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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평점 :
국립습지센터에서는 습지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습지(濕地 wetland)의 사전적인 의미는 “물기가 축축한 땅”을 지칭하는 말로 간단하게 말하면 물을 담고 있는 땅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습지는 물에 따라 동식물의 생활과 주변 환경이 결정되는 곳이며 1년의 일정기간 이상 물에 잠겨 있거나 젖어 있는 지역을 말한다. 하지만 습지에 대한 상세한 정의는 나라마다 또는 전문가마다 조금씩 의미가 다르다.
우리나라 습지보전법(1999년 8월 7일 시행)에서 정의하고 있는 습지는 "습지란 담수1)·기수2) 또는 염수가 영구적 또는 일시적 으로 그 표면을 덮고 있는 지역으로서 내륙습지 및 연안습지를 말한다.“ 「내륙습지」는 육지 또는 섬 안에 있는 호 또는 소와 하구 등의 지역, 「연안습지」는 만조3)시에 수위5)선과 지면이 접하는 경계선으로부터 간조6)시에 수위선과 지면이 접하는 경계선까지의 지역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이어서 국립습지센터는 습지의 여러가지 순기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습지를 보호해야한다는 주장을 편다. 나는 지금 이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습지에 대해 이런 긍정적인 시각이 있는 반면 그 습지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더군다나 그 습지라는 것이 이 만화에서처럼 20대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은유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때는 더욱 그렇다.
처음 습지 생태 보고서라는 제목을 보고는 환경보호 단체에서 펴낸 글인가 싶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습지라는 말이 20대의 눅눅한 지하 자취생활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작가의 천재적인 작명 실력에 감탄을 했었다. 왠지 사서 읽어 봐야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때마침 할인 판매를 하기게 낼름 주문했다. 한장 한장 넘겨가면서 "리얼 궁상 만화"라는 작가의 호언장담이 허언인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20대의 궁상이 눅눅하게 묻어 있는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스카이, 인서울, 지잡대로 구분되는 현재의 구도 속에서 지방사립대학에 다니는, 그것도 잘 안팔리는 만화를 그리는 학과에 다니는 지지리 궁상맞은 20대의 삶을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만화가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다. 유쾌함 속에 슬픔이, 일상 속에 20대 청춘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나온 상명대학을 잘 안다. 내가 살던 동네 바로 옆에 있던 대학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3이던 시절에 주변에 꽤 많은 대학들이 있었다. 단국대학교, 순천향대학교, 상명대학교, 천안공전 등등. 흔히 그렇듯이 자기 집 주변에 있는 학교를 그다지 높게 여기지 않는 풍토가 우리 안에도 있었고, 그래서 그 학교들을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
"단포드, 순브릿지, 상르본, 천안 MIT공전, 호버드"
선생님들도 우리에게 농담처럼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서울에 있는 학교, 그 중에서도 스카이를 가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대학의 서열화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신있게 지원해서 서울에 갈 사람들은 서울로 가고, 근처의 대학에 갈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대학 가운데 하나를 택해서 갔다. 서울로 가지 못했다고 해서, 혹은 서울에 있는 학교를 갔다고 해서 친구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결코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서울에 가 있는 친구들은 서울에서 만나고, 고향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고향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후배들 사이에서 이렇게 고향에 남아 있는 친구들을 패배자로 낙인찍는 풍토가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가던 그런 풍토가 이제는 확고해져서 무조건 인서울을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지방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혹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학교를 간 이들은 마치 인생에서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한 것처럼 항상 주눅들어 있기 시작했다. 학교를 어디 갔느냐는 말에 절대로 자기가 다니는 학교를 가르쳐 주지 않던 입시생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패배감이라는 절망의 수렁이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안쓰럽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었다. 아마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감정은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대로 패배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탈출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눅눅한 지하 자취방의 느낌이 아닐까? 한창 도전하고 열정을 불태워야할 나이에 인생의 곳곳에 패배감이 눅눅하게 뭍어 있는 그들을 보면서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걱정은 하지만 실제로 내가 그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나조차도 어느새 인서울을 그들에게 강요하는 세대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카이에 가지 못한 것이, 인서울하지 못한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닐텐데, 인서울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닌데 어느새 나조차도 그들에게 눅눅함을 강요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 비해서 병아리 눈꼽만큼 나은 것은 공부를 조금 더 해서 인서울 했다는 것이고(그렇다고 내가 다닌 학교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다. 워낙 인기 없는 학과를 지망했기 때문이다.), 그들보다 IMF의 타격이 덜 할 대 학교에 들어갔다는 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나는 기득권이 되어서 그들을 정죄하고, 당연한듯이 그들에게 20대의 열정대신에 지지리 궁상과 눅눅함을 강요하고 있는 기득권이 되었다. 마치 그들을 생각해 주는 척 왜 짱돌을 들지 않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그 밑바닥에 그들에게 눅눅함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힘들어하고, 답답해하는 것은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책은 나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그 꼰대기질이 어느새 내 안에 깊이 스며 들어서 당연한 듯이 가르치려고 드는 나를 자각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들이 정말 안쓰럽다면 최소한 그들에게 눅눅함과 궁상을 강요하지는 말아야하지 않겠는가? 아직 출발선에 서지도 않은 그들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