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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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한 구절 밑줄을 긋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생각할수록 부럽기 그지없다.  나는 그가 쓴 대부분의 책들을 읽어왔지만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읽지 않았었다.  부족한 사탕을 두고두고 아껴 먹으려고 몰래 감추어 둔 것은 아니다.  제목만 보고 내용을 지레 짐작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종교 비판서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구미가 당기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최근에 읽은 어느 책에선가(요즘은 책을 읽어도 리뷰를 잘 쓰지 않는 탓에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의 인용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나는 비로소 내가 그동안 책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책은 종교 비판서가 아닐 뿐더러 오히려 종교는 인류가 오랜 세월을 거쳐 세밀하게 구축한 지적 창조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종교 찬양서라고 해야 옳다.  다만 종교인들이 가질 수 있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무비판적 신봉이나 타종교에 대한 일방적 비판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저자는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종교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비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무신론자에게는 일종의 오락이 될 수도 있다.  냉정한 종교 비판자들은 신자들의 아둔함을 가차 없이 속속들이 이 세상에 드러내는 일에서 상당한 기쁨을 발견하며, 자신의 적이야말로 철저한 바보이거나 광인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야만 비로소 공격을 멈춘다.  이런 과제가 나름의 만족감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이슈는 하느님이 존재하느냐 않느냐 여부가 아니라, 만약 하느님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이라면 이런 논의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철저한 무신론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종교가 유용하고, 흥미롭고,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때때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전제이다.  또한 종교의 관념과 실천 가운데 일부를 세속적인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분명히 흥미롭다는 것이다."   (P.12) 

 

이 책은 1. 교리가 없는 지혜, 2. 공동체, 3. 친절, 4.교육, 5. 자애, 6.비관주의, 7. 관점, 8. 미술, 9. 건축, 10.제도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소제목만 훑어보아도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을 아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종교는 알게 모르게 인간의 행위 전체에 관여하고 법이나 제도가 무관심하거나 방치한 일부 영역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존 종교가 제시해 온 여러 가지 인류 문제의 해결책마저 무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초창기 종교의 초자연적인 맥락을 종교가 갖는 여러 유용성과 분리하여 우리가 흡수하여야 할(또는 흡수하기를 바라는) 실용적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가끔 반대론자의 반박을 불러 일으킬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의 폭 넓은 지식과 사고의 깊이를 생각할 때, 과연 그럴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 책의 내용 중 흥미롭지 않은 부분을 거의 찾을 수 없었지만 그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고, 비관주의적 세계관 일부를 적는다. 

 

"비관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해서 삶에서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관주의자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뛰어난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법이 없으므로, 가끔 어두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소한 성공에도 깜짝 놀라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현대의 세속적 낙관주의자들, 곧 자격에 대한 감각이 잘 발달한 낙관주의자들은 지상 낙원의 건설에 바쁜 나머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신비스러운 현상들을 대부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P.203)

 

부모님 모두 세속적인 유대인이셨기에 자신도 철저하게 무신론적인 가정에서 자라게 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을 선뜻 수용하기도 어렵고, 종교학자도 아닌 그가 여타 종교의 교리나 수행법을 연구했을 리도 만무하기에 저자의 논거는 다분히 기독교적인 측면으로 편중되고 일반론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우리가 종교에서 얻을 수 있는 실용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이 책을 읽은 효과는 충분하리라고 본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영국인 알랭 드 보통, 그의 특이한 이력만큼이나  독특하고 기발한 발상이 그의 저서에서 언제까지고 빛을 발할 수 있기를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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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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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작가 '위화'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 싶다.  <허삼관 매혈기>를 비롯하여 <형제>, <무더운 여름>, <인생> 등 많은 작품이 있는데 나는 그 중 <인생>을 감명깊게 읽었다.  물론 <허삼관 매혈기>도 좋았다.  그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두보의 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문체가 시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의 짧고 명료한 문체에서 유유자적하는 도인의 시선처럼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세상에 소설가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독자의 마음 언저리에 닿을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위화의 작품이 인기있는 이유는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인 듯싶다.

