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복음서 2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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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복음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잃어버린 연결고리 2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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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소문 - 믿음의 경계지대에 선 회의자를 위한 안내서
필립 얀시 지음, 홍종락 옮김 / 포이에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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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얀시의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일까?

  쉽게 읽힌다는 것, 재미있다는 것, 그리고 현학적이지 않다는 것.

  서로 다른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이다. 학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뻔히 속이 보이는 기복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적당한 깊이와 적당한 고민, 그리고 적당한 난이도. 이것이 필립 얀시의 책이 가지는 장점이고, 이런 이유로 그의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약간 다르다. 그가 책에서 말한 것처럼 내공이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글쓰는 포인트와 생각이 달라진 것인지, 필립 얀시의 책 치고는 읽기가 쉽지 않다. 물론 내용이 어려워서 읽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읽었던 그의 책과는 달리 내용이 약간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쏟아져 나오는 다른 기독교 서적에 비하면 우수하다. 단지 그의 이전 책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수상한 소문"이라는 제목을 통하여 내가 생각했던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초대와 같은 내용(이현주 목사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같은 종류의 책)을 생각했는데, 내용 자체는 전혀 다른 것이다. 출판사에서 나름대로 제목을 붙인 것 같지만 원제 "A Skeptic's Guide to Faith"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이 또한 포이에마가 하기에는 큰 실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팔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원제가 의미하는 바는 살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번역서는 번역을 한 것이지, 창작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번역자도 꽤 번역을 잘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제목을 번역했다는 것은 판매를 고려한 출판사의 잘못인지, 아니면 번역자의 실수인지는 모르겠다.


  얀시는 책에서 이 세상을 두 부류로 나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이원론적인 구조이지만, 이 책이 회의주의자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것이라면 이러한 용어 선택은 출발에서부터 잘못된 것이 아닐까? 회의주의자가 대상이라기보다는 필립 얀시의 새 책이라는 점에 흥미가 동한 기독교인들이 대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용어는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단어이지만 비기독교인에게는, 그리고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들에게는 그렇고 그런 용어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기독교 서적을 저술하는 사람들과 출판하는 사람들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특히 비기독교인들에게 읽히는 책을 쓰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고민 끝에 저 단어를 다시 사용한다면 인정하겠지만 고민 없이 그냥 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말 그대로 허공을 치는 소리요, 향방없는 싸움일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그 너머에 있는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 매일 내가 숨쉬면서 살아가는 세계와 내가 그리고 바라보는 세계 사이에 살고 있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세계가 천국일 것이고, 비기독교인에게는 이루고 싶은 세계일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인이 실수하게 된다. 기독교인에게도 보이지 않는 세계는 천국 뿐만이 아니라 이루어야 하는 세계가 포함된다.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에게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분명히 명시하지 않는가? 얀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도 전형적인 미국 복음주의 전통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나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개인의 봉사, 선, 자비, 베품과 같은 부분에만 국한되어 있다. 얀시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해를 하지만, 회의주의자들에게 과연 이것이 믿음으로 인도하는 가이드가 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회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믿음 안내서라는 포장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던져주는 떡밥이라는(너무 막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이런 의도라면 틸리케의 "현실돠 믿음 사이"라든지 툼 라이트의 "광장에 선 하나님"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이 부분도 회의주의자들에게 의미있는 대답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얀시의 책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평타 이상은 한다. 기독교인들로 국한했을 때에만. 개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볼만한 것들도 많이 던져준다. 다만 회의주의자들에게는 아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출판사에서 제목을 바꿨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신의 한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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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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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이들을 보면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릴 때부터 디지털에 특화된 센서를 달고 나오는지 기계를 다루는 일에 능숙하다. 나는 새로운 휴대폰이 나오면 이것저것 배워야 하지만 아이들은 조금 만져보더니 능숙하게 다룬다. 물론 고급 기능이야 아이들보다 내가 더 잘 다루기는 하지만 기초적인 것들은 아이들이 금방 더, 그리고 더 능숙하게 다룬다. 저자가 만하는 포노 사피엔스가 이런 것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나도 꽤 기계와 친하게 지내온 세대이다. 가리방, 타자기, 팩스, 도트 프린터, 복사기, 베이직, xt 컴퓨터, at컴퓨터. 도스에서 위도우즈로 정말 정신없이 변화되었고, 그 변화변화 사이에 기능을 익히기 위해서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간신히 기능을 익히면 다음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되기가 몇번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뒤쳐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 얼마나 뒤쳐지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아마 내 세대 사람들은 컴퓨터를 끄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에 껐던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껐다가 컴퓨터 수리를 몇번 다녀온 후에 깨닫게 된 지식이다.) 


