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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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러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돈 문제?  노후에 대한 걱정?  가족?  자녀의 교육?  그도 저도 아니면 밀려오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건 아닌가요?  참 우습죠?  형체도 없는 것에 우리가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을 합니다.  어떨 때는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의 주체는 무엇일까요?  생각하는 당사자 자신이라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생각의 주체가 오직 그 자신의 의지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서양의 심리학자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하루에 보통 6만여 가지의 생각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중 95%가 매일 같은 생각이고 새로운 생각은 단 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 대부분은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것인데 그것마저도 자신의 의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생각들, 그리고 그 생각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행위들이 우리들 삶의 팔할을 메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철학의 필요성은 딱 그지점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영역, 왜인지도 모른 채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행위들에 대하여 철학은 그 원인과 대안을 생각하게 합니다.  소설은 드러나고 행해지는 실상을 그저 보여주기만 할 뿐 분석하지 않습니다.  철학자는 현실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라도 소설을 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생각하고 분석하여 우리와 같은 일반 독자에게 알려줍니다.

 

이 책의 저자인 강신주 작가도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책에서 산업자본주의에 매몰된 인간 군상의 실체를 분석합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서술 방식은 문학과 철학을 대비시키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었겠지만 독자들로서는 그렇게 반가울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책은 현대 철학의 주류를 이루는 구조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 학파에서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 l'Autre)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식하는 개인을 온전한 자율적 존재라고는 보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 요인, 이를테면 자신의 환경, 문화, 언어, 제도 등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이고 반복적으로 하는 자신의 행위를 매번 의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구조화된 구조, 구조화 되어가는 구조, 또는 내면화된 구조는 우리의 생각과 행위 전반을 지배합니다.  같은 지역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면 어쩌면 그 생각의 얼개는 서로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지도를 들고 타인의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다름'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산업자본주의라는 외부 요인이 사람들의 생각과 일상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아주 세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의 생계의 곤궁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보면 나는 경제적으로 약간의 여유가 있는 셈입니다.  생계에 쪼들린 도시 근로자나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치나 쓸 데 없는 개똥철학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생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 자신의 현실에 직대면할 여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언젠가는 이들의 불만이 감정적으로 폭발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부르디외의 지적처럼 "현재에 의해 너무 짓눌려서 유토피아적 미래 - 그것은 현재의 성급하고 주술적인 부정이다 - 와는 다른 것을 겨냥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포자기 혹은 마술적인 조급함" 정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p.245)

 

현대 산업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은 인간의 허영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가가 만들어낸 유행에 사람들은 끝없이 현혹되고, 그들을 따라하면 마치 자신도 상류층에 속한 듯한 착각에 빠져들곤 합니다.  저자는 이 책의 3부(매트릭스는 우리 내면에 있다)에서 인간의 허영과 가식을 깊이 통찰했던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래 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찾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p.286-p.287)

 

이 책에는 네 명의 문학가와 네 명의 사상가가 등장합니다.  이상, 보들레르, 투르니에, 유하의 작품을 네 명의 사상가인 게오르그 짐멜, 발터 벤야민, 부르디외, 장 보드리야르의 사상과 대비시켜 설명하고 있죠.  느끼셨겠지만 산업자본주의의 초창기 인물에서부터 현대의 문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인 셈이죠.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시든 소설이든 현실에서 벌어지는 어떤 현상을 분석하거나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보여줄 뿐이죠.  분석하고 밝히는 것은 어쩌면 사회학자나 철학자의 몫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단적으로 말해 하나의 고유한 선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업자본은 생산력의 증가, 다시 말해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일종의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산업자본이 설치해놓은 집어등에 사로잡혀 스스로 교환 가능한 존재라고 받아들이며 체념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마치 선사(禪師)가 사자후를 토하듯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과는 달리 "세계는 교환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것은 "아무데서도 (교환을 위한) 등가물을 갖지 않는"소중한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p.403-p.404)

 

