감이 있었다.  그 집은 우리의 일부였고 우리는 집의 신뢰를 얻어 은총과 축복의 평화 속에 살았다."    (p.128)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집 '몽크스 하우스'를 샀던 순간에 대해 "내 평생을 통틀어 그토록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5분은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녀의 일기에 기록했다고 한다.  또한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장 지오노는 그의 고향 프로방스를 너무나 사랑하여 마노스크 언덕에 터를 닦고 콩타두르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언젠가 그곳에서 친구들과 판(Pan)의 신화를 되살리고 싶었다고 한다.

 

저자의 여정은 덴마크의 여류작가 카렌 브릭센, 이탈리아의 카를로 도시,영국 웨일스의 딜런 토머스,프랑스의 시인이며 다재다능한 작가였던 장 콕토로 이어진다.  장 콕토가 살았던 밀리 라 포레 자택은 지금도 변하지 않은 채 유보된 시대의 마술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다고 한다.  장 콕토의 영화에 출연하여 하루 아침에 유명해진 장 마레는 장 콕토를 이렇게 회고한다.

 

"글쓰기든 그림이든 낙서든, 그는 항상 자기 밖의 힘이 내리는 명령에 휘둘리듯 일했습니다.  하루는 기차에서 갑자기 나에게 종이를 좀 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한테는 주소 적는 수첩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몇 쪽뿐이었지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글이 잔뜩 떠올랐어.  당장 이 글을 쏟아내지 않으면 나중에는 쓸 수 없을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p.257)

 

어쩌면 작가들에게 집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은 영감과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를 고요히 간직했다가 작가의 손과 입을 통해 일시에 풀어내는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여정은 장 콕토를 지나 영국의 위대한 작가이자 여행가인 로렌스 더럴, 생의 대부분을 옥스퍼드에서 살았던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노르웨이의 소설가 크누트 함순, 아일랜드의 대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로티를 거쳐 이탈리아의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집에서 끝난다.

 

작가에게 집은 <걸작의 공간>을 쓴 J.D. 매클라치가 밝혔듯 동시대를 사는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소통의 공간이자 자신의 내면 세계로 끝없이 침잠하는 은둔의 공간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에 있어 반쯤의 세월이 담기는 곳, 집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작가의 집>을 읽는 내내 그 물음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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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 Free - 자기를 찾아 떠나는 젊음의 세계방랑기
다카하시 아유무 글, 사진, 차수연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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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만의 꿈이 있고, '언젠가'라는 타이틀이 붙은 실행의 의지를 낡은 메모지처럼 지니고 다니지만 정작 자신의 꿈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명처럼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꿈을 실천에 옮긴 소수의 사람들을 마냥 부럽게 쳐다보곤 한다.  그리고 여러 이유를 들어 그들과 나를 비교하게 마련이다.  대개는 그 소수의 사람과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나 여건이 다르다는 데 촛점이 맞춰지곤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많은 변명과 반박의 말을 한들 결과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며, 심지어는 말하면 말할수록 자신의 모습만 초라해진다는 사실을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알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릴없이 누군가의 책으로 슬쩍 눈길을 돌리곤 한다.

 

"어릴 적, 자전거를 갖고 나서 온 동네가 내 놀이터였다.

열 여덟, 바이크를 갖고 나서 온 도시가 내 놀이터였다.

지금, 나는 '시간'을 갖고 나서 온 세계를 내 놀이터로 삼으려 한다."    ('playground' 中에서)

 

이 책을 쓴 다카하시 아유무(高橋 步)는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괴짜 시인이자 록 가수이며 사업가라고 한다.  학업에 별 흥미를 못 느껴 명문 대학을 중퇴하고, 갓 스무 살에 온갖 빚을 끌어 대 아메리칸 바 'Rockwells'를 개업해 제법 장사가 잘 되자 이번에는  자서전을 쓰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Sanctuary'(신전, 성당, 거룩한 장소라는 뜻) 출판사를 설립하였고, 자서전을 포함한 몇 권의 책을 발간해 뜻밖에도 큰 호응을 얻어 유명인사가 되자 혼자서 'GREAT JOURNEY'라는 일본열도 전국순회콘서트(트럭을 타고 다니며 아무데서나 열었던 콘서트임)를 감행한 덕에 경찰에 쫓겨다니기도 했다.  26세에 출판사에서 손을 뗀 그는 사야카와 결혼해 약 2년간의 세계일주 여행을 하였고 이 책이 그 여행의 산물로 남았다.

