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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집 -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지음, 이세진 옮김, 에리카 레너드 사진 / 윌북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사람들마다 집을 고르는 기준은 따로 있는 듯하다.
집이 위치한 장소에서도 어떤 이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장 근처를, 또 어떤 이는 사람들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고즈넉한 시골을, 그런가 하면 집의 구조나 형태에 있어서 어떤 이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집을, 또 어떤 이는 목가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집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취향이 저마다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니 집에 대한 취향도 제각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가끔 '집에도 다 인연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집이란 단순히 먹고 잠자기 위한 어떤 공간, 비바람으로부터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바쁜 현대인에게 있어 집이란 그저 그런 곳이며, 운이 좋으면 돈으로 한몫 쥘 수 있는 그런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과 영감을 필요로 하는 작가에게 있어 '집'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각별할 것이다.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로서의 집이 아닌, 문학적 열정이 살아 숨 쉬고 생동감 넘치는 글이 씌어지는 작가 내면의 외딴 곳, 친밀감과 더불어 자청한 고독이, 기시감(deja vu)과 낯섦이라는 상반된 감정들이 조심스런 균형을 이루는 곳으로서의 집 말이다. 예컨대 그것은 젊고 매혹적인 여성에게 느낄 수 있는 성욕과 성스러움의 상반된 감정,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으면서도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만 싶은 성스러운 느낌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집은 오브제로서의 사물인 동시에 작가의 생각과 함께 변화하고 나이들어가는 생명체로서의 대상일 터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살고, 창조하고, 고통받았다. 스스로 택한 고독과 글을 써야만 한다는 긴박감이 언제나 그곳에 도사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글쓰기의 열정으로 집을 채웠고, 바로 그만큼 집을 사랑했다." (p.7 '서문')
이 책의 저자인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는 프랑스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저자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시기에 발자취를 남긴 20인의 작가들과 그들의 집을 취재한다. 저자가 이 시기의 작가를 택한 까닭은 이 시기가 현대문학의 태동기이자 건축과 라이프스타일이 급속도로 변화한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작가들은 지금은 모두 죽고 없지만 집에 깃든 작가들의 영감과 풍광에 섞인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도 호기심과 함께 여행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저자의 여정은 헤르만 헤세의 카사 카무치에서 시작된다. 스위스의 루가노 호수를 에워싼 언덕에 자리한 몬토뇰라 마을의 장엄하면서도 괴상하게 보이는 바로크식 사냥 성채가 바로 카사 카무치다. <클라인과 바그너>, <클링소어의 마지막 여름>, <싯다르타>,<황야의 늑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나온 산실이기도 하다.
이어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머물렀던 '프티트 플레장스(Petite Plaisance : 작은 기쁨)'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키웨스트 저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비타 색빌웨스트의 '시싱허스트'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두 집 살림'이, 하트포드에 위치한 마크 트웨인의 집이 소개된다. 마크 트웨인은 작가로서는 성공했지만 무모한 투자로 결국 하트포드 저택을 잃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몇 년 후 하트포드를 방문하고 그 회한을 이렇게 썼다고 한다.
"그 집은 우리를 볼 줄 아는 눈과 마음과 혼이 있었다. 그 집에는 합의, 요청, 깊은 공감이 있었다. 그 집은 우리의 일부였고 우리는 집의 신뢰를 얻어 은총과 축복의 평화 속에 살았다." (p.128)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집 '몽크스 하우스'를 샀던 순간에 대해 "내 평생을 통틀어 그토록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5분은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녀의 일기에 기록했다고 한다. 또한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장 지오노는 그의 고향 프로방스를 너무나 사랑하여 마노스크 언덕에 터를 닦고 콩타두르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언젠가 그곳에서 친구들과 판(Pan)의 신화를 되살리고 싶었다고 한다.
저자의 여정은 덴마크의 여류작가 카렌 브릭센, 이탈리아의 카를로 도시,영국 웨일스의 딜런 토머스,프랑스의 시인이며 다재다능한 작가였던 장 콕토로 이어진다. 장 콕토가 살았던 밀리 라 포레 자택은 지금도 변하지 않은 채 유보된 시대의 마술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다고 한다. 장 콕토의 영화에 출연하여 하루 아침에 유명해진 장 마레는 장 콕토를 이렇게 회고한다.
"글쓰기든 그림이든 낙서든, 그는 항상 자기 밖의 힘이 내리는 명령에 휘둘리듯 일했습니다. 하루는 기차에서 갑자기 나에게 종이를 좀 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한테는 주소 적는 수첩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몇 쪽뿐이었지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글이 잔뜩 떠올랐어. 당장 이 글을 쏟아내지 않으면 나중에는 쓸 수 없을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p.257)
어쩌면 작가들에게 집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은 영감과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를 고요히 간직했다가 작가의 손과 입을 통해 일시에 풀어내는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여정은 장 콕토를 지나 영국의 위대한 작가이자 여행가인 로렌스 더럴, 생의 대부분을 옥스퍼드에서 살았던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노르웨이의 소설가 크누트 함순, 아일랜드의 대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로티를 거쳐 이탈리아의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집에서 끝난다.
작가에게 집은 <걸작의 공간>을 쓴 J.D. 매클라치가 밝혔듯 동시대를 사는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소통의 공간이자 자신의 내면 세계로 끝없이 침잠하는 은둔의 공간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에 있어 반쯤의 세월이 담기는 곳, 집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작가의 집>을 읽는 내내 그 물음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