우리는 때로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주관이나 판단에 의지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을 고루하거나 고집불통의 사람쯤으로 매도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제대로 깨우친 사람이라면, 또는 구조주의 철학을 한번쯤 읽어본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들을 존경하거나 부러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그들은 오징어배의 집어등에 현혹되어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는 않고 있으니까요.  나는 책을 덮으며 다시 한 번 되묻고 있습니다.  내 생각은 오롯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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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더 사랑하는 법 -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일상의 재발견
미란다 줄라이, 해럴 플레처 엮음, 김지은 옮김 / 앨리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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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프로 작가에 의해 씌어진 책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의 이웃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작은 변화들을 특별한 시선으로 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늘 마주치던 평범한 일상과 우리의 이야기들을 지면으로 만났을 때 잔잔한 감동과 함께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게 된다.  왜 그럴까?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누가 강요하거나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책의 저자인 미란다 줄라이와 해럴 플래쳐는 2002년 '당신을 더 사랑하는 법 배우기(Learning to love you more)'란 웹사이트를 개설한다.  그리고 이곳에 과제를 내기 시작한다.  가령 '누군가의 주근깨나 점을 연결해 별자리 그리기',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 써보기', '태양을 사진에 담기', '죽음을 앞둔 사람과 시간 보내기', '최근에 했던 말다툼 적어보기','5학년 때 가장 좋아했던 책 다시 읽어보기', 중요한 날 입었던 옷을 사진으로 찍어보기'등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특별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그닥 어렵지 않은 과제들이다.

 

과제가 진행되는 동안 국적, 나이, 성별, 직업을 초월한 사람들이 마음을 담은 5,000여 개의 답변을 보냈으며, 2009년 5월, 마지막 70번째 과제 '작별 인사하기'로 마감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과제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오롯이 느끼게 되고, 웹공간에 올려진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면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다.  어두운 방 한 귀퉁이에 놓인 자신은 개별적 존재로서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지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또 다른 사람들의 일상과 작은 상처들을 확인할 때 우리는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과제'라는 형식에 참여함으로써 마음을 열고, 타인과 공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쯤 덜어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갈수록 유리 조각처럼 파편화되는 우리가 '과제'라는 단일한 목표를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모자이크와 같은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인류라는 거대한 작품 속에서 보이지 않는 작은 공간에 위치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지...  

 

"이윽고 그가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가족들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고요.  그의 손을 잡자 그는 갑자기 온 몸을 떨며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손을 잡는 게 싫은 것 같아 손을 놓으려 하자 그는 더듬거리며 내 손을 찾았습니다.  나는 다시 그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우리는 말없이 한동안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그의 곁에 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노래도 하고, 기도도 하고, 말도 건넸습니다.  내가 하는 일 중 가장 좋아하는 대목입니다.  언젠가 내가 떠날 차례가 오면 누군가 내 손을 꼭 잡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과제 31:죽음을 앞둔 사람과 시간 보내기-캘리포니아에 사는 익명의 간호사)

사람들의 호응과 공감에 힘입어 과제 결과물들을 모아 뉴욕 휘트니 미술관, 휴스턴의 오로라 픽처 쇼 등에 전시를 하기도 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책으로 출간하였다고 한다.  과제들 대부분은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전쟁을 겪은 사람과 인터뷰해보기(과제 59)'라든가 '낯선 사람들에게 손을 잡게 한 뒤 그 모습을 사진에 담기' 등 녹록지 않은 과제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당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정부에 대해 이야기해보기(과제 61)'와 같은 정치적인 과제들도 있다.

 

과제 44에는 '<나를 더 사랑하는 법> 과제 만들어보기'가 있다.  나는 이 과제에 대해 한동안 곰곰 생각해보았다.  교도소에 방문하여 모르는 수감자 면회해보기?  생각나는 은사에게 편지하기? 아침 운동 중에 만난 사람과 나란히 걸어보기?  딱히 맘에 드는 게 없다.  그래도 즐겁다.  용기를 내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 그리고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비교되고 비교하면서 '하찮고 보잘것 없음'이라고 단정지었던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게 한다.  세상에 가치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70억의 사람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삶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면. 

