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죽음의 조건
아이라 바이오크 지음, 곽명단 옮김 / 물푸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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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 후 잠실로 이사를 와서 가지 못하지만 과거엔 인사동에 자주 갔다. 머리가 복잡하면 가고, 실연을 당했을 때도 가고, 외로울 때도 갔으며,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갔다. 스무 살 인사동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지라 인사동 찻집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조금은 더 아는 편이었고, 항상 가던 곳이 정해져 있었다. 경인미술관, 오 자네 왔는가, 지대방, 귀천! 조금은 모던한 분위기를 원하면 경인미술관과 오 자네 왔는가를 갔고, 주로 지대방을 갔으며(그 덕에 사장님과 조금은 안면이 있다), 모과차가 마시고 싶으면 귀천을 갔다.(모르긴 해도 인사동에서 모과차를 제대로 만드는 곳은 이곳일 것이다.) 옛날 귀천과 분점 귀천의 분위기는 매우 다르지만 양쪽 모두에 걸려있던 시 한편이 있었다. 천상변 시인의 귀천이다.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이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어린 시절 멋모르고 외우고 다녔던 시였는데, 모과차 한잔과 함께 대하는 시는 너무나 달랐다. 歸天이라는 말 한마디에 담긴 천상병 시인의 인생과 철학,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단편적으로나 음미해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다되면 돌아갈 때가 되었을 때 아름답게 살았노라고, 고마웠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했고, 지금도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

 

  내가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48이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1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시면서 입원을 반복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보낼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에도 학교에 있었던지라 곁에서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학교에 있다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집에 돌아와서 사흘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장례식이 끝나고 일가친척들이 모두 돌아간 그 순간부터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시간들을 기댈 대상을 잃어버린 외로움과 아버지에 대한 죄송한 마음과의 길고 긴 싸움이었다. 왜 그리 길고 긴 시간들을 혼자서 그렇게 힘들어했고 외로워했을까? 내가 준비가 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떠나셨기 때문이었다.

 

  생일은 시원찮게 챙겨드려도 장례식만큼은 요란뻑적지근하게 치르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이다. 지금이야 장례문화가 많이 바뀌어서 장례식장에서, 최대한 조용하게 장례식을 치르지만 어릴 적 내가 목격했던 장례식은 동네잔치에 가까웠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 달라붙어서 음식을 장만하는 것은 잔칫날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안에서는 곡을 하면서 조문객을 받지만 밖에서는 상여를 꺼내놓고 예행연습을 한다. 요령잡이의 소리가 얼마나 구슬픈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소리가 상당히 구슬픈데도 묘하게 리듬감이 있어서 그냥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장례지낸 음식은 집안으로 들이지 말라는 옛말대로 온 동네 아이들과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그 음식을 먹고 떠난 사람을 기억하고,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했다. 떠난 이에게 미처 못한 말을 하고 들어주다보면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사람도 마음의 준비가 된다. 죽은 사람을 묻는 예식이지만 철저하게 산 사람을 위한 예식이 바로 장례식이다.

 

  이 책에서 하는 말이 이것이다.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 얼마나 부하게 살았느냐, 성공했느냐, 무슨 일을 이루고 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후회를 남기지 않고 죽음을 준비했느냐를 묻는 말이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랑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용서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꼭 필요하지만 평소에 하지 못하고 있던 말들을 다 하라는 말도 “당신은 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라는 뜻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을 빌리려 표현하자면 소풍 끝나는 날 하늘로 돌아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냐는 의미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잘 살고 싶어한다. 잘 살기 위해서 공부하고, 돈을 모으고, 권력을 잡고 싶어한다. 잘 살기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한다. 그렇지만 단 한번도 잘 죽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당신은 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물으면 그냥 살다가 죽으면 죽는 것이지 잘 죽기 위해 애쓸 필요까지 있느냐 반문한다. 맞는 말이다. 그냥 살다가 죽으면 죽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죽는 사람의 입장이고, 남겨진 자들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살아 있을 때는 그 사람으로부터 서운한 대접을 받은 것, 상처받은 것이 생각이 나는데 죽고 나면 왜 그렇게 못해준 것, 상처준 것이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리라. 이 책에서 소개된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전혀 다른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 칼라와 폴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사랑한다. 고맙다. 용서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 보낼 준비를 한 칼라와는 달리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아버지의 죽음을 직면하게 된 동생 폴이 아직도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책을 통해 아름다운 죽음은 아름다운 삶으로 이어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발견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경험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풍요로움을 제공해 준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만들며, 평범한 것들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잘 살려는 노력의 십분 지 일만 잘 죽으려는 노력으로 전환한다면 어떨까?

 

  2012년 가장 처음 읽은 책이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이다. 새해를 처음 시작하면서 읽게 된 책이 우연히도 인생의 마지막을 잘 준비했느냐는 책이라니. 몇 주 전 어머니와 말 그대로 대판 싸웠다. 개인적인 일도 산적해 있는데 장남으로서 집안일(주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일이지만)을 처리하자니 스트레스가 쌓인다. 꽤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서는 당연하게 생각하신다. 항상 하시는 말씀이 “너는 장남이니까, 여동생은 출가외인이니까, 막내는 불쌍하다.”인데 이 말이 나와 여동생의 마음을 후벼 판다. 외삼촌들도 한번씩 전화하실 때마다 스트레스는 더 늘어간다. 내 나이에 감당하기 불가능한 것들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쌓였던 마음이 아주 작은 일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그 후로 약간은 냉전 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냥 이대로 지나가면, 상처로 남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조만간 기회를 만들어야겠다. 이 또한 이 책에 나에게 남겨준 작지만 중요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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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06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천에 자주 들르셨군요. 때론 저도 들르던 곳입니다.
당시에는 천상병께서 생존에 계실때였죠.
천상병시인에게 시집에 손수 사인을 받 후, 신문을 통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돌아가신 후 한 번 더 방문했죠. 시인과 무언의 인사라도 나누고 싶었거든요. 안주인은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시인을 잃어버린 것 같아 서운했습니다.

소풍을 아름답게 끝내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saint236 2012-01-06 01:10   좋아요 0 | URL
전 돌아가신 다음에야 들렀습니다. 학교 선배가 처음으로 저를 데리고 갔던 인사동 찻집이 여기거든요. 감기로 고생하던 시절에 여기 모과차만한 것은 없다면서.

2012-01-06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6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