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벌루션 No.0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가네시로 카즈키의 소설을 좋아했었다. [GO]의 영화를 보고 원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책을 찾아 읽었는데 가슴이 따뜻하다가 아픈 게 이 사람의 삶이 고단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소설이었다. 이후 일본 드라마의 홍수에 빠지면서 그의 단편 소설이 영화가 된 것도 보면서 참 좋은 작가를 알게 되었다며 그의 소설들을 무작정 찾아 읽었는데 그의 첫 번째는 [GO]에서 그리고 다음은 [레벌루션 NO.3]로 이어졌다.

 

 

아마 그의 소설을 즐겨 읽은 사람이라면 좀비 시리즈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레벌루션 NO.3]의 시작으로 된 그들의 행적은 [플라이, 대디, 플라이]로 이어지고 마지막은 [스피드]로 끝이 났었다. 그 소설 시리즈속에서 “순신”을 만났고 그 순신은 가네시로 자즈키의 다른 면을 부각시킨 인물일 것이다.

 

그는 그 스스로가 재일 교포이며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조총련계 학교를 다니고 그때 빠졌던 독서가 아마도 그를 이렇게 키웠을 것이다. 순신이 싸움을 잘하면서 무뚝뚝한 의리를 지키면서 고독한 순간에도 책을 놓지 않는 모습은 가네시로 가즈키의 모습이 아닐까.

 

 

[레벌루션 NO.0] 또한 순신과 그의 무리들이 나온다. 이 얘기는 [레벌루션 NO.3] 이전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아주 짧은 이야기다. 그들이 그 학교로 몰릴 수 있었던 얘기. 그리고 한반이 되어서 학교가 행하는 음모를 알게 되고 그 음모를 어떻게 저항해 나가는 것인지 보여주는 며칠의 모험담으로 끝이 났다.

 

왠지 우리나라에는 이런 학교는 이제 없을 것 같지만 내가 아는 내 동창 남학생들도 이런 폭력적인 학교의 생활을 하며 3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남학교의 모습이 나온다. 지금은 선생님이 회초리를 든 모습을 핸드폰 카메라로 바로 찍어 교육청 사이트에 올리는 시대라지만, 어디 앞니가 빠지도록 아이들을 구타하는 학교가 얼마나 있을라고.

 

학교에서 메이저의 아이들이 아닌 마이너의 아이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아이들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은 가네시로 가즈키의 성장이 그러했고, 남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생생한 모습을 그려 넣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말했던 좀비란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지만 인간은 아닌 것. 즉 자신은 일본인이지만, 재일 교포이며 학교에서 또한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정체성의 혼란이 자신이 어쩌면 좀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가 느낀 단절된 감정이 얼마나 쓰리고 아팠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레벌루션 NO.3]속에 아이들은 개구지고, 의리 있고, 박력 있고, 믿음직스러웠었다. 그 이후 스피드까지 가면서 좀비 시리즈들이 좀 시들한 맛이 있고 무엇보다 너무 우려 먹는것 같은 느낌이 많이 나서 사실 [스피드]에서는 좀 실망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그들의 소식이 궁금했었던 것은 있다. 특히 우리의 순신이 어찌 지내시는지 너무 궁금했고, 순신으로 한때 영화까지 찍었던 오카다 준이치의 소식 또한 궁금했으니까. 무엇보다 [플라이, 대디, 플라이]속에는 명대사들이 참 많았다.

그가 언제부터 영상을 만들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어쩌면 그의 소설들의 대부분이 영화화 되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일지 모르겠고) 그가 한때 오카다 준이치와 츠츠미 신이치와 함께 드라마 [SP]의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이 좀 놀라웠었다. 그의 소설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직접 시나리오 각색을 할 때 나는 참 말리고 싶었다. 사실 그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재미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이제 [레벌루션 NO.0]을 마지막으로 좀비 시리즈는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하시니 순신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좀 아쉽다고나 할까.