 

사실, 나는 은둔자에 가까운 타입이다.  전화번호부에 전화번호도 싣지 않으며, 누가 찾아와도 아는 사람이 아니면 거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런 성격인지라 살아온 이야기를 쓰면서 내 이름을 밝혀야 하는지에 대해 도덕적인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익명'으로 하자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지만 몇 분 동안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면서, 내 이야기의 지은이는 '행인 2'가 아닌 나 자신이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내 이름을 밝혔다."    ('참여자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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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아직 새였을 때 시공 청소년 문학 10
마르야레나 렘브케 지음, 김영진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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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에 앉아 읽을 만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소란스럽지 않아 귀를 기울이면 마치 꽃이 피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이다.  마르야레나 렘브케!  발음하기 쉽지 않은 작가의 이름이다.  1945년 핀란드에서 태어난 작가는 연극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 가 뮌스터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고 한다.  핀란드 작가의 책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울창한 숲과 크고 작은 호수를 떠올리게 하는 나라.  어쩌면 핀란드식 사우나와 잘 갖춰진 교육제도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야기는 "내게는 '돌이 새였다.'고 생각하는 동생이 한 명 있었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과거형의 문장이다.  읽기도 전에 짠한 슬픔이 밀려온다.  동생의 이름은 페카.  제왕 절개로 태어난 동생은 합지증과 사시가 있었고 머리는 비딱했다.  보통 사람과는 조금 특이하게 태어난 아이.  동생은 헬싱키의 어린이 병원 '라스텐린나'로 보내졌다.  라스텐린나는 핀란드 말로 '어린이 궁전'이라는 뜻이다.

 

"'제왕'이니 '어린이 궁전'이니 하는 말은 우리에게 굉장히 신비스럽게 다가왔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아이들만 사는 궁전을 그려 보았다.  그 궁전에는 딸기처럼 빨간 실크 드레스를 입은 어린 공주들과 이끼처럼 푸른 벨벳 바지에 진짜 진주알이 반짝이는 하얀 조끼를 받쳐 입은 어린 왕자들이 살고 있을 것 같았다."    (p.8)

 

페카는 2년 동안 어린이 궁전에 살면서 여러 번 수술을 받았고, 걷기 시작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페카는 걷지 않고 언제나 바닥을 기어만 다녔다.  어느 날 바닥에 떨어진 고기 조각을 삼킨 페카는 다시 병원에 가야 했고, 그 이후 페카는 다시 두 발로 걸었으며 말도 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페카. 페카는 가족뿐만 아니라 자기가 앉는 의자와 자기 침대, 양말과 양탄자, 할머니의 앞치마와 엄마의 냄새, 그리고 아빠의 수염도 사랑했다.

 

"난 숲을 사랑해.  난 자작나무를 사랑해.  전나무랑 소나무도 사랑해.  그 나무들은 향이 좋으니까.  그리고 나는 꽃도 사랑해.  꽃은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알록달록하니까.  풀은 초록이라서 사랑하고, 버섯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사랑해.  나는 다람쥐랑 개구리랑 애벌레도 사랑해.  하지만 내가 진짜 사랑하는 것은 새랑 돌이야.  왜냐하면 돌도 옛날엔 새였거든."  (p.14 - 15)

 

특별했던 페카도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페카의 친구들은 페카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 학교 뒤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던 도중에 누군가가 페카를 밀어 우물에 빠기도 하였고, 손목시계가 탐나서 주인 몰래 집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다음 날 페카는 시계 주인에게 시계를 돌려주었으며,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미안하단 말은 걔 듣기 좋으라고 했을 뿐이야.  그래야 누나가 좋아할 테니까.  하지만 난 사람들 기분 좋으라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러면서 페카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p.42-p.43)

 

바다에서 수영을 배우다 잔뜩 물을 먹은 페카가 내뱉은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페카는 '물고기가 울어서 바다에 소금이 녹아 있다'고 했다.  가난했던 페카의 부모님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페카뿐만 아니라 페카의 누나와 형들 그리고 페카의 동생들은 모두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날 날만 기다리던 중 페카가 아팠고 의사는 백혈병이라고 진단했다.  부모님은 이민을 포기했고 떠날 준비를 하느라 이미 살던 집도 팔았던 부모님은 결국 시골로 이사를 했다.  학교도 그만두게 된 페카는 그곳에서 부모님이 기르는 닭과 돼지와 놀았고, 나와 산책도 하거나, 동생 시오나를 돌보기도 했다.  웃지 않는 시오나를 웃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페카 뿐이었다.  부모님은 페카를 치료하기 위해 신선한 간과 간유, 그리고 철분 약을 먹였고 페카도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는 듯 보였다.  가족들은 페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번 아날리사가 페카에게 물었다.  "넌 언제 죽니?"  페카는 이마를 찡그리면서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했다.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그때나 죽을 것 같아."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고, 페카의 엉뚱함과 특이함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선사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p.95)