 

책은 여행지에서 그가 찍은 사진과 짧은 단상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책이지만 이상하게도 막혔던 속이 '툭'하고 터지는 느낌이 든다.  저자의 자유로운 생각이 지면 가득 묻어있다가 독자의 동공 속으로 휘리릭 빨려드는 것처럼.  

 

"타인의 법칙에 묶여 있는 사람을 '가축의 돼지'라 한다.

자신의 법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쾌락의 돼지'라 한다.

어느 쪽이건, 나는 돼지가 싫다."

 

손수 만든 자신만의 원칙에 따라 살건 아니면 타인이 세운 원칙에 따라 살건 후회는 남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각자의 삶이니 가타부타 평을 할 문제는 전혀 아님에도 우리는 습관처럼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곤 한다.  저자와 같은 사람이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 때면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가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른 사람의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일본에서 태어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마음이 없는 독지가보다 마음이 있는 바텐더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마음이 없는 정치가보다 마음이 있는 청소부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마음이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떠돌며,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마음이 있는 일')

 

여행을 하다 보면 아주 작은 일에도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작고 사소한 도움에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할 때가 있고, 모르는 이의 아픔도 절절이 느껴질 때가 있다.  여행 중에는 일체의 욕심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런 모습에 나조차도 생경함을 느끼곤 하지만, 더불어 나의 내면에 아직도 그런 순수함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여행이 필요한 까닭은 일상에 묻힌 자신의 진면목을 여행지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좁고 뭐든지 있는 장소'에 있을 때는 길을 선택하는 데 필사적이었다.

'넓고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있을 때는 그냥 걷기만 했다.

고르다 지치기보다, 걷다 지쳐 잠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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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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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회귀는 단순히 시간적 역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시간에 채색된 과거, 시간이 지워버린 과거, 또는 현재의 내가 그 나이 때에 이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여러 모습들로 인해 여러 관계 속에서의 객관적 나를 오롯이 떠올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지난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의 나와 과거의 기억 속에 있는 내가 끝없이 갈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기억하는 주체가 현재의 나이므로 그 주도권은 온전히 현재의 나에게 주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거란 현재의 내가 만들어 낸 상상의 세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나에게 객관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애당초 부질없는 짓인 듯 보입니다.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은 작가가 된 서른두 살의 현재의 내가 열여섯에서 열아홉이었던 과거의 나를 회상하는 소설입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 평하는 이 작품은 현재의 내가 지난 과거에 대해 얼마나 이기적이고 냉정한지 생각하게 합니다.  작품 속에서도 현재의 나는 그때의 사건을 발설하는 것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고 망설입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에 비해 모든 면에서 훨씬 우월하다고 믿는 것이겠지요.  작가가 된 서른두 살의 나는 처음부터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과거의 나에 대해 현재의 내가 하는 변형과 왜곡을 이해해 달라는 뜻이겠지요.  그런 까닭에 나는 작품 속의 과거의 나에게 연민과 동정의 눈길을 아니 줄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못 한 열여섯의 나는 외사촌과 함께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합니다.  무료함에 지쳐 두엄자리를 뒤적이다가 쇠스랑에 발바닥이 찍힌 곳, 그 쇠스랑이 보기 싫어 끝내 우물에 빠뜨렸던 곳,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바깥세상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 그렇지만 겨울에도 추웠던 기억이 없는 곳, 열여섯의 나는 모내기가 끝나던 마지막 날 밤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납니다.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있거라.  나의 고향.  나는 생을 낚으러 너를 떠난다."    (p.28)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도시로 온다'고 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이 생각납니다.  어쩌면 도시에 익숙해진 현재의 나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외사촌 언니와 나는 직업훈련원을 마치고 구로1공단의 어느 전자회사에 취직합니다.  그리고 큰오빠와 함께 구로공단역 근처의 서른여섯 개의 방이 딸린 '외딴방'으로 이사합니다.  그렇게 그곳에서 열여섯의 나는 힘든 도시의 삶을 견뎌냅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산업체 특별학급의 학생으로서 공부도 하며 힘겨운 나날을 버텨내는 것이죠.  마음 속으로는 오직 도시로 나오던 그날 밤 외사촌이 보여준 사진집 속의 아름답게 잠든 새를 꼭 보러 가겠다는 기약을 하며 말입니다.