  이 책에서는 정신없이 변화하고 있는 이 시대의 기술과 그 기술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세대, 그리고 그 세대를 우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앞세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두 세대 사이에서 겪는 여러가지 불협화음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저자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포토 사피엔스 세대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더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는 데이터를 축적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산업 모델로 나가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여기에 대한 저항이 있음 또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마존, 애플과 같은 미국의 기업들, 알리바바와 같은 중국의 기업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업들이 등장해야 함을 말한다. 삼성이라는 굴지의 기업이 있지만 삼성에게는 스토리가 부족하다는 뼈아픈 지적도 충분히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내용까지 전부 기술에 관한 이야기들, 데이터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마치 책은 기술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이 책은 우리에게 결국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데이터를 생산해 내는 것도, 스토리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이며, SNS로 인하여 직접적인 만남이 없이도 만남과 물건의 판매와 구매가 가능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사람 사이의 관계에 더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어디에 있어도 연결이 되는 초열결 시대를 살아가지만, 정작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은 만남이라는 고전적인 관계맺음이 금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데이터를 생산해 내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데이터에 집중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따뜻함,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결국은 사람이라는 점,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데이터가 아니라 존재로 대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가, 그리고 기업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보면서 아쉬운 점은 사람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도, 데이터와 기술을 익혀야 하는 이유도 산업과 자본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것도 사람을 알아야 기업이 돈을 벌 수 있다는 내용으로 흘러가는 점들이 불편함을 준다. 그래도 한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며, 무엇보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점이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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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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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에 나온 사회과학 서적을 8년이 지나서 읽는다는 것은 참 미련해 보이는 일이다. 그 동안 지난 세월과 바뀐 정치지형은 또 얼마이며, 이 글이 씌여지던 시기는 또 어떠한가? 문국현에 대한 20대의 지지가 나오고, 미국산 소고기로 인한 촛불집회, 참여정부의 실패 이야기, 20대 개새끼론은 언제적 이야기이던가? 2021년에 2013년에 나온 책, 그리고 그 책에 수록된 글 가운데에는 2007년의 글도 있다고 하니, 슈가맨도 아니고, 과거의 글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싶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 없이, 사놓은 책이니 읽고는 버리자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역시 내용은 어렵지 않게 잘 넘어간다. "청년 논객"이라는 말처럼 당시 젊은 사람이었던 저자의 글은 어려운 말을 어렵사리 쓰는 그런 글이 아니라 간결하다. 그 덕에 책을 읽는 속도는 꽤 빠르다. 데이터 하나하나에 얽매일 필요도 없으니 이 또한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요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속도와 달리 던져 주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청춘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겉으로 보면 20대를 신경쓰는 정치인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들과 소통하려고 애를 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노력이 소통이 아닌 쇼통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얼마전 송영길 대표가 국회에서 교섭단체 연설을 하면서 자신은 청년들도 만나봤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모 당에서는 젊은 당대표가 탄생했고, 선거철만 되면 다들 청년들을 모아서 간담회를 하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요즘은 근엄했던 대선 주자들이 청년과의 소통이라는 말로 포장하면서 망가지기 시작하는데 왜 그러나 싶다. 본인들이 잘 할 수 있는 포지션을 버리고 왜 자꾸 홍그리 버드(아는 사람은 아는) 스타일로 가는 지 모르겠다. 젊은이들과의 소통이라는 미명하게 이런식으로 나가는 것은 그들의 생각 속에 젊은이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젊은이들은 생각이 없고, 들어주면 되고, 웃기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곁다리 취급! 이것이 젊은이에 대한 정치인들의 생각이고, 소위 말하는 사회 지도층들의 생각이다. 얼마전 류호정 의원의 퍼포먼서는 보면서 "가만히 있어도 예쁠 나이인데"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사회가 젊은이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해줄께, 버릇없이 자기 생각 드러내지마." 아직도 젊은이들을 향하여 그렇게 외친다. 자기보다 아랫 사람들에게는 동양의 장유유서를, 자기보다 윗 사람들에게는 유럽의 평등과 자유를 말하는 것이 이 시대 중장년층의 생각이 아닐까? 어느덧 중년층으로 분류되는 나이가 되면서 더 조심하게 되는 부분이 이것이다. 어느새 나도 젊은이들을 그렇게 생각없고, 쓰다 버리는 용도로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은 정말 한국에 극우 정치세력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는 점이다. 저자는 한국 정치 시스템이 극우 정당의 출현을 막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나도 여기에 공감한다. 그렇지만 앞으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다. 20대의 정치 참여가 부족하다는 말로 20대를 꾸짖으면서 그들을 조금도 키우지 않는 현 정치체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20대를 키우지 않는 것은 보수나 진보나 동일하다. 386이 586이 되는 20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기 아래에 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쳐내지 않았던가? 비례대표 자리 한 두개 던져주고 네 소신껏 해봐라는 것이 20대들에게 얼마나 어필했을까? 4년이 지난 후 단 한명이라도 생존한 사람들이 있었던가? 이런 일이 공고해지면 결국 그 힘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들을 받아줄 수 있는 곳으로 흘러갈 곳이고, 그곳은 극우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이 멤버십을 공고히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 극우 정당은 그러한 방법을 택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냥 잡설이 길어졌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청춘을 진심으로 위하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그거 계도하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할 뿐이다. 젊은이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시민으로 인정하는 날은 언제나 올까? 10년이 더 지나면 그런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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