 

 

오래전에 사 놓고 읽지 못했던 [영화처럼]만 읽는다면 그의 작품은 모두 다 읽는 것인데, 그의 신간 소식을 좀 듣고 싶다. [GO]와 같은 소설을 또 기대한다면 그를 너무 괴롭히는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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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작으로 여러 번 들었던 그녀의 책을 처음 접했다. 이 책을 읽고 텔레비전으로도 방송이 된 <달의 제단>을 읽고 나서 나는 그녀의 팬이 되었다. 왜 이제야 그녀의 작품을 읽었을까.

 

 

<나의 아름다운 정원>아 내게 시선을 끌지 못했던 부분 하나는 표지에 있다. 유명 작가는 표지가 어떠해도 아는 작가라 읽고는 하는데 생소한 작가는 표지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표지에 사실 민감하다.

이 소설의 내용을 다 읽고 나면 사실 표지속의 의자가 어떤 의미였을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뭔가 소설의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부분이다. 또한 제목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아름다운 정원보다 그 이면의 다른 부분에 훨씬 더 많이 가슴이 아리기 때문이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접하고 그녀의 팬이 되기로 했었던 십여 년 전, 나는 성장소설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성숙되지 못한 자아를 달래기 위해 혹은 아직 크지 못한 나를 채워나가기 위해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성장소설을 읽고 나면 뭔가 쑥 가슴에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있기는 하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도 동구의 성장소설이다. 동구의 하나밖에 없는 귀한 여동생이 탄생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70년대, 80년대의 우울한 시대를 거쳐 간다. 암울했던 정치적 시대를 동구는 잘 모르겠지만, 동구가 사랑했던 담임선생님이 80년 5월 광주로 자신을 길러준 외할머니를 만나러 내려간 후 다시는 학교로 돌아 올 수 없는 장면을 맞으면서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알게 된다. 초등학생인(그때는 국민학생이었던) 동구가 감당해야 할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는 모습에 같이 마음이 아프고 혼자 남아 있는 동구의 모습에 안쓰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무뚝뚝하고 때로는 폭력으로 사랑하는 엄마를 대하는 아버지나 중졸도 아니고 중퇴의 여자가 고등학교 중퇴인 자신의 아들의 피를 빨아 먹으며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식하고 무지하고 독한 시어머니, 친할머니의 모진 욕설을 받으며 살고 있는 엄마를 지켜보는 동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약한자를 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다. 엄마의 심성을 그대로 담은 동구는 참 착하고 따뜻하다. 그렇기 때문에 동생 영주를 그렇게 예뻐하고 사랑했으리라 믿는다.

 

 

딸을 낳았다고 처다 보지도 않았던 친할머니 때문에 산후 조리도 없이 며칠사이 부엌으로 나가 일을 하던 엄마도, 외출을 하게 되면 자신이 홀대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며 예쁜 옷은 전혀 입지 않고 가장 추레한 옷을 걸쳐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힐긋거리며 자신의 엄마를 더욱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할머니 때문에 어쩜 동구는 더 철이 들었을지 모른다. 할머니는 깔끔한 엄마에게 재앙과도 같은 그림자가 아닌가. 그래서 그런 엄마를 위로하고 구출하기위해 자신의 희생이 필요한 시점을 너무 잘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희생으로 저런 할머니와 어떻게 살아, 나 같으면 할머니와 절대 못사는 나와 달리 동구는 엄마를 위하 할머니와 함께 할머니의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할머니와 고등학교까지는 그곳에서 머물겠다는 그 말에 가슴이 탁 막혔다.

아, 동구야...넌 어쩜...

 

 

너희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라고. 엄마가 꿈꾸던 구라파풍의 아름다운 정원을 푸성귀로 가득 찬 작은 시골 텃밭으로 만들고 향기가 진하게 났던 백합들은 모두 발로 짓이겨져 있었던 그 광경을 보며 대성통곡을 하는 엄마에게 미친년이라고 욕하던 할머니가 아니던가. 자신의 밥 먹을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나서 상을 차리면 바로 상을 엎어버리던 대책 없는 할머니라고.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대부분 이렇게 할머니의 모진 행동이 참 많이 그려져 있다. 자신의처를 모질게 대하는 어머니를 방관하기 일쑤인 아버지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때로는 방관을 하다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때로는 속상한 마음에 시집살이의 설움을 얘기하면 그날은 엄마의 매타작이 시작되었던 그 순간을 견디며 참아왔던 동구의 시선은 차갑지 않고 아버지를 바라보는 마음 또한 열려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동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접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큰 사건을 남겨두고, 한 뼘 더 성장한 동구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삼층집의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던 풍경의 묘사가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정원에 아마도 철딱서니 없는 손목이 건진 돌팔매에 맞아 죽었거나 사라진 것 같은 곤줄박이는 어쩌면 동구가 그토록 찾고 싶은 박선생님일 것이다. 그녀 또한 죽었거나 데모로 세상에 나타나지 않기 위해 꽁꽁 숨었는지 모르는 일이니까.