 

외딴방 1층에는 희재언니가 삽니다.  그녀도 나와 같은 산업체 특별학급의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막과 같은 도시에서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같은 직장의 남자와 동거를 시작하지만 결국 남자는 떠나고 맙니다.  시골로 휴가를 다녀오겠다던 희재언니는 그 외딴방에서 자살을 합니다.  희재언니는 내게 문을 잠거달라고 부탁합니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희재언니의 방에 자물쇠를 채웁니다.  현재의 나는 그때의 기억을 몇 번이고 외면하려 합니다.

 

"그곳을 떠나와서도 언니와 비슷한 사람을 보거나 그 방과 비슷한 방을 보게 되면 내 가슴은 뛰고 숨이 막히곤 했지.  갑자기 멍해지거나 안절부절못했지.  주위가 산만해지고 잠이 깨면 다시 잠들지 못했어.  때때로 갑자기 어린애가 돼버린 것같이 판단력이 흐려지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그 사람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기도 했어......"    (p.327)

 

현재의 나는 그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여러 번 망설이고 방황하여 소설을 완성합니다.그리고 마침내 어느 해안도로에서 새들을 보게 됩니다.  고독과 절망 속에서 마음으로만 기약했던 그 다짐을 이룬 셈이죠.

 

"새들의 자취를 따라가다 바라본 바다 끝, 그 위의 어린애 같은 하늘, 나의 갇혀 있던 옛일들이 흩어지는 구름 속에 섞이는 걸 느꼈다.  그 자유로운 기억의 끝에서는 어느 해안가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물가의 바다 위에서 더 놀고 싶은데 엄마가 데려가려는 모양이었다.  저만큼 자동차 안에서 아이의 아빠가 자동차 클랙슨을 빵빵- 누르고 있었다.  엄마 품에 안겨 울면서 아이는 해안에서 멀어졌다.  기억할는지.  이 해안에서 울었다는 걸.  이 해안에서 자신이 존재했었다는 걸."    (p.423)      

 

 열여섯의 나이에 외딴방으로 걸어들어가서 열아홉의 나이에 뛰어나온 그 사 년의 삶과 좀처럼 화해가 되지 않는다고 작가는 고백합니다.  작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네 삶은 과거의 나와 끝없이 부딪치고 갈등하다 제 풀에 지쳐 조금씩 화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과거의 나와 싸우는 것이 참 우습지 않나요?  왜 그때는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말입니다.  과거라는 교과서에는 언제나 물음표가 달리고 나는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바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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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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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침은 언제나 '조용함'으로 시작된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조금은 경건하다 싶게, 아주 가끔은 나직한 비밀을 품은 채 집을 나선다.  혹여라도 작게 들리는 나의 발소리가 옆집 사람들의 달콤한 아침잠에 방해나 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움, 까치발을 하고 사붓사붓 걷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긴장의 끈에 옭죄인다.  때로는 이른 새벽에 출근하는 사람들의 우울한 얼굴과 마주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침은 아직은 잠이 덜 깬 부시시한 하늘과 아침을 준비하는 새들의 부산한 날개짓,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는 나무들의 차분한 시선 속에서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벌써 십수 년째 매일 아침 산을 오르고 있다.