 

2009년 미국 퍼모나 대학에서 있었던 중국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며 썼다는 위화의 신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었다.  중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을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등 저자가 가려 뽑은 10개의 단어에 담아 문화 대혁명 이후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파헤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국가로서의 중국이 변화하는 만큼 그 안에 사는 민중의 삶도 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가 될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잔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P.353)

 

돌이켜 보면 나는 중국의 문화 혁명기에 버금가는 산업화의 시기에 자란 탓에 작가의 이야기가 남의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5.18 만주화 운동, 외국 기자가 몰래 촬영한 그때의 실상을 영상으로 접했을 때 나는 충격과 함께 그 잔인함에 경악했었다.  교정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자보가 연일 나붙고, 학생회관 벽면을 장식하던 걸개그림과 교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오가던 화염병과 최루탄, 피 흘리며 끌려가는 학생들, 학사주점의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서 구슬프게 들려오던 민중가요, 국가 권력의 강압에 마냥 무기력하기만 했던 학생들의 한숨 소리와 막걸리잔 부딪는 소리...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닌데 사람들의 기억은 세월보다 빨리 잊혀진다.  이런 현상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시대의 격랑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 세월이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우리는 그것을 잃어가고 있다.  작가는 그것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아프게 쓰고 있는 것이다.

 

책을 덮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을 때 문득 떠오르는 시가 있다.  이화인 시인의 시 한 수.  위화 작가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은 독자라면 나즉나즉 읊어보면 좋을 듯하다.

 

길 위에서 길을 잃다/ 이화인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남겨진 한 뼘의 간격조차 좁히지 못하고

스쳐 지나쳐야만 했던 사람들

시선 속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한발 비켜서야만 했던 일들

문득 작은 파문으로 밀려와

흔들릴 때마다,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산그늘이 어둠보다

한걸음 먼저 찾아드는 산방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먼지와 땟국에 물들지 않고 산다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을 때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내게 주어진 길을 가면서도

진정,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인지 내게 되묻곤 한다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길을 가면서도 길 위에서 길을 잃고

길 위에서 길을 찾아 헤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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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엔젤
마가렛 로렌스 지음, 강수은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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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언론에서는 곧 있을 대통령 선거 보도로 떠들썩하다.

후보들의 일정에서부터 그들의 말, 표정 등 세밀한 것에 이르기까지 각 언론사의 취재진들은 이런 것도 기삿거리가 되나, 싶은 것들도 앞다퉈 보도하곤 한다.  덕분에 정작 알고 싶은 기사는 항상 뒷전으로 밀린다.  투표의 주인공이 될 국민들은 다들 시큰둥한 눈치인데 기자와 정치꾼들, 그 옆에서 기생하는 온갖 시정잡배들만 한껏 들뜬 분위기다.  12월 대통령 선거일까지는 오직 그들만의 축제요, 그들만의 전쟁이 이어질 것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이야기,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만한 작은 이야기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스톤엔젤>을 읽었다.  캐나다가 사랑하는 여성 작가 마가렛 로렌스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나는 사실 어려서 읽은 <빨간 머리 앤>을 빼면 캐나다 출신 작가의 작품은 읽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책은 술술 읽혔다.  무엇보다 자극적이거나 가볍지 않아서 좋았다.  지독히 자극적인 소재와 스토리 전개, 감상적인 문체가 주류를 이루는 요즘의 소설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온 젊은 세대에게는 평범하거나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날로그 시대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기성세대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다.

 