 

 

자서전 같은 이 소설의 주인공의 화자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는 것이 좋다. 성숙하지 못한 소년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한 번 비춰줬던 순간을 기억하려하니 짠한 마음에 눈물이 뚝 떨어졌던 마지막 장을 읽고 나는 사는 일을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잃어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간 엄마를 지키기 위해 강둑에 서서 할머니와 함께 시골로 내려갈 생각을 하는 동구를 생각하니 내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좋은 작가의 발견은 가슴 벅찬 일이다. 그녀의 남은 장편들도 모두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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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습관 - 병 없이 건강하게 사는
이시하라 유미 지음, 홍성민 옮김 / 더난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건강을 유지하며 장수 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의료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과거보다 암 발병률이 높아졌어도 못 고쳤던 암을 고쳐내는 숫자가 올라갔지만 여전히 암은 건강하며 살아가는 생활에서 가장 치명적인 걸림돌이다.

 

 

먹거리와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에 백수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하지만 나는 백세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큼 살다가 이 세상과 이별할지 모르겠지만 건강하게 살며 아프지 않고 눈 감고 가고 싶은 소망이야 어디 나뿐일까.

그렇기 때문에 더 건강하게 지내며 살아가고자 운동도 하고 건강 보조식품도 먹어 보고 했지만 여전히 마음과 육체는 너무 멀리 있는것 같다. 좀처럼 꾸준한 운동을 할 수 없고, 보조식품 또한 잊고 먹지 않을 때가 많다.

 

운동을 하거나 건강 보조식품을 먹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먹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100세 습관]의 책 또한 운동도 중요하지만 꾸준하게 자연식으로 먹는 습관의 중요성에 더 큰 초점을 두고 있다.

“자연식 밥상이 보약이다.”P24 라는 말처럼 짜거나 맵지 않게 자연 있는 그대로의 식탁을 차려 소식하며 먹음으로 인간의 수명을 더 길게 연장 할 수 있고, 무엇보다 가장 큰 걱정의 암과도 멀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장수 10계명

 

1. 독(毒)도 잘만 쓰면 최대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여기서 독이란 엑스선, 술, 햇빛을 말한다).

2. 정신 상태를 안정시킨다.(행복한 결혼 생활과 가정은 장수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결혼한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남성은 7년, 여성은 2년 더 오래 산다.)

3. 오래 살 수 있는 환경, 특히 온난한 기후 지역에서 산다.

4. 적당한 수명 시간을 지키고, 포도주와 초콜릿을 적정량 섭취한다.

5. 지속적으로 두뇌 활동을 한다.

6. 병에 걸리기 전에 예방한다.

7. 음식이 곧 약이라고 생각한다.

8. 즐거운 일이나 취미에 몰두한다.

9. 새로운 방법이나 양식, 기술을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10. 늘 웃음을 잃지 않는다.

 

 

 

 

 

 