새벽길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날이 그날일 것처럼 막연히 생각하게 마련이다.  단 하루도 지난 날과 같지 않음을 직접 걸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평온 속에 깃든 잔잔한 변화가 사람들을 얼마나 설레이게 하는지, 내 발로 두드리는 땅의 울림이 얼마나 가슴 벅찬 것인지, 까슬한 나무껍질의 감촉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완벽한 날들>은 오늘처럼 봄비가 내리는 날에 어울리는 책이다.  이런 날이면 '점액의 은빛 길을 남기며' 느릿느릿 나아가는 달팽이의 걸음에도 내 시선이 머물 것만 같다.  또는 여리디여린 아침에게도 '안녕'하며 인사를 건넬 것만 같다.  작가는 그 작은 소리에도 한껏 귀를 열고 평온함 속의 경이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우리는 마치 햇살 속에 숨겨진 신의 목소리마저 들을 수 있겠다는 헛된 욕망을 품고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나는 마음 깊이, 그러면서도 즐겁게 귀 기울였다.  비는 찾아 오는 장소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이곳 항구에, 넘실대는 모래언덕에, 소귀나무에 내리는 빗소리는 저지대의 더 풍성한 빗소리나 심지어 옥수수밭의 빗소리와도 다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빗속을 걸으며 이 좁은 곶의 빗소리를 뼛속 깊이 기억해두었다.  어디서든 어둠 속에 누워 빗소리를 들으면 내가 집에 있는지 다른 데 있는지 알 수 있다.  밤에 걸으면서도 리틀시스터 연못의 윤기 나는 어깨에 떨어지는 빗소린지, 더 길게 뻗은 해치스 항구에 음산하고 활기차게 내리는 빗소린지 알 수 있다."    (p.132 - p.133)

 

시인의 감성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사뭇다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또는 낯설고 외로운 먼 여행길에서의 이야기는 시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나도 어쩌면 지금보다 더 젊었던 시기에는 새롭고 다양한 것, 희귀하고 누구나 탐내는 것, 위험하지만 내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것들에 한없이 끌렸는지 모른다.  삶의 가치는 오직 그것 뿐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평온하기를 기원했었다.  그 상반된 감정이 차츰 평범함 속으로 갈무리 되었을 때 숨겨진 삶의 경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목격했다.  여름이 물러가고, 다음에 올 것이 오고, 다시 겨울이 되고, 그렇게 계절은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은 우주 안에서 그 뿌리, 그 축, 그 해저로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흔들리고 있으니까.  세상은 재밌고, 친근하고, 건강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사랑스럽다. 세상은 정신의 극장이다.  하나의 불가사의에 지극히 충실한 다양함이다."    (p.137-p.138)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고 프로빈스타운의 자연에 둘러싸여 50여 년을 지내온 메리 올리버.  79세인 그녀는 여전히 시인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시인들과 작가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워즈워스, 셸리, 에머슨, 너새니얼 호손.  그러나 이 책에서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평범함 속에 깃든 삶의 의미와 자연에 대한 찬사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시인, 생태시인이라고도 불리는 그녀의 시가 이 책에서는 '그저 책갈피에 앉아 숨만 쉬는' 형태로 몇 편 실려 있다.  조금은 아쉽지만 말이다.

       

"시는 바늘처럼 단순하든, 물레고둥 껍데기처럼 화려하든, 백합 얼굴 같든, 상관없어.

시는 말들의 의식, 하나의 이야기, 기도, 초대, 아무런 현실감 없이 독자에게 흘러가서 마음을 흔드는,

진짜 반응을 일으키는 말들의 흐름."    (p.126)

 

하루 종일 봄비가 내리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평온함으로, 누군가에게는 스산함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무덤덤함으로 그 바라보는 느낌도 제각각이겠지만 우리는 무수히 반복되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과 그 속에서 나의 존재를 느낄 만큼 나이가 들면 격한 감정의 회오리에도 휘말리지 않는 메리 올리버처럼 차분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꿈꾸듯이 나도 이 책의 작가처럼 늙고 싶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미세한 소리에도 반응할 수 있는 그런 감성을 유지하고 싶다.  익숙함이 곧 무관심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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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의사, 죽음의 땅에 희망을 심다
로스 도널드슨 지음, 신혜연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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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던가.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8월의 어느 날 나는 뉴질랜드 남단 퀸스타운 근교의 카와라우 다리 (Kawarau Bridge) 한 복판의 점프대에 서 있었다.  같은 교실에서 낯선 언어를 배우는, 국적도 다르고 나이도 제각각인 그들과 함께.  방학이었고 가족과 멀리 떨어진 나와 그들은 적당히 길들여진 호주의 하늘을 갑갑해했다.  우연은 항상 자극적인 무엇인가에 끌리곤 한다.  트레킹이 목적이었던 우리가 '번지점프'로 발길을 돌렸던 것도, 구경만 하자던 우리 모두의 생각이 '그래도 한 명은...'의 느닷없는 결정으로 돌변한 것도.

