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의사, 죽음의 땅에 희망을 심다
로스 도널드슨 지음, 신혜연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언제였던가.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8월의 어느 날 나는 뉴질랜드 남단 퀸스타운 근교의 카와라우 다리 (Kawarau Bridge) 한 복판의 점프대에 서 있었다.  같은 교실에서 낯선 언어를 배우는, 국적도 다르고 나이도 제각각인 그들과 함께.  방학이었고 가족과 멀리 떨어진 나와 그들은 적당히 길들여진 호주의 하늘을 갑갑해했다.  우연은 항상 자극적인 무엇인가에 끌리곤 한다.  트레킹이 목적이었던 우리가 '번지점프'로 발길을 돌렸던 것도, 구경만 하자던 우리 모두의 생각이 '그래도 한 명은...'의 느닷없는 결정으로 돌변한 것도.

 

나는 그렇게 점프대에 섰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호흡처럼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두려움에 파랗게 질린 강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곁에선 매캐한 먼짓내를 풍기던 안내 요원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나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그의 억센 팔로 붙잡았고, 그 순간 멀리 남반구의 하늘이 잿빛으로 어두워졌었다.  안내 요원의 카운트 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했었다.  나는 차마 밑을 보지 못한 채 먼 하늘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어쩌면 누군가의 힘에 떠밀렸는지도 모른다.  결국, 먼지처럼 가벼워진 두려움은 강물을 스치는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가끔 도저한 운명의 손아귀에 우연처럼 떨어질 때가 있다.  <청년의사, 죽음의 땅에 희망을 심다>를 쓴 로스 로널드슨도 그랬는지 모른다.  1969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라사에서 발생한 치사율 90%의 괴질병인 '라사열'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질병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로 향하던 그의 발길은 한번쯤 주춤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라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처음에는 감기나 독감 증상으로 시작하지만 이후 몸 전체에서 체액이 흘러나와 호흡기 장애나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저자는 설치류의 일종인 다유방쥐의 분비물을 통해 인간에게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진 라사 바이러스의 연구를 위해 위험천만의 땅, 시에라리온을 향해 떠난다.   친구들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시에라리온 케네마에 위치한 라사병동에서 평생을 의료구호와 라사 바이러스의 치료 및 연구에 몰두했던 애니루 콘테 박사를 만난다.

 

라사 병동에서 콘테 박사와 라사열 사례의 기초 치료를 익혀가던 로스는 어느 날 타지역으로 세미나를 떠나는 콘테 박사를 대신해 라사 병동을 맡게 된다. 그 엄청난 책임감에 짓눌려 자신의 결정에 목숨을 건 환자들에게 해를 주지는 않을지, 누군가 자신의 어설픈 진료 행위를 탓하지는 않을지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지은이는 환자들과 의료진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열악한 진료 시설과 전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한 간호사들과 함께 하면서도 그는 생명을 지키는 의사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는다.  비록 그 당시에는 의학도의 입장이었지만.  저자는 자신이 라사 병동을 맡게 되었던 순간을 이렇게 썼다. 

"나는 멍한 상태로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어스레한 길 위에서, 나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누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  시아, 빈타, 니니, 그리고 내 책임하에 있는 모든 환자들이 러시안 룰렛 게임처럼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죽음의 운명이 과연 누구의 얼굴에서 멈출지 불안했다."    (p.189)

 

저자는 자신이 맡게 된 라사 병동의 환자들, 라사열 치료에도 불구하고 포도상구균의 감염으로 생사를 넘나들던 두 살배기 시아와 라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어린 임산부 등을 치료하는가 하면 원인도 모른 채 죽어 나가는 많은 환자들을 가슴 아파 하기도 한다.  잦은 내전과 고질적인 가난의 굴레 속에서 생명은 너무나도 여리고 하찮은 것이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어린 임산부의 아이를 간호사는 당현하다는 듯 엄마에게서 떼어 놓는다.  저자는 그런 모습에 분노하고 그 어린 생명을 살리고자 노력한다.  결국 아이는 살아나고 병원이 떠나가라 울기도 한다.    

 

"비극은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연적인 부분이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비극적인 사건들은 종종 인간이 지닌 최악의 본성에서 비롯되지만, 그와 동시에 인류의 최선을 볼 수 있는 창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비극을 통해서, 우리는 살고자 하는 희망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희생자와, 이기적인 보상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고귀한 삶을 바치는 의료 종사자들을 만나는 특권을 누린다."    (p.382)

 

콘테 박사가 복귀하고 저자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짧다면 짧았을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던 저자는 심근염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이 책은 그가 환자로 지내던 그 기간에 옮겨 적은 것이다.  책의 내용은 저자가 시에라리온에 도착했던 순간부터 미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치력의 부재와 그로 인한 가난, 질병의 만연은 한 생명을 너무도 쉽게 앗아가곤 한다.  그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었던 저자는 내가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번지점프를 했던 그 순간을 떠오르게 했다.  삶이 던져준 우연은 두려움 없이 도전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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