 

그러나 페카가 백혈병에 걸렸다고 진단했던 의사는 나중에 오진이었음을 시인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 페카를 위해 소를 한 마리 선물했다.  그 소가 송아지를 낳았고, 얼마 후 페카의 동생 '야코'도 태어났다.  어느 날 내가 핀란드 일주를 계획하고 여행을 떠날 때 페카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볼 거니까 또 만나자고 인사하는 거야.  내가 죽을까봐 겁낼 필요 없어.  누나, 내 생각에 난 절대 안 죽을 것 같거든.  난 돌이 됐다가 새로 변할 거야.  밤이 돼서 달이 뜨고 그래서 슬픈 생각이 들면 지금 내가 한 말을 기억해.  그리고 혹시 돌에 맞더라도 겁먹지 마.  그건 막 새가 되려는 돌일지도 모르니까."    (p.127)

 

페카는 그 뒤로 여러 해를 더 살았고 곂국 가족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가족들은 작은 돌을 찾아서 '네케민'이라고 쓰고 페카의 무덤 위에 올려 놓았다.  네케민은 핀란드어로 '또 만나.' 라는 뜻이다.  

       

마르야레나 렘브케는 장애를 결코 불행하다고 쓰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짠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큰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쓴 작가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쓴 또 다른 작품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었다.

 

행복은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는 외롭고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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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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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미리 밝혀둬야 할 게 있다.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이 책의 저자이면서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썼던 밀란 쿤데라를 좋아한다.  나는 그의 작품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반긴다.  그 정도로 좋아한다면 어떻게 서평을 쓸 수 있느냐고?  아니다.  쓸 수 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믿어도 좋다.  그러나 단 한가지, 내 서평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는 없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대상에 대한 맹목적이고 노골적인 찬사와 미화가 없다면 진정한 팬이 될 수 없을 테니까.  아무튼 나는 밀란 쿤데라의 팬으로서 이 글을 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가수 싸이를 좋아하는 열혈팬이 있다고 치자.  그(또는 그녀)는 그가 알고 있는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싸이에 대해 세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것임에 틀림없다.  설령 상대방이 노래에 관심도 없고, 더구나 싸이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또는 그녀)는 그런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싸이가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 음악 장르, 요즘 나온 신곡 등과 함께 강남 스타일의 작곡가와 안무, 반주 등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하려 들 것이다.  듣는 상대방은 어찌 되느냐구?  글쎄, 때에 따라서는 많은 지식을 얻게 될 수도, 또는 지루한 대화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등을 돌릴 수도 있겠다.

 

<소설의 기술>은 독자에 따라 그 평이 천차만별일 것이라 짐작한다.  소설을 쓰는 실무자로서(게다가 그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가 아닌가!) 그가 밝히는 소설에 대한 여러 담론들과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의 기법들이 그의 작품에서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그리고 유럽의 문화적 배경(또는 문학의 역사) 속에서 현대의 소설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그의 어시스턴트인 살몽과의 대담 형식으로 또는 에세이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이 생각이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자면 많은 사전지식이 필요하다.(그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밀란 쿤데라는 거장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고, 그의 지식은 끝이 없어 보이는 반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의 지식이 형편없음을 그를 통해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은 소설에 대한 설명서나 이론서가 아니기에 일반 독자의 얄팍한 지식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

 

"제 소설에서 자아를 포착한다는 것은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포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실존적 약호(code existentiel)를 포착한다는 거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쓰면서 이런저런 인물의 약호가 몇 가지 열쇠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테레자에게 그것은 육체, 영혼, 현기증, 허약함, 목가, 낙원 같은 것들이죠."    (p.48)  

 

이 책의 3부에 등장하는 "<몽유병자들>에 관한 단상들"은 소설가로서의 쿤데라가 얼마나 치밀하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통하여 지금의 위치에 올랐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 ,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손꼽히는 3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철학 소설이 아닌가.  그럼에도 작가는 일반 독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해력과 분석을 통하여 현대 소설의 개괄을 곁들여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소설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을 법한 이러한 분석들을 읽으면서 그의 능력에 또 다시 감탄해 마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대충 넘기려했던 장면들을 곰곰이 되새기게 된다. 