소설이 그 시대의 반영물이라고 할지라도 '영혼의 정화'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그것은 천편일률적으로 찍어 낸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의 주인공인 헤이거는 아흔 살이 넘은 노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푸근하고 넉넉한 인상의 할머니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이다.  지극히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고집이 센 노인이다.  아들 마빈과 며느리 도리스의 보살핌을 받으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는 과거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이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추억에 빠진다.  자주 이러지는 않는다.  아니, 어쨌든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노인이 과거에서 산다고 말하지만, 허튼소리지.  요즘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하루하루를 진귀하게 여기고 있다.  마치 처음으로 민들레를 볼 때 잡초 같은 면을 잊어버리고 그저 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탄하듯, 오늘 하루를 꽃병에 꽂고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P.10)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도 그랬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모진 고생을 하며 2남 1녀의 자식을 키우셨던 할머니는 결코 당신이 힘들어 하던 과거를 말하지 않았다.  차멀미가 심하여 버스를 타지 못하던 할머니는 여든이 가까운 연세에도 신대방동에서 용산을 오직 자신의 두 발로 걸어다녔다.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당신의 아들을 보며 자신의 탓인 양 가슴을 치셨다.  할머니는 잘못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마늘을 까셨다.  그렇게 푼푼이 모은 돈으로 장성한 손주들에게 용돈을 쥐어주셨고 매년 거르지 않고 다니셨던 어느 사찰의 부처님께 손주들의 미래를 축원하셨다.  딱 삼 일만 앓고 죽게 해달라는 당신의 염원과 함께.  그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할머니는 단 하루도 앓지 않고 돌아가셨다.

 

헤이거의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자신을 낳다가 죽은 어머니,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두 오빠, 자신에게 쏟는 아버지의 기대.  어머니의 묘지 앞에 세워진 '천사상(stone angel)'을 보며 자란 헤이거는 아버지가 세워 놓은 그 천사상처럼 자신도 아버지의 체면과 위신을 세우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그녀가 선택했던 결혼.  남편 브램은 거칠고 무례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한 번 결혼하였다가 사별한 남자였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결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헤이거의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언장은 벽돌집의 내용물을 어떻게 처분하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이 이상 나와 화해하려고 노력할 수 없으셨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과 부동산에 대한 구체적 지시사항은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아버지가 우아한 영원의 궁궐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셨다가 자기 무덤이 노란 구륜앵초에 뒤덮인 걸 보고 모욕감에 젖지 않아도 되도록 가족 묘지를 돌보는 영구 관리비가 되었다.  남은 돈은 모두 시에 환원되었다."   (P.82)  

 

헤이거는 두 아들을 두었다.  마빈과 존. 둘째 아들 존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던 친구 로즈의 딸과 결혼하려 했다.  이들의 결혼을 반대했던 헤이거와 그 두 사람의 죽음.  헤이거는 몸도 마음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나이에 이르러 그들을 그리워 한다.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늘 엇나가기만 했던 그녀의 인생.  환갑이 넘은 아들 내외가 자신을 돌보는 것이 힘들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 헤이거는 그제서야 그 모든 것이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진정한 삶의 모습이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우리가 바라는 삶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신이 바라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임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편린처럼 흩어진 삶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고 우리가 죽는 순간에 보게되는 완성된 삶의 모습에서 바라볼 때 어느 순간에 가졌던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당위성과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그것에 깊이 감사하게 된다.  

 

"나는 누워서 내가 지난 90년 동안 했던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동을 떠올려보려고 애쓴다.  그렇게 여겨질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근의 두 가지 일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는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여느 승리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전투 끝에 쟁취한 전리품이 하찮아 웃을 일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거짓말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이 말은 적어도, 드디어 일종의 사랑이라 할만한 마음으로 한 말이었으니까."   (P.377)

 

나는 지금도 꿈결처럼 나의 할머니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기도한다.