정서적인 부분이 많다. 아무래도 마음의 병이 모든 병의 근원일테니 그럴 수밖에. 운동의 중요성도 많이 얘기를 해줬다. 운동은 뇌졸중, 대장암, 우울증등 많은 것들을 치유 할 수 있고 대비 할 수 있는데 사실 이 부분이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을 몇 가지 소개해줘서 쉬엄쉬엄 한번 해 볼까 한다. 사람의 노화는 하체에서 시작한다고 하니 운동은 동안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얼마 전 모 텔레비전의 “끼니의 반란”이라는 스페셜을 봤다. 그것에 앞서 “1일1식”이라는 책을 통해서 나 또한 하루에 한 끼를 먹고 사람의 오장육부가 편하게 쉴 수 있고 병과 멀어지는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책을 읽었다. 끼니의 반란은 그 책으로부터 정말 우리에게 하루에 한 끼의 식사가 건강과 관련이 있을까하는 의문점에서 시작된 프로였다. 이미 1일 1식으로 생활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생기고, 혹은 간헐적 단식을 통해 몸을 비우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에 책을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100세 습관]의 책에서도 소식과 부분 단식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하루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몸을 비워 두는 행위로 몸을 더 가볍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수로 유명한 마을의 노인들은 유산균이 많은 음식을 먹으며 소식으로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많이 보고되어 왔다. 그들의 장수도 소식과 운동에 있다.

 

 

“아프지 않고 오래 살고 싶은 당신을 위한 책” 이라고 하지만, 나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더 지향하고 싶다.

나 또한 건강하게 남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그동안 추워서 그만두었던 베드민턴을 다시 시작해야 할까보다.

과잉된 음식과 과잉된 건강 염려증으로 벗어나기 위해 읽는다면 그 취지에 딱 맞아 떨어질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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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책을 절반 정도 읽다가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책은 아직 나에게 오기엔 이르다는 생각, 즉 이 책은 나에게 잘못 왔구나 싶었다. 너무나 유명한 밀란 쿤데라이지만 나의 비약한 도서 목록에는 그의 책이 많이 자리 잡지 않고 있기에 너무나 철학적이고 방대한 그의 작품을 논한 이 책은 어려운 숙제를 놓고 다 풀어야 하는 학생의 입장으로 책상에 앉아 며칠을 끙끙거리며 읽었다. 참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정독을 하고 다시 밑줄 친 부분을 또 읽으며 책을 곱씹어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책 표지에는 밀란 쿤데라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생하여 1975년 프랑스로 정착하여 살았다는 소개가 전부다. 그래서 그의 전면을 좀 알아보고자 인터넷을 뒤졌다. 1929년생인 그가 절반의 인생은 분열되기 전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살고 인생의 절반은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프랑스로 정착한 몇 년 후에 프랑스 시민권 취득 후 그는 프랑스인이 되었다. 그간 체코어로 적어 놓은 그의 책들도 프랑스어로 다시 번역을 하기도 했다고 해서 그가 추방당한 체코를 잊은 것인가 생각이 들지만 그의 책속에는 그의 출생지인 체코슬로바키아의 그리움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하다.

 

 

부유한 환경에 놓였던 밀란 쿤데라여서 음악도 공부하고, 영화도 공부하고 문학과 함께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이나 사상은 깊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의 음악적 재능이 소설 속에서 강약과 빠르고 느리고의 흐름을 가져 주는 것도 그의 강점인 듯 하다.

 

그의 가장 대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 것이다. 한때 영화광이었던 나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영화 “프라하의 봄”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원작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여 찾아 읽어본 책이 어쩜 나는 밀린 쿤데라의 소설과 처음 만남이었다. 이후 그의 작품은 《농담》이 전부가 되어 [소설의 기술]을 읽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어떤 것인지 그 얘기 중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가지고 대담으로 나눠진 부분은 참 흥미롭게 읽은 것을 보면 역시 그의 작품을 읽지 않으면 이 책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그가 풀어 놓은 소설의 기술이라기보다, 유럽 문학의 기반과 특히 러시아 문학의 소중함을 말하는 그의 간결한 말들을 잘 느낄 수 있다. 나 또한 톨스토이부터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까지 러시아 문학을 꽃피웠던 그 시절의 문학을 가장 좋아하고 그들의 책을 통해 고전의 진리를 느낄 때가 많다. 우리가 읽고 있는 고전들은 대부분 유럽 문화 속에서 꽃피웠던 문학들이고 그 문학의 근간은 그가 말하려고 하는 소설의 한 시절 가장 단단했던 기둥을 가지고 있다.

 

 

그가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에 대한 부분을 여러 번 읽으면서 그 둘의 문학적으로 다른 부분들 다시 한번 떠 올려 봤다.

