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돈 문제? 노후에 대한 걱정? 가족? 자녀의 교육? 그도 저도 아니면 밀려오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건 아닌가요? 참 우습죠? 형체도 없는 것에 우리가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을 합니다. 어떨 때는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의 주체는 무엇일까요? 생각하는 당사자 자신이라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생각의 주체가 오직 그 자신의 의지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서양의 심리학자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하루에 보통 6만여 가지의 생각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중 95%가 매일 같은 생각이고 새로운 생각은 단 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 대부분은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것인데 그것마저도 자신의 의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생각들, 그리고 그 생각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행위들이 우리들 삶의 팔할을 메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철학의 필요성은 딱 그지점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영역, 왜인지도 모른 채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행위들에 대하여 철학은 그 원인과 대안을 생각하게 합니다. 소설은 드러나고 행해지는 실상을 그저 보여주기만 할 뿐 분석하지 않습니다. 철학자는 현실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라도 소설을 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생각하고 분석하여 우리와 같은 일반 독자에게 알려줍니다.
이 책의 저자인 강신주 작가도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책에서 산업자본주의에 매몰된 인간 군상의 실체를 분석합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서술 방식은 문학과 철학을 대비시키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었겠지만 독자들로서는 그렇게 반가울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책은 현대 철학의 주류를 이루는 구조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 학파에서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 l'Autre)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식하는 개인을 온전한 자율적 존재라고는 보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 요인, 이를테면 자신의 환경, 문화, 언어, 제도 등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이고 반복적으로 하는 자신의 행위를 매번 의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구조화된 구조, 구조화 되어가는 구조, 또는 내면화된 구조는 우리의 생각과 행위 전반을 지배합니다. 같은 지역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면 어쩌면 그 생각의 얼개는 서로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지도를 들고 타인의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다름'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산업자본주의라는 외부 요인이 사람들의 생각과 일상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아주 세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의 생계의 곤궁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보면 나는 경제적으로 약간의 여유가 있는 셈입니다. 생계에 쪼들린 도시 근로자나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치나 쓸 데 없는 개똥철학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생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 자신의 현실에 직대면할 여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언젠가는 이들의 불만이 감정적으로 폭발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부르디외의 지적처럼 "현재에 의해 너무 짓눌려서 유토피아적 미래 - 그것은 현재의 성급하고 주술적인 부정이다 - 와는 다른 것을 겨냥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포자기 혹은 마술적인 조급함" 정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p.245)
현대 산업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은 인간의 허영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가가 만들어낸 유행에 사람들은 끝없이 현혹되고, 그들을 따라하면 마치 자신도 상류층에 속한 듯한 착각에 빠져들곤 합니다. 저자는 이 책의 3부(매트릭스는 우리 내면에 있다)에서 인간의 허영과 가식을 깊이 통찰했던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래 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찾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p.286-p.287)
이 책에는 네 명의 문학가와 네 명의 사상가가 등장합니다. 이상, 보들레르, 투르니에, 유하의 작품을 네 명의 사상가인 게오르그 짐멜, 발터 벤야민, 부르디외, 장 보드리야르의 사상과 대비시켜 설명하고 있죠. 느끼셨겠지만 산업자본주의의 초창기 인물에서부터 현대의 문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인 셈이죠.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시든 소설이든 현실에서 벌어지는 어떤 현상을 분석하거나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보여줄 뿐이죠. 분석하고 밝히는 것은 어쩌면 사회학자나 철학자의 몫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단적으로 말해 하나의 고유한 선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업자본은 생산력의 증가, 다시 말해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일종의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산업자본이 설치해놓은 집어등에 사로잡혀 스스로 교환 가능한 존재라고 받아들이며 체념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마치 선사(禪師)가 사자후를 토하듯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과는 달리 "세계는 교환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것은 "아무데서도 (교환을 위한) 등가물을 갖지 않는"소중한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p.403-p.404)
우리는 때로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주관이나 판단에 의지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을 고루하거나 고집불통의 사람쯤으로 매도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제대로 깨우친 사람이라면, 또는 구조주의 철학을 한번쯤 읽어본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들을 존경하거나 부러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그들은 오징어배의 집어등에 현혹되어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는 않고 있으니까요. 나는 책을 덮으며 다시 한 번 되묻고 있습니다. 내 생각은 오롯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