 

쿤데라는 “소설은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탐색”하는 것이며 소설가란 역사가도 예언자도 아닌, 단지 “실존의 탐구자”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소설은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는 실제를 통하여 소설 속에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쿤데라가 보여준 놀라운 면은 4부 "예술의 구성에 대한 대담"에 있다.  소설의 구성이 그저 작가의 우연적이고도, 선험적인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쯤으로 알았던 독자라면 그가 밝히는 구성의 체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 더 소설과 음악을 비교해도 괜찮겠죠.  한 부는 박자예요.  각 장은 하나의 소절이고요.  이 소절들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또는 길이가 아주 불규칙하지요.  이것은 우리를 템포 문제로 이끌어 갑니다.  제 소설들이 각 부분에는 모데라토, 프레스토, 아다지오 등과 같은 음악적 지시가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p.128) 

 

이 책의 6부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에서는 작가가 좋아하는 단어들에 대해 사전식으로 배열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자신의 소설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오류(이를테면 작가가 생각하는 의미와 번역가가 생각하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오류)를 줄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된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셈이다.

 

마지막 7부에서는 "예루살렘 연설:소설과 유럽"이 실려있다.  연설문에서도 소설가로서의 그의 자부심과 소명의식은 잘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 유럽 문화가 위협받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가장 소중한 것, 즉 개인에 대한 존중, 개인의 독창적 사고와 침해할 수 없는 사생활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안팎으로 위협받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유럽 정신의 소중한 진수는 마치 금고에 보관된 것처럼 소설 역사 속에, 소설 지혜 속에 보관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224)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작품으로만 만나는 일반 독자에게 있어 한 작가의 생각과 자신이 쓴 작품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그럼으로써 우리는 소설가로서의 쿤데라와 한 인간으로서의 쿤데라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셈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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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3-03-24 22:10   좋아요 0 | URL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꼼쥐 2013-03-28 13:46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이응준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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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처럼 흐리고 간간이 비가 내리는 날엔 무력한 갈증이 비둘기처럼 내려앉는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때론 터질듯 부풀어오른 기억의 풍선들이 약한 빗방울에도 '펑펑' 소리를 내며 의식의 빈 그릇에 소나기처럼 쏟아지기도 한다.  그리곤 금세 걸쭉한 수프처럼 엉긴 기억의 잔해들은 의식이 스쳐갈 때마다 펄펄 끓는다.  뒤죽박죽의 기억들이 몽글몽글 끓어 넘칠 때면 기포와 함께 원추형으로 봉긋 솟았다가 '폭'소리와 함께 터져서는 이내 공기중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꽃샘 바람과 함께 흩뿌리던 봄비 속에서 의식의 밑바닥에 눌어 붙은 기억의 알갱이들을 한움큼 건져 올렸다.  그리고 이응준의 소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을 읽었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날씨와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작가가 있다.  나는 쌀쌀하게 굳은 하늘을 보며 아침부터 이응준을 생각했었다.  얼마 전에도 그의 작품<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을 읽었으면서도 말이다.  그의 뿌리 깊은 우수와 텍스트를 관통하는 죽음에 대한 집착은 오늘 같은 날씨에는 더할 수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이야기의 출발은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다.  과장된 슬픔이 언뜻언뜻 스칠 때마다 거식증 환자의 토사물처럼 움찔움찔 뒤로 물러나게 했다.  이틀 후면 처음 갖게 된 '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나는 이삿짐을 싸고 있다.  책장을 들어내자 실먼지에 휘감긴 채 발견된 묵직한 노트 한 권.  나는 먼지를 쓰다듬듯 털어내고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읽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그들과 내가 있었고, 그들과 내가 나눈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들과 나를 슬프게 만든 청춘과 운명이 있었고, 우리의 배경에서 끝없이 내리던 함박눈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색 바랜 일기는 자신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 더 먼 기억까지 기어코 불러와 기묘한 악몽의 만다라를 완성하고 있었다."    (p.14-15)