 

 

 

“ 도스토옙스키는 자기 논리의 끝까지 자기를 고집하는 이성의 광기를 포착한다. 톨스토이는 그 반대다. 그는 비논리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의 개입을 드러내 보여 준다. 내가 그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톨스토이를 참조함으로써 브로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는 결정에서 비합리적인 것이 맡는 역할에 대한 탐구’라는, 유럽 소설의 위대한 탐구의 맥락 속에 자리 잡게 된다.” P90

 

 

 

그동안 계속 미루고 있었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그의 언급이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안나 카레니나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라는 그의 질문과 그의 답변은 책을 정독하며 다시 느낀 그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아 여러 번 또 읽게 된다.

 

그가 느낀 소설은 어떤 것일까.

 

 

 

“소설이 우리의 시대정신과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과, 만일 소설이 아직 찾아지지 않는 것을 계속 찾아 나가고자 한다면 소설이 소설로서 ‘진보’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세계의 진보에 역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P35

 

 

 

 

하지만 이 얘기보다 그가 만들어 놓은 그의 작품과 관련된 언어 사전속의 소설적 의미가 더 쉽게 와 닿는다.

 

 

 

"소설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형식.” P191

 

 

 

인터넷을 통해 찾은 소설의 사전적 의미는

 

 

명사

 

1 .<문학>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 일정한 구조 속에서 배경과 등장인물의 행동, 사상, 심리 따위를 통하여 인간의 모습이나 사회상을 드러낸다. 분량에 따라 장편ㆍ중편ㆍ단편으로, 내용에 따라 과학 소설ㆍ역사 소설ㆍ추리 소설 따위로 구분할 수 있으며, 옛날의 설화나 서사시 따위의 전통을 이어받아 근대에 와서 발달한 문학 양식이다. [비슷한 말] 이야기.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일도 쉽지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기승전결을 꾸려 소설을 쓰는 일은 그의 말처럼 위대한 일인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똑같은 산문형식이지만, 그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의 전집들이 궁금해졌다. 그의 전집을 다 읽고 나면 [소설의 기술]이 훨씬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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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3-03-24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읽을 때도 '오후즈음'님과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오후즈음 2013-03-25 21:53   좋아요 0 | URL
저만 그런게 아니었군요. ㅠ.ㅠ
너무 어려웠어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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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많은 순간에 상처받고 살아가고 있다. 위로가 되어주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노래를 듣거나 혹은 맛있는 것을 먹거나 추억의 사진의 한 장이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선배가 건네주는 말에 위로가 되고 용기가 생길 때가 있을 것이다.

 

 

 

문득 나에게는 어떤 말들이 용기가, 위로가 되었었던가 생각해 본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꿈이 하나 있는데, 그걸 생각하면 나의 나이가 떠오른다. 이 나이에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당연히 접어 버렸던 그 소망 앞에 <늦지 않았다>는 말이 허망하면서도 위로가 되고, 때로는 “너 아직 그 바닥에서 죽지 않았구나!” 말을 들으면 아직 내가 접지 않아도 될 그런 희망이었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곤 하다.

 

 

때론 누군가에게는 길가에 버려진 종이처럼 쓸모없는 말일지라도 절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모습에 자책과 자학의 길에 서 있을 때 구원해줄 그런 말이기도 하다. 그런 말들을 골라 놓은 정호승 시간의 산문집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에는 책의 두께만큼 묵직한 용기들이 들어 있다. 그 용기는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양식이 되고 때로는 마음의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는 마술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말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너무나 평범하다. “인생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목적을 버려야 목적에 다다른다.”, “나만의 속도에 충실 하라.”,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용서는 신의 몫이다.” 등등 자기 계발서에서 많이 읽어 본 듯한 소제목들이다. 간혹 자기 계발서들의 제목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라던가 혹은 제목만 읽고도 다음 장을 그냥 넘겨 버리고 싶은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얘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너무나 뻔해서 읽고 싶지 않고, 너무나 잘 알아서 듣고 싶지 않은 얘기들이 수두룩하다. 대체 이런 말로 절망에 빠진 나에게 용기를 준단 말인가 자문하면서 책에 대한 신뢰가 급 하락한다.