 

나는 그렇게 점프대에 섰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호흡처럼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두려움에 파랗게 질린 강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곁에선 매캐한 먼짓내를 풍기던 안내 요원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나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그의 억센 팔로 붙잡았고, 그 순간 멀리 남반구의 하늘이 잿빛으로 어두워졌었다.  안내 요원의 카운트 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했었다.  나는 차마 밑을 보지 못한 채 먼 하늘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어쩌면 누군가의 힘에 떠밀렸는지도 모른다.  결국, 먼지처럼 가벼워진 두려움은 강물을 스치는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가끔 도저한 운명의 손아귀에 우연처럼 떨어질 때가 있다.  <청년의사, 죽음의 땅에 희망을 심다>를 쓴 로스 로널드슨도 그랬는지 모른다.  1969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라사에서 발생한 치사율 90%의 괴질병인 '라사열'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질병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로 향하던 그의 발길은 한번쯤 주춤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라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처음에는 감기나 독감 증상으로 시작하지만 이후 몸 전체에서 체액이 흘러나와 호흡기 장애나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저자는 설치류의 일종인 다유방쥐의 분비물을 통해 인간에게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진 라사 바이러스의 연구를 위해 위험천만의 땅, 시에라리온을 향해 떠난다.   친구들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시에라리온 케네마에 위치한 라사병동에서 평생을 의료구호와 라사 바이러스의 치료 및 연구에 몰두했던 애니루 콘테 박사를 만난다.

 

라사 병동에서 콘테 박사와 라사열 사례의 기초 치료를 익혀가던 로스는 어느 날 타지역으로 세미나를 떠나는 콘테 박사를 대신해 라사 병동을 맡게 된다. 그 엄청난 책임감에 짓눌려 자신의 결정에 목숨을 건 환자들에게 해를 주지는 않을지, 누군가 자신의 어설픈 진료 행위를 탓하지는 않을지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지은이는 환자들과 의료진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열악한 진료 시설과 전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한 간호사들과 함께 하면서도 그는 생명을 지키는 의사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는다.  비록 그 당시에는 의학도의 입장이었지만.  저자는 자신이 라사 병동을 맡게 되었던 순간을 이렇게 썼다. 

"나는 멍한 상태로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어스레한 길 위에서, 나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누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  시아, 빈타, 니니, 그리고 내 책임하에 있는 모든 환자들이 러시안 룰렛 게임처럼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죽음의 운명이 과연 누구의 얼굴에서 멈출지 불안했다."    (p.189)

 

저자는 자신이 맡게 된 라사 병동의 환자들, 라사열 치료에도 불구하고 포도상구균의 감염으로 생사를 넘나들던 두 살배기 시아와 라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어린 임산부 등을 치료하는가 하면 원인도 모른 채 죽어 나가는 많은 환자들을 가슴 아파 하기도 한다.  잦은 내전과 고질적인 가난의 굴레 속에서 생명은 너무나도 여리고 하찮은 것이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어린 임산부의 아이를 간호사는 당현하다는 듯 엄마에게서 떼어 놓는다.  저자는 그런 모습에 분노하고 그 어린 생명을 살리고자 노력한다.  결국 아이는 살아나고 병원이 떠나가라 울기도 한다.    

 

"비극은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연적인 부분이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비극적인 사건들은 종종 인간이 지닌 최악의 본성에서 비롯되지만, 그와 동시에 인류의 최선을 볼 수 있는 창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비극을 통해서, 우리는 살고자 하는 희망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희생자와, 이기적인 보상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고귀한 삶을 바치는 의료 종사자들을 만나는 특권을 누린다."    (p.382)

 

콘테 박사가 복귀하고 저자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짧다면 짧았을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던 저자는 심근염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이 책은 그가 환자로 지내던 그 기간에 옮겨 적은 것이다.  책의 내용은 저자가 시에라리온에 도착했던 순간부터 미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치력의 부재와 그로 인한 가난, 질병의 만연은 한 생명을 너무도 쉽게 앗아가곤 한다.  그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었던 저자는 내가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번지점프를 했던 그 순간을 떠오르게 했다.  삶이 던져준 우연은 두려움 없이 도전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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