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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ㅣ 이덕일의 역사특강 2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4년 4월
평점 :
시대는 변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현실은 가끔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와는 엇박자를 보일 때가 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그렇다.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대는 변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2014년 대한민국의 지형도를 살펴보자. 남과 북으로, 동과 서로 갈라져 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갈라져 있고, 노와 소가 갈라져 있다. 왜 그럴까? 그 누구도 자기의 생각을 잠시 접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부모님 세대가 자녀 세대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아버지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어!"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살아왔던 시대는 분명 우리가 사는 시대와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우리 자녀 세대와는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바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사고와 사고 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한 예를 들어보자. 몇년전 MB가 청년 실업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외쳤던 말이 있다. 젊은이의 생각을 바꿔라. 젊은이의 생각을 바꾸고 눈 높이를 조금만 낮추면 우리 주위에 얼마나 일자리가 많은가? 말 자체는 잘못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자녀에 대해서만큼은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시대가 바뀌었고,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대학을 나온 사람은 인구의 한줌도 되지 않던 시대였다. 학교에서 부모님들의 학력을 조사하던 때의 일이다. 부모님 가운데 두분 모두 고졸만 되어도 많이 배우셨다고 놀라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요즘은 고졸이라는 학력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80% 이상이 대학에 가는 시대에 고졸은 학력 계급의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부모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자기 자녀들을 수백만원짜리 등록금을 내면서 대학교에 보내는 이유가 최소한 자기들보다는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겠는가?
특히 정치 지도자들은 이 부분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자신들이 학생 시절을 떠올리면서 요즘 대학생이 눈이 높아졌다, 배가 부르다, 혹은 역사 의식이 없다고 비판하고 깎아 내리는 것은 "나 무식한 사람이요, 시대의 변화도 모르는 사람이요."라고 자인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정치 의식은 또 어떤가? 과거에는 대통령을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왕처럼 떠받들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대통령은 대통령이지, 왕은 아니라는 생각을 누구나 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는 사람은 자신이 충분히 욕을 먹고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과거 왕처럼 군림하려고 한다면, 대통령에 대한 비웃음이 도를 넘었다고 엄포를 놓는다면 개그의 소재가 될 뿐이다.
이성계와 이방원만큼 이 사실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경우는 없다. 흔히 우리는 이성계와 이방원을 해석하면서 이방원은 세종의 태평성대를 열기 위하여 온갖 악역을 자신이 감당한 결단의 군주로, 이성계를 자식 사랑에 치우쳐서 시대의 변화에 반동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 과연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덕일씨가 지적한 것처럼 이성계의 시대에도, 이방원의 시대에도 개혁을 진핸하는 가운데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시대 속에서,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다만 우리가 이성계에 대해서 그렇게 역사의 흐름에 반동한 인물로 해석하는 것은 그가 자기의 사고를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게 갖고 가지 못한데 그 이유가 있다.
이성계의 시대에는 고려의 멸광과 조선의 창업, 이 안에서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틀을 어떻게 놓을지가 정치 판단에서 가장 고려할 사항이었다. 조선의 창업을 뒤흔든다면 아무리 명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대항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방원의 시대는 창업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 창업을 어떻게 이어갈 것이며, 어떻게 발전의 단계로 나갈 것인가를 더 고려해야할 시대였다. 더군다나 명이 주체라는 강력한 권력자를 황제로 맞아들였다면 이 부분을 변수로 놓고 모든 것들을 판단해야 한다. 이성계는, 그리고 그의 정치적인 동반자였던 정도전은 이 부분을 간과했다. 자신들의 시대가 변화하는 것처럼 명도 변화하고 있는데 여전히 명을 과거의 명으로 판단하고 대처하고 있다. 괜히 민족적인 자존심을 가지고 그때 조선이 명과 한판 했더라면 요동을 재탈환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만약이라는 역사관과 미련은 말 그대로 미련일 뿐이다.
이성계와 이방원 모두 시대의 흐름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다만 두 사람이 파악한 시대라는 것 자체가 너무 다르다는데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성계도 이방원도, 심지어는 존재감조차 없었던 정종도 나름대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갔기 때문에 세종의 시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조반정처럼 정말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바보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비극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조선이 발전의 단계를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나 어릴 때는, 내가 말단일 때는, 내가 청년일 때는 이런 말들로 훈계를 남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나라가 온통 분열과 갈등 투성이가 아닌가? 진보도 보수도 훈계질을 그만두고 시대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나는 이성계파요, 나는 이방원파요 편가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시대는 우리에 대해서 입을 다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