 

 

“기념하지 않는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는 기념함으로써 비로소 성공의 싹을 틔웁니다. 인생이라는 학교에서는 성공보다 실패가 교사입니다. 저는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실패라는 교사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그런 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P31

 

 

“ 인생의 수없는 동반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동반자는 바로 실패입니다.” P227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실패 때문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버렸고 마음을 닫았다. 이런 상투적인 얘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단 말인지. 이런 마음은 아마도 닫힌 마음 때문에 드는 생각일 것이다.

 

 

아직 나에게도 두려워 시도하지 않은 일이 있다. 그 일 앞에서 분명 이 말은 큰 용기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패를 기념하고, 다시 도전하면 되는 삶이 아닐까. 때론 이런 말들이 너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라 그냥 지나쳤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어떤 도전을 앞둔 사람이거나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말일 것이다. 그 말이 때로는 벼랑 끝에 선 발을 쳐다보고 다시 내려 올 수 있는 용기를 줄지 모를 일이다.

 

한때 나는 [아마데우스] 영화를 보고 늘 내 자신이 살리에리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살리에리가 아마데우스를 보며 이런 말을 했었다.

 

 

 

“신이여, 당신은 제가 그토록 갈망했던 능력을 저런 방탕한 녀석에게 주시고 왜 저에게는 그 아름다움의 화신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밖에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P59

 

 

 

천재적은 능력은 없지만 분명 재능은 있었던 그가 아마데우스를 만나고 절망했었던 그 순간, 그가 용기를 내어 자신을 더 갈고 닦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그는 분명 위대한 음악가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실을 그만 몰랐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살리에리에 대한 애증이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의 천재적 재능을 탐하기보다 그를 보며 마음 아팠을 살리에리에 대한 동정 혹은 공감의 마음이 더 깊다. 많은 사람들은 모차르트보다 살리에리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이 천재가 될 수 없고 그들의 모습을 동경 혹은 질투하며 자신을 바꿔 나가거나 그들의 모습을 인정하고 자신의 모습을 순응하며 그렇게 살아나가고 있다.

 

 

 

가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기위해 쓴 책의 저자들이 스님이거나 수녀님들은 절대 화를 내지 않을까 궁금했다. 책에는 모두 참아 내거나 견뎌내면 그 일이 지나간다고 다독인다. 하지만 그런 말을 수백 번 들어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분노와 화가 있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책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또한 그랬다. 뭐든 실패의 어머니를 삼아 좌절하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들이 너무 많아서 답답했지만 그 또한 사람이기 때문에 화를 냈던 일화에 웃음이 났다.

 

 

참 사소한 일에 화를 냈던 에피소드들에 그의 인간다움에 마음이 놓이는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도 이토록 화를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구나. 우리에게 어떤 실의나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품지 말고 지나도록 하라는 말을 하는 그 또한 사소한 일에 화를 내거나 그것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상해 있는 사람 일 수 있다. 마음을 다스리는 책을 읽어도 그 수간만큼은 절대 그 책의 내용이 뒷등으로도 들리지 않는 수련이 덜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도 증오심을 품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는데 수련도 못한 사람들이 어찌 단 한순간에 없었던 일로 치부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마음을 해질녘까지 품지 말고 다음날까지 이월하지 않아야 하는 말은 수긍할 수밖에 없다. 당장의 화는 어찌 할 수 없다고 해도 그 다음날까지 그 마음으로 살아가면 일주일 혹은 한 달 내내 마음의 고통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어떤 위인들은 누군가가 해준 작은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 실패를 딛고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는 얘기를 한다. 때로는 어떤 이들은 절망의 순간에 자신에게 용기를 줬던 말로 죽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는 얘기도 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강철마인드를 가지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 흔들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가져야 더 유연하게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점점 늘어나는 청소년들의 자살에 마음이 아프다. 그들이 견뎠던 더 모진 시간이 앞에 있을 수 있지만, 분명 삶은 살아 볼만한 인생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안타깝다. 절망의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도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 텐데, 그 절망의 순간에 나타나는 손은 때로는 너무 야속하게 쉽게 오지 않는 것 같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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