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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골리앗 - 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
말콤 글래드웰 지음, 선대인 옮김 / 21세기북스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가수 김국환의 접시를 깨자라는 노래가 있다. "타타타" 이후로 큰 인기를 끌었던 노래다. 당시 가사 업무 분담이라는 혁신적인 내용을 노래로 부른 아주 코믹한 노래였다.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자 그녀에게 시간을 주자 저야 놀든 쉬든 잠자든 상관말고
거울 볼 시간 시간을 주자 그녀에게도 시간은 필요하지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부엌으로 가서 놀자 아하
그건 바로 내 사랑의 장점 그녀의 일을 나도 하는 건
필수 담당 아니겠어 그거야
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자 접시 깬다고 세상이 깨어지나(*2)
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자 접시 깬다고 세상이 깨어지나
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드리자 접시를 깨뜨리자
당시 이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동네 아줌마치고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이 노래는 인기를 끌었다. 아줌마들이 모이는 모임치고 "접시를 깨자"라는 노래를 안부른 곳이 없다. 내용을 보면 별거 아니다. 남자들도 부엌에 가서 앞치마 두르고 일을 하자는 것이다. 별거 아닌 이 노래가 그렇게 인기를 끈 이유는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이다. 당시 남자들은 부엌에 들어가면 아주아주 큰일이 나는 것처럼 생각했다.
아버지는 꽤나 가정적인 분이셨다. 우리 남매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한글을 익히게 해준다고 보물섬, 소년 중앙 같은 잡지를 1년간 구독해 주셨던 분이다. 당시 아버지의 생활 형편으로 보건대 이것은 어마어마한 지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을 줄여서라도 해주셨다. 우리 남매는 모두 2년 터울인지라 한해는 만화책을 보고, 한 해를 건너뛰고, 그 다음해를 손꼽아 기다렸다. 아직까지도 어머니하면 무서운 존재로 기억이 남지만, 동생이나 나에게 아버지는 자상한 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부엌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버지가 그것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가끔 내가 부엌을 맴돌면 외할머니께서 "저리가라. 꼬추 떨어진다."라는 말을 하셨다. 지금이야 신혼 부부들은 왠만하면 다 하는 일들도 당시에는 절대 금기시 되어 있던 일이다. 그것이 하도 마음에 맺히셨는지, 어머니는 나에게 남자도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부엌일을 시키곤 하셨다. 대학을 다니다가 오랫만에 집에 오면 "냉장고에 닭 사놨다. 양념은 어디있는지 알지?"라면서 닭볽음을 만들게 하셨다.
이런 시대에 접시를 깬다는 것은 대단한 금기를 범하는 아주 불량한 말이다. 당시 많은 어머니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도 실제로 그런 시대가 올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남자의 가사 분담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이 되고, 여자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육아도 공동으로 해야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는가? 부질없는 일이라, 접시 깯나고 세상이 달라지냐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접시를 깼던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 이루어진 성과가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미련해 보여도, 무모해 보여도 판을 깨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달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골리앗 앞의 다윗이 되라는 것, 인상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큰 물에서의 작은 고기보다 작은 못에서의 큰 고기가 되라는 것은 결국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판을 깨버리고 세상을 뒤집어 엎자는 말이 아닌가? 쫄지말고 현재 질서에 순응하기 보다는 그 질서를 부정하고 뒤집어 엎어버리자는 말이 아닌가?
사교육이 문제라는 말을 한다. 부모의 자산 정도에 따라서 신분질서가 고착되는 오늘의 현실이 문제라고 말한다. 개천에서 용나는 것은 이미 캄브리아기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개천에서는 미꾸라지 한마리 나기 어렵다고 한다. 다들 이것은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 문제를 깨기보다는 그 질서에 어떻게 해서든 편입해 보려고 용쓴다. SKY를 가면 세상이 온통 달라진다고 너희 때는 진정한 우정보다는 끊임없는 경쟁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한우도 아니면서 아이들에게 등급을 매긴다. 아이들은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서 자기 성적에 매겨진 등급이 곧 자신의 미래라 믿는다. 설령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고 그 중심에 서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쓴다. 청년들은 어떤가? 자신들을 88만원 세대라고 말하면서도, 이대로 가면 삼포세대가 된다고 말하면서도, 나만은 대기업 정규직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세상에 약자가 넘쳐나지만, 그리고 자신도 그 약자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자신만은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다윗이 아니라 골리앗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언더독이지만 자신은 탑독이라고 착각하면서, 아니 착각하는 척하면서 살아간다. 왜? 무모한 도전이 가져올 쓰라린 상처가, 무지막지한 고통이, 그리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만 기억하자. 어떻게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는가? 그가 실력이 뛰어나서? 윌리엄 텔의 선조라서? 골리앗보다 무기가 좋아서? 골리앗이 생각보다 약해서? 아니다. 그가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앞에 서지 않았을 때 다윗만은 골리앗 앞에 서서 부딪혔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설령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지 못했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다만 한 가지 변화는 있었을 것이다. 다윗처럼 골리앗 앞에 서는 또다른 누군가가 나타났을 것이라는 사실말이다.
다윗처럼 골리앗을 이기면 가장 좋고,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와 연대를 해도 좋다. 다만 접시를 깨지 않으면 부엌은 여전히 나만의 리그가 되는 것이고, 거실은 그들만의 리그가 된다는 불변의 진리를 바뀌지 않는다. 다같이 접시를 깨자. 접시 깬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지만, 변화의 조짐을 불러올 수는 있다.
*그저 흔한 자계서라 부르기엔 매우 아깝다. 글래드 웰의 책 가운데에서 꽤나 접수를 줄만한 책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