삶이 이어지는 어느 한 순간에 주관적인 선악의 판단으로 내 자신이 요동치지 않게 하소서.  오직 내 마지막 순간에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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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 마지막 리뷰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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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좋은 날 -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전망 없는 밤을 위한 명랑독서기
이다혜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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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느낌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에쿠우스를 닮은 엄숙주의가 좌회전을 하는 사이 가볍게 통통 튀는 낙천주의가 텅빈 도로를 질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풍선을 매단 카트라이더가 거칠 것 없이 내달리듯이.  북칼럼니스트 이다헤가 들려주는 책과 관련한 수다는 끝이 없어 보인다.  성인 독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수다쟁이 아줌마처럼, 게임 오버가 되더라도 무한반복할 수 있는 아케이드 게임처럼 어느 순간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지 않는다면 내 삶이 끝나는 순간에도 다음 날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받아들 것처럼 말이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나 <장정일의 독서일기>, 또는 정헤윤 PD의 <삶을 바꾸는 책읽기> 이후 이렇게 재밌는 서평집을 읽은 적이 있을까?  나는 가끔 꿈속에서도 책을 읽는 꿈을 꾸곤 한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가 정말로 책을 좋아하긴 하는가 보다,는 것인데, 단 한 번도 같은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꿈을 꾸어본 적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없어서?  읽은 책이 몇 권 되지 않아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딱히 이렇다 할 이유도 댈 수 없지만 궁금한 건 군금한 거다.  현실에서도 나는 내 생각을 들려주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는 쪽을 택한다.  가만가만 듣고 있노라면 내 생각과 일치하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때 느끼는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렇다고 매번 그럴 수는 없는 일.  때로는 처음 듣는 작가의 생경한 이야기도 듣게 되고, 그 때문에 주눅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 그 나름의 기쁨이 있다.  "아, 이런 책도 있었구나!'하고 무릎을 칠 때면 어렸을 때 소풍가서 하던 보물찾기 놀이가 떠오르곤 한다.

 

작가 이다혜는 자신의 생각을 심각하게 말하지 않아서 좋다.  작가가 이 책에서 언급한 120여권의 책중에 내가 읽었던 책은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일 때, 그동안 내가 취했던 행동은 작가가 언급한 책을 대충이라도 다 읽고나서야 서평집을 펼치는 것이었다.  일종의 결벽증인데, 그도 그렇게만 치부할 것도 아닌 것이 대개의 서평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자신이 직접 그 책을 읽어보지 않고서는 달리 방도가 없다는 데 있다.  더구나 수시로 튀어나오는 전문용어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면 평론에 관련된 전문서적을 적어도 서너 권쯤은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평론에 재미를 붙이지 못한 일반독자가 이런 수고를 감내하며 서평집을 끝까지 읽어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작가 이다혜의 책은 달랐다.  마치 무뚝뚝한 남자 친구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애교 만점의 여자처럼 맛깔나는 입담으로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녀의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작품도 전혀 낯설지 않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책의 전반에 흐르는 구술적 표현이 무미건조한 활자의 느낌을 확 날려버리는 까닭에 400쪽에 가까운 책의 볼륨에도 독자로서의 지루함은 묻어나지 않는다.

 

"이성을 볼 때 어디부터 보는가?  남자라면 여자의 눈(이라고 쓰고 가슴으로 읽는다)-가슴-다리(라고 쓰고 가슴이라고 읽는 사람도 있다)가 가장 일반적인 루트인 것 같다.  여자들은 남자의 얼굴, 엉덩이, 손 등 산발적인 부위에, 목소리나 체취를 더해 공감각적(!)으로 느끼는 일이 많다.  그렇다면 책을 고를 때는 어떨까?  책의 어디가 당신을 유혹하는가? "   (P.311)

 

글쎄?  책의 어디가 나를 유혹하고 있을까?  저자의 얼굴(이라고 쓰고 가슴이라고 읽어야 하나?)이라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듯하다.  아무튼 이런 식의 가벼운 터치는 독자의 긴장감을 풀어준다.  우리는 비록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멀리 함께 여행이라도 떠날 수 있어요, 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언젠가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경계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책장에는 아직 읽지 못한 책이 가득한데도 또 다시 많은 책을 새로 구입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구매 리스트에는 새로 추가된 목록들로 가득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지름신이 강림하면 나는 생각도 없이 주문 버튼을 누르고야 말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브이아이피(VIP)'라 하고 가족들은 나를 '폐지장수'라 부른다.  서재를 따로 둘 여유가 없는데 책은 점점 쌓여간다.  여러 식구의 책이 뒤섞인 채 짐만 되고 있다.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못 찾아서 두 권 산 책이 있다.  읽은 책인데 기억이 안 난다.  책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엄두가 안 난다."  (P.395) 이런 사람들을 위한 책 정리 노하우가 부록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읽기만 했을 뿐 실천은 장담하지 못하겠다.  혹시 모른다.  우렁각시가 '짠'하고 나타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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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2-11-16 14:01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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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 2012-11-18 15:10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
 