 

그해 겨울, 모든 것을 잃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원했던 해군에도 신체검사에서 입대면제 판정을 받았던 내가 직행버스를 타고 무작정 떠나 다다른 곳은 서울 근교의 대학가인 가합동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카페 '하늘밥도둑'의 주인 '산타 페'를 만난다.  유명 미술대학 조소과 출신인 그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저는 인물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를 가진 그와 보이지 않는 상처를 지닌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가까워진다.  미친 이모의 벗은 알몸을 보고 황혼의 극단적인 아름다움을 목격했다는 '싼타 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같은 과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무튼, 나는 녀석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어쩌면 하나도 아는 게 없었을 수도 있지.  체질적으로 녀석은 쓸데없는 관념들에 정의 내리기를 좋아했어.  아까 말했듯이 사랑이란 뭐다, 죽음이란 어쩌고 저쩌고다, 라는 식으로.  나는 그런 녀석을 볼 때마다 내심 감탄하곤 했지만, 마음 한편에선 뜻 모를 불안감이 소리 없이 고이곤 했어.  놈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 불안감이 무엇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지만 말이야.  나는 결심했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에 정의를 내리며 살진 않겠노라고.  너구린 너구리고 곰은 곰인 거지.  쥐는 쥐고, 비버는 비버인거야.  그러면 인생은 간단해지거든.  자살 같은 건 어리석은 일이지.  미친 짓이야.  없는 단어들에 관해 두툼한 사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불쌍한 법이야."    (p.108-109)

 

나는 '싼타 페'와 어울리며 '나그네들만 주인인' 그곳 가합동에 서서히 적응해간다.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대학의 명물인 '물귀신'을 만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미저리'도 만난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수인.  그녀는 야구를 좋아했던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그녀는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야구용품을 모두 불사르고 환상만 좇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털어낸다.  그리고 얼치기 대학생활을 청산하고 장사라도 해보겠다며 대학을 떠난다.

 

수인이 떠나고 나는 며칠을 앓아 눕는다.  내가 앓고 있던 사이 '미저리'도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배경처럼 그칠 줄 모르고 내리던 눈이 거짓말처럼 개인 어느 날 아침 '싼타 페'는 자신이 발견했다는 '아름다운 길'과 그 길에 있는 '이름 모를 나무'를 보여주겠다며 나를 잡아 끈다.  그곳에서 나는 그 '이름 모를 나무' 밑에 내 상처를 묻고 돌아선다.

 

첩의 자식이었던 나는 유난히 젊어 보였던 어머니 손에 이끌려 열 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다.  네 살 터울의 배 다른 형제 인하를 만났고, 밀교의 사제처럼 형을 존경했던 나는 형이 지녔던 아픔과 그로 인해 벌어진 모든 일들이 운명이었다고 수긍한다.  탐욕에 이끌려 모든 것을 잃고 허무하게 죽었던 아버지와 병으로 죽은 형의 여자 친구, 그리고 형과 자신의 어머니의 정사 장면을 목격한 이후 형의 자살.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처럼 흘러갔음을 인정한다.

 

"지난 일은 그냥 지난 일이다.  상처가 남았다고 하지 말자.  상처는 '우리'라는 거대한 대륙에 놓인 작은 늪이나 웅덩이 같은 것일 뿐이므로.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는 상처지만, 높고 푸른 하늘 위에서 자유로운 새처럼 내려다보면,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상의 한 풍경일 수도 있으려니.  나는 아프게 흘러갔던 지난날들이 내 마음의 하구에 얼마나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삼각주를 만들어놓았는지를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잃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그것이 내 불행의 전모였다."    (p.270)

 

이 작품은 작가의 나이 스물여섯에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앞부분에선 슬픔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 과도하게 표출되는 듯 싶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투의 관조적인 자세로 서둘러 끝을 맺는다.  그럼에도 소설 곳곳에서 읽을 수 있는 시적 표현과 무리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에서는 작가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건 다 슬프기 마련이라는 작가의 주장처럼 그도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나 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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