무경십서 1 : 손자병법, 오자병법 - 중국의 모든 지혜를 담은 10대 병법서
신동준 역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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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학 책을 즐겨 읽게 되었다.  학창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기껏해야 "꿈의 해석" 정도를 읽어보았을 뿐, 그것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말이다.  내가 심리학에 빠져든 것도 기실 2009년도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불어닥친 심리학 열풍에 나도 모르게 편승한 것이 주된 계기였지만 쉽게 사그라질 줄로만 알았던 심리학의 매력은 올해로 벌써 그럭저럭 3년이 되어가고 있다.  꺼질 듯하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잔불처럼 요즘도 나는 생각날 때마다 심리학 서적을 뒤적이곤 한다.

 

내가 읽었던 심리학 서적은 대학이나 연구목적을 위한 전공서적이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가벼운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어떤 전문적 깊이를 논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요, 학문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체계적 독서도 아니었지만 심리학과 관련된 여러 영역으로 내 관심의 폭이 조금씩 넓어진 것도 사실이다.  가령 종교단체에서 주관하는 힐링 프로그램이나 템플 스테이, 또는 심리학 강의와 같은 색다른 것에 호기심이 많아졌다.  이런 변화는 '귀차니즘의 전형인 내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하는 의구심이 들게 만든다.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듯한 새로운 느낌이다.  그럴 때마다 'Curiosity killed the cat.'이라는 속담이 생각나 두렵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슬금슬금 영역을 넓혀가던 중 나는 우연찮게 병법서를 만났다.(인문학 열풍이 불었던 것도 한참 전인데 그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유행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인문학 서적을 이제야 알아보다니!)  심리학 서적과 병법서가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고 뜬금없이 병법서를 들먹이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 서적이 주로 다양한 인간 심리를 케이스 바이 케이스식으로 다루는 데 반해 병법서는 인간 심리의 기저에 있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심리를 다룬다는 게 내 생각이다.  즉, 시시때때로 변하는 피상적 심리가 아닌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변의 심리,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공통의 심리를 다룬 책이 병법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작은 실수로 인해 백두난간 황천길로 떨어지고마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는 데 그 무엇보다 유용한 것은 상대의 심리가 아니었을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일상에서의 피상적인 심리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앞에 둔 자의 본원적 심리, 아프게 응시하고 있는 자기 내면의 심연, 극한의 상황에서 마주치게 되는 원초적인 본성이 바로 그것이다.  병법서는 탈출구가 없는 천애절벽의 끝에서 만나는 인간의 절박함을 다룬다.

 

나는 병법서를 읽을 때마다 좀 더 겸손해지는 느낌이 든다.  남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 내 속에도 약간의 비겁함과 비열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 우쭐할 것도 없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 그런 여러 가지 상념이 오가곤 한다.

 

<무경십서>는 병법서의 집대성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손자병법>, 오자서의 <오자병법>, 사마양저의 <사마법>, 그 외에 <울료자>, <당리문대>, <육도>와 <삼략>을 "무경칠서"라 하고, 이에 더하여 <손빈병법>, <장원>, <삼십육계>를 더하여 "무경십서"라고 한다.  작가 신동준은 <손자병법>을 필두로 무경십서 전권을 다루고 있다.  병법서를 원문과 함께 해석하고 해설을 덧붙인 형식이다.  자칫 따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고전의 이미지를 불식시키 듯 현대적인 사례를 부록으로 첨부하여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제 겨우 그 제1권을 읽고 웬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깊은 지식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제1권에는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이 나온다.  심리학의 '심'자도 몰랐던 그 옛날에 인간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혜안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적이 편히 쉬고 있으면 심리전 등으로 피로하게 만든다.  배불리 먹고 있으면 식량을 탈취하는 등 굶주리게 만든다.  안정된 곳에 영채를 세워 굳게 지키고 있으면 기습공격 등으로 동요하게 만든다."   (P.359)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 옛날의 병법서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기본심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칼싸움이나 하던 원시시대의 전쟁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일은 나의 마음과 적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결국 병법의 요체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도의 측